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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정자와 재실의 유래를 찾아서

기사입력 2018.12.16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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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산전씨(星山全氏) 어은재(漁隱齋), 용암재(龍巖齋)

     

    정자(亭子)는 풍류를 즐기고 경치를 완상(玩賞)하는 심리적 공간이며 재실(齋室)은 선조의 유덕(遺德)을 추모하고 종사(宗事)를 논의하는 종회(宗會)의 장소이다. 선인(先人)들의 숨결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고령지역의 정자(亭子)와 재실(齋室)의 유래를 격주 간격으로 연재해 소중한 문화유산인 정자(亭子)와 재실(齋室)을 재조명하는 기회를 가지고자 한다.

     

     

    1. 어은재(漁隱齋)

    (1) 유래
     어은재(漁隱齋)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성산인(星山人) 어은(漁隱) 전영세(全永世)의 충절(忠節)과 학행(學行)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이 1979년 건립한 재실이다. 공은 임진왜란 때 형인 죽헌(竹軒) 영기(永期)와 창의(倡義)하여 전공(戰功)을 세우고, 난이 끝난 후 내려진 훈공(勳功)을 사양한 후 옛 마을으로 돌아와 집을 짓고 자신의 호를 따 어은재(漁隱齋)라고 하고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향중(鄕中) 유림(儒林)들의 공의(公議)를 거쳐 신계사(新溪祠)를 세워 제향(祭享)하는 예(禮)를 거행하였으나 고종 8년(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으로 이 집은 없어지고, 재일교포 후손이 1979년 8월에 고령군 쌍림면 신촌리에 새로 건립하였다.

    (2) 전영세(全永世)
    자는 인로(仁老)이고 호는 성재(惺齋) 또는 어은(漁隱)이다. 충순위(忠順衛)를 지내고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를 받은 억령(億齡)과 군수(郡守)를 지낸 사림(士林)의 따님인 숙부인(淑夫人) 밀양박씨(密陽朴氏) 사이에서 중종 32년(1537년) 태어났다. 효도와 우애가 뛰어났으며 부모상을 당해서 3년간 시묘(侍墓)를 하였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진주진(晉州鎭)으로 달려가 주장(主將)되는 장수를 만나니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 조대곤(曺大坤)은 늙고 겁내어 싸우지 아니하거늘 돌아와 합천에서 백형(伯兄) 영기(永期)와 함께 의병(義兵)에 참여하였다. 송암(松菴) 김면(金沔)과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진영에서 모계(茅溪) 문위(文緯), 학암(鶴巖) 박정번(朴廷璠)과 더불어 군대 업무를 나누어 강우지방(江右地方)을 왜적으로부터 온전하게 보전하였다. 난리가 평정된 후에 벽송정(碧松亭) 인근에 정사(精舍)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며 시를 지어 말하기를
    “ 十里龍潭一鑑開(십리용담일감개)
     십리나 되는 용담(龍潭)이 한 거울같이 열렸으니
      碧松亭下早歸來(벽송정하조귀래)
     벽송정(碧松亭) 아래에 일찍 돌아왔도다
      沙鷗翔集銀鱗躍(사구상집은린약)
     모래위 해오라비는 나래하여 모이고 물고기는 뛰어 노는데
      日日觀瀾上釣臺(일일관란상조대)
    날마다 이런 물결보면서 낚시터에 오른다네” 라고 하였다.
    이 글은 읍지(邑誌)에 실려 있다. 광해 11년(1619년) 기미년에 졸(卒)하니 향년 83세이었다. 배위는 숙부인(淑夫人) 청도김씨(淸道金氏)로 아버지는 색(穡)이다. 임란호국영남충의단(壬亂護國嶺南忠義壇)에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3) 건축형태
    어은재(漁隱齋) 건물은 입구에는 3칸의 삼문(三門)을 두었고 둘레에는 담장을 둘렀다. 정면 5칸, 측면 1칸 반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좌우측에 각 2칸의 온돌방을 두었고, 가운데 1칸은 대청을 깔았다. 전면에 길이 방향으로 반 칸의 마루를 내었다. 어은재(漁隱齋) 입구에 2010년 5월 후손들이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성재(惺齋) 전공(全公) 휘(諱) 영세(永世) 사적비(事蹟碑)’를 세웠다.

    (4) 어은재(漁隱齋) 상량문(上樑文)
    무릇 어진사람이 지나간 땅에 빛나는 정자(亭子)가 있거늘 하물며 선조가 은택(恩澤 : 은혜와 덕택)을 남긴 자리에 몇 칸의 궁장(宮墻 : 집과 담장)이 없으랴. 공손히 생각건대 나의 선조 중추부사(中樞府事) 성재(惺齋) 선생은 병든 어버이를 봉양(奉養)함에 씻고 깨끗이 함을 다하고 여묘(廬墓)를 모심에 피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였다. 문행(文行)은 소가(蘇家)의 형제와 같고 우애(友愛)는 속수(涑水) 선생의 형제에 부끄러움이 없도다. 임금의 수레가 북쪽으로 피난함에 의병(義兵)을 일으켜 분노하여 대적(對敵)한 공이 있으니 오직 옛사람에 상고(詳考)하겠으며 악한 오랑캐가 동쪽으로 달아남에 고향에 돌아와 곧고 길(吉)하게 지내니 향사(享祀)를 받음이 마땅하도다. 세대(世代)가 멀고 오래됨에 어은재(漁隱齋) 재실(齋室)이 이미 헐어져 없어 지고 나라의 금(禁)함이 더욱 엄(嚴)함에 신계사(新溪祠)가 또 폐철(廢徹)되었도다. 오직 사람들이 탄식해 마지  아니하니 하물며 후손들의 한(恨)이야 끝없지 않을까? 사당(祠堂)도 대대로 지키지 못하였거늘 재실(齋室)을 어찌 지키겠는가? 이 집을 경영함이 이미 오래되었으나 재력(財力)이 없었고 또 재목을 거두기를 올해 내년으로 미루어 지연되었으니 성심(誠心)을 정하기 어려웠다. 다행히 당숙부(堂叔父)님의 거대한 힘으로 종족(宗族)들이 이루지 못한 수치(羞恥)을 씻었도다. 기울어진 옛터를 생각하니 하루도 세울 곳이 못되어 새터에 집을 세우니 백년 근심이 없드라. 청조(靑鳥 : 고지새, 파랑새)에 물으니 길(吉)함을 고(告)하고 영귀(靈龜 : 신령스러운 거북)에 점치니 협조하드라. 산을 등지고 물을 바라보니 다 나에게 응하고 좋은 날 좋은 때에 다시 재실을 이루었드라. 만대산(萬岱山) 나무를 운반하여 기둥과 대들보를 만드니 만대(萬代)나 견고(堅固)함을 기약할 것이요 용담들의 흙과 돌을 운반하여 기초와 기와를 만드니 용담(龍潭) 연월(烟月 : 연기같은 안개 속에 보이는 은은한 달)이 오랜 세월 동안 옛 모습 그대로 이더라. 이에 사모하고 이에 집을 지음에 진씨(甄氏)가 정자를 지음을 생각한 일을 느끼고 여기에 살고 여기에 처(處)함에 위가(葦家)의 잔치자리가 합당하도다. 아손(兒孫)들을 가르치되 선조의 충성하고 효도한 아름다운 행실(行實)을 가르쳐 밝히고 술두루미의 술을 제공하여 손님과 벗들의 시(詩)와 예(禮)의 의식을 치루는데 필요한 예절로 편안하게 즐겼다. 감히 가벼운 말로써 상량(上樑)속에 넣노라. 잠깐 삼사(三斯)의 칭송을 멈추고 대신하여 육위(六偉)의 노래를 쓰노라. 아랑위(兒郞偉) 들보를 동쪽으로 드니 벽송정(碧松亭)의 연기와 달이 푸른 하늘에 가득하도다. 지금 오봉년(五鳳年)이 얼마나 되었는고. 하늘에 있는 조물주의 솜씨를 얻었도다. 아랑위(兒郞偉) 들보를 서쪽으로 드니 노태산(魯泰山)의 바위가 하늘 가운데서 가지런하도다. 길이 봄빛을 띠어서 푸름을 다하지 아니하니 노력하여 함께 올라 다다를 것을 원하노라. 아랑위(兒郞偉) 들보를 남쪽으로 드니 낚시터의 이끼와 전자(篆字)의 푸른빛이 쪽빛 같구나. 올해의 기상(氣象)을 누구에게 물어 볼까? 구름 그림자 하늘빛이 함께 못에 비치네. 아랑위(兒郞偉) 들보를 북쪽으로 드니 가야산 빼어난 빛이 구름 끝에 곧도다. 문창후(文昌侯) 영각(影閣)이 여기에 있으니 제사를 드리는 후손들의 사모하는 마음이 정성스럽도다. 아랑위(兒郞偉) 들보를 위쪽으로 드니 은하(銀河水)는 푸르고 푸른데 하늘이 밝도다. 자리를 지키는 북두칠성은 항상 옮기지 아니하니 여러 별들이 총총하게 벌려있어 다투어 서로 받들도다. 아랑위(兒郞偉) 들보를 아래로 드니 차가운 샘물은 밤낮으로 흐르도다. 이 가운데 이 이치(理致)를 누가 먼저 깨달을고? 바다에 도달하려는 기약은 쉼이 없도다. 원컨대 상량(上樑)한 후에 귀신이 보호하고 보호하여 풍우(風雨)의 두려움이 없게 해달라는 생각이 항상 마음속에 있고 자손들이 삼가고 조심하여 선조(先祖)의 아름다운 명예가 더럽힘이 없이 영원토록 끊어짐이 없게 하소서. 

    (註釋1) 소가(蘇家)의 형제
    송(宋) 나라 때 문장이 뛰어나 당송 팔대가(唐宋八大家)에 들었던 소순(蘇洵)의 아들 동파(東坡) 소식(蘇軾)ㆍ소철(蘇轍)을 가리킨다.
    (註釋2) 속수(涑水) 선생의 형제
    사마광의 자(字)는 군실(君實)이라고 하고 속수(涑水) 선생으로 불리었으며 형제간의 우애가 각별하였다고 한다.
    (註釋3) 진씨(甄氏)가 정자를 지음을 생각한 일
    송(宋)나라 때 서주(徐州)의 부호였던 진씨(甄氏) 집안이 진군(甄君)의 대(代)에 이르러 빈한(貧寒)해졌다. 그래서 부모 형제가 죽어도 장례를 치르지 못하다가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여러 영구(靈柩)를 함께 장사지내고 무덤 가에 조상을 추모한다는 뜻을 담은 사정(思亭)을 지었다. 사정(思亭)은 조상을 추모하는 뜻에서 지은 정자나 재각(齋閣)을 뜻한다.
    (註釋4) 위가(葦家)의 잔치자리
    당나라 위장(韋莊)이 화수(花樹 : 꽃나무) 아래에 위씨(韋氏) 친족을 모아 놓고 술을 마신 고사(故事)를 가리킨다.
    (註釋5) 삼사(三斯)
    몸을 움직이는것(動容貌), 말을 하는 것(出辭氣), 얼굴빛을 바르게 하는 것(正顔色)을 말한다. 
    (註釋6) 육위(六偉)
    육위(六偉)는 상량문(上樑文)을 이른다. 상량문에 ‘아랑위(兒郞偉)’라는 상투어가 여섯 번 들어가기 때문에 흔히 ‘육위송(六偉頌)’이라고 부른다.
    (註釋7) 아랑위(兒郞偉)
    아랑위는 대들보를 여러 사람들이 ‘어영차’하고 힘을 모아 들 때 나는 의성어(擬聲語)이다. 상하(上下) 사방(四方)의 여섯 방향으로 들보를 들기 때문에 육위(六偉)라 하기도 한다.
    (註釋8) 오봉년(五鳳年)
    오봉(五鳳)은 한(漢)나라 선제(宣帝)의 연호(年號)로서 기원전 57년 박혁거세가 신라를 건국한 때를 말한다.

    2. 용암재(龍巖齋)
    (1) 유래
     용암재(龍巖齋)는 처사(處士) 용암(龍巖) 전홍립(全弘立)의 학행(學行)과 충절(忠節)을 추모(追慕)하기 위하여 숭정(崇禎) 기원후(紀元後) 5년 신유(辛酉) 1861년 12월 28일 건립한 재실(齋室)이다.

    (2) 전홍립(全弘立)
     자는 여신(汝信)이요 호는 용암(龍巖)이다.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어은(漁隱) 전영세(全永世)와 김색(金穡)의 따님인 청도김씨(淸道金氏) 사이에서 선조 7년(1574년)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천품(天稟)이 영민(穎敏)하여 경서(經書)에 통달하고 15세에 선고(先考) 성재공(惺齋公) 영세(永世)를 수행(隨行)하여 학암(鶴巖) 박정번(朴廷璠), 탁계(濯溪) 전치원(全致遠) 등 제공(諸公)과 함께 의병도대장(義兵都大將) 송암(松菴) 김면(金沔) 진중(陣中)에 참여하여 전황(戰況)의 기록에 관한 사무를 맡아 보는 ‘기실(記室)’ 업무를 맡아 임진왜란에 공(功)이 있었다. 문장이 뛰어나 문집(文集) 수권(數卷)이 책 상자(箱子)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계미년(癸未年 : 1643년) 화재로 흔적(痕跡)없이 아주 타 없어졌다.

    (3) 건축형태
     용암재(龍巖齋) 건물은 입구에 3칸의 삼문(三門)을 두었고 둘레에는 담장을 둘렀다.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좌측에 2칸의 온돌방을 두었고, 우측 2칸은 대청을 깔았다.

    (4) 용암재(龍巖齋) 상량문(上樑文)
     다음과 같이 서술하노니 마을에 학교를 두고 가문에 글방이 있음은 선생이 서있는 방위(方位)를 소중히 함이오. 겨울에 예악(禮樂)을 읽고 봄에 시서(詩書)를 읽음은 후대(後代)의 사람들이 학문을 닦고 심신수양(心身修養)할 곳을 얻음이라. 제군(諸君)들은 어찌 독실하지 않겠는가? 사문(斯文)은 이 빛나는 글을 좇는도다! 삼가 생각컨대 봉진문중(鳳津門中)의 터전은 용암(龍巖) 선생으로부터 모여 살게 되었다. 생각컨대 인후(仁厚)한 풍속이 있고 아름답고 깊어 살 곳을 고르는 방우(方隅)가 분명하고 농촌에서 늙을 것을 생각하니 이에 은거(隱居)하는 길을 얻었네. 평천장(平泉庄)의 만 가지 화초(花草)는 오래토록 전해왔고 녹문산(鹿門山)의 한 조각 구름은 남김이 없지 않도다. 무성한 뿌리를 깊이 북돋우니 더욱 줄기와 가지의 번창(繁昌)함을 보겠고 덕(德)을 쌓고 인(仁)을 쌓음에 남긴 덕의 보답을 증험(證驗)하도다. 비록 벼슬길 영광은 없으나 여기 농사짓는 순박(淳朴)함이 있도다. 지혜는 둥글고 행실(行實)은 정직(正直)하니 세가(世家)의 아름다운 법도(法度)라. 지킴은 견고(堅固)하고 지조(志操)가 맑으니 유림(儒林)의 어진 재목이 되었네. 배우는 곳이 온전하지 못하므로 독서하는 자의 불편함을 없애었네. 각자 문호(門戶)를 수호하여 독서는 봉마(蓬麻 : 쑥과 삼)의 헝크러짐이 없고 매양 춘추(春秋)를 당함에 종족(宗族)은 화수(花樹)의 감탄을 일으키네. 조심하여 타락(墮落)없이 우리 후손에게 훈계(訓戒)하고 근면하게 법도가 있어서 선대 조상을 따르네. 이에 점쾌를 물으니 세 사람 세 점쾌가 흡족하게 다같고 이에 재정(財政) 모으기를 의논하니 일 문중이 한 입같이 찬성하도다. 원래부터 축적한 바 있어 그러함이요. 진실로 백지(白地)에 갑자기 밝히는 것이 아니로다. 손방(巽方)을 택하고 진방(震方)을 닫으니 문호(門戶)는 음양(陰陽)의 조화(造化)로 열렸도다. 새가 나르듯이 꿩이 빛나듯 완전하며 아름답고 위 처마 아래 거실은 풍우(風雨)의 침노(侵擄)함을 대비하였네. 한낱 교화(敎化)를 일으키고 글읽는 곳일 뿐이리오. 노래와 곡(哭)을 지어서 종족을 모우는 집이라네. 넉넉히 배워 벼슬함에 큰선비 배출함이 많고 집이름을 돌아보고 생각함에 자손이 누가 현판(懸板)의 뜻을 공경하지 않으리오. 비가 젖고 서리가 내림에 근본을 깨닫고 보답하는 정성이 간절하고 날이 가고 달이 감에 나날이 고충은 조상의 욕됨이 없는 소원을 축원하네. 제사드리는 집이 되어 이미 만족하니 어찌 크고 화려하게 보는 데만 빛나게 하리오. 저 상자에 가득한 황금도 역시 이같지 못하니 덕업문장(德業文章)이 입신양명(立身揚名)함을 보리로다. 이에 상량(上樑) 올림을 당하여 연하(燕賀)의 정성을 대신하노라. 아랑위(兒郞偉) 들보를 동쪽으로 드니 오봉(五鳳) 옛일은 증거가 없고 옛집만 네 산창(山窓)에 다리를 펴고 봄꿈을 깨니 숲사이 꽃나무는 가지마다 붉도다. 아랑위(兒郞偉) 들보를 남쪽으로 드니 야천(倻川) 물이 깊이 쌓여 남빛(藍 : 진한 푸른빛)보다 프르네. 깊은 곳 채우며 바다에 도달하니 제군(諸君)과 함께 궁구(窮究)하기를 원하노라. 아랑위(兒郞偉) 들보를 서쪽으로 드니 오도산(吾道山)의 돌은 크고 단단한데 석양이 비치네. 만길 붉은 불꽃이 촛불같이 빛나니 문명(文明)있는 곳에 별도 잠자는도다. 아랑위(兒郞偉) 들보를 북쪽으로 드니 가야산 봉우리의 산색(山色)이 만고(萬古)에 푸르디 푸르도다. 등반(登攀)하는 노력은 자신에게 있으니 금패(衿佩)가 동국(東國)에 울림을 머물러 서서 돌아보리라. 아랑위(兒郞偉) 들보를 위쪽으로 드니 봄이 오고 붉고 푸름이 산같이 불어나네. 관동(冠童 : 남자 어른과 아이) 육, 칠명이 읊조리고 돌아와 도를 닦는 기상이 평안하고 한가(閑暇)로움에 화류(花柳)를 찾으리라. 아랑위(兒郞偉) 들보를 아래로 드니 한가한 날에 술마시고 노래하며 거동하네. 꽃나무에 봄이 깊어 부질없이 노곤하니 변변찮은 술과 안주로 마을사람과 결합하리라. 원하노니 상량(上樑)한 후에 족의(族誼)를 더욱 돈독히 하고 글을 숭상하는 풍습이 크게 떨쳐져 가가호호(家家戶戶) 글읽는 소리가 들리고 자자손손(子子孫孫) 각궁부(角弓賦)를 잊음이 없으라. 높은 산에서 봉황새가 홰홰(噦噦)히 우니 곧 마음이 어진 선비의 봉황새 울음을 들을 것이요. 큰 들이 아득하고 아득하니 어찌 좋은 때 용(龍)을 만남이 없으리요. 거룩하고 위대하며 아름답고 성대하도다.

    (註釋1) 사문(斯文)
    유교(儒敎)의 도의(道義)나 또는 문화(文化)를 일컫거나 학자(儒學者)를 달리 일컫는 말이다.
    (註釋2) 평천장(平泉庄)
    당 나라 때 정승 이덕유(李德裕)가 낙양(洛陽) 근처에 세운 별장인 평천장(平泉莊)는 특히 기이한 화초(花草)와 진귀한 소나무와 괴석(怪石) 등 기관(奇觀)이 천하에 뛰어났다고 한다.
    (註釋3) 녹문산(鹿門山)
    후한(後漢) 말엽 양양(襄陽)의 고사(高士)인 방덕공(龐德公)은 벼슬길에 나오라는 형주 자사(荊州刺史) 유표(劉表)의 청을 거절하고 훗날 처자식을 거느리고 녹문산(鹿門山)에 들어가 약초를 캐며 세상에 나오지 않고 일생을 마쳤다.
    (註釋4) 손방(巽方)
    정동(正東)과 정남(正南) 사이 한가운데를 중심으로 45도 각도 안의 방향이다.
    (註釋5) 진방(震方)
    정동(正東)쪽을 중심으로 한 45도 각도 안의 방위인 동쪽을 말한다.
    (註釋6) 연하(燕賀)
    제비가 사람이 집을 지으면 제 집도 생겼다 하여 서로 기뻐한다는 뜻으로 타인(他人)이 집을 지었을 때에 마음으로 기뻐하며 축하(祝賀)함을 이르는 말이다.
    (註釋7) 금패(衿佩)
    옷깃에 방울을 달아 소리를 내며 다니는 선비를 말한다.
    (註釋8) 각궁부(角弓賦)
    《시경(詩經)》 소아(小雅) 각궁(角弓)의 시를 말한다. 그 내용은 주 유왕(周 幽王)이 친척을 멀리하고 아첨하는 신하를 가까이함을 나무란 것이다.

     

     

    자료제공 : 성산전씨 회장 전병열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최종동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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