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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고령지역 세거성씨(世居姓氏) 연원(淵源)을 찾아서

기사입력 2019.01.21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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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성김씨(義城金氏) 문절공파(文節公派), 참의공파(參議公派)

     

     

    본지는 ‘고령지역 세거성씨(世居姓氏) 연원(淵源)을 찾아서’를 격주로 기획 연재한다. 씨족연원(氏族淵源), 현조(顯祖), 고령입향(高靈入鄕) 내력 및 시기, 입향조(入鄕祖) 이 후 역대 인물 등을 문헌적 고증(考證)을 근거로 밝힘으로써 각 문중 고유의 씨족연원(氏族淵源), 열조(烈祖)들의 위업(偉業), 올곧은 정신 및 문화유산(文化遺産)을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코자 하오니 관심 있는 문중들의 많은 참여를 바라며, 이번호에는 의성김씨(義城金氏) 문절공파(文節公派), 참의공파(參議公)를 소개한다.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시조(始祖) 김석(金錫)
     일휘(一諱) 중석(重錫)이고 대보(大輔)를 지낸 김알지(金閼智)의 29세손이며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큰딸인 낙랑공주(落浪公主)이며 일명 신란궁부인(神鸞宮夫人)이라고도 한다. 고려 태조의 외손(外孫)으로 의성군(義城君)에 책봉되어 자손들이 본관(本貫)을 의성(義城)으로 삼았다. 의성(義城)의 구호(舊號)가 경덕왕 16년(757년) 문소(聞韶)로 개칭되었기 때문에 한때 문소(聞韶)로 본관(本貫)을 쓰기도 하였다. 의성김씨 족보인 병신보(丙申譜 : 1656년)이후 수차례 족보 간행시 문중의 석학거유(碩學巨儒)들이 일관되게 시조(始祖) 김석(金錫)을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로 기록하고 있으나 신라김씨 2천년사(新羅金氏 二千年史),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 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와 신라김씨 분파연원도(新羅金氏 分派淵源圖)에는 경순왕(敬順王)의 다섯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2) 분파(分派)
    9세조를 분파조(分派祖)로 하여 5개파로 나누어진다. 김용비(金龍庇)의 후손은 첨사공파(詹事公派), 김용필(金龍弼)의 후손이 수사공공파(守使空公派), 김용주(金龍珠)의 후손은 충의공파(忠毅公派), 김성단(金成丹)의 후손은 찬성공파(贊成工派), 김흥(金興)의 후손은 선략장군공파(宣略將軍公派)로 나누어진다.
    (3)봉군(封君) 책봉 10명, 시호(諡號)를 받은 사람 13명을 배출한 명문가
    고려·조선조에 걸쳐 의성군(義城君) 7명, 광주군(廣州君), 개성군(開城君), 고양군(高陽君) 등으로 봉군된 사람이 10명이며 시호(諡號)를 받은 사람은 문절공(文節公) 김용초(金用超), 문경공(文敬公) 김안국(金安國), 문정공(文貞公) 김우옹(金宇顒) 등 13명을 배출한 명문가(名門家)이다.
    (4) 고령군내 의성김씨 파별 분포 현황
    ① 문절공(文節公) 김용초(金用超) 장남 계열의 성주 윤동(倫洞) 사우당(四友堂) 김관석(金關石) 후예들은 쌍림면 송림리, 대가야읍 중화1리, 성산면 득성리, 덕곡면 지사동 등지에 산거(散居)하고 있다.
    ② 문절공(文節公) 김용초(金用超)의 차남 수사공(水使公) 김감(金鑑) 후손은 운수면 대평리 흑수와 다산면 벌지리에 세거하고 있다.
    ③ 참의공(參議公) 김용기(金用起)의 후손은 덕곡면 후암동과 운수면 월산리에 집성촌(集姓村)을 이루며 살고 있다.
    (5) 의성김씨(義城金氏)에서 고령김씨(高靈金氏) 분적(分籍)
    의성김씨(義城金氏) 9세 김용비(金龍庇)의 장손(長孫)인 김남득(金南得)이 고양부원군(高陽府院君)으로 봉군되고 고령을 식읍(食邑)으로 받아 의성김씨(義城金氏)에서 분적(分籍)하여 고령김씨(高靈金氏) 시조(始祖)가 되었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① 김용비(金龍庇)
    금오위(金吾衛) 별장동정(別將同正)의 벼슬을 지낸 김공우(金公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려 항몽기(抗蒙期)에 중서성(中書省) 참지정사(參知政事)로 번다한 국난(國難)에 공로가 있어 추절보절공신(推節保節功臣) 의성군(義城君)에 책봉되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태자첨사(太子詹事)를 지냈으며 의성군 백성들이 공의 공덕(功德)을 기리는 진민사(鎭民祠)를 세워 오늘에 전해졌다. 배위는 영동정(令同正) 후주(后柱)의 따님인 강씨(姜氏)이다. 묘는 의성군 사곡면 상현리 오토산(五土山)에 있다.
    ② 김용필(金龍弼)
    금오위(金吾衛) 별장동정(別將同正)의 벼슬을 지낸 김공우(金公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은자광록대부(銀紫光祿大夫) 수사공(守司空)의 벼슬을 지내고 의성군(義城君)에 봉해졌다.
    ③ 김영(金英)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태자첨사(太子詹事)를 지낸 김용비(金龍庇)의 3남으로 태어났다. 전객시(典客寺) 판사(判事) 겸 집현전(集賢殿)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봉익대부(奉翊大夫) 삼중대광(三重大匡) 문하 찬성사(門下贊成事)에 올랐다.
    ④ 김지예(金之銳)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김영(金英)의 장남으로 문과에 급제해 초계군수(草溪郡守)를 지내고 아들 김광부(金光富)가 귀(貴)하게 되어 병부상서(兵部尙書)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증직(贈職)되었다.
    ⑤ 김광부(金光富)
    초계군수(草溪郡守)를 지낸 김지예(金之銳)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공민왕 10년(1361년) 홍건적(紅巾賊)이 개경을 침공하자 이를 수복한 공으로 공민왕 12년(1363년) 2등공신이 되었다. 1372년 부원분자(附元分子) 고철두(高鐵頭) 등이 변방에 침입하였을 때 수어관(守禦官)으로 이를 격파하였다. 그뒤 계림윤(鷄林尹)을 지냈다. 1379년 8월 합포도순문사(合浦都巡門使)가 되었는데, 9월에 왜구가 단계(丹溪)·거창(居昌)·야로(冶爐) 등을 습격하고, 가수현(嘉樹縣 :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에 이르자 이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의성군(義城君)에 봉군되었다.
    (註釋) 부원분자(附元分子)
    고려 시대에 원나라의 힘을 등에 업어 출세를 한 권문세족(權門勢族)을 의미한다
    ⑥ 김수덕(金修德)
    초계군수(草溪郡守)를 지낸 김지예(金之銳)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판사(判事)를 지냈으며 3남 김용초(金用超)의 귀(貴)로 가의대부(嘉義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으며 의성군(義城君)에 봉군되었다.
    (2) 조선시대
    ① 김용기(金用起)
    고려말 판사(判事)를 지낸 수덕(修德)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용맹과 힘이 남보다 뛰어나고 활을 잘 쏘았다. 왜구가 양광도(楊廣道)에 침입하였을 때 밀직부사(密直副使)인 동생 김용초(金用超)를 따라 참전(參戰)하여 영주(寧州 : 평안북도 안주)의 도고산(道高山) 아래에서 군사를 만나 백여 급(級)을 참획(斬獲)하여 토벌(討伐)하였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왕위에 오르자 형제가 함께 순충분의개국공신(純忠奮義開國功臣)에 책록(策錄)되었으며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다. 시호는 무절(武節)이다. 생졸년(生卒年) 미상이다. 의성김씨(義城金氏) 참의공파(參議公派) 고령(高靈) 입향조(入鄕祖)이다.
    ② 김용초(金用超 : ? ∼ 1406년)
    호는 내성재(內省齋)로 고려말 판사(判事)를 지낸 수덕(修德)의 3남으로 태어났다. 고려 충정왕 때 문과에 급제했다. 성품이 질박(質朴)하고 곧으며 무재(武才)가 있었다. 공양왕 2년(1390년)에 왜구가 양광도(楊廣道)를 침탈하자 공은 밀직부사(密直副使)로써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윤사덕(尹師德), 자혜윤(慈惠尹) 이방과(李芳果), 밀직부사(密直副使) 유용생(柳龍生), 의덕부윤(懿德府尹) 곽충보(郭忠輔) 등과 함께 영주(寧州)의 도고산(道高山) 아래에서 왜구 100여 급(級)을 베었다. 조선 개국 후에 충청도병마절제사(忠淸道兵馬都節制使)를 제수받고 태조 때에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봉해졌다.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고 시호(諡號)는 문절(文節)이다.
    ③ 김관석(金關石 : 1505년∼1542년)
    자는 의중(倚中)이며 호는 사우당(四友堂)이다. 장사랑(將仕郞)을 지낸 김윤적(金允迪)의 외동 아들로 태어났다. 공은 조선 중종조의 학자로 품행이 독실하고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바탕으로 한 도의(道義)를 익히고 닦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서당을 세워 많은 제자를 가르쳤으며, '독서명문도편'(讀書銘聞道篇)을 비롯한 유교철학과 관련한 적지 않은 저술과 사우당십경운(四友堂十景韻)을 남겼다. 조정에서 공의 어짊을 듣고 재릉참봉(齎陵參奉)의 벼슬을 내렸으나 '부모가 계시는 집을 떠날 수 없다' 하여 사양하였다. 사후 덕천서원(德川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처사(處士) 탄(坦)의 따님인 순천박씨(順天朴氏)와 혼인하여 처향(妻鄕)인 성주 윤동(倫洞)에 시거(始居)하여 의성김씨(義城金氏) 윤동(倫洞) 입향조(入鄕祖)가 되었다. 
    ④ 김담로(金聃老 : 1522년∼1602년)
    자는 백수(伯叟)이며 호는 백와(栢窩)이다. 재릉참봉(齎陵參奉)을 지낸 사우당(四友堂) 김관석(金關石)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증직(贈職)받았다.
    ⑤ 김담수(金聃壽 : 1535년∼1603년)
    자는 태수(台叟)이고 호는 서계(西溪)이다. 재릉참봉(齎陵參奉)을 지낸 사우당(四友堂) 김관석(金關石)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는 남명(南冥) 조식(曺植)을 사사(師事)하였고, 오건(吳健)에게서『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을 배웠으며, 황준량(黃俊良)에게서『중용(中庸)』과『대학(大學)』을 강의를 받았는데, 모두 지극한 칭찬을 받았다.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한강(寒岡) 정구(鄭逑)와 도의(道義)로 사귀었고 특히 지극한 효성으로 명성이 있었다. 명종 19년(1564년) 식년(式年)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하였으나 두문불출, 경전(經典) 공부에 정진하였다. 1591년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선공감참봉(繕工監參奉)을 제수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안동과 예안 사이에서 살면서 월천(月川) 조목(趙穆)⋅설월(雪月) 김부윤(金富倫)⋅성성재(惺惺齋) 금란수(琴蘭秀)⋅일휴당(日休堂) 응협(應夾)과 종유(從遊)하면서 시(詩)를 서로 주고받았다. 선조(宣祖)가 황계처사(黃溪處士)라고 호(號)를 내렸다. 성주의 청천서원(晴川書院)과 상주의 낙암서원(洛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서계일고(西溪逸稿)』3권 1책이 규장각도서에 전한다.
    ⑥ 김정룡(金廷龍 : 1561년∼1619년)
    자는 시현(時見)이며 호는 월담(月潭)이다. 선공감(繕工監) 참봉(參奉)을 지낸  김담수(金聃壽)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선조 18년(1585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를 거쳐, 선조 19년(1586년) 예안현감(禮安縣監)이 되었다. 현감으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량미 수송에 공이 커 왕으로부터 황감(黃柑 : 잘 익어서 빛깔이 누렇게 된 감자)을 받았다. 1607년 예조좌랑(禮曹佐郞)·병조좌랑(兵曹佐郞)을 지내고, 그 뒤 영월군수(寧越郡守)·풍기군수(豊基郡守)·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상주 낙암서원(洛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월담집(月潭集)이 전한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1) 13세 참의공(參議公) 김용기(金龍起)가 의성(義城)으로부터 조선 초기에  고령에 전거(奠居 : 자리 잡고 살 만한 곳을 정함)하였고 그후 통훈대부(通訓大夫) 통례원(通禮院) 우통례(右通禮)를 지낸 19세 백산공(栢山公) 사학(士鶴)의 차남과 셋째 아들이 아래 지역에 집성촌(集姓村)을 형성하며 세거하고 있다.
    ① 충순위(忠順衛) 사복시부정(司僕寺副正)을 지낸 차남 덕산공(德山公) 김양수(金良壽)는 덕곡면 후암1리에 시거(始居)하여 후손들은 덕산공파(德山公派)를 이루며 살아 가고 있다.
    ② 종사랑(從仕郞)을 지낸 3남 월성공(月城公) 김극수(金克壽)는 운수면 월산리에 터를 잡아 후손들은 월성공파(月城公派)를 이루고 세거하고 있다.
    (2) 성주군 수륜면 윤동(倫洞) 의성김씨(義城金氏) 입향조(入鄕祖) 18세 사우당(四友堂) 김관석(金關石)의 장남 19세 백와공(栢窩公) 담로(聃老)와 3남 서계공(西溪公) 담수(聃壽)의 후손들은 아래와 같이 입향하여 세거하고 있다.
    ① 장남 백와공(栢窩公) 담로(聃老)의 차남 20세 천설(天渫)이 조선 선조 때 성주 윤동(倫洞)에서 고령군 덕곡면 백2리 광천동(廣川洞) 늠내마을로 입향하여 세거하였으나 현재는 살고 있지 않으며 후손 중 일부는 고령군 쌍림면 송림리로 이거(移居)하였다. 천설(天渫)의 5세손 재백(載伯)이 성주군 대가면 내기(內基 : 안터)에서 영조 2년(1726년)에 대가야읍 중화1리로 입향하여 의성김씨 신재공파(新齋公派)를 이루며 세거하고 있다.
    ② 3남 서계공(西溪公) 담수(聃壽)의 현손(玄孫) 처사(處士) 만석(萬錫)은 상주시 중동면 죽암리(竹巖里)에서 1700년경 외가(外家)인 덕곡면 백2리 광천동(廣川洞) 인근인 덕곡면 후암2리 지사동으로 입향하였고 월암공(月巖公) 김정룡(金廷龍)의 5세손 김일빈(金鎰彬)이 1800년 초기에 성주군 수륜면 수륜리 토실마을에서 고령군 성산면 득성리에 입향하였다.
    (3) 문절공(文節公) 김용초(金用超)의 차남 수사공(水使公) 김감(金鑑)의 5세손 처사(處士) 김승일(金承逸)이 성주 윤동(倫洞)에서 1592년 임진왜란을 피하여 고령군 운수면 대평1리 흑수(黑水)로 입향하였고 공의 6세손 첨사(僉使) 김거우(金巨祐)가 같은 시기에 다산면 벌지리(伐知里)로 입향하여 세거하고 있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조선시대
    ① 김극진(金剋震 : 1498년 ∼1555년)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증직(贈職)받은 연(鍊)과 청주한씨(淸州韓氏) 사이에서 연산군 4년(1498년)에 태어났다. 조선시대 5위(五衛)에 속한 종5품의 무관직인 부사직(副司直)을 지냈다.
    ② 김계남(金啓南)
    유학(幼學) 언우(彦佑)와 참봉(參奉)을 지낸 광하(光河)의 딸인 김해김씨(金海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훈련원(訓練院) 주부(主簿)를 지냈다. 생몰년(生沒年) 미상(未詳)이다.
    ③ 김보진(金普珍)
    자는 미백(美伯)이고 충순위(忠順衛) 사복시부정(司僕寺副正)을 지낸 김양수(金良壽)와 지권(之權)의 따님인 광산김씨(光山金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宣傳官)을 지냈다. 생몰년(生沒年) 미상(未詳)이다.
    ④ 김두(金枓 : 1590년∼1627년)
    자는 이간(而幹)이고 호는 묵재(齋)이다. 선무랑(宣務郞) 군자감(軍資監) 주부(主簿)를 지낸 김천설(金天渫)과 부호군(副護軍)을 지낸 성범(成範)의 따님인 의인(宜人) 성산이씨(星山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인조 2년(1624년) 식년(式年)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한 후 한강(寒岡) 정구(鄭逑)에게 사사(師事)하여 직접 교화(敎化)를 깊게 받았다.
    (2) 근∙현대 인물 
    ① 김기려(金基麗) : 동대구신협이사장, 대구광역시 중구 의회의원
    ② 김기천(金基千) : 동대구신협이사장, 신협대구∙경북실책협의회 회장
    ③ 김기학(金基鶴) : 울산광역시 국장
    ④ 김길수(金吉守) : 서기관, 고령군 건설도시국장
    ⑤ 김두성(金斗聲) : 육군 소령
    ⑥ 김무현(金武鉉) : 경북대학교 교수, 안과의원 원장
    ⑦ 김병준(金秉準) : 자유한국당 혁신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 대통령 정책실장, 제7대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부총리
    ⑧ 김병환(金秉煥) : 덕곡 예마을 이사장, 덕곡면 발전위원회 위원장
    ⑨ 김왕기(金王基) : 법무법인유한율촌 고문, 국무총리 공보실장, KB금융지주 부사장 
    ⑩ 김양웅(金良雄) : 제4대 고령군 의회 의장, 3선 군의원 역임
    ⑪ 김용대(金龍大) : 경상북도 행정부지사, 경북도립대학교 총장
    ⑫ 김용태(金龍) : 고령가스 사장, 가산농장 대표
    ⑬ 김인탁(金仁卓) : 고령문화원장, 마스터피스 골프장 대표
    ⑭ 김종대(金鍾大) : 한국도로공사 차장
    ⑮ 김종필(金鍾泌) : 부장판사, 변호사
    ⑯ 김종호(金鍾浩) : 경찰서장
    ⑰ 김점동(金点東) : (주) 동훈그룹 회장, 힐마루 컨트리클럽 대표
    ⑱ 김판오(金判五) : 제2대 고령군의회 의원
    ⑲ 김호일(金虎一) : 의학박사, 병원원장
    ⑳ 김형준(金亨埈) : 서일대학교 산업시스템 경영과 교수

    ​자료 제공  : 죽와공파(竹窩公派)
                     김병환(金秉煥)
    집      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      리  : 최종동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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