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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정자와 재실의 유래를 찾아서

기사입력 2019.01.21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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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이씨(全州李氏) 양녕대군파(讓寧大君派) 사우재(四友齋)

     

     

    정자(亭子)는 풍류를 즐기고 경치를 완상(玩賞)하는 심리적 공간이며 재실(齋室)은 선조의 유덕(遺德)을 추모하고 종사(宗事)를 논의하는 종회(宗會)의 장소이다. 선인(先人)들의 숨결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고령지역의 정자(亭子)와 재실(齋室)의 유래를 격주 간격으로 연재해 소중한 문화유산인 정자(亭子)와 재실(齋室)을 재조명하는 기회를 가지고자 한다.

     

     


    1. 사우재(四友齋) 유래(由來)

    (1) 현와(弦窩) 이도(李)가 고령군 쌍림면 귀원리 구담(龜潭) 즉 서재동(書齋洞)에 정착(定着)하면서 1650년경 후학을 양성하기 위한 강학(講學) 장소로 사우재(四友齋)를 건립하였다.
    (2) 몇 차례 중수(重修)하였으나 오랜 세월 풍우(風雨)로 퇴폐(頹廢)하여 후손들이 1910년경 고령군 쌍림면 귀원리 14-5번지 현재 장소에 사우재(四友齋)를 다시 세우고 1955년 중수(重修)하였다.
    (3) 현와(弦窩) 이도(李)가 옛날 사람 중에서 상우(尙友)를 구하여 주(周)나라에서 노중련(魯仲連), 진(晋)나라에서 도연명(陶淵明), 송(宋)나라에서 호방형(胡邦衡)을 얻고 신라에서 백결(百結) 선생을 얻어 네 벗 즉 사우(四友)을 하였으니 이것이 사우재(四友齋)를 짓게 된 연유(緣由)이다.
    (註釋) 상우(尙友)
    책을 통하여 옛날의 현인(賢人)을 벗으로 삼는 일을 말한다.

    2. 건축형태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기와집으로, 우측 2칸과 좌측 1칸은 온돌방으로 만들고, 그 사이 2칸은 대청을 놓았다. 전면 길이 방향으로 길게 반 칸의 마루를 놓았다.

    3. 사우재(四友齋) 경내(境內) 현황
    1910년 후손들이 세운 ‘조선(朝鮮) 현와(弦窩) 선생(先生) 이공(李公) 유허비(遺墟碑)’는 의정부(議政府) 참찬(參贊)을 지낸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이 찬(撰)하고 글은 일선(一善) 김선(金)이 쓴 구(舊) 유허비(遺墟碑)가 있고, 1983년 이건(移建)하여 진와(進窩) 이헌주(李憲柱)가 구(舊) 유허비(遺墟碑) 내용을 써서 세운 신(新) 유허비(遺墟碑)가 경내(境內)에 나란히 세워져 있어 공의 휘행의적(徽行懿蹟)이 숭모(崇慕)되고 있다.
    (註釋) 휘행의적(徽行懿蹟)
    아름다운 행위와 행적을 말한다.

    4. 이도(李)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자소(子韶)이며 호는 현와(弦窩)이다.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증직(贈職)받고 완능군(完能君)에 봉해진 세량(世良)과 대사헌(大司憲)을 지내고 예조참판(禮曹參判)을 지낸 주(澍)의 따님인 증정부인(贈貞夫人) 안동김씨(安東金氏)사이에서 선조 26년(1593년)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의 6세손이다. 광해군(光海君) 10년(1618년) 무오(戊午)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하였다. 인조 2년(1624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백형 심()이 복주(伏誅 : 형벌을 받아 죽음)되고 같은 해 이괄(李适)의 난으로 정국(政局)이 혼란하자 누대(累代)에 걸쳐 세거한 서울 명례방(明禮坊 : 현재 서울특별시 중구)를 떠나 처가인 합천 초계 성산(城山 : 현재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으로 낙남(落南)하여 은둔(隱遁)하다가 얼마 후 고령(高靈) 구담(龜潭 : 고령군 쌍림면 귀원리 서잿골)으로 이거(移居)하였다. 37세 때인 인조 7년(1629년) 고령 의병장(義兵將) 송암(松巖) 김면(金沔)과 옥산(玉山) 이기춘(李起春)을 향사하는 향현사(鄕賢祠 : 현재 道巖書院)의 중수기(重修記)를 지었다. 44세 때인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수찬(修撰)에 제배(除拜)된 조카 이만(李曼)이 오랑캐와 화친(和親)할 수 없다고 척화(斥和)를 주장하고 전 예조참의(禮曹參議) 전식(全湜)이 의병(義兵)을 일으켜 청군(淸軍)의 남하(南下)를 저지하려 할 때 공은 초계향병(草溪鄕兵)을 이끌면서 유사(有司)가 되어 군량(軍糧)의 효과적 이용계획을 제시하여 방어작전을 도왔다. 같은 해 동계(桐溪) 정온(鄭蘊)의 권유로 황강(黃江) 이희안(李希顔)과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탁계(濯溪) 전치원(全致遠), 설학(雪壑) 이대기(李大期)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 소재 청계서원(靑溪書院)의 원장(院長)을 맡았다. 55세 때인 인조 25년(1647년)에 창원(昌原)의 자여도(自如道) 찰방(察訪)을 거쳐 58세 때인 인조 28년(1650년) 금산(錦山)에서 제원도(濟原道) 찰방(察訪)을 수행하였고 61세 때인 효종 4년(1653년) 안동의 안기도(安奇道) 찰방(察訪)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령으로 돌아왔다. 75세 때 고령 반룡사(盤龍寺)의 종각기(鍾閣記)를 지었다. 공의 집안은 조부(祖父) 희손(希孫), 백숙부(伯叔父) 목(), 조카 만(), 사위 곽홍지(郭弘址), 윤길(尹咭) 등이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고관대작(高官大爵)을 역임하여 당대 명문가(名門家)로 일컬어졌다. 공은 동계(桐溪) 정온(鄭蘊), 미수(眉叟) 허목(許穆)과 도의(道義)로 사귀었고,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 조은(釣隱) 한몽참(韓夢參), 오계(梧溪) 조정립(曺挺立), 기옹(畸翁) 박공구(朴衢), 낙수(洛叟) 곽위국(郭衛國), 국포(菊圃) 이문룡(李文龍), 태허정(太虛亭) 곽홍지(郭弘址), 매헌(梅軒) 곽수강(郭壽岡), 운계(雲溪) 정홍석(鄭弘錫), 임곡(林谷) 임진부(林眞) 등 당대의 명유석학(名儒碩學)들과 깊게 교유(交遊)하였다. 유고(遺稿)로 현와선생문집(弦窩先生文集)이 전하는데 약 730여 수의 한시(漢詩)와 60여편의 산문(散文)이 수록되어 있다. 현종 9년(1668년) 향년 76세로 졸(卒)하여 묘는 고령군 쌍림면 합가2리 가곡(佳谷) 지현(智峴) 도장곡(道藏谷) 사좌(巳座)에 형조정랑(刑曹正郞), 함양군수(咸陽郡守)를 지낸 설학(雪壑) 이대기(李大期)의 따님인 숙인(淑人) 전의이씨(全義李氏)와 합폄(合窆)이다.

    5. 사우재(四友齋) 서(序) : 현와(弦窩) 이도(李) 지음
    내가 만년(晩年)에 편벽(偏僻)되고 황폐(荒廢)한 곳에 살아서 게을러 빠진 것이 풀 수 없는 고질(痼疾)이 되었으니 늘 고루(固陋)하고 견문(見聞)이 적은 것을 스스로 비웃고 또 스스로 후회하였다. 우연히 <맹자(孟子)>를 읽다가 '효효연(嘐嘐然)하다'라는 말에 이르러서는 비록 늙었지만 흔쾌(欣快)하게 마치 여기에 뜻을 두는 듯했다. 옛 사람 중에 혹 희구(希求)하여 벗할만한 사람이 있을까 하고 깊이 생각해보았는데 공자(孔子)·맹자(孟子)·안자(顔子)·증자(曾子)와 같은 성현(聖賢)은 하늘과 같아서 오를 수 없고, 장자(莊子)·굴원(屈原)·사마천(司馬遷)·반고(班固)와 같은 문장은 배워도 이를 수 없다. 노력을 해도 될 수 없겠지만 고요(皐陶)·기(夔)·직(稷)·설(卨)과 같이 되는 것은 더욱 내 사업(事業)이 아니다. 위아래를 두루 살펴보아도 전혀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었다. 이에 맥이 풀려 스스로 주저하고 소스라쳐 스스로 말을 잃었다. 이에 마음먹은 것을 입을 통해 말하기를 “쯧쯧, 나는 누구와 더불어 벗을 한단 말인가? 또한 장차 지금의 사람을 따라 벗을 해야 하는가? 지금 사람의 마음은 나의 마음과 같지 않은데 어찌 벗할 수 있겠는가? 옛사람은 이미 감히 더불어 벗할 수 없고, 지금의 사람 또한 벗할 수 없으니 장차 무리(群)를 떠나 쓸쓸히 살면서 무리 없이 홀로 다녀야 한다는 것인가?”라고 하였다. 얼마 있다가 스스로 분발(奮發)하여 말하기를 “나는 농사꾼도 아니요, 장인(匠人)도 아니요, 장사꾼도 아니다. 글을 읽는 사람이니 비록 선비라 일러도 괜찮다. 선비는 뜻을 숭상(崇尙)하는 자인데 뜻이 진실로 줄어들지 않으면 척당강개(俶儻慷慨)한 사람과 오히려 가까이 할 수 있다. 하물며 가난하고 천함을 운명처럼 편안히 여김에랴. 이를 가지고 그와 같은 이를 구하여, 여섯 나라(六國) 즉 초(楚)·연(燕)·제(齊)·한(韓)·위(魏)·조(趙)에서는 노중련(魯仲連)을 얻었고, 진(晋)나라에서는 도연명(陶淵明)을 얻었으며, 송(宋)나라에서는 호방형(胡邦衡)을 얻었고, 신라(新羅)에서는 백결(百結) 선생을 얻었다. 이 네 사람은 나보다 먼저 그 뜻을 얻었으니 진실로 본받을만하다. 기대하고 부러워하는 것이 어찌 다만 쑥대가 소나무와 잣나무에 대한 것과 같을 따름이겠는가?” 한유(韓愈)가 이르기를 “일은 백대(百代)를 지나서도 서로 느껴지는 것이 있고, 사람에게 고금(古今)이 있으나 마음은 서로 같을 수 있으며, 때엔 전후(前後)가 있지만 일은 서로 같을 수 있으니, 서로 같은 때를 만나 서로 같은 마음을 느낀다면 옛사람이 곧 지금의 나(我)이고 지금의 내가 또한 옛사람이다. 이것은 과연 막역지교(莫逆之交)라 이를 것이니 다만 아침저녁으로 만날 뿐이 아니다. 세상에서 늘 옛사람과 지금사람은 서로 미칠 수 없다고 말하나 어찌 제대로 알고 하는 말이겠는가? 다만 그 발자취에 나아가 논했을 따름이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맹자가 이른바 “우(禹)와 직(稷)과 안연(顔淵)은 도(道)가 같다.”라고 말한 것은 그른 것인가? 이전에 노중련(魯仲連)으로 하여금 포위된 성안에 있지 않아서 동해(東海)에 빠져죽겠다는 말을 하지 못하게 했거나, 호방형(胡邦衡)이 화친(和親)을 주장하는 때에 있지 않아서 상소(上疏)를 봉(封)하여 올린 일이 없도록 했다면 사람들이 아마 그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도연명(陶淵明)이 원량(元亮)으로 자(字)를 고치고, 백결(百結)이 대악(碓樂)을 가지고 스스로 즐긴 것을 사람들 역시 등한시(等閑視)했다. 애석한 것은 그들이 불행히도 어렵고 곤궁한 때를 만나 그 마음에 쌓아둔 큰 뜻을 가지고 끝내 한 가지 절개를 지킨 데로 돌아가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로 하여금 부질없이 천 년 전을 우러러 사모하여 그들을 벗으로 삼도록 하고 또 무궁한 한(恨)을 품게 만들었다. 비록 그러하나 이 네 사람이 아니면 내가 누구와 함께 돌아갈 것인가?”하고는 마침내 사우(四友)의 편액(扁額)을 나의 집에 걸고 서문을 쓴다.
    (註釋1) 효효연(嘐嘐然)
    뜻이나 말이 모두 큰 모양을 이르는 말이다.
    (註釋2) 고요(皐陶)·기(夔)·직(稷)·설(卨)
    중국의 태평성세(太平盛世)인 요순(堯舜) 시대에 이름난 신하를 말한다.
    (註釋3) 척당강개(俶儻慷慨)
    재주와 기운이 높이 뛰어나고 의롭지 못한 것을 보고 의기(義氣)가 북받쳐 원통하고 슬퍼하는 것을 뜻한다.
    (註釋4) 쑥대가 소나무와 잣나무에 대한 것과 같을 따름이겠는가?
    현달(賢達)한 노중련(魯仲連), 도연명(陶淵明), 호방형(胡邦衡), 백결(百結) 선생을 소나무(松)와 잣나무(栢)에 비유하고 이를 보고 부러워하는 쑥대(蓬)를 자신에 비유하였다.
    (註釋5) 막역지교(莫逆之交)
    본래 천지의 참된 도를 깨달아 사물에 얽매이지 않는 마음을 가진 사람끼리의 교류를 의미했지만, 요즈음은 허물없는 친구 사이를 모두 가리킨다.
    (註釋6) 우(禹)와 직(稷)과 안연(顔淵)은 도(道)가 같다
    맹자는 태평성대에 나랏일을 돌보느라 자신의 집을 세 번이나 지나치고도 들르지 않은(三過其門而不入) 우(禹) 임금과 후직(后稷), 난세를 만나 가난 속에서도 자신의 즐거움을 변치 않은 안회(顔回)에 대하여 공자가 칭송한 점을 들면서 “우(禹) 임금과 후직(后稷), 안회(顔回)는 그 도가 같다.〔禹稷顔回同道〕”고 하였으며 “우(禹)와 후직(后稷)과 안자(顔子) 즉 안회(顔回)가 처지가 바뀌었더라도 모두 똑같이 그렇게 했을 것이다(禹稷顔子 易地則皆然)”라고 하여 생각이 같음을 표현하였다. 
    (註釋) 대악(碓樂)
    신라(新羅) 20대 자비왕(慈悲王) 때 백결(百結) 선생이 지었다는 노래이며 지금은 전(傳)하지 아니한다.

    6. 사우재(四友齋) 기(記) : 현와(弦窩) 이도(李) 지음
    옛날 미원장(米元章)은 기이(奇異)하게 선돌(立石)을 보고 도포(道袍)와 홀(笏)을 가져오게 명(命)하여 예용(禮容 : 예의에 맞는 거동)을 갖추고 그에게 절을 하면서 말하기를 “이 물건은 마땅히 나에게 절을 받을 만하다”하고, 이어 석장(石丈 : 돌어르신)이라 붙였다. 돌은 둔(鈍)한 물건인데 어디에 칭찬하고 공경할만한 것이 겠는가? 그러나 또 사람에게 절을 받고 사람에게 어른 대우를 받게 되었다. 하물며 꽃과 나무는 흙에서 싹을 내고 비와 이슬에 발육해 자라나서 가지와 잎이 무성하고 꽃을 피우는 것이 참으로 사람과 매우 다르지 않아 이양(養)할 기구로 삼을 만하다. 그렇다면 나는 이미 서책(書冊)속에서 위로 천고(千古)의 사람과 벗을 삼았으니, 또 이것으로 고요히 마음속의 벗으로 삼는 것이 어찌 옳지 않겠는가? 나의 집 정원 안에는 몇 포기의 대나무, 몇 그루의 매화, 자단(紫檀) 한 그루, 사계(四季) 한 그루가 있는데, 모두 내가 내손으로 심은 것들이다. 무릇 하늘과 땅 사이에 화(花). 죽(竹). 초(草). 목(木)들로 구경할만한 것들이 어찌 한계가 있겠는가마는 내가 유독 이 네 가지를 벗으로 취한 것은 그 뜻이 어디에 있겠는가? 깨끗하고 고상(高尙)하고 늠름(凜凜)하고 꽂꽂하여 의기(義氣)가 세상속에서 빼어나고 밝고 깨끗하고 시원하여 빼어난 품격(品格)이 먼지 속에서 튀어나와 푸르디 푸른 빛깔이 눈과 서리를 능멸(凌蔑)하고 고치지 않으며 온화하고 순수한 용태(容態)가 추위와 더위에 따라 다르지 않으니 옛날 나의 벗에 일찍이 이와 같은 자가 있었다. 기이하고 아름다우며 재기(才氣)가 출중(出衆)하여 뜻을 펴고 굽이지 않은 이는 노중련(魯仲連)이 그 사람인데 물건에 비교하면 대나무(竹)이고, 온 집안이 쓸쓸하며 담박(淡泊 : 욕심이 없고 마음이 깨끗함)하게 구(求)함이 없는 이는 도연명(陶淵明)이 그 사람인데 물건에 비교하면 매화(梅花)이다. 작은 종이에 써 올린 상소(上疏)의 말이 준엄(峻嚴)하고 큰 절의(節義)가 당당(堂堂)했던 것은 호방형(胡邦衡)이 한 일인데 이는 물건 중에 자단(紫檀)이며, 내가 좋아 하는 것을 따라 뜻대로 하면서 기쁘하고 백결선생은 만물(萬物)중에 사계(四季)를 택했다.
    그렇다면 대나무와 매화(梅花)와 자단(紫檀)과 사계(四季)인들 어찌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겠는가? 참으로 보통 풀과 예사 꽃의 품종(品種)들이 짝 할 수 있는게 아니다. 아, 대나무와 매화(梅花)와 자단(紫檀)은 동방(東方)의 물건만 되는 것이 아니라 일찍이 중국의 군자(君子)들에게도 취택(取擇 : 가려서 뽑음)함을 받았는데, 애석하게도 사계(四季)만은 홀로 편벽(偏僻)된 우리나라에 나서 중국의 군자들에게는 취택(取擇)함을 보지 못했다. 비록 그러나 오늘날에 알아주는 이를 만나서 고인(古人)에 비교하는 대나무, 매화(梅花), 자단(紫檀)과 더불어 같은 줄에 있음을 얻었으니 이는 다행이 아니겠는가?  나는 항상 네 명 군자는 사람과 뼈가 이미 다 썩어 없어지고 그들의 말만이 귀에 남아 있는 것을 한스럽게 여긴다. 지금 이후로 네 물건을 정실(庭實)로 삼아 조석(朝夕)으로 상대하니 마음이 융화(融和)되고 사군자(四君子)의 성용(聲容 : 음성과 용모)과 기개(氣槪)가 황홀히 백대(百代) 뒤에 서로 만나는 것과 같으니 내가 어찌 스스로 사람을 알아보는 교우(交友)의 도(道)가 썩지 않았다고 자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람과 물건을 합하여 말한다면 나의 벗이 넷이지만, 물건과 사람을 나누어 말하면 나의 벗은 여덟이니, 내가 벗을 취함도 또한 단정(端正)하고 넓다고 할 만하다. 저 미원장(米元章)은 석장(石丈)에게 절하였으나 저 이상하게 생긴 돌에서 내가 무엇을 취할 것이 있겠는가? 그래서 이미 사우재(四友齋) 서(序)를 만들었으나 다시 사우재(四友齋) 기(記)를 짓는다.
    (註釋1) 미원장(米元章)
    송나라 서화가(書畫家)로 자(字)는 미불(米芾)이다. 기암괴석(奇巖怪石)을 좋아하였는데, 언젠가 보기 드문 기이한 돌을 대하고는 뜰 아래로 내려와서 절을 하며 “내가 석 형님을 보기를 소원한 지가 20년이나 되었소.〔吾欲見石兄二十年矣〕”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註釋2) 이양(養)
    이신양성(神養性)의 준말로 마음을 수양하고 바른 성정(性情)을 기름을 말한다
    (註釋3) 자단(紫檀)
    나무속이 붉고 짙은 향이 나는 향나무를 이른다. 
    (註釋4) 사계(四季)
    쌍떡잎식물 장미목 장미과의 사계절 잎이 지지 않는 키 작고 늘푸른 나무이다.
    (註釋5) 정실(庭實)
    뜰에 가득 찬 공물(供物 : 물건)

     

     

    자료제공 : 전주이씨 양녕대군 18세손
                  이병록(李丙綠)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최종동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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