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상세페이지

기획연재-고령지역 세거성씨(世居姓氏) 연원(淵源)을 찾아서

기사입력 2018.12.16 21:24

SNS 공유하기

fa tw gp
  • ba
  • ka ks url

    일선김씨(一善金氏) 문충공파(文忠公派)

     

    본지는 ‘고령지역 세거성씨(世居姓氏) 연원(淵源)을 찾아서’를 격주로 기획 연재한다. 씨족연원(氏族淵源), 현조(顯祖), 고령입향(高靈入鄕) 내력 및 시기, 입향조(入鄕祖) 이 후 역대 인물 등을 문헌적 고증(考證)을 근거로 밝힘으로써 각 문중 고유의 씨족연원(氏族淵源), 열조(烈祖)들의 위업(偉業), 올곧은 정신 및 문화유산(文化遺産)을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코자 하오니 관심 있는 문중들의 많은 참여를 바라며, 이번호에는 일선김씨(一善金氏) 문충공파(文忠公派)를 소개한다.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일선김씨(一善金氏) 시조(始祖)
    신라김씨 선원계통보(璿源系統譜)에 의하면 일선김씨(一善金氏) 시조(始祖)는 순충공(順忠公) 선궁(宣弓)이고 초휘는 선(宣)이다. 신라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 계통으로 신라 46대 문성왕(文聖王)의 7대손이며 일선군사(一善郡事) 체의(體誼)의 아들로 구미시 해평면 낙산동(洛山洞) 부근에서 태어났다.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후백제(後百濟) 정벌차(征伐次) 일선군(善山)에 머물 때 공은 일선리(一善吏)이었으며 15세의 나이로 자원(自願) 종군(從軍)하여 큰 공을 세우니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기뻐하여 어궁(御弓)을 하사하고 이름을 선궁(宣弓)이라 사명(賜名)하였다. 삼한통합(三韓統合)에 큰 공을 세우고 고려 개국을 익찬(翊贊 : 도움)한 공으로 태조 원년(918년) 통합공신(統合功臣)에 책봉(冊封)되고 선주백(善州伯)으로 피봉(被封)되었으며 후삼국 통합 후 태조 19년(936년) 삼한통합 익찬공신(三韓統合 翊贊功臣)에 책봉(冊封)되었다. 946년 공이 별세함에 정종(定宗)이 대승(大丞)을 증직(贈職)하고 순충(順忠)이라 시호(諡號)하였다.
    (2) 부자(父子)간 성리학(性理學) 도통(道統)을 계승(繼承)
    한국의 성리학(性理學)은 고려 말기 충렬왕을 호종(扈從)하여 원(元)나라에 갔던 회헌(晦軒) 안향(安珦)에서 비롯되었으며 그후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조(祖)인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학풍을 이은 야은(冶隱) 길재(吉再)는 의리학(義理學)의 학통을 세웠고 그 학통은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를 거쳐 사림파(士林派)의 조종(祖宗)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에 이어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그리고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로 이어졌다.
    (3) 문무과(文武科) 급제자 16명을 배출한 명문가(名門家)
    고령 입향 후 문과(文科) 중 대과(大科) 5명, 소과(小科) 즉 사마시(司馬試) 9명, 무과(武科) 2명 등 16명의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4) 분파(分派) 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 시조 김선궁(金宣弓)의 장남 김봉술(金奉術)의 후손들은 13개 파를 이루고 관내에는 김달상(金達祥)의 후손인 화의군파(和義君派)가 개진면 구곡리, 인안1리 등에 세거하고 있다.
    ② 차남 김봉문(金奉文)의 후손들은 5개 파를 이루고 김숙자(金叔滋)의 4남 김종유(金宗裕)의 후손인 과당공파(苽堂公派)가 쌍림면 매촌리에, 5남 김종직(金宗直)의 후손인 문충공파(文忠公派)가 쌍림면 합가1리에 세거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① 김광위(金光偉) 정조공(正朝公) 김연(金延)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 말기에 처음으로 명법과(明法科)를 닦아 향적(鄕籍)을 벗어나서 조정(朝廷)에 등용되어 후손들의 길을 열어주었고, 벼슬은 선덕랑(宣德郞) 양온령(良醞令)에 이르렀다.
    ② 김은유(金恩宥) 양온공(良醞公) 김광위(金光偉)와 영산신씨(靈山辛氏)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 말기에 벼슬하여 동면도감 판관(東面都監判官)이 되었고, 뒤에 중정대부(中正大夫) 사재령(司宰令)이 되었다. 치사(致仕)하여 향중(鄕中)에 있을 때 그의 기덕(耆德 : 나이가 많고 덕이 높은 사람)을 추앙(推仰)하였다.
    (2) 조선시대
    ① 김숙자(金淑滋 : 1389년 ∼ 1456년) 자는 자배(子培)이고 호는 강호(江湖)·강호산인(江湖散人)이다. 진사공(進士公) 김관(金琯)과 봉선대부(奉善大夫) 소부(少府) 소윤(少尹)을 지낸 유인귀(兪仁貴)의 따님인 증(贈) 정부인(貞夫人) 인동유씨(仁洞兪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선산(善山) 영봉리(迎鳳里) 집에서 태어났다. 12세 때부터 길재(吉再)로부터 소학(小學)과 경서(經書)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황간현감(黃澗縣監) 윤상(尹祥)으로부터 주역(周易)을 힘써 배웠다. 태종 14년(1414년) 갑오(甲午) 식년시(式年試)에 입격(入格)한 후 세종 1년(1419년) 기해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급제하였다. 세종 1년(1419년) 권지성균학유(權知成均學諭)로 벼슬길에 나아가 선공주부(繕工注簿)·성균주부겸세자우정자(成均注簿兼世子右正字) 등을 거쳤다. 성리학에 대한 집념으로 세종 23년(1431년) 불교를 배척하는 상소인 ‘척불소(斥佛疏)’를, 세종 29년(1437년) ‘척불재소(斥佛再疏)’를 올렸다. 세종 24년(1442년) 11월 고령현감(高靈縣監)으로 부임했을 적에 군수(軍須 : 군대의 경비에 쓰기위한 재원)를 검열해 본 결과 3천여 곡(斛)이 모자랐다. 전관(前官)이 장죄(贓罪)에 걸릴 것을 염려하여 재임 5년동안 애써 그 숫자를 다 채워 놓아 전관(前官)을 위태롭게 하지 않았다. 성주 사람들이 진상(進上)한다고 칭탁하고 공공연하게 고령(高靈)의 경계에 와서 은어를 잡고 횡포(橫暴)를 부리는 것을 바로 잡았다. 해마다 백사기(白沙器)를 진공(進供)할 때 흠집 난 그릇이 많았기 때문에 관(官)에서 힐책(詰責)을 받았으나 공이 아홉 번 체로 가루를 치는 법을 가르쳐 그릇을 진헌(進獻)할 적마다 고령현의 장인(匠人)들은 상을 받고 도순찰사(都巡察使) 김종서(金宗瑞)가 격찬하였다. 세종 31년(1449년) 개령현감(開寧縣監)을 거쳐 단종 24년(1454년) 성균관(成均館) 사예(司藝)에 제수(除授)되었다가 성주 교수관(敎授官)이 되었다. 세조 1년(1455년) 중훈대부(中訓大夫)로 승진하고 3등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으나 12월 사직하고 처가가 있는 밀양으로 내려와 이듬해 졸(卒)했다. 성종 20년(1489년) 자헌대부(資憲大夫) 호조판서(戶曹判書), 헌종 11년(1845년)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등으로 추증(追贈)되었다. 선산의 낙봉서원(洛峯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諡號)는 문강(文康)이다.
    ② 김종직(金宗直 : 1431년 ∼1492년)
    자는 효관(孝盥) 또는 계온(季昷)이며 호는 점필재(畢齋)이다. 성균관(成均館) 사예(司藝) 김숙자(金叔滋)와 사재감정(司宰監正) 박홍신(朴弘信)의 따님인 증(贈) 정부인(貞夫人) 밀양박씨(密陽朴氏) 사이에서 밀양시 부북면 제대리에서 3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단종(端宗) 1년(1453년) 계유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가 되고 세조 5년(1459년) 기묘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급제한 후 이듬해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로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으며 세조 8년(1462년) 승문원박사(承文院博士) 겸(兼) 예문봉교(藝文奉敎)에 승진되었다. 이듬해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경상도병마평사(慶尙道兵馬評事)·이조좌랑(吏曹佐郞)·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 등을 거쳤다. 성종 2년(1471년) 함양군수(咸陽郡守) 재임 중 유자광(柳子光)이 지은 시가 학사루(學士樓)에 걸려 있자 떼어 불질러 버려 훗날 무오사화(戊午士禍)의 원인이 되었다. 성종 3년(1472년)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등이 공의 문하에서 배웠다. 성종 7년(1476년) 선산부사(善山府使)가 되었다. 그후 부승지(副承旨)·이조참판(吏曹參判)·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병조참판(兵曹參判)·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공조참판(工曹參判) 등을 역임하였다. 성종 20년(1489년) 2월 자헌대부(資憲大夫)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제수된 후 8월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옮겼다. 성종 23년(1492년) 8월 19일 밀양의 거처인 명발와(明發窩)에서 별세했다. 조의제문(弔義帝文)은 세조 3년(1457년)에 공이 항우(項羽)에게 죽은 조카 초(楚)나라 회왕(懷王) 의제(義帝)를 조상(弔喪)하는 글을 지어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단종(端宗)에 비유하여 세조의 왕위찬탈(王位簒奪)을 비난한 글인데 제자인 춘추관(春秋館) 사관(史官) 김일손(金馹孫)이 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시 사초(史草)에 실어 연산군 4년(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의 발단(發端)이 됨으로써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다. 세조·성종 대에 걸쳐 벼슬을 하면서 항상 절의(節義)와 의리(義理)를 숭상하고 실천하여 사림파(士林派)의 영수(領袖)가 되었다. 중종 2년(1507년) 적몰가산(籍沒家産)을 돌려받는 등 신원(伸寃)되었고 중종 9년(1514년) 청백리(淸白吏)로 천거(薦擧)되었으며 숙종 15년(1689년)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追贈)되었다. 저서로는 『점필재집(畢齋集)』·『유두류록(遊頭流錄)』·『청구풍아(靑丘風雅)』·『당후일기(堂後日記)』 등이 있으며, 편저로는 『일선지(一善誌)』·『이준록(彝尊錄)』·『동국여지승람』 등이 전해지고 있다. 밀양의 예림서원(藝林書院),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柏淵書院), 김천의 경렴서원(景濂書院), 개령의 덕림서원(德林書院) 등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1) 점필재(畢齋) 둘째손자 김유(金維)가 양천최씨(陽川崔氏) 참봉(參奉) 최필손(崔弼孫)의 따님과 혼인하여 합천 야로 행정리(行亭里)에서 고령 용담(龍潭 : 쌍림면 하거리 학골)으로 전거(轉居)하여 고령 입향조가 되었다.
    (2) 입향시기는 김유(金維)의 출생년도(1527년)와 조선시대 혼인 적령기(20세 안밖)를 감안하면 고령 입향시기는 명종 5년(1550년)경으로 추정된다.
    (3) 효종 2년(1651년) 점필재(畢齋) 5대손이며 김성율(金聲律)의 아들인 남계(南溪) 김수휘(金受徽)가 송림(松林) 지동(池洞)을 떠나 가곡(佳谷) 즉 지금의 합가리(合伽里)에 입향(入鄕)하였다.
    (4) 과당공파(苽堂公派)는 상호(相瑚), 상후(相垕) 형제가 합천군 가회면 목곡리(木谷里)에서 1820년경 고령군 쌍림면 지릿재 아래 합가2리로 입향하였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조선시대
    ① 김성율(金聲律 : 1566년∼ ?) 자는 이해(而諧)이고 승사랑(承仕郞) 호조정랑(戶曹正郞)을 지낸 아버지 몽령(夢齡)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점필재(畢齋)의 현손(玄孫)이다. 선조(宣祖) 36년(1603년) 계묘(癸卯) 정시(庭試)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어모장군(禦侮將軍)의 품계를 받았으며 임치도진관(臨淄島鎭管), 금모포(黔毛浦) 만호(萬戶)와 훈련원(訓練院) 판사(判事)를 지냈다.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 때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창녕(昌寧) 화왕산입성(火旺山入城)을 방어했던 경상도 열읍의사(列邑義士)들의 명단인 화왕산성동고록(火旺山城同苦錄)에 기록되어 있다. 대구광역시 망우당공원내 임란호국영남충의단(壬亂嶺南護國忠義壇)에 위패가 봉안(奉安)되어 있다.
    ② 김수휘(金受徽 : 1599년∼1662년) 자는 미중(美仲)이고 호는 남계(南溪)이다. 훈련원(訓練院) 판사(判事) 성률(聲律)의 아들로 태어났다. 역학(易學)과 풍수지리에 밝았다. 전력부위(展力副尉) 용양위(龍驤衛) 부사용(副司勇)을 지냈다.
    ③ 김시락(金是洛 : 1658년∼1710년) 자는 희철(希哲)이고 호는 졸와(拙窩)이다. 유학(幼學) 이(彛)의 아들로 태어났다. 숙종 17년(1691년) 증광(增廣)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한 후 효릉참봉(孝陵參奉) 등을 지내고 헌릉봉사(獻陵奉事)로 승서(陞敍)되었다.
    ④ 김상직(金相稷 : 1779년∼1851년) 자는 주로(周老)이고 호는 가정(佳亭)이다. 삼외헌(三畏軒) 경철(敬喆)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순조 19년(1819년) 식년(式年) 문과에 급제한 후 벼슬이 통정대부(通政大夫) 행(行) 병조참의(兵曹參議) 겸(兼) 지제교(知製敎)에 이르렀다. 향림정(香林亭)의 중건기문(重建記文)을 지었으며 유고(遺稿)가 있다.
    ⑤ 김호진(金虎振 : 1769년∼1814년) 자는 문위(文威)이며 호는 진모재(進慕齋)이다. 세심재(洗心齋) 양정(瀁精)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순조 1년(1801년) 신유(辛酉) 식년(式年) 문과에 급제한 후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을 지냈다.
    ⑥ 김상락(金相洛 : 1791년∼1845년) 자는 택중(宅中) 호는 탄옹(灘翁)이다. 삼외헌(三畏軒) 경철(敬喆)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문과에 급제한 상직(相稷)의 동생이다. 순조 13년(1813년) 증광(增廣)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한 후 승사랑(承仕郞) 행(行) 정릉참봉(貞陵參奉)을 지냈다.
    ⑦ 김사묵(金思默 : 1806년 ∼1872년) 자는 성언(聲彦)이고 호는 묵암(默庵)이다. 유학(幼學) 상택(相宅)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헌종 12년(1846년) 식년(式年)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한 후 후릉참봉(孝陵參奉)·제용감(濟用監) 봉사(奉事)·상서원(尙瑞院) 직장(直長)·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 등을 거쳐 통훈대부(通訓大夫) 행(行) 연풍현감(延豊縣監) 겸 충주진관병마절제도위(忠州鎭管兵馬節制都尉)를 지냈다.
    ⑧ 김계묵(金啓默 : 1819년 ∼1884년) 자는 국명(國鳴)이고 호는 용암(慵菴)이다. 유학(幼學) 상택(相宅)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연풍현감(延豊縣監) 겸 충주진관병마절제도위(忠州鎭管兵馬節制都尉)를 지낸 사묵(思默)의 동생이다. 고종 13년(1876년) 식년(式年)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하였다.
    ⑨ 김양묵(金養默 : 1824년∼1878년) 자는 선오(善五)이며 초자(初字)는 의열(義悅)이고 호는 적우당(赤憂堂)이다. 유학(幼學) 상엄(相儼)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고종 2년(1865년) 식년(式年) 문과에 급제한 후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예조좌랑(禮曹佐郞)을 거쳐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을 지냈다.
    ⑩ 김준(金 : 1825년∼1853년) 자는 치준(致準)이고 호는 묵와(默窩)이다. 유생(幼生) 두진(斗振)의 장남으로 태어나 재종숙(再從叔)인 용진(鏞振)에게 출계(出系)하였다. 철종 3년(1852년) 정시(庭試) 문과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한 후 전적(典籍)·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을 거쳐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에 제수(除授)되었다.
    ⑪ 김발(金 : 1826년∼1877년) 자는 치발(致發)이며 통덕랑(通德郞) 기진(驥振)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철종 6년(1855년) 식년(式年)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한 후 영릉참봉(英陵參奉)·선략장군용양위부사과(宣略將軍龍驤衛副司果)에 제수되었으며 통훈대부행감조관(通訓大夫行監造官)에 승서(陞敍)되었다.
    ⑫ 김증(金增 : 1840년∼1900년)  자는 천익(天益)이고 호는 창애(蒼厓)이다. 진사(進士)를 지낸 계묵(啓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문인(門人)이다. 고종 1년(1864년) 증광(增廣)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하였다.
    ⑬ 김기현(金冀鉉 : 1850년 ∼1897년) 자는 도약(道若)이고 호는 석난(石蘭)이다. 정와(靜窩) 훈(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종 31년(1894년)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장사랑(將仕郞) 행(行) 권지(權知)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를 지냈다.
    ⑭ 김창현(金昌鉉 : 1847년 ∼ 1921년) 초휘(初諱)는 선상(善詳)이고 자는 문약(文若)이며 호는 선은(鮮隱)이다.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을 지낸 준(準)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종 25년(1888년) 식년(式年)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한 후 음직(蔭職)으로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을 제수(除授)받았다.
    ⑮ 김구현(金龜鉉 : 1867년∼1925년) 자는 낙서(洛瑞)이고 감조관(監造官)을 지낸 발()의 차남(次男)으로 태어났다. 고종 22년(1885년)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웅천현감(熊川縣監)을 제수받았다. 예천(醴泉), 성주(星州), 하양(河陽), 고령(高靈) 등지에서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⑯ 김영국(金永國 : 1876년∼1898년) 자는 형직(亨稷)이다. 유학(幼學) 기현(冀鉉)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종 31년(1894년) 식년(式年)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하였다.
    (2) 근∙현대 인물
    ① 김병식(金炳埴 1933년) : 성균관(成均館) 전학(典學), 전의(典儀) 경북도 민선 1대, 2대 교육위원(敎育委員) ② 김태순(金泰順 1920년) : 의령(宜寧), 창녕(昌寧), 동래(東萊) 군수(郡守) ③ 김태우(金泰宇 1914년) : 고령향교 전교(典校), 쌍림단위농협조합장 ④ 김태두(金泰斗 1931년) : 조흥은행(朝興銀行) 전무이사(專務理事) ⑤ 김기수(金騏秀 1931년) : 고령향교 전교(典校) ⑥ 김형규(金亨圭 1937년) : 경북대 사범대 교수 ⑦ 김병직(金炳直 1941년) : 의학박사, 인제대학교 백병원 교수, 원장 ⑧ 김병홍(金炳弘 1945년) : 이학박사, 한국과학기술원(KIST) 주임 연구관 ⑨ 김병윤(金炳潤 1949년) : 삼보건설 사장, 강남순환도로㈜(대표이사), 서울 정진플래너 회장 ⑩ 김태조(金泰晁 1951년) : 삼성전기 공장장, ㈜이엠에스 대표이사 ⑪ 김병원(金炳元 1954년) : 한국후지쯔 대표이사 사장 ⑫ 김  기(金  己 1962년) : 성균관대학교 초빙교수, 충남대 유학연구소 연구원, 중화서당 원장, 철학박사 ⑬ 김병철(金炳喆 1962년) : 신한금융지주회사 부사장(투자운용사업부문장) 신한은행 부행장, 신한생명보험 부사장 ⑭ 김병조(金炳助 1963년) : 동의대 물리치료학과 교수 ⑮ 김민수(金敏秀 1964년) : 한화케미칼 전무 ⑯ 김병진(金炳振 1965년) : 제38회 사법시험 합격, 법무법인 법여울 변호사 ⑰ 김만득(金萬得 1967년) : 연세대 신촌 세브란스병원 영상의학과 교수

     

     

    자료 제공  : 문충공파 전 사무국장 김년수(金年秀)
    집      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      리  : 최종동 편집국장 

    backward top 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