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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정자와 재실의 유래를 찾아서

기사입력 2018.12.16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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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와재(謝臥齋)

     

    정자(亭子)는 풍류를 즐기고 경치를 완상(玩賞)하는 심리적 공간이며 재실(齋室)은 선조의 유덕(遺德)을 추모하고 종사(宗事)를 논의하는 종회(宗會)의 장소이다. 선인(先人)들의 숨결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고령지역의 정자(亭子)와 재실(齋室)의 유래를 격주 간격으로 연재해 소중한 문화유산인 정자(亭子)와 재실(齋室)을 재조명하는 기회를 가지고자 한다.

     

     


    1. 서언

    조선 태종 원년(1401년) 2월에 고령에 입향한 성산전씨(星山全氏)는 후손들이 선조의 충절(忠節)과 학덕(學德)을 기리기 위하여 3개의 재실(齋室) 즉 사와재(謝臥齋), 어은재(漁隱齋), 용암재(龍巖齋) 등을 건립하였는바 그 유래와 추모 인물, 건축형태, 상량문 등을 소개하고자 한다. 

    2. 사와재(謝臥齋)
    (1) 유래
    사와재(謝臥齋)는 우왕 2년(1376년) 생원에 등제한 후 공양왕 4년(1392년) 우헌납(右獻納)을 제수 받고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내고 성산백(星山伯)에 피봉(被封)되고 봉지(封地)인 성산(星山) 교후동(校後洞)으로 낙남(落南)하여 성산전씨(星山全氏) 득관조(得貫祖) 및 고령 입향조(入鄕祖)가 되신 전순(全順)의 충절(忠節)과 덕행(德行)을 추모(追慕)하기 위하여 1926년 병인(丙寅) 4월에 후손들이 건립한 재실(齋室)이며 1977년 11월에 중건(重建)하였다.

    (2) 전순(全順)
    자는 사공(士恭)이고 호는 수헌(睡軒)이다.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과 어사대부(御史大夫)를 지낸 전우화(全遇和)와 영삼사사(領三司事)를 지낸 덕보(德甫)의 따님인 정부인(貞夫人) 옥천황씨(沃川黃氏)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 우왕 2년(1376년) 병진(丙辰) 생원(生員)에 급제한 후 공양왕 4년(1392년) 4월 우헌납(右獻納)에 제수(除授)되었다. 공양왕 때 각종 조정의 국정(國政)에 이바지한 공로(功勞)를 인정받아 성산백(星山伯)에 피봉(被封)되었고 고려의 국운(國運)이 다함에 고려 유신(遺臣)으로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節槪)를 지키기 위하여 봉지(封地)인 성산(星山) 교후동(校後洞)으로 낙향(落鄕)하였다. 세상을 사절하고 은거하였으니(謝世隱臥) 그 처소를 “사와동우(謝臥洞寓)”로 명명(命名)하였다. 목은(牧隱) 이색(李穡) 선생과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과 도의지교(道義之交)로 사귀어 덕업(德業)을 성취하니 목은(牧隱) 이색(李穡) 선생이 시를 주어 절개를 칭송하기를
    “一秣星山何處是(일말성산하처시)
     일말 성산이 어드메인고
     南來復見杜門洞(남래부견두문동)”
    남쪽으로 내려와서 다시 두문동을 보겠구나”라고 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금곡(錦谷) 송내희(宋來熙) 선생 문집 10권중 정선전씨(旌善全氏) 을축보(乙丑譜) 서(序)에 수록되어 있다. 또한 두문동 72현 중 한분이신 공의 장질(長姪) 채미헌(採薇軒) 휘(諱) 오륜공(五倫公)이 공에게 문안(問安)올 때 유항(柳巷) 한수(韓脩)가 시를 지어 보내 이르기를
    “千里馳書問我安(천리치서문아안)
     천리 멀리 먼 길에 글을 보내어 나의 안부를 물어주시니 감사하며
     喜君無恙臥星山(희군무양와성산)
     성산에 가서 누워 있음을 기뻐하고
     太平都下無人事(태평도하무인사)
     태평세월에 서울지방에 인사가 비록 없으나
     惟見氷翁奉使還(유견빙옹봉사환)
     오직 빙옹(氷翁)께서 사명을 받들어 돌아옴을 보리라”라고 하였다.
    그 후 조선 정종 2년(1400년) 출사(出仕)하여 중승(中丞)을 거쳐 태종 1년(1401년) 좌우산기상시(左右散騎常侍)를 지냈다. 생졸년(生卒年)은 미상이며 묘는 고령군 대가야읍 본관동 강곡산(講谷山) 자좌(子坐)에 있으며 정부인(貞夫人) 봉호(封號) 성씨실전(姓氏失傳) 배위(配位)와 쌍분(雙墳)이다.

    (3) 건축형태
    건물 구조는 정면 5칸, 측면 1칸 반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대청마루와 두 칸의 방으로 되어 있고, 문간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되어 있는 솟을대문이며, 좌측에 제례를 준비하는 종무실(宗務室)이 있다. 마당 우측에는 유허비(遺墟碑)와 고려공조판서수헌공휘순신도비(高麗工曹判書睡軒公諱順神道碑)가 있다.

    (4) 사와재(謝臥齋) 중건기(重建記)
    “철령(鐵嶺) 높은 곳에 쉬어넘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孤臣寃淚)를 비삼아 띄여다가 님 계신 구중심처(九重深處)에 뿌려본들 어떠리” 이것은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선생의 충절(忠節)을 읊은 노래의 한 토막이거니와 이와같은 심정으로 경경단애(耿耿丹哀) 오로지 한 임금에게 충성을 바치기 위하여 부귀영화(富貴榮華)를 저버리고 벽항궁촌(僻巷窮村)의 고을에 사시며 집절수도(執節守度)하신 의인(義人)이 계시니 고려말엽의 충신이시며 성산전씨(星山全氏)의 파조(派祖)이신 성산백(星山伯) 수헌공(睡軒公) 휘(諱) 순(順) 자(字) 사공(士恭)이 바로 그 어른이시다. 공은 백제 온조왕조(溫祚王朝)의 십제공신(十濟工臣)이고 전씨(全氏)의 도시조(都始祖)인 환성군(歡城君) 휘(諱) 섭(聶)의 28세손이시며 정선군(旌善君) 휘(諱) 선(愃)의 21세손이시요 어사대부(御史大夫) 휘(諱) 우화(遇和)의 둘째 아드님이시다. 공은 1372년 우왕 2년 생원(生員)으로 등제(登第)하신 후 관(官)이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이르셨고 공양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중요한 국정(國政)을 결정할 때마다 크게 보좌(補佐)의 실적을 올리셨으니 각도(各道) 목부(牧府)에 유학교관(儒學敎官)을 두는 일, 서적원(書籍院)을 두는 일 남경(南京)에서 송도(松都)로 환도(還都)하는 일, 신복제(新服製)를 정하는 일, 경도(京都)의 내성(內城)을 축조하는 일 등 열거할 수가 없다. 이러한 공(功)으로 성산백(星山伯)에 봉수(封授)되시었고 1392년 공양왕 4년 4월에 충언(忠言)과 모책(謀策)을 올리는 우헌납(右獻納)이 되셨으나 동(同) 7월에 조준 (趙浚), 정도전(鄭道傳), 배극렴(裵克廉) 등이 이성계(李成桂)를 추대(推戴)하여 이씨왕조(李氏王朝)를 조시(肇始)케 하니 공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대의(大義)를 지키고자 결연(決然)히 경사(京師 : 서울)을 떠나 봉지(封地)인 성산(星山) 교후동(校後洞)으로 낙향(落鄕)하시었다. 여기에서 은둔생활을 하시며 그 거처(居處)를 “사와동우(謝臥洞寓)”라 이름 하셨음은 사세은와(謝世隱臥)의 처소(處所)라는 뜻이다. 이 때에 이씨왕조(李氏王朝)의 조국대업(肇國大業)은 순탄치 못하였으니 그 난관(難關)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명나라가 이성계(李成桂)를 인정치 않는 점, 정포은(鄭圃隱) 및 두문동(杜門洞) 72현을 비롯하여 유능한 인사들이 국조(國祚 : 국운)가 천혁(遷革 : 변혁)됨을 질시하고 있었다는 점, 세자(世子) 책봉(冊封)을 두고 정비(正妃)인 한씨소생(韓氏所生)의 왕자와 계비(繼妃)인 강씨소생(康氏所生)의 왕자들 사이에 골육상잔(骨肉相殘)의 비극이 계속되고 있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어려움이 가시지 못한 국면에 즉위한 태종(太宗)은 인재를 구하는데 정력을 기울였다. 태종이 즉위하던 신사(辛巳) 정월에 공을 소접(召接)하고 중승(中丞)을 제수(除授)하며 협찬(協贊)을 청하였으나 공이 사퇴하매 다시 좌우산기상시(左右散騎常侍)를 제수하며 보좌(補佐)를 청하였다. 그러나 공은 완강히 거절하고 성산(星山)으로 환차(還次)하시었다. 이를 전하여 들은 목은(牧隱) 선생은 불원천리(不遠千里) 그곳을 찾아 의정(義情 : 의리와 실정)의 한 구(句)의 시를 읊었으니 공의 지조(志操)와 용기를 칭송하였다. 이르기를 一秣星山何處是(일말성산하처시) 南來復見杜門洞(남래부견두문동)이라 하였으니 내님 계시다는 성산이 아련하여 어딘가 했더니 와서 보니 남쪽에도 두문동(杜門洞)이 있었구나 하는 뜻이다. 이것은 고려조(高麗朝)가 쇠망(衰亡)하자 이씨왕조(李氏王朝)를 거부하는 전오륜(全五倫), 신규(申珪), 조의생(曺義生), 임선미(林先味), 맹호성(孟虎誠), 고천상(高天上) 등 72인의 고려충신들이 은둔처(隱遁處)로 삼았던 두문동(杜門洞)이 개풍군(開豊郡) 광덕산록(光德山麓)에만 있는 줄 알았더니 이곳 성산 고을에도 충신의 은둔처가 있었구나 하고 공의 고려에 대한 충의(忠義)를 찬탄(讚嘆)하는 글귀이다. 공은 이래(爾來)로 사와동우(謝臥洞寓)에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며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여생을 보내셨으니 유호덕(攸好德)과 고종명(考終命)을 누리신 것이다. 공은 두 아드님을 두셨는데 장(長) 휘(諱) 천로(天老)는 무후(無後)하셨고 차(次) 휘(諱) 현로(玄老)는 태종조(太宗朝)에 감찰(監察)에 소사(召辭)되셨으나 굳이 사양하시고 전리(田里 : 고향마을)로 돌아가셨다. 휘(諱) 현로(玄老)의 외아드님이신 휘(諱) 전중(殿中)은 관(官)이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이르셨고 세 아드님을 두셨는데 휘(諱) 난()은 동래부윤(東萊府尹)을 거쳐 경주부윤(慶州府尹)에 이르셨고 휘(諱) 형(炯)은 강진현감(康津縣監)에 이르셨으며 휘(諱) 찬(燦)은 관(官)이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이르셨다. 또 공의 6세손인 호(號) 죽헌(竹軒) 휘(諱) 영기(永期)는 중종 31년 병신(丙申)에 나시어 관(官)이 의금부(義禁府) 도사(都事)를 거쳐 당상관(堂上官)인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셨다. 임진왜란에는 김면(金沔), 조종도(趙宗道), 곽재우(郭再祐) 등과 각지(各地)에서 분전(奮戰)하여 혁혁(赫赫)한 공(功)을 세우셨고 정난후(靖亂後)에는 누차 나라의 부르심을 받으셨으나 응하지 아니하셨다. 공은 노래(老來 : 늘그막에)에 동지와 함께 정사(精舍)를 마련하고 후학(後學)을 기르기 위하여 학문을 강술(講述)하셨는데 뒤에 향리(鄕里)사람들이 공의 인격을 흠모(欽慕)하여 여지인물편(輿地人物編)에 공의 위덕(偉德)을 게재하였고 다시 강곡사(講谷祠)는 고종조시(高宗朝時)에 세출절감책(歲出節減策)의 하나로 전국 각지에 산재(散在)되어 있는 각종 사원(祠院)이 폐쇄령(廢鎖令)에 의하여 철폐(撤廢)되었고 지금은 강곡(講谷) 촌명(村名)만이 전해오고 있다. 이래(爾來) 효자충신(孝子忠臣)과 덕망있는 인재가 속출(續出)되었고 지금도 경향각지에서 공의 후예(後裔)가 각계에 기라성(綺羅星)같이 점철(點綴)되어 활약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할 제 공의 유덕(遺德)이 비단(非但) 성산백(星山伯) 전씨(全氏)에만 한한 것이 아니라 전체 전씨(全氏)의 명성에도 불멸(不滅)의 섬광(閃光)을 발하였다. 하여서 과언(過言)이 아니라 그러나 공의 유서(由緖)를 닮은 이 사와재(謝臥齋)가 퇴폐(頹廢)되고 노후(老朽)된 데다가 규모가 작아서 증축보수(增築補修)할 것을 논의하고 구재(舊齋)옆에 터까지 잡아 놓았으나 힘이 미치지 못하여 오랫동안 천연(遷延 : 지체)되어 근자(近者)에 이르렀다. 하늘은 결코 역사를 무심(無心)과 비정(非情)가운데 묻어 버리는 일은 없다. 공의 후예(後裔)가운데 중윤공(仲潤公)을 있게 한 것이 그것이다. 중윤공(仲潤公)은 자수성가(自手成家)로 이 나라 식품공업의 개척자가 되었고 또한 사도(斯道 : 유교의 도덕)의 기치(旗幟)를 세계에 휘날린 공로자일 뿐 아니라 성실(誠實)과 근면(勤勉)과 신의(信義)와 예지(叡智)로써 그 인물됨이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었고 도주(陶朱)와 의둔(猗頓)을 능가(凌駕)할 치부(致富)를 하였으나 그는 위선(爲先) 일념(一念)과 겸허(謙虛)의 미덕(美德)을 잊지 않았다. 공이 사와재(謝臥齋)의 내력(來歷)을 알고 기꺼이 거액의 성금을 독담(獨擔)하여 증보공사(增補工事)를 진취(進就)케 하였으니 이 또한 하늘의 경륜(經綸)이라 감하(感賀)할 뿐이다. 이렇게 널찍하게 중수(重修)되고 깨끗하게 단장된 사와재(謝臥齋)에 수많은 종친(宗親)들이 모여 멀리 수헌공(睡軒公)을 흠모(欽慕)하여 가까이는 중윤공(仲潤公)을 기리며 화수(花樹)의 정(情)을 나누게 된 것은 충효가 고갈된 오늘에 있어서는 한 폭의 그림일 듯 느껴진다. 또 강옥(鋼玉) 창연(昌淵) 해기(海機) 용한(鏞漢) 등 공의 후손(後孫) 제공(諸公)들이 동분서주(東奔西走) 시종역사(始終役事)를 감독하여 오늘 그 완공(完工)을 보게되니 일월(日月)도 산천(山川)도 기쁨을 나누는 듯 여기 사와재(謝臥齋) 주변에 영롱(玲瓏)한 서기(瑞氣)가 감돎을 보겠도다. 신명(神明)이시어 전씨(全氏)의 문(門)에 영원한 홍복(鴻福 : 크나큰 복)을 내리소서 

    1977년 정사(丁巳) 11월  일 청주후인(淸州后人) 문학박사 한갑수(韓甲洙) 근찬(謹撰)
    (註釋1) 고신원루(孤臣寃淚)
    임금의 사랑을 잃게 된 외로운 신하(臣下)의 원통(寃痛)한 눈물을 말한다. 광해군 5년(1613년) 영의정 이항복이 광해군의 계모이자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생모인 인목대비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여 함경도 북청의 철령(鐵嶺)으로 유배되었을 때 자신의 충간(忠諫)이 받아드려지지 않자 억울한 눈물을 비대신 띄워다가 임금이 계신 구중궁궐(九重宮闕)에 뿌려서 충심(忠心)을 알리고 싶다는 심정을 읊었다.
    (註釋2) 경경단애(耿耿丹哀)
    마음에 잊히지 아니하는 붉은 마음 
    (註釋3) 벽항궁촌(僻巷窮村)
    외따로 떨어져 있어 사람이 드물게 살고 아주 가난한 마을
    (註釋4) 집절수도(執節守度)
    절개를 굽히지 아니하고 법도를 지켰다
    (註釋5) 조시(肇始)
    무슨 일이 처음으로 비롯되거나 비롯하거나 함
    (註釋6) 조국대업(肇國大業)
    나라를 일으키는 큰 사업
    (註釋7) 골육상잔(骨肉相殘)
    부자(父子)나 형제(兄弟) 또는 같은 민족(民族) 간(間)에 서로 싸움
    (註釋8) 소접(召接)
    임금이 신하(臣下)를 불러서 만나 봄
    (註釋9) 중승(中丞)
    조선시대 태조 1년(1392년) 사헌부(司憲府)의 정3품 관직
    (註釋10) 좌우산기상시(左右散騎常侍)
    정치에 대해 논박하고 왕명과 문서의 출납 등을 담당하였던 정3품 관직
    (註釋11) 이래(爾來)
    아주 가까운 때
    (註釋12) 환차(還次)
    길 떠난 웃어른이 돌아옴.
    (註釋13) 유호덕(攸好德)
    오복의 하나로 도덕(道德)을 지키기를 낙으로 삼는 일
    (註釋14) 고종명(考終命)
    오복(五福) 중의 하나로 하늘이 부여한 천명(天命)을 다 살고 죽음을 맞이함
    (註釋15) 소사(召辭)
    소명(召命 : 신하를 부르는 임금의 명령)을 내렸으나 사직하였다.
    (註釋16) 정난후(靖亂後)
    국가(國家)의 난리(亂離)를 평정(平定)한 후
    (註釋17) 강술(講述)
    학술이나 책의 내용을 차례대로 밝혀 설명함
    (註釋18) 회자(膾炙)
    칭찬을 받으며 사람의 입에 자주 오르내림을 이르는 말
    (註釋19) 도주(陶朱)
    월(越)나라 재상(宰相) 범여(范蠡)가 도(陶)의 땅에서 살아 주공(朱公)이라 일컬어 도주(陶朱)라 하였으며 치산(治産)으로 거부(巨富)가 되었다.
    (註釋20) 의둔(猗頓)
    춘추시대 노(魯)나라 빈한한 선비에서 소금과 목축으로 거부(巨富)가 되었다
    (註釋21) 위선(爲先)
    다른 것에 앞서 우선하는 일이라는 뜻으로, 조상을 위하여 일함
    (註釋22) 화수(花樹)
    옛날 위씨(韋氏) 일가가 꽃피는 나무(花樹) 밑에서 모여 술을 마시고 친목을 도모하였다는 것에서 유래되었다.

     

    료제공 : 성산전씨 회장 전병열(全炳烈)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최종동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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