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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장서운동 고령 유림 서명자 고찰

기사입력 2019.03.02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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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유림의 독립운동인 파리장서운동

     

    1. 서언
    (1)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1919년 137명의 유림(儒林) 대표가 전문(全文) 2천674자에 달하는 장문(長文)의 한국독립청원서(韓國獨立請願書)를 파리강화회의(巴里講和會議)에 보내어 한국의 실정(實情)과 일본의 침략성(侵略性)을 국제정의(國際正義)에 호소한 운동이 ‘파리장서운동(巴里長書運動)’이다.
    (2) 면우선생연보(俛宇先生年譜)에 기록된 ‘파리장서’ 운동 서명자 137명의 명단을 분석하면 경북출신 인사는 62명으로 45.3%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 고령 출신 유림은 곽수빈(郭守斌), 이인광(李寅光), 이상희(李相羲), 윤양식(尹亮植), 곽걸(郭杰), 박재근(朴在根), 이병회(李柄回) 등 7명이다.
    (3) 서명자의 군별 분포로 보면 성주 15명, 달성 10명, 봉화 9명 다음으로 고령 출신 서명자가 많은 것은 고령 유림의 민족운동 참여 성격을 반영해 주는 것이며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 임재(臨齋) 서찬규(徐贊奎) 등의 학맥(學脈)이 혼재(混在)되어 있었으나 유림층(儒林層)의 기반(基盤)이 강하였던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4) ‘파리장서운동(巴里長書運動)’의 배경(背景), 동기(動機), 3·1운동과 차이점, 추진세력(推進勢力), 지역별 서명활동(署名活動), 파리장서(巴里長書) 문안작성 (文案作成) 및 발송(發送), 일제 측의 탄압(彈壓) 등을 소개하고 고령 출신 서명자(署名者)의 가계(家系), 생애(生涯), 수형량(受刑量), 서훈(敍勳) 등을 객관적인 문헌과 자료에 의거 밝힘으로서 고령 출신 유림(儒林)의 파리장서운동(巴里長書運動) 참여를 새롭게 조명(照明)하고자 한다.

    2. 파리장서운동(巴里長書運動)
    (1) 배경(背景)
    ① ‘3·1 독립선언서’ 민족대표 33인의 명단에는 천도교계 15명, 기독교계 16명, 불교계 2명 등으로 분포되어 있어 유림층(儒林層)은 제외되었다. 전통 유림(儒林)은 이들을 사교(邪敎) 내지 이교도(異敎徒)로 규정하여 배척(排斥)하였기 때문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나 요원(燎原)의 불길처럼 무서운 기세(氣勢)로 퍼져갔던 ‘3·1독립만세 시위운동’은 유림층에게 자기반성(自己反省)의 계기를 만들었고 대외적으로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을 준비하게 되었다.  
    (註釋) 사교(邪敎)
    부정(不淨)하고 요사(妖邪)스러운 종교(宗敎) 또는 사회(社會)에 해악(害惡)을 끼치는 종교(宗敎)를 말한다.
    ② 일제(日帝)가 명의(名義)를 도용(盜用)하여 김윤식(金允植)과 이용직(李容稙)을 유림대표로 하여 일본정부에 소위(所謂) ‘독립불원서(獨立不願書)’ 즉 조선은 독립을 원하지 않는다는 서면을 제출하였다. 김윤식(金允植)과 이용직(李容稙) 명의의 ‘독립불원서(獨立不願書)’는 파리장서운동(巴里長書運動)의 촉매제(觸媒劑) 역할을 하였다.
    (2) 동기(動機)
    국내적으로는 1910년 한일합병늑약(韓日合倂勒約)이 강제적이며 국제적으로는 민족자결운동(民族自決運動)과 자유민주주의(自由民主主義) 사상이 팽배(澎湃)되고 있으며 고종 황제의 급서(急逝)에 대한 국민의 충격 등이 유림(儒林)으로 하여금 파리장서운동(巴里長書運動)을 일으키는 결정적인 원인(原因)이 되었다.
    (3) 3·1운동과 차이점
    3·1운동은 국민봉기(國民蜂起)로써 대내투쟁(對內鬪爭)을 제1차적 목적으로 하는 한편 파리장서운동(巴里長書運動)은 유림(儒林)의 총의(總意)를 비밀리에 망라(網羅)하고 국제무대(國際舞臺)에서 공개적으로 투쟁하려는데 그 차이점이 있다.
    (4) 추진세력(推進勢力)
    파리장서운동(巴里長書運動)은 곽종석(郭鍾錫)을 중심으로 하는 영남유림(嶺南儒林) 계열과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하는 호서(湖西)의 기호유림(畿湖儒林) 계열에서 각각 독자적으로 비밀리에 추진되었으며 영남유림 계열에서는 곽종석의 지시를 받은 성주의 김창숙(金昌淑)이 활동의 중심 인물이었고, 기호유림 계열에서는 김복한의 지시를 받은 임경호(林敬鎬)가 그 중심에 있었다.
    (5) 지역별 서명활동(署名活動)
    1919년 3월 4일 성태영(成泰永)의 집에서 지역별로 유림 서명활동을 갖도록 약속을 하였는데 강원, 충북은 이중업(李中業), 충남은 김정호(金丁鎬), 경기, 황해는 성태영(成泰永), 전남북은 유준근(柳濬根), 함남북은 윤중수(尹中洙), 경남북은 김창숙(金昌淑), 평남북은 유진태(兪鎭泰)가 각각 담당하기로 하였다.
    (6) 파리장서(巴里長書) 문안작성(文案作成)
    파리장서(巴里長書) 초간본(初刊本) 작성에 관하여 이설(異說)이 있으나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과 중재(重齋) 김황(金榥)이 각각 작성한 초간본(初刊本)을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이 수정(修正)하여 곽종석본(郭鍾錫本)을 원본(原本)으로 확정지었으며 김창숙(金昌淑)에게 파리장서(巴里長書) 전문을 암송하게 하고 다시 원문을 놋줄로 꼬아 짚신 총으로 만들어 전달하고 1919년 3월 23일 상해로 파견하였다.
    (7) 파리장서(巴里長書)  발송(發送)
    1919년 3월 27일 상해에 도착한 김창숙은 불과 7·8일전에 임시정부에서 파리강화회의(巴里講和會議)에 민족대표로 김규식(金奎植)을 파견한 사실을 알고 자신의 파리 행을 그만 두고 서울에서 가져온 파리장서(巴里長書)를 영문본(英文本)으로 인쇄한 뒤 김규식(金奎植)에게 우송(郵送)하여 파리강화회의와 각국 대사·공사·영사관 및 중국의 각 정계(政界) 요인(要人)들에게 우송하고 국내 각지 향교에는 원문 그대로 직접 우송하였다. 
    (8) 일제 측의 탄압(彈壓)
    1919년 4월 2일 펼쳐진 성주시장 만세운동은 송회근(宋晦根), 이봉희(李鳳熙), 이기정(李基定) 등이 주도(主導)하였는데 송회근(宋晦根)이 체포되면서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이 발각되어 사건의 전모(全貌)가 드러나자 그후 다수의 인사들이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하거나 재판을 받고 징역형을 살았다.


    3. 고령 출신 서명자(署名者)
    (1) 곽수빈(郭守斌)
    본관은 현풍(玄風)이며 자는 사언(士彦)이고 호는 몽와(夢窩)이다. 치송(致崧)과 남수(南秀)의 따님인 순천박씨(順天朴氏)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고종 19년(1882년) 고령군 임천면 월막동 109번지에서 태어났으나 숙부 치안(致安)에게 출계(出系)하였다. 을사조약(乙巳條約)과 경술국치(庚戌國恥)로 인한 망국(亡國)의 설움에 비분강개(悲憤慷慨)하면서 나라를 구할 책략(策略)을 궁구(窮究)하던 중 스승인 임재(臨齊) 서찬규(徐贊奎) 문하에서 동문수학(同門受學)하였던 서건수(徐建洙)와 함께 1919년 3월 38세 때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지역인사 중 최초로 서명하여 지역 유림 6명의 서명(署名)에 큰 영향을 끼쳤다. 동년 4월경 일경(日警)에 체포되어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모진 옥고(獄苦)를 겪었으나 1919년 6월 9일 대구지방법원 판결에 의하여 기소유예(起訴猶豫)로 석방되었다. 그 후 1938년부터 1940년까지 고령향교의 직원(直員 : 현재 전교)을 맡아 향풍교화(鄕風敎化)와 민족의식(民族意識)을 고취(鼓吹)하는데  마음과 힘을 다하였다. 1942년 서간도(西間島)로 망명(亡命)하여 2년 동안 항일운동(抗日運動)을 하다가 수토병(水土病)으로 귀국(歸國)하여 매림서원(梅林書院)을 중심으로 후진양성에 이바지하다가 광복(光復)을 맞이하여 좌우대립의 혼란기에도 은인자중(隱忍自重)하면서 금도(襟度 : 아량)를 지켰다. 정남택(鄭南澤), 곽태진(郭泰珍) 등 지역 정객(政客)들의 자문(諮問)에 응하고 탁견(卓見)을 제시하였으며 ‘강세계(講世契)’를 만들어 혼란기(混亂期)의 도덕(道德)을 바로 잡고자 노력하였다. 1951년 2월 24일 향년 69세로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쌍림면 월막리 구리곡 간좌(艮坐)이다, 정부는 고인(故人)의 공훈(功勳)을 기리어 1996년 8월 15일 ‘건국포장(建國章)’을 추서(追敍)하였다. 2005년 9월 24일 ‘애국지사(愛國志士) 몽와(夢窩) 곽선생(郭先生) 추모비(追慕碑)’를 고령군 쌍림면 월막리 동네 입구에 세웠다. 
    (2) 이인광(李寅光)
    본관은 성산(星山)이며 자는 중실(仲實)이고 호는 손암거사(遜菴居士)이다. 아버지 호발(發)과 태운(泰運)의 따님인 어머니 성산전씨(星山全氏) 사이에서 고종 15년(1878년) 7월 6일 고령군 대가야읍 내상리 228번지에서 태어났다. 홍와(弘窩) 이두훈(李斗勳)과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문하(門下)에서 수학(受學)하였다. 42세의 장년(長年)으로 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운동(己未獨立運動)을 당하여 온 마음과 온 힘을 한곳에 모아 만세를 크게 외쳤다.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지역인사 중 2번째로 서명하는 등 항일운동(抗日運動)을 전개하였다.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宋晦根)이 체포되어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면서 체포되어 구속되었으나 1919년 4월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기소유예 (起訴猶豫) 불기소(不起訴) 처분(處分)을 받고 풀려났다. 1934년 8월 18일 향년 57세로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덕곡면 반성리 금암 수락동 선영 청룡등 진좌(辰坐)에 있다. 유고(遺稿) 3권이 전한다. 1995년 8월 15일 정부는 고인(故人)의 공훈(功勳)을 기리어 ‘건국포장(建國褒章)’을 추서(追敍)하였다.
    (3) 이상희(李相羲)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자는 백양(伯陽)이고 이명(異名)은 상의(相義)이다. 고종 17년(1880년) 고령군 대가야읍 내상동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선생을 찿아 뵙고 제자가 되어 학문을 전수(傳受)받아 유학자로서 명성이 인근 지역에 널리 알려졌다. 1910년 8월 29일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국권(國權)을 상실한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한 후 오매(寤寐)에도 조국 광복에 마음과 정성(精誠)을 다하던 중 1919년 3월 43세 때 전국 유림이 비밀리에 파리강화회의에 자주독립을 청원하는 독립청원서(獨立請願書)에 서명했던 유림의거(儒林義擧)에 즈음하여 고령 출신 서명자 중 이인광(李寅光)에 이어 3번째로 서명하였다. 그 후에 사문(師門)의 지휘하에 서명인(署名人)의 규합(糾合)에 혼신의 노력을 다하다가 왜경에게 체포되어 고령경찰서에서 모진 고문(拷問)과 옥고(獄苦)를 치르다가 석방(釋放)된 후에도 민족정기(民族精氣)의 선양(宣揚)에 앞장섰다. 파리장서(巴里長書) 사건에 서명한 지역 유림 7명 중 6명은 정부에서 고인(故人)의 공훈(功勳)을 기리어 ‘건국포장(建國褒章)’을 추서(追敍)받은 반면 공만이 유일하게 미추서(未追敍) 유림(儒林)으로 남아 있어 애석하다.
    (4) 윤양식(尹亮植)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자는 옥여(玉汝) 또는 태봉(泰奉)이며 이명(異名)은 경식(慶植)이다. 태규(泰奎)와 수극(壽極)의 따님인 창원황씨(昌原黃氏) 사이에서 고종 3년(1866년) 고령군 성산면 용소동(龍沼洞) 310번지에서 태어났다. 젊었을 때 나랏일을 근심하고 염려하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과거를 보는 데 필요한 학업을 폐지하였으며 궁벽(窮僻)한 시골에 은거(隱居)하여 재주나 학식 따위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감추었으며 스스로 뉘우치고 경계하였다. 1919년 3월 54세 때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이라고 불리우는 이 거사(擧事)에 분연(憤然)히 동참하여 지역 유림 중에서 4번째로 서명하여 조국독립(祖國獨立)의 당위성(當爲性)을 세계만방(世界萬邦)에 알리는데 적극 가담하였다.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이 발각되어 사건의 전모(全貌)가 드러나자 이때 체포되어 모진 고초(苦楚)를 겪었으며 1919년 대구지방법원 판결문에 의하면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궐석(闕席)한 채 ‘징역 6월’을 판결(判決)받았다. 옥고(獄苦)를 치룬 뒤에도 자나 깨나 조국의 광복(光復)을 위하여 노심초사(勞心焦思)하다가 광복을 2년 앞둔 1943년 12월 30일 애석하게도 78세로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성산면 창리(倉里) 뒤 저전산(楮田山) 임원(壬原)에 있다. 정부는 고인(故人)의 공훈(功勳)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建國褒章)’을 추서(追敍)하였다.
    (5) 곽걸(郭杰)
    본관은 현풍(玄風)이며 자는 회주(晦周)이고 호는 국전초부(菊田樵夫)이다. 구담(龜潭) 후근(厚根)과 정(禎)의 따님인 김해허씨(金海許氏) 사이에서 고종 5년(1868년) 고령군 쌍림면 월막리에서 태어났으나 당숙(堂叔) 영근(塋根)에게 출계(出系)하였다. 어릴 때부터 선고(先考)가 남려(南黎) 허유(許愈),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과 더불어 도의(道義)로 교유(交遊)하였던 관계로 유가(儒家)의 가르침과 가학(家學)에 영향을 받아 고풍(古風)을 즐겼고 맑고 높은 명망(名望)이 있었으며 가르침에 교화(敎化)되어 넓게 베풀었다. 1919년 3월 52세 때 파리강화회의(巴里講和會議)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독립청원서(獨立請願書)에 서명한 지역 유림으로서는 5번째로 서명하는 등 항일운동(抗日運動)을 전개하였다. 성주의 만세시위운동(萬歲示威運動)과 관련하여 송회근(宋晦根)이 체포되면서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이 발각되어 사건의 전모(全貌)가 드러나자 이때 체포되어 모진 고초(苦楚)를 겪었으며 끝내 병(病)을 얻어 1926년 6월 6일 향년 59세로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쌍림면 월막리 국전촌(菊田村) 뒤편 술좌(戌坐)에 있다. 1998년 8월 14일 정부는 고인의 공훈(功勳)을 기리어 ‘건국포장(建國褒章)’을 추서(追敍)하였다. 2012년 6월 7일 ‘애국지사(愛國志士) 곽걸(郭杰) 선생 추모비(追慕碑)’를 묘소에 건립하였다.
    (6) 박재근(朴在根)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진근(瑨根)으로 개명(改名)하였고 자는 영언(韺彦)이며 호는 운석당(雲石堂)이다. 종항(宗恒)과 석관(錫寬)의 따님인 창녕조씨(昌寧曺氏) 사이에서 고종 7년(1870년) 1월 6일 고령군 성산면 용소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 문하에서 수업한 후 온능참봉(溫陵參奉)에 제수되어 중종왕비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능(陵)을 관리하다가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맞이하자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등과 대한독립(大韓獨立)을 모의(謀議)하였으며 1919년 3월 39세 때 파리강화회의(巴里講和會議)에 제출한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지역 유림 중에서 6번째로 서명하였다. 그후 달성군 현풍면에서 영업 중이던 약국문을 닫고 조랑말을 타고 고령, 성주, 서울 등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가산(家産)을 탕진(蕩盡)하였다. 1955년 5월 26일 향년 85세로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성산면 용소리 원당촌 뒤편 선고(先考) 좌편(左便) 건좌(乾坐)에 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건국포장(建國褒章)’을 추서(追敍)하였다.
    (7) 이병회(李柄回)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자는 응두(應斗)이며 호는 만회(晩悔)이다. 행은(杏隱) 호영(祜永)과 석유(錫裕)의 따님인 성주도씨(星州都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고종 2년(1865년) 7월 12일 고령군 성산면 고탄리(高呑里) 155-2번지에서 태어났다. 젊었을 때에는 족조(族祖)인 소암(小菴) 이종희(李宗熙)에게 배우고 장성한 후에는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 선생을 따르시어 학문은 정통을 계승하고 의리를 실천하여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렀으며 선행(善行)은 흐르는 물과 같이하고 비리(非理)는 용서하지 않았다. 장년기에는 유림사회(儒林社會)에서 융숭(隆崇)한 학덕(學德)과 탁월한 경륜(經綸)으로 각종 행사에 선도적(先導的)인 역할을 하여 신망(信望)이 두터웠다. 1919년 3월 55세 때 파리강화회의(巴里講和會議)에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고자 작성한 독립청원서(獨立請願書)인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지역 유림 중에서 7번째로 서명하여 조국광복(祖國光復)을 위한 민족의 역량(力量)을 하나로 모으는데 적극 동참하였다. 간암(艮庵) 박돈(朴燉), 어산(於山) 김희록(金熙祿),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 병산(甁山) 김영학(金永學), 백괴(百愧) 우하구(禹夏九), 이고(二顧) 최우동(崔羽東) 등 당대의 지사(志士) 명류(名流)들과 우국(憂國)의 정(情)을 나누었다. 그후 일경(日警)에 검거되어 5,6개월간 물을 씌우고 몽둥이로 실신(失身)케 한 후 또 사람을 거꾸로 매달아 물고문을 하는 등 온갖 고초(苦楚)를 겪었으며 심한 악형(惡刑)으로 얻은 불치(不治)의 병으로 1927년 9월 20일 향년 63세에 졸(卒)하였다. 묘는 성산면 기족(旗族) 후산등(後山嶝) 계좌(癸坐)에 있다. 정부는 고인(故人)의 공훈(功勳)을 기려 2009년 8월 15일에 ‘건국포장(建國褒章)’을 추서(追敍)하였다. 2013년 12월 22일 ‘애국지사(愛國志士) 만회(晩悔) 광산(光山) 이선생(李先生) 추모비(追慕碑)’를 사망정(四望亭) 앞에 건립하였다.


    - 집필 향토사학자 겸 시민기자 이동훈(李東勳),
    - 정리 최종동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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