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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고령지역 세거성씨(世居姓氏) 연원(淵源)을 찾아서

기사입력 2018.12.16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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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김씨(金海金氏) 판서공파(判書公派)

     

    본지는 ‘고령지역 세거성씨(世居姓氏) 연원(淵源)을 찾아서’를 격주로 기획 연재한다. 씨족연원(氏族淵源), 현조(顯祖), 고령입향(高靈入鄕) 내력 및 시기, 입향조(入鄕祖) 이 후 역대 인물 등을 문헌적 고증(考證)을 근거로 밝힘으로써 각 문중 고유의 씨족연원(氏族淵源), 열조(烈祖)들의 위업(偉業), 올곧은 정신 및 문화유산(文化遺産)을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코자 하오니 관심 있는 문중들의 많은 참여를 바라며, 이번호에는 김해김씨(金海金氏) 판서공파(判書公派)를 소개한다.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시조(始祖)
    김해김씨(金海金氏)는 가락국(駕洛國)의 시조(始祖) 김수로(金首露)를 시조로 한다. 성(姓)을 김(金)이라 하신 것은 금알에서 화생(化生)하였기 때문이며 어휘(御諱)를 수로(首露)라 하신 것은 여섯 황금알 중에서 제일 먼저 화생(化生)한 까닭이다.
    (註釋) 화생(化生)
    어떤 것에 의존하지 않고 저절로 태어나는 것.
    (2) 탄생(誕生) 설화(說話)
    고려 문종 때 김관지주사(金官知州事) 문인(文人)이 지은 김수로왕(金首露王)의탄생설화가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가락국기(駕洛國記)에 기록되어 있어 소개한다.
    “천지(天地)가 처음 열린 이후로 이곳에는 아직 나라 이름이 없었다. 그리고 또 군신(君臣)의 칭호도 없었다. 이럴 때에 아도간(我刀干)·여도간(汝刀干)·피도간(彼刀干)·오도간(五刀干)·유수간(留水干)·유천간(留天干)·신천간(神天干)·오천간(五天干)·신귀간(神鬼干) 등 아홉 간(干)이 있었다. 이들 추장(酋長)들이 백성들을 통솔했으니 모두 100호(戶)로서 7만 5,000명이었다. 이 사람들은 거의 산과 들에 모여서 살았으며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 곡식을 먹었다.
    후한(後漢)의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 임인(壬寅 : 42) 3월 계욕일(稧浴日 : 액을 없애기 위하여 물가에서 목욕하며 노는 날)에 그들이 살고 있는 북쪽 구지(龜旨 : 이것은 산봉우리를 말함이니, 마치 십붕十朋이 엎드린 모양과도 같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에서 무엇을 부르는 이상한 소리가 났다. 백성 2, 3백 명이 여기에 모였는데 사람의 소리 같기는 하지만 그 모양은 숨기고 소리만 내서 말한다.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아홉 간(干) 등이 말한다. “우리들이 있습니다.” 그러자 또 말한다. “네가 있는 곳이 어디냐.” “귀지(龜旨)입니다.” 또 말한다. “하늘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였으므로 일부러 여기에 내려온 것이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노래를 부르되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먹겠다'하고, 뛰면서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 뛰놀게 될 것이다.” 구간(九干)들은 이 말을 좇아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추다가 얼마 안 되어 우러러 쳐다보니 다만 자줏빛 줄이 하늘에서 드리워져서 땅에 닿아 있다. 그 노끈의 끝을 찾아보니 붉은 보자기에 금으로 만든 상자가 싸여 있으므로 열어보니 해처럼 둥근 황금 알 여섯 개가 있었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하여 함께 백배(百拜)하고 얼마 있다가 다시 싸안고 아도간(我刀干)의 집으로 돌아와 책상 위에 놓아 두고 여러 사람은 각기 흩어졌다. 이런 지 12시간이 지나, 그 이튿날 아침에 여러 사람들이 다시 모여서 그 합을 여니 여섯 알은 화해서 어린아이가 되어 있는데 용모(容貌)가 매우 훤칠했다. 이들을 평상 위에 앉히고 여러 사람들이 절하고 하례(賀禮)하면서 극진히 공경했다. 이들은 나날이 자라서 10여 일이 지나니 키는 9척으로 은(殷)나라 천을(天乙)과 같고 얼굴은 용과 같아 한(漢)나라 고조(高祖)와 같다. 눈썹이 팔자(八字)로 채색이 나는 것은 당(唐)나라 고조(高祖)와 같고, 눈동자가 겹으로 된 것은 우(虞)나라 순(舜)과 같았다. 그가 그 달 보름에 왕위(王位)에 오르니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해서 이름을 수로(首露)라고 했다. 혹은 수릉(首陵 : 죽은 후의 시호이다)이라고도 했다. 나라 이름을 대가락(大駕洛)이라 하고 또 가야국(伽耶國)이라고도 하니 이는 곧 여섯 가야(伽耶) 중의 하나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가서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니 동쪽은 황산강(黃山江), 서남쪽은 창해(滄海), 서북쪽은 지리산(地理山), 동북쪽은 가야산(伽耶山)이며 남쪽은 나라의 끝이었다.

    (3) 최대 인구를 자랑하는 성씨
    2015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김해김씨의 인구는 4,456,700명으로 집계되어 우리나라 성씨 가운데 인구가 가장 많다

    (4) 허(許)씨로 사성(賜姓)
     고보왕(古譜王) 세계(世系)에 의하면 김수로왕(金首露王)의 왕후(王后)인 허황옥(許黃玉) 왕후의 장남이자 제2대 임금인 거등왕(居登王)과 차남 거칠군(居漆君), 3남은 허씨(許氏)로 사성(賜姓) 되었다.

    (5) 김해허씨(金海許氏)와 인천이씨(仁川李氏)는 동본동근(同本同根)
     인천이씨(仁川李氏)는 바로 허(許)씨에서 갈라진 분적종(分籍宗)이며 시조는 고려 현종 때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역임한 이허겸(李許謙)이다. 공(公)의 선세(先世)에 허기(許奇)란 분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셨다가 천자(天子)로부터 이씨(李氏)로 사성(賜姓)을 받았으며 훗날 이허겸(李許謙)이 소송현(邵城縣) 개국후(開國候)에 봉해지면서 인천이씨(仁川李氏)로 관향을 갖게된 것이다. 소성(邵城)이란 인천의 옛지명이다. 따라서 인천이씨(仁川李氏)와 김해허씨(金海許氏)는 동본동근(同本同根)이다.

    (6) 군내 김해김씨 파별 분포 현황
     고령군내에 김해김씨는 시중공파(侍中公派), 판서공파(判書公派), 삼현파(三賢派), 경파(京派), 도총관공파(都摠管公派) 등이 고르게 전지역에 세거하고 있으나 판서공파 후손은 성산면 대흥리, 기족리, 삼대리 등에 산거(散居)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고려
    ① 김불비(金不比)
    호는 신묵재(愼默齋)이며 김수로왕의 49세손인 용서(龍瑞)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판서공파(判書公派)의 파조(派祖)이다. 고려 때 영천군사(永川郡事)를 지내고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으로 학문을 성취하니 국내에서는 그의 학문에 비견(比肩)할 사람이 없다하여 불비(不比)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창원시 동읍 금산리에 공을 추모하는 재실인 금호재(琴湖齋)가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 상정일(上丁日)에 묘제(墓祭)를 지내고 있다. 

    (2) 조선
    ① 김수광(金秀光)
    호는 환성헌(喚惺軒)이며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김불비(金不比)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세종 29년(1447년) 정묘 식년시에 생원(生員)에 입격(入格)한 후 문종 1년(1450년) 경오 식년시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세조 7년(1461년) 예조정랑(禮曹正郞)의 벼슬길에 나아가 경상도(慶尙道) 도사(都事)‧사간원(司諫院) 헌납(獻納)를 지냈다. 성균관(成均館) 사예(司藝) 재임시에는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임금에게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강론(講論)하였다. 성종 14년(1483년) 통훈대부(通訓大夫)와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에 승서(陞敍)되었다.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 재임시 성품이 강직(剛直)하여 성종의 장인이자 조선 초기 최고의 권신(權臣)인 한명회(韓明澮)를 국문(鞠問)할 것을 직간(直諫)하여 조정에서 청렴결백함이 드러났다. 그후 제용감정(濟用監正)과 원주목사(原州牧使)를 거쳐 전시관(典祀官)을 지냈다. 묘지명(墓誌銘)을 동방오현(東方五賢) 중 수현(首賢)인 한휜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이 찬(撰)하였다.
    ② 김석공(金錫貢 : 1483년∼1535년)
    자는 규보(圭甫)이며 원주목사(原州牧使)를 지낸 김수광(金秀光)과 숙부인(淑夫人) 경주최씨(慶州崔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성종 14년(1483년) 태어났다. 어관포(魚灌圃)가 찬(撰)한 묘지명에 이르기를 “ 어릴 적부터 공부에 힘을 쓰고 마음을 독실히 가지며 과거 공부를 일삼지 않았다. 성종 때에 문음(門蔭)으로 처음 벼슬을 얻어 진원현감(珍原縣監 : 현재 장성군 진원면)을 지냈으나 그 후 조선 시대 조회(朝會)와 의례(儀禮) 등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통례원(通禮院)에 소속된 종6품의 벼슬인 인의(引儀)에 제수되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을 감추고 창원 산남(山南) 즉 현재 창원시 의창구 동읍 산남리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도 옛날 유적의 주춧돌이 완연히 남아있다고 한다” 배위는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의 증손 제천군(堤川君) 이온(李)의 딸인 전주이씨(全州李氏)이다.
    ③ 김중손(金仲孫 : 1481년 ∼ 1557년)
    자는 숙윤(叔胤)이다. 진원현감(珍原縣監)을 지낸 김석공(金錫貢)과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의 증손 제천군(堤川君) 이온(李)의 딸인 전주이씨(全州李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연산군 10년(1504년) 갑자 식년시에 진사(進士)에 입격(入格)한 후 유일(遺逸)로 천거(薦擧)되어 예빈시판관(禮賓寺判官)을 거쳐 지례현감(知禮縣監)과 용궁현감(龍宮縣監)을 지냈다. 초취(初娶)는 진사(進士) 곽승화(郭承華)의 따님인 숙부인(淑夫人) 포산곽씨(苞山郭氏)이고 재취(再娶)는 생원(生員)을 지낸 김전생(金銓生)의 따님인 숙부인(淑夫人) 안동김씨(安東金氏)이다. 둘째 사위는 경원도호부사(慶源都護府使)를 지낸 김세문(金世文)이며 외손자(外孫子)는 임진왜란 때 의병도대장(義兵都大將)을 지낸 송암(松菴)
    김면(金沔)이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명종 15년(1560년) 장사랑(將仕郞)을 지낸 김취명(金就明)의 셋째 아들 김언제(金彦悌)가 창원 산남(山南)에서 고모집이 있는 고령군 개진면 양전리로 이거(移居)하여 김해김씨 판서공파의 고령 입향조가 되었다. 입향 경위는 미상(未詳)이다. 한편 김취명(金就明)의 현손(玄孫)인 김한정(金漢禎)이 영조 때인 1750년경에 김산(金山) 도암(道岩) 즉 김천시 조마면 장암리에서 고령군 성산면 대흥리로 이거(移居)하여 한 문중을 이루면서 살고 있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조선시대
    ① 김언제(金彦悌 : 1540년 ∼? )
    자는 경원(敬源)이며 장사랑(將仕郞)을 지낸 김취명(金就明)과 정랑(正郞)을 지낸이광원(李光元)의 따님인 전의이씨(全義李氏)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선시대 종육품(從六品) 서반(西班) 무관(武官)에게 주던 품계(品階)인 병절교위(秉節校尉)를 지냈으며 병란이 있을 때 군무(軍務)을 순찰하였던 권설직(權設職 : 임시직)인 순찰사(巡察使)를 지냈다. 임진왜란 때 의병도대장(義兵都大將)을 지낸 김면(金沔)의 외종형(外從兄)이다. 배위는 중종 35년(1540년) 경자 식년시에 입격하여 진사(進士)를 지낸 박문균(朴文鈞)의 따님인 숙부인(淑夫人) 밀양박씨(密陽朴氏)이다.
    ② 김응감(金應鑑 : 1558년 ∼ ?)
    초휘(初諱)는 일(鎰)이며 자는 자첨(子瞻)이며 호는 금창(琴窓)이다. 순찰사(巡察使)를 지낸 언제(彦悌)와 진사(進士)를 지낸 박문균(朴文均)의 따님인 숙부인(淑夫人) 밀양박씨(密陽朴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종형(從兄) 매오공(梅塢公) 김응현(金應鉉)과 함께 예학(禮學)의 대가(大家)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하(門下)에서 수학(修學)하여 문학과 예학이 뛰어났다. 임진왜란을 만나 송암(松菴) 김면(金沔)이 창의(倡義)하자 공은 송암(松菴)의 외종질(外從姪)인 관계로 진중(陣中)에 동참(同參)하여 종군(從軍)하면서 개산포(開山浦), 무계(茂溪), 개령(開寧), 금산(金山) 등 각종 전투에서 많은 전공(戰功)을 세웠으며 1593년 3월 11일 송암(松菴)이 금산진중(金山陣中)에서 순절(殉節)한 후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진영에서 활약하였다. 군자감(軍資監) 참봉(參奉)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불취(不就)하였다. 김해김씨(金海金氏) 판서공파(判書公派) 문중에서는 김천시 조마면 장암리에 충효당(忠孝堂)을 세워 매년 공의 유덕(遺德)을 기리며 향사(享祀)하고 있으며 임난호국영남충의단(壬亂護國嶺南忠義壇)에도 위패(位牌)가 봉안(奉安)되어 있다. 초취(初娶)는 문과에 급제한 후 교리(校理)와 한림(翰林)을 지낸 주박(周博)의 따님인 숙부인(淑夫人) 상주주씨(尙州周氏)이며 재취(再娶)는 봉사(奉事) 이영성(李永成)의 따님인 성산이씨(星山李氏)이다.
    ③ 김재철(金載喆 : 1735년 ∼ ?)
    자는 희천(希天)이다. 처사(處士) 김총(金寵)과 달성서씨(達城徐氏)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순조 13년(1813년) 무과에 급제한 후 선략장군(宣略將軍) 행(行) 용양위(龍驤衛)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다. 시대와 어울리지 못하여 벼슬길에서 물러나 수양하면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2) 근·현대 인물
    ① 김경주(金景珠) → 인천노인전문병원 병원장
    ② 김경호(金敬鎬) → 검찰청 서울대일항쟁 보상위원 담당관, 사무관
    ③ 김규철(金奎喆) → 목포해양대 기획처장 겸 교수, 공학박사
    ④ 김귀배(金貴培) → 성균관대 교수, 문화재청 문화재 전문위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아태지역위원회 위원장
    ⑤ 김달희(金達熙) → 제20회 사법시험, 대구지방법원 부장판사, 변호사
    ⑥ 김말수(金末守) →  제1대 고령군의회 전반기 부회장
    ⑦ 김상근(金相根) → 초휘는 상규(相圭)이고 자는 윤범(允範)이며 호는 도천(道泉)이다. 한말(韓末) 선각자(先覺者)인 아버지 경호(景浩)와 의윤(義允)의 딸인 충주석씨(忠州石氏) 명이(明伊) 사이에서 1905년 9월 25일 고령군 성산면 삼대동에서 태어났다. 계성학교(啓聖學校)를 거쳐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를 졸업한 후 경북노회(慶北老會)에서 목사(牧師)로 안수(按手)받아 고령군의 고령읍, 사부, 객기, 삼대교회와 달성군의 현풍,원교, 구지교회 등에서 당회장(堂會長)과 시찰장(視察長)으로 사목(使牧)하였다. 의열단(義烈團)에 극비로 거액의 군자금(軍資金)을 전달하고 항일독립투사(抗日獨立鬪士)의 가족을 지원하는 등 독립운동에도 헌신하였다. 광복 후에는 각지방을 순회하면서 사상계몽강연(思想啓蒙講演)과 애국가를 가르쳤으며 이승만(李承晩) 박사가 영도(領導)하는 국민회(國民會)의 고령지구 위원장으로 추대받아 1948년 5·10 실시된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落選)하였다. 특히 6·25 동란 때 대구로 피난하는 고령군민 수천명이 낙동강 철교를 건너고 있는데 미육군(美陸軍)이 작전상 이 철교를 폭파할 즈음에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고 위험지역으로 들어가 유창한 영어로 미국책임자를 설득하여 폭파를 연기시켜 수많은 고귀한 인명(人命)을 구하였다. 공이 목사로서 박애정신(博愛精神)을 실천한 것은 고령군민 전체의 흉금(胸襟)을 감동시켰다.
    ⑧ 김상화(金相和) → 서울신문 정치부장
    ⑨ 김성호(金聖鎬) → 대구광역시 달서구의회 사무국장, 사무관
    ⑩ 김  수(金  首) → 농학박사, 농촌진흥원 연구원
    ⑪ 김영권(金永權) → 시조 시인, 고령문화원 부원장, 성균관 유도회 도봉지부 회장, 가락종친회 중앙이사,  판서공파 대종회 회장
    ⑫ 김영만(金永萬) → 23회 행정고시, 농림부 식량정책국장, 국립수산과학원장, 한국마사회 부회장
    ⑬ 김영식(金永植) → 대가야문학회 회원, 시인
    ⑭ 김연수(金連洙) → 37사단 연대장, 75사단 부사단장, 재향군인회 국제협력관, 육군 대령
    ⑮ 김용탁(金龍卓) → 의학박사, 경주 맘존산부인과
    ⑯ 김종환(金鍾煥) → 성산면 초대 면장
    ⑰ 김재웅(金在雄) → 문학박사, 경북대 교수
    ⑱ 김창수(金昌洙) → 기독교 대구방송(대구CBS) 본부장
    ⑲ 김철호(金喆昊) → 신학박사, 목사
    ⑳ 김  훈(金  勳) → 대구서부경찰서 경정

     

     

    자료 제공  : 김영식(金永植) 
    집      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      리  : 최종동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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