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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고령지역 세거성씨(世居姓氏) 연원(淵源)을 찾아서

기사입력 2019.01.14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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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강씨(晋州姜氏) 박사공파(博士公派)


    본지는 ‘고령지역 세거성씨(世居姓氏) 연원(淵源)을 찾아서’를 격주로 기획 연재한다. 씨족연원(氏族淵源), 현조(顯祖), 고령입향(高靈入鄕) 내력 및 시기, 입향조(入鄕祖) 이 후 역대 인물 등을 문헌적 고증(考證)을 근거로 밝힘으로써 각 문중 고유의 씨족연원(氏族淵源), 열조(烈祖)들의 위업(偉業), 올곧은 정신 및 문화유산(文化遺産)을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코자 하오니 관심 있는 문중들의 많은 참여를 바라며, 이번호에는 진주강씨(晋州姜氏) 박사공파(博士公派)를 소개한다.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진주강씨(晋州姜氏) 시조(始祖)
    고구려 영양왕 8년(597년) 5호(五胡) 16국(十六國)·남북조(南北朝)의 난세(亂世)를 평정(平定)하고 한족(漢族)의 통일국가를 형성한 수문제(隋文帝)가 고구려를 협박하는 내용의 무례(無禮)한 국서(國書)를 보내자 영양왕(嬰陽王)은 모욕적(侮辱的)인 국서(國書)를 받고 군신(群臣)을 불러 모아 회답(回答)할 말을 의론(議論)했을 때 강이식(姜以式) 장군(將軍)이 “이 같이 모욕적이고 무례한 글에 대해서는 붓으로 답변할 게 아니라 칼로 답변해야 합니다”라면서 개전(開戰)을 주장(主張)하므로 영양왕(嬰陽王)도 거기에 찬동하여 영양왕 9년(598년) 강이식(姜以式) 장군으로써 병마원수(兵馬元帥)로 삼아 정병(精兵) 5만명을 이끌고 임유관(臨渝關)을 향하도록 하고 또 말갈병(靺鞨兵) 1만명을 보내 요서(遼西) 지방을 침공하여 고구려군은 수나라 요서총관(遼西總管)인 위충(韋冲) 혹은 장충(張忠)과 접전을 벌이다가 거짓으로 패하는 척하며 임유관(臨渝關)으로 후퇴하니 수문제(隋文帝)는 계략에 빠진 줄도 모르고 이 때를 놓칠세라 한왕(韓王) 양량(楊諒 : 수 문제의 넷째 아들)을 행군대총관(行軍大總官), 왕세적(王世積)을 행군원수(行軍元帥)로, 주라후(周羅)를 수군총관(水軍總管)으로 삼아 수륙군(水陸軍) 30만명을 이끌고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요동을 향했으나 수(隋)의 육군은 요서(遼西)의 유성(柳城)까지 나왔다가 군량미는 떨어지고, 6월 장마로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자가 속출하니 견딜 수 없어 철수하였고 주라후(周羅)의 수군(水軍)은 산동성(山東城) 동래(東萊)에서 출병(出兵)하여 바다를 건너 평양을 향하다가 해상에서 폭풍을 만나 파선(破船) 혹은 표류(漂流)로 요수(遼水)를 건널 수도 없었거니와 실상은 강이식(姜以式) 장군(將軍)이 벽루(壁壘 : 성벽과 성루)를 지켜 항전(抗戰)하고 수군(水軍)을 풀어 거의 전군(全軍)을 격침(擊沈)시켜 수병(隋兵)은 30만명 중에서 십(十)의 팔(八), 구(九)를 잃어버리고 9월에 헛되이 돌아가니 이것이 수나라와 제1차전쟁이었던 임유관(臨渝關) 전투(戰鬪)로 국사학계의 태두(泰斗)인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이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서 ‘서곽잡록(西郭雜錄)’이란 문헌을 인용하여 밝혀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신라 헌강왕(憲康王) 때 태중대부(太中大夫) 판내의령(判內議令)을 지낸 휘(諱) 진(縉)의 시호(諡號)가 정순공(正順公)이고 진양후(晉陽侯)에 봉(封)해져 후손들이 강이식(姜以式)을 시조(始祖)로 삼고 본관(本貫)을 진주(晋州)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 오고 있다. 묘(墓)는 만주(滿洲) 심양현(瀋陽縣) 봉길선 원수림 역 앞에 병마원수강공지총(兵馬元帥姜公之塚)이라는 큰 비석이 있었다고 하나, 중국 문화혁명(文化革命) 때 소멸되고, 돌조각과 거북좌대만 묘역에 남아 있다. 현재 진주시 상봉서동 봉산사(鳳山祠)에 강이식(姜以式) 장군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2) 분파(分派)
    진주강씨(晋州姜氏)는 은열공파(殷烈公派), 박사공파(博士公派), 소감공파(少監公派), 시중공파(侍中公派), 인헌공파(仁憲公派) 등 5파로 분파(分派)되었다.
    (3) 4대에 걸친 공경(公卿) 장상(將相)을 배출한 명문가(名門家)
    박사공파(博士公派) 중 문경공(文敬公) 강군보(姜君寶) 후손은 조선초 강회백(姜淮伯)은 참판승추부사(參判承樞府事), 아들인 강석덕(姜碩德)은 호조참판(戶曹參判)과 대사헌(大司憲)을 손자인 강희안(姜希顔)는 호조참의(戶曹參議) 겸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 강희맹(姜希孟)은 좌찬성(左贊成), 증손자인 강귀손(姜龜孫)은 우의정(右議政)을 지내는 등 4대에 걸쳐 공경(公卿) 장상(將相)을 배출한 집안이다. 
    (4) 고령군내 진주강씨 파별 분포 현황
    재신공(宰臣公) 강황보(姜璜寶)의 후손들은 다산면 월성리에, 봉성군(鳳城君) 강전보(姜畋寶)의 후손은 우곡면 객기리에, 문경공(文敬公) 강군보(姜君寶)의 후손은 개진면 부리(斧里) 가암(加岩) 등지에 산거(散居)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① 강계용(姜啓庸)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며 진주강씨(晋州姜氏) 박사공파(博士公派) 파조(派祖)이다. 문과에 급제한 후 국자박사(國子博士)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으며 원종 15년(1274년) 통신사 김방경(金方慶)과 함께 서장관(書狀官)의 직위로 일본에 다녀왔다. 원나라가 일본을 공격할 때 서장관으로서 길잡이 역할을 하였는데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까닭에 이후에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후에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에 봉해졌다. 묘소가 실전(失傳)되어 합천군 율곡면 갑산리에 설단(設壇)하였다.
    ② 강황보(姜璜寶 : ? ∼1381년)
    음직(蔭職)으로 정용위(精勇衛) 대장군(大將軍)을 지내고 진양군(晋陽君)을 지낸 창부(昌富)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일명 이황(利璜)이라고 한다. 음사(蔭仕)로 관직에 나아가 힙문지후(閤門祗候), 추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를 거쳐 숭록대부(崇祿大夫)의 품계를 받았으며 재신(宰臣) 겸(兼) 이병부사(吏兵部事)를 역임하였다. 공은 학덕(學德)과 덕행(德行)이 있는 분들과 사귀었는데 문인(文人)으로는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목은(牧隱) 이색(李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등이며 무인(武人)은 최영(崔瑩), 이성계(李成桂) 등 이었다. 고려말 정국(政局)이 혼란스럽게 돌아가자 두 아들 손기(孫奇), 손수(孫壽)와 함께 합천 미숭산(美崇山)에서 은둔(隱遁) 자적(自適)하다가 고려 우왕 7년(1381년)에 졸(卒)하였으며. 묘는 고령군 다산면 벌지리 묵방곡(坊谷) 자좌(子坐)에 있다.
    ③ 강전보(姜畋寶 : ? ∼ ?)
    음직(蔭職)으로 정용위(精勇衛) 대장군(大將軍)을 지내고 진양군(晋陽君)을 지낸 창부(昌富)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충숙왕 때 벼슬이 낭장(郎將)이였는데 뒤에 봉성군(鳳城君)으로 봉(封)하였으며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후손들이 공의 유덕(遺德)을 기리기 위하여 성주군 용암면 운산리에 운산재(雲山齋)를 세웠다.
    ④ 강군보(姜君寶 : ? ∼1380년)
    증(贈) 중대광(重大匡)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서 진원부원군(晋原府院君)을 지낸 창귀(昌貴)와 합문지후(閤門祗候)를 지낸 윤보(允保)의 딸인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 안동권씨(安東權氏) 사이에서 외동 아들로 태어났다. 충숙왕 5년(1336년) 채홍철(蔡洪哲)이 지공거(知貢擧)로 선발한 문과에 장원급제한 남궁 민(南宮 敏)과 함께 등제(登第)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 첨의평리(僉議評理),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을 거쳐 삼중대광(三重大匡)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을 역임하였고 봉산군(鳳山君)에 봉해진 후 치사(致仕)하고 환향(還鄕)하여 고려 우왕 6년(1380년)에 졸(卒)하였으며 시호(諡號)는 문경(文敬)이다. 묘는 고령군 성산면 어곡리 제석산(帝釋山) 병좌(丙坐)에 있다. 후손들이 1958년 고령군 성산면 어곡리 산 378번지에 어곡재(御谷齋)를 창건하여 공의 유덕(遺德)을 기리고 있다.
    ⑤ 강시(姜蓍 : 1339년∼1400년)
    호는 양진당(養眞堂)이다.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낸 군보(君寶)와 전객시령(典客寺令)을 지낸 여진(呂珍)의 따님인 계림군부인(鷄林郡夫人) 경주김씨(慶州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공민왕 6년(1357년) 성균시(成均試)에 급제한 후 공민왕 11년(1362년) 대관서승(大官署丞)이 되고, 이후 전공좌랑(典工佐郞)·합문인진부사(閤門引進副使)를 거쳐, 전법(典法)·전리(典理)의 총랑(摠郞)을 역임하였다. 이어 삼사좌윤(三司左尹)·군기판관·(軍器判官)을 역임한 뒤 우왕 5년(1379년) 선공판관(繕工判官)을 거쳐, 이듬해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事)로 나아가고,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으며, 단성보리공신(端誠輔理功臣)의 훈호를 받고 상호군(上護軍)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문하평리상의(門下評理商議)가 되었으며, 진산군(晉山君)에 봉하여졌다. 공양왕 2년(1390년)에 추충보조공신(推忠輔祚功臣)의 훈호(勳號)를 받고 찬성사(贊成事)에 올랐으며, 청성군(菁城君)에 봉해졌으며 정종 때 상의문하찬성사(商議門下贊成事)를 지냈으며 공목(恭穆)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⑥ 강회백(姜淮伯 : 1357년 ∼ 1402년)
    자는 백부(伯父)이고 호는 통정(通亭)이다. 상의문하찬성사(商議門下贊成事)를 지낸 시(蓍)와 정치관(整治官)을 지내고 원정공(元正公)에 봉해진 즙(楫)의 따님인 정신택주(貞愼宅主) 진주하씨(晋州河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우왕 2년(1376년) 병진방(丙辰榜)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한 후 우왕 8년(1382년)에 대언(代言)이 되었는데, 이해에 봉익 대부(奉翊大夫)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승진하였다. 우왕 10년(1384)에 하륜(河崙)·염정수(廉廷秀)·강회백(姜淮伯)·이숭인(李崇仁)과 함께 호복(胡服)을 혁파하고 중화의 제도[華制]를 따르자고 건의하였다. 우왕 11년(1385년) 겨울에 하정사(賀正使)로 명나라 경사(京師 : 서울)에 갔다, 창왕 1년(1389년)에 광정대부(匡靖大夫)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제수하여 교주(交州)·강릉도(江陵道)를 관찰(觀察)하였고 공양왕이 즉위하자 추충협보공신(推忠協輔功臣)의 호를 받았다. 공양왕 3년(1391년)에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옮기어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겸임하였다. 정종 2년(1400년)에 동북면 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로 제수되어 정헌계(正憲階)에 올랐고, 태종 2년(1402년)에 참판승추부사(參判承樞府事)에 제수되었다. 공은 총명(聰明)이 남보다 뛰어나고 강개(慷慨) 노성(老成 : 노련)하여, 가는 곳마다 성적(聲績 : 명성과 공적)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저서로는『통정집(通亭集)』이 있다.
    ⑦ 강진덕(姜進德 : 1387년 ∼?)
    자는 자수(子修)이고 호는 송헌(松軒)이다.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를 지낸 회백(淮伯)의 세째 아들로 태어났다. 세종 9년(1427년) 친시(親試)에서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을 지냈다. 공은 병조정랑(兵曹正郞)으로 재임 시 형조판서(刑曹判書) 김자지(金自知)·참판(參判) 정연(鄭淵) 등과 함께 호조(戶曹)에서 공법(貢法)을 변경시키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였다. 호조좌랑(戶曹佐郞),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필선(弼善),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 좌부승지(左副承旨) 겸 지제교(知製敎)를 지냈다. 공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대구도호부 누정(樓亭)에 수록된 시(詩)에서 대구를 “땅이 넓어 사람이 많이 살고, 다락이 높아서 시계(視界)가 밝구나. 학은 능히 구름과 함께 가고, 거문고는 달과 같이 맑구나.”(地大人居密 樓高限界明 鶴能雲共去 琴與月俱淸)라고 하여 문장에도 능하였다. 배위는 검한성사(檢漢城事)를 지낸 원현(元顯)의 따님인 숙부인淑夫人) 문화류씨(文化柳氏)이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1) 재신공(宰臣公) 강황보(姜璜寶) 후손
    ① 13세 강정승(姜鼎昇)이 임진왜란 후인 현종 11년(1670년)경 합천군 초계(草溪)에서 고령군 개진면 직2리 송천(松泉)으로 이거(移居)하였다. ② 14세 강하수(姜河壽)가 합천군 쌍백면 하안리(下安里) 현재 평구리(平邱里) 천곡(泉谷)에서 1590년경 고령군 다산면 월성리 장자골로 이거(移居)하였다.
    (2) 문경공(文敬公) 강군보(姜君寶) 후손
    ① 20세 송재(松齋) 강세남(姜世南)이 영조 15년(1750년)경 합천군 율곡면 영전리(永田里)에서 고령군 개진면 부리(斧里) 가암(加岩)으로 이거(移居)하였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조선시대
    ① 강하수(姜河壽 : 1577년∼1611년)
    유학(幼學) 이삼(履三)과 윤위(允偉)의 따님인 경주최씨(慶州崔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사정(副司正)을 거쳐 이병부사(吏兵部事)와 병조참의(兵曹參議)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 전공으로 선무원종3등공신(宣武原從三等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사후에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증직(贈職)받았다. 시호(諡號)는 충무(忠武)이다. 배위는 군수(郡守)를 지낸 덕문(德文)의 따님 정경부인(貞敬夫人) 성주배씨(星州裵氏)이다. 1968년 후손들이 다산면 장척1길 58-1에 추원재(追遠齋)를 건립하여 공의 유덕(遺德)을 기린다.
    ② 강청대(姜淸大 : ? ∼ 1620년)
    초명(初名)은 봉대(奉大)이며 병조참의(兵曹參議)를 지낸 하수(河壽)와 군수(郡守)를 지낸 덕문(德文)의 따님 정경부인(貞敬夫人) 성주배씨(星州裵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정유재란 때 의병을 일으키고 공을 세웠으며 충의위(忠義衛) 장군에 임명되었다. 배위는 호달(好達)의 따님인 숙인(叔人) 김해김씨(金海金氏)이다 .
    ③ 강석귀(姜碩龜 : ? ∼ ?)
    자는 광일(光一)이며 통정대부(通政大夫) 품계를 받은 홍록(弘錄)과 두정(斗廷)의 따님인 숙부인(淑夫人) 전의이씨(全義李氏)사이에서 태어났다. 영조 4년(1728년) 3월 이인좌(李麟佐)의 난(亂) 즉 무신란(戊申亂)에 전공을 세워 양무원종공신(揚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고 절충장군(折衝將軍) 행(行) 용양위(龍驤衛) 부사직(副司直)을 거쳐 진주병사(晋州兵使)와 동래부사(東萊府使)를 역임하였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⑤ 강상홍(姜相洪 : 1850년∼1901년)
    자는 치옥(致玉)이고 아버지 태우(太祐)와 욱관(旭觀)의 따님인 김해김씨(金海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절충장군(折衝將軍) 용양위(龍驤衛) 부호군(副護軍)과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을 지냈다.
    ⑥ 강병관(姜炳觀 : 1901년∼1965년)
    자는 정견(廷見)이고 통정대부(通政大夫) 행(行) 경릉참봉(敬陵參奉)을 증직(贈職)받은 정환(政桓)과 생원(生員) 근영(根榮)의 따님인 증(贈) 숙인(淑人) 농서이씨(隴西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공이 불행하게도 29세의 젊은 나이에 병이 걸려 죽음에 이르렀을 때 눈물을 흘리며 “부모가 집에 계시니 눈을 감을 수 없다”면서 울부짖었다. 그로부터 9년 뒤인 1937년 5월 아버지가 이질에 걸려 3개월 동안 병상에 누워 있었는데 온갖 약을 썼으나 전혀 차도가 없고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에 이르렀다. 어느 날 아버지가 잠자다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어떤 궁궐로 끌려가 보니 그곳에 아들이 있었다. 아들이 우두머리에게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를 살려 줄 것을 간청하자, 우두머리가 “너의 정성이 갸륵하니 아버지를 놓아 주겠노라!”는 말을 듣고 잠에서 깨어났다. 그 후로 아버지의 병이 점차 차도를 보여 완전히 낫게 되었다. 효행이 세상에 들어나 마을사람들이 개진면 직2리 송천(松泉)에 ‘효자(孝子) 강병관(姜炳觀) 사적비(事蹟碑)’를 세워 효행(孝行)을 기렸다.

    (2) 근∙현대 인물
    ① 강병국(姜炳國 1898년) : 한의사(韓醫師) ② 강채규(姜彩奎 1937년) : 고령군수 ③ 강호경(姜鎬敬 1939년) : 동고령농협조합장,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④ 강인수(姜仁洙 1941년) : 쌍림면장, 고령군 총무과장  ⑤ 강팔권(姜八權 1946년) : 고령군 종친회 회장, 우곡면 유도회 회장  ⑥ 강충규(姜忠奎 1951년) : 월산 농장 대표, 동고령농협 감사 ⑦ 강타점(姜他点 1952년) : 육군 중령, (사) 국민안전협회 연구위원 ⑧ 강종진(姜鍾鎭 1954년) : 한국전력 부장 ⑨ 강신기(姜信琪 1956년) : 경북 교육청 기획담당 서기관, 공보관 ⑩ 강기수(姜基守 1956년) : 성보기계 대표 ⑪ 강종환(姜鍾煥 1960년) : 대가야읍장, 고령군 기획감사실장 ⑫ 강호증(姜鎬增 1965년) : 국방대학교 교수, 육군 중령

    ​자료제공 : 전 고령군 진주강씨
           화수회 회장 강윤득(姜潤得)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최종동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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