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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고령지역 세거성씨(世居姓氏) 연원(淵源)을 찾아서

기사입력 2019.02.21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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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령김씨(高靈金氏) 감찰공파(監察公派)·집의공파(執義公派)

     

    본지는 ‘고령지역 세거성씨(世居姓氏) 연원(淵源)을 찾아서’를 격주로 기획 연재한다. 씨족연원(氏族淵源), 현조(顯祖), 고령입향(高靈入鄕) 내력 및 시기, 입향조(入鄕祖) 이 후 역대 인물 등을 문헌적 고증(考證)을 근거로 밝힘으로써 각 문중 고유의 씨족연원(氏族淵源), 열조(烈祖)들의 위업(偉業), 올곧은 정신 및 문화유산(文化遺産)을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코자 하오니 관심 있는 문중들의 많은 참여를 바라며, 이번호에는 고령김씨(高靈金氏) 감찰공파(監察公派)·집의공파(執義公派)를 소개한다.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고령김씨(高靈金氏) 시조(始祖) 김남득(金南得)
     초휘는 기지(麒芝)이고 자는 중서(重瑞)이며 고려 때 전리좌랑(典理佐郞)을 역임한 김의(金宜)와 합문지후(閤門祗候)를 지낸 유신(由信)의 따님인 진천송씨(鎭川宋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충혜왕 1년(1340년)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한 후 공민왕 때 감찰집의(監察執義), 양광도안렴사(楊廣道按廉使)를 거쳐 공양왕 때 서해도관찰사(西海道觀察使)·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문하평리(門下評理)에 이르렀다. 공민왕 13년(1364년) 최유(崔濡)가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옹립(擁立)하려는 공민왕폐위음모사건(恭愍王廢位陰謀事件)에 접반시랑(接伴侍郞)이 되어 무고함을 역설하여 원나라 황제의 마음을 돌리게 하여 공민왕의 왕위보전에 공을 세웠다. 또한 사은사(謝恩使)로 원나라에 가서 금자광록대부이부상서(金紫光祿大夫吏部尙書)의 벼슬을 받고 환국(還國)하자, 익대공신(翊戴功臣) 광정대부(匡靖大夫)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고양부원군(高陽府院君)에 봉해졌고 고양(高陽)을 식읍(食邑)으로 받고 ‘득어영남지의(得於嶺南之意)’ 즉 ‘영남에서 왕의 뜻에 맞는 인재를 얻었다’ 라는 뜻의 이름을 하사(下賜)받아 남득(南得)으로 개명(改名)하였고, 후손들은 의성김씨(義城金氏)에서 분적(分籍)하여 고령(高靈)을 본관(本貫)으로 하고 공을 득관조(得貫祖)로 하였다. 공양왕 1년(1390년) 서해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였으며, 명나라에 정조사(正朝使 : 정월 초하룻날 새해 축하사신)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태조 1년(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그 직첩을 회수하고 먼 지방에 방치(放置)되었다. 생몰년은 미상이며 시호는 충익(忠翊)이다. 묘소는 정경부인(貞敬夫人) 강릉김씨(江陵金氏)와 함께 고령군 쌍림면 신곡동 산 178 박곡(朴谷) 선고(先考) 계하(階下) 신좌(申坐) 합분(合墳)이다.
    (2) 의성김씨(義城金氏)에서 분적(分籍)
     고령김씨(高靈金氏)는 의성김씨(義城金氏)에서 분적(分籍)하였으며 시조(始祖) 김남득(金南得)은 의성김씨(義城金氏) 시조(始祖) 의성군(義城君) 김석(金錫)의 10세손으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태자첨사(太子詹事)를 지낸 김용비(金龍庇)의 장손(長孫)이며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낸 김의(金宜)의 장남이다.
    (3) 고령김씨 파별 분포 현황
    감찰공파(監察公派) 후손들은 운수면 신간1리 물한(勿閑)과 순천공파(順天公派)후손들은 쌍림면 고곡 및 신곡리에, 집의공파(執義公派) 후손들은 성산면 고탄리(高呑里) 및 대가야읍 내상리 등에 세거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여말선초(麗末鮮初)
    ① 김무(金畝)
    자는 하경(夏景)이며 익대공신(翊戴功臣) 광정대부(匡靖大夫)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고양부원군(高陽府院君)에 봉해졌던 남득(南得)과 정경부인(貞敬夫人) 강릉김씨(江陵金氏)사이에서 태어났다. 생졸년(生卒年)은 미상이다. 공양왕 3년(1391년)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에 제수되었고 정도전(鄭道傳), 조준(趙浚) 등이 고려 사직(社稷)을 위해하려는 음모가 있어 탄핵(彈劾)하여 유배(流配)케 하였다. 태조 1년(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귀양을 갔고 태종 3년(1403년) 지초계군사(知草溪郡事)로 재직 중 금주령(禁酒令)을 어겨 파면되었으나 태종 10년(1410년) 지사간(知司諫)이 되었다. 뒤에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으로 추증(追贈)되었다.
    (2) 조선시대
    ① 김사행(金士行)
     자는 이성(彛性)이며 옥천군수(沃川郡守)를 지낸 무(畝)와 전서(典書)를 지낸 복상(復常)의 따님인 성산이씨(星山李氏)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사마시(司馬試)에 오르고 세종 8년(1426년) 여산현감(礪山縣監)에 제수되어 선정(善政)하고 그 후에 홍산현감(鴻山縣監)을 지내고 퇴관(退官)하고 처향인 논산 노성(魯城) 신양촌(新陽村)에 터전을 잡아 그 후손들이 세거하게 되었다. 통정대부(通政大夫)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증직(贈職)받았다.
    ② 김사문(金士文)
     옥천군수(沃川郡守)를 지낸 무(畝)와 전서(典書)를 지낸 복상(復常)의 따님인 성산이씨(星山李氏)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일찍부터 벼슬에 나아가 태종 9년(1409년)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재임중 태종비(太宗妃) 원경왕후(元敬王后)의 동생인 민무구(閔無咎) 형제와 권문세가(權門勢家)인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의 방자(放恣)함을 직간(直諫)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받아 유배(流配)되었다. 태종 17년(1417년) 사헌부(司憲府) 지사(知事)를 거쳐 회양부사(淮陽府使)를 지냈다. 퇴관(退官)하고 충주(忠州)에 머무르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고령군 성산면 고탄리에 정착하여 고령김씨 집의공파(執義公派) 파조(派祖)가 되었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고령김씨(高靈金氏) 시조(始祖) 김남득(金南得)이 고양부원군(高陽府院君)에 봉해졌고 고양(高陽)을 식읍(食邑)으로 받았으며 묘소가 고령군 쌍림면 신곡동에 있는 것으로 보아 퇴관(退官)한 후인 여말(麗末)에 고령에 입향한 한 것으로 추정되며 처음에 쌍림면 안림리에 거주하다가 나중에 상양전(上良田)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그후 고향을 떠난 후손은 흩어져 충남 논산 노성(魯城), 영천군 화남면, 청도군 이서면 및 각남면,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천면, 충주 등지로 이거(移居)하였으며 고령군에는 감찰공파(監察公派), 순천공파(順天公派), 집의공파(執義公派) 후손 약 40세대가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조선시대
    ① 김형생(金荊生 : 1442년 ∼1490년)
     자는 공우(貢禹)이며 자손의 귀(貴)로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증직(贈職)받은 자숙(子肅)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성종 16년(1485년) 을사(乙巳) 알성시(謁聖試) 문과(文科)에 등제한 후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역임② 김장생(金莊生 : 1448년 ∼ 1524년)
     자는 가진(可珍)이며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증직(贈職)받은 자숙(子肅)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연산군 때에 무과에 급제한 후 진잠현감(鎭岑縣監), 하양현감(河陽縣監), 강령현감(康翎縣監)을 거쳐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끝으로 나에게는 부(富)와 귀(貴)는 부운(浮雲 : 뜬구름)과 같다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쌍림면 안림리에서 은거하면서 세상인연을 멀리하고 문을 굳게 닫아 걸고 뜻을 구하는 ‘병적사세두문구지(屛跡謝世杜門求志)’의 생활을 일생토록 하였다.
    ③ 김수(金銖 : 1476년∼1559년)
     자는 우경(禹卿)이며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지낸 장생(莊生)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중종 5년(1510년) 무과에 등제한 후 고성(固城), 진주(晉州), 진도(珍島)의 군재(郡宰)를 거쳐 통훈대부(通訓大夫) 순천진관(順天鎭管)과 진주판관(晉州判官)을 지냈다. 자(子) 수문(秀文)의 귀(貴)로 정헌대부(正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 겸(兼)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증직(贈職)받았다. 공은 고령김씨 판서공파(判書公派) 파조(派祖)이다.
    ④ 김구(金鉤 : 1483년∼1532년)
     자는 직경(直卿)이며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지낸 장생(莊生)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중종 5년(1510년) 3월 22일 무과(武科)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한 후 예빈시(禮賓寺) 주부(主簿)를 거쳐 하동현감(河東縣監), 첨정(僉正), 전섬부정(典韱副正)에 이어 순안첨절제사(順安僉節制使)·벽동첨절제사(碧潼僉節制使)·수원첨절제사(水原僉節制使)·부산첨절제사(釜山僉節制使)를 거쳐 창성도호부사(昌成都護府使)를 역임하였다. 중종 27년(1532년) 통훈대부(通訓大夫) 행(行) 순천도호부사(順天都護府使) 겸(兼) 감목(監牧)으로 제수(除授)되었다. 공은 고령김씨(高靈金氏) 순천공파(順天公派) 파조(派祖)이다.
    ⑤ 김탁(金鐸 : ? ∼ ?)
     자는 진경(振卿)이며 호는 죽촌(竹村)이다.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지낸 장생(莊生) 6남으로 태어났다. 중종 11년(1516년) 병자(丙子) 식년시(式年試)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중종 14년(1519년)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급제하였다. 중종 15년(1520년) 정언(正言)을 역임하였고, 이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병조참지(兵曹參知)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삼사(三司)와 호당(湖堂)에서 직언(直言)을 서슴치 않았다. 중종 28년(1533년) 경상좌도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에 임명되었으나 중종 29(1534년) 김안로(金安老)가 뇌물(賂物)을 요구하였으나 거절하여 체직(遞職)되었다.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과 도의지교(道義之交)가 있어 회재(晦齋) 만사장(挽四章)이 전한다.
    ⑥ 김세문(金世文 : 1520년∼?)
     자는 덕장(德章)이며 경상좌도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를 지낸 탁(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무과에 급제한 후 철산군수(鐵山郡守)로 재직시에 강명(剛明)하여 선정(善政)을 하였다. 경흥도호부사(慶興都護府使) 겸(兼) 경흥진병마첨절제사(慶興鎭兵馬僉節制使)로 재임 중 선조 2년(1569년) 5월 16일 임소(任所)에서 기세(棄世)하였다. 아들 면(沔)의 공적(功績)으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 겸(兼) 의금부사(義禁府事)로 추증(追贈)되었다.
    ⑦ 김뢰(金賚 : ? ∼ ?)
    자는 성옥(盛玉)이며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언순(彦純)의 장남이다. 고조는 회양부사(淮陽府使)를 지낸 사문(士文)이다. 음제(蔭除)로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병화(兵禍)로 알 수 없다.
    ⑧ 김면(金沔 : 1541년 ∼ 1593년)
     자는 지해(志海)이고 호는 송암(松菴)이다. 경원도호부사(慶源都護府使)를 지낸 세문(世文)의 장남으로 고령군 개진면 양전리에서 태어났다.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양문(兩門)에서 수학하였다. 3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까지는 명륜지(明倫誌), 역리지(易理誌) 등을 저술(著述)하였으며 선조 22년(1589년) 5월에는 옥산(玉山) 이기춘(李起春), 청휘당(晴暉堂) 이승(李承), 모재(茅齋) 이홍우(李弘宇), 한강(寒岡) 정구(鄭逑), 대암(大庵) 박성(朴惺), 육일헌(六一軒) 이홍량(李弘量) 등 ‘낙강칠현(洛江七賢)’과 함께 낙동강을 선유(船遊)하며 만경창파욕모천(萬頃蒼波欲暮天 : 저녁 때의 저무는 하늘에 한없이 넓고 푸른 물결) 일곱 자로 분운(分韻)하여 시를 지었다. 51세가 되던 때에 은일(隱逸)로 공조좌랑(工曹佐郞)에 제배(除拜)되자 부득이 사은(謝恩)만 하고 이내 낙향(落鄕)하였다. 52세가 되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월 22일 열읍(列邑)에 통문(通文)을 보내어 기병유사(起兵有司)를 정하고 곧 군사를 뽑게하여 조종도(趙宗道)를 조군(調軍)ㆍ곽준(郭逡)ㆍ문위(文偉)ㆍ박정번(朴廷璠)ㆍ류중룡(柳仲龍) 등으로 참모장서기(參謀掌書記)로 삼아 거창(居昌)ㆍ고령(高靈) 등지에서 의병(義兵)을 규합(糾合)하였고 박성(朴惺)은 전향(典餉)으로써 군량(軍糧)을 조달하게 하였다. 4일∼5일 동안에 군사 2,000명을 모았으며 1593년 1월에는 5,000명으로 대군화(大軍化)하게 되었다. 창의(倡義)한 후 개산포(開山浦)전투‧제2차 무계(茂溪)전투‧두곡(豆谷), 장곡(長谷) 역전(驛前)전투‧지례(知禮)전투‧성주성(星州城)전투‧사랑암(沙郞巖)전투‧방해현(防害峴)전투‧개령(開寧)전투 등을 통하여 세운 전공(戰功)으로 선조 25년(1592년) 6월 29일 합천군수(陜川郡守)를, 9월 9일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제수받았고 11월 26일 경상도의병도대장(慶尙道義兵都大將)에 특명(特命)되었다. 선조 26년(1593년) 1월 4일 의병도대장(義兵都大將)의 교서(敎書)를 받고 제의진(諸義陳)의 순검(巡檢)에 나서며 인근 의병을 통괄(統括)하였다. 1월 29일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 겸 진주목사(晋州牧使)를 제수받았으며 2월 5일 성주의 적들이 남김없이 도망가버리고 2월 19일 개령의 적들이 도망하자 김산(金山)에 나아가 주둔하였다. 선조26년(1593년) 3월 11일 김산(金山 : 지금 김천) 진중(陳中)에서 창병(瘡病 : 피부 질병)에 걸려 향년 53세로 졸(卒)하였다. 운명 직전 “只知有國不知有身(단지 나라 있는 줄은 알았으나 내 몸 있는 줄은 몰랐다)”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 아들은 없고 외동딸은 순천인(順天人) 박산립(朴山立)에게 출가하였으나 남편이 임진왜란에 창의(倡義)에 동참한 후 순절(殉節)하여 친손과 외손이 없다. 묘소는 고령군 쌍림면 고곡리 칠동산(七洞山) 유좌(酉坐)에 초취 및 재취 전주이씨(全州李氏)와 함께 삼위합분(三位合墳)이며 윤선거(尹宣擧)가 행장(行狀)을 짓고 신도비(神道碑) 비문(碑文)은 채제공(蔡濟恭)이 근찬(謹撰)하였다. 선조 40년(1607년)에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정헌대부이조판서겸지의금부사(正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使)로 추서(追敍)되었다.
    공을 배향하기 위하여 고령군 쌍림면 고곡동 26번지에 세운 도암서원(道巖書院)과 묘소(墓所), 신도비(神道碑)는 1988년 경북지방문화재(慶北地方文化財) 제76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역사 속에 잃어버렸던 공의 전공(戰功)과 위망(威望)이 2013년 중학교 각종 교과서에 수록됨으로써 현양(顯揚)되었다. 1988년 9월 23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76호로 지정된 도암서원(道巖書院)에서는 매년 음력 3월 초열흘날 도암서원 운영위원회가 주관하여 유림들이 참석하여 향사(享祀)를 받들고 있다.
    ⑨ 김자(金滋 : 1546년 ∼ ?)
    자는 지화(志和)이고 호는 구암(龜巖)이다. 경원부사(慶源府使)를 세문(世文)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정헌대부(正憲大夫) 한성부(漢城府) 판윤(判尹) 겸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을 지낸 당숙(堂叔) 수문(秀文)에게 출계(出系)하였다. 선조 34년(1601년) 음직(蔭職)으로 태인현감(泰仁縣監)에 제수(除授)되었으며 선조 36년(1603년) 금구현령(金溝縣令)을 지내고 사퇴하였다. 승정원 (承政院) 좌승지(左承旨)에 증직(贈職)되었으며 몰년(沒年)은 미상(未詳)이다.
    ⑩ 김홍원(金弘遠 : 1574년 ∼ 1600년)
    호는 풍암(楓菴)이며 사림(士林)의 추중(推重)을 받았던 대학유(大學儒) 송계(松溪) 길(洁)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송암(松菴) 김면(金沔)의 재종질(再從姪)이다. 방년(芳年) 19세에 임진왜란을 당하여 재종숙(再從叔) 송암(松菴)을 따라 창의(倡義)하였으며 1593년 3월 11일 금산진중(金山陳中 : 지금 김천)에서 송암(松菴)이 향년 53세로 순사(殉死)하자 통분(痛憤)을 금치 못하고 송암(松菴)을 대신하여 병사를 거느리고 7년간에 걸쳐 혈전(血戰)을 하면서 크게 군공(軍功)을 세웠다. 난이 평정(平定)된 후에 선조 38년(1605년) 4월 16일 선무원종공신1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녹훈(錄勳)되고 조선시대 오위(五衛)에 두었던 종삼품(從三品) 서반 무관직인 대호군(大護軍)으로 제수(除授)되었지만 나아가서 벼슬할 뜻이 없어 호연(浩然)히 귀향하여 예전부터 해 온 구업(舊業)만을 다스렸다.
    ⑪ 김의립(金毅立 : 1571년 ∼ ?)
    자는 홍이(弘而)이며 생부(生父)는 자(滋)이며 송암(松菴) 김면(金沔)에게 출계(出系)하였다. 음제(蔭除)로써 통훈대부(通訓大夫) 행(行) 능성현령(綾城縣令)을 지내고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호조참판)에 증직(贈職)되었다. 금구공(金溝公) 자(滋)께서 독자(獨子)로서 형제가 없는 연유로 송암(松菴) 후부인(後夫人) 전주이씨(全州李氏)가 나라에 소장(訴狀)을 관청에다 바쳐(呈狀) 임금으로부터 생양가(生養家) 연삼대봉사(連三代奉祀)의 은전(恩典)을 받았다. 자(滋)의 아들 정황(鼎黃)은 생가(生家)와 양가(養家)의 독자(獨子)이므로 생가(生家)로 환가(還家)하였으나 그의 후손들은 족보상에는 김면(金沔)과 김자(金滋) 양가(兩家)의 계대(繼代)를 이어가고 있다.
    (2) 근∙현대 인물
    고령 거주 고령김씨 중에서 특별히 거론할 만한 인물이 없어 생략한다. 

     

     

    자료 제공  : 고령김씨 집의공파 후손
                     김정웅(金貞雄),
    집      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      리  : 최종동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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