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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시대별 구분에 따른 고령군 연혁(沿革) (上)

기사입력 2018.10.24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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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령군의 인문지리

    고령군(高靈郡, Goryeong-Gun)은 대한민국 경상북도 남서부에 위치한 기초자치단체이다. 21세기 고령은 도농(都農) 복합형(複合形) 지역이며 대가야사의 복원을 통한 역사와 문화도시를 지향하고 있으며 1000여개의 소기업 중심의 공단이 밀집되어 경상북도 군부(郡部)에서 두 번째로 많은 기업체을 보유한 경쟁력있는 산업지역이다. 서울로부터 318km 부산으로부터 151km 광주로부터 172km 대전으로부터 139km거리에 있으며 면적은 384.10㎢로 경상북도 전체 면적의 2.0%에 해당한다. 2017년 12월말 현재 인구(외국인 포함)는 33,768명이며 대가야읍을 비롯한 7개면 153개리 663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리적(數理的) 위치는 북위(北緯) 35° 36' 32"에서 35° 50' 53"까지 남북 14' 21"간에 있고 동경(東京) 128° 09' 36"에서 128° 28' 54"까지 동서 19' 18"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본군의 동단(東端)은 다산면 호촌리의 낙동강 연안의 사문진(沙門津) 나루터이고 서단(西端)은 쌍림면 산주리 매화재로서 해발 550m의 만대산 산록(山麓)이다. 남단(南端)은 우곡면 객기리로 낙동강 연안의 객기나루터이고 북단(北端)은 다산면 녹곡리로 성주군 용암면과의 경계지점이다. 동서간 거리는 약 28.25km이며 남북의 거리는 약 26.75km이다.
    관계적(關係的) 위치는 고령군은 경상북도 남서부에 편재(偏在)되어 있어 경상북도 북부지방보다 경상남도 서북부지방과 교류가 잦고 북(北)으로는 대가천(大伽川)의 상류에 해당하는 성주군 수륜면, 용암면과 접하고 있으며 남(南)으로는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쌍책면, 덕곡면과 경계를 접하고 있다. 동(東)으로는 사행(蛇行)하는 낙동강을 지나서 대구광역시가 있고 서(西)로는 가야산(伽倻山) 남쪽 능선과 북두산(北斗山), 문수봉(文壽峰), 미숭산(美崇山)을 넘어서 합천군의 가야면, 야로면과 인접하고 있다.
    자연환경으로는 가야산 줄기가 남서쪽으로 뻗다가 동쪽으로 내려와서 만대산(668m), 노태산(440m), 소학산(489m) 등 구릉성 산지를 이루어 경상남도 합천군과 경계를 이루고 중앙부를 흐르는 대가천(大伽川)은 가야산 북서쪽에서 발원하여 성주군 수륜면을 거쳐 운수면을 관통하여 흐르고, 소가천(小伽川)은 가야산 남동쪽에서 발원하여 덕곡면을 거쳐 고령읍 본관리에서 대가천과 합류하여 금천(錦川)을 이룬다. 용담천(龍潭川 : 현 안림천)은 가야산 남쪽에서 발원하여 합천군 가야면 야로면을 거쳐 남서부를 관류(貫流)하며, 대가야읍 남부와 개진면 북부에서 금천과 합류하여 회천(會川)이 되어 우곡면 남부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이들 하천의 유역과 낙동강 서안을 따라 곳곳에 평야가 발달해 있어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춘 지역이다. 천혜의 자연환경과 사통오달(四通五達)의 도로망을 이용하여 대구광역시의 위성도시(衛星都市)로서 성장이 기대되며 국책사업인 ‘가야사 복원’과 지산동 대가야 고분군의 세계유산 등재와 가야국역사루트 재현사업을 통한 대가야 문화벨트 완성하고 신성장동력인 첨단기술 기업체를 유치하고 「군민 중심, 잘 사는 고령」을 위해 군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역사와 문화가 숨쉬고 지역경제가 활성화되는 지방자치를 지향하고 있다.

    2. 연혁(沿革)
    1) 상고시대(上古時代)
    ① 구석기(舊石器) 시대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70만년 전인 구석기 시대부터 라고 규명되고 있다. 이 시기는 지질학적으로 제4기 홍적세(洪績世)에 해당되며 신생대(新生代)의 마지막 단계이며 오늘날과 같은 기후상태와 대륙빙하가 발달하였던 시기가 교대로 나타나는 대단히 불안정한 기후로 특징되는 시기로, 흔히 “빙하시대(氷河時代)”라고 불리기도 한다. 원명으로 “플라이스토세(Pleistocene)”라고 하며 중국에서는 “갱신세(更新世)”라고 부르고 있으며 주로 뗀석기(打製石器)를 사용하면서 강가나 해안의 단구(段丘)와 동굴에서 수렵(狩獵)·채집(採集)생활을 하였다. 고령 지역에서 구석기 시대 유적은 주로 낙동강 주변의 하안(河岸) 단구성(段丘性) 지형에서 찾아지고 있는데 비교적 완만한 경사지(傾斜地)를 이루는 다산면 상곡리(上谷里)와 개진면 구곡리(九谷里)·반운리(盤雲里) 일대의 저평(低平)한 침식(浸蝕) 구릉지대(丘陵地帶)에서 지금부터 약 12만 년 ∼ 4만 년 전의 중기(中期) 구석기시대(舊石器時代) 유물인 여러면석기(多角面圓球)와 찍개류 등의 석기(石器)들이 출토되고 있는데 주로 석영암(石英岩)을 이용하여 만들었다. 다산면 상곡리(上谷里)와 개진면 구곡리(九谷里)·반운리(盤雲里) 일대의 구석기(舊石器) 유적(遺蹟)을 통해 3만 년 ∼2만 년 전인 구석기 시대부터 고령 지역에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② 신석기(新石器) 시대
     약 1만 년 전, 즉 지질학상 홀로세(世)인 제4빙기가 끝난 후빙기(後氷期)에 해당되는 시기이다. 이 시대의 특징은 생산경제의 발전과 기술의 진보 등 2가지를 들 수 있으며, 그래서 이 시기를 ‘인류의 위대한 생산혁명’이라고도 한다. 신석기 시대가 시작될 무렵 우리나라의 기후와 지형은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토기와 간석기(磨製石器)를 만들어 사용하게 되었고 직조기술(織造技術)을 습득하여 옷감을 만들 줄 알았고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으며 동물의 뼈와 조개껍질을 이용하여 장신구(裝身具)를 만들어 착용하였으며 집을 지어 정착생활을 하게 되었다. 신석기 시대 문화를 규정하는 가장 큰 특징인 신석기 시대 토기는 민무늬 토기, 덧무늬 토기, 눌러찍기무늬 토기, 빗살무늬 토기 순서로 급속히 한반도에 전파되어 갔으나 고령지역에서는 아직까지 발굴조사된 신석기 시대의 유적은 없다. 그러나 최근 낙동강 동쪽 대안(對岸)인 대구 지역의 상동(上洞), 대천동(大泉洞), 월성동(月城洞) 등 제 유적에서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어 고령지역 신석기 문화의 존재 가능성을 높여 주고 있다.
    ③ 청동기(靑銅器) 시대
    구리와 주석의 합금(合金)인 청동(靑銅)으로 된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철제(鐵製) 도구를 사용하기 직전까지의 시기로 기원전 10세기 ∼ 기원전 4세기에 해당되며 벼농사와 함께 농경(農耕)이 본격화되면서 정착생활(定着生活)이 이루어지고 비교적 큰 마을이 생겨나고 집단내에서 사회적, 신분적 분화(分化)가 일어났다. 고령지역은 선사시대 사람들의 신앙체계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암각화 유적이 많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암각화는 대가천과 안림천이 만나 회천을 이루는 곳의 산기슭 바위 벼랑에 새겨져 있는 ‘장기리(場基里) 암각화(巖刻畵)’로 1976년 8월 6일 보물 제605호로 지정되어 있다. 나이테 같은 둥근 동심원과 마치 깃털이 달린 네모진 탈 모양의 그림이 여기저기 새겨져 있는데 동심원은 태양을 상징하며 탈모양의 그림은 신상(神像)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는 풍요(豊饒)와 다산(多産) 그리고 집단의 안녕(安寧)과 발전(發展)을 기원하는 원시 농경사회의 제사유적(祭祀遺蹟)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밖에 별자리형 암각으로 해석되기도 하는 바위구멍 유적과 윳판모양 암각들이 다수 발견되고 있다.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인 무문토기는 운수면 운수평야 일대와 개진면 신안리에서 발굴되었으며 넓은 하천변에 하천이 운반 퇴적하는 토사(土砂)가 쌓여 이루어진 충적평야(沖積平野)라는 유적 입지(立地)는 벼농사에 적합한 곳으로서 이들 지역에 대규모 취락(聚落)이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양식인 지석묘(支石墓 : 고인돌)는 운수면 순평리, 봉평리 등 대가천 유역, 쌍림면 산주리 등 안림천 유역, 개진면 양전리, 직리 등 회천과 우곡면 사촌리 등 낙동강으로 직접 유입되는 소지류변(少支流邊)에 분포되어 있으며 가장 규모가 큰 것은 길이 420cm가 넘는 대가야읍 저전리 지석묘와 쌍림면 산주리 지석묘이다. 지석묘와 더불어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거석문화(巨石文化)의 하나인 신앙 대상물인 선돌(立石)은 주로 평야나 계곡의 입구에 세워져 있는데 운수면 순평리와 신간리 선돌은 가까운 곳에 있는 순평리와 봉평리·운산리의 지석묘와 함께 있다. 운수면 봉평리 석기(石器) 제작장(製作場) 유적은 청동기 시대의 생활에 필요한 각종 석기(石器)를 만들었던 곳이며, 이곳에서는 석기 제작에 필요한 원석과 받침돌, 망치돌 등의 도구를 비롯하여 석기 제작 과정에서 생긴 많은 돌날 박편(薄片)들이 출토되었으며 석기 제작 유적으로 사용된 원석은 멀지 않는 곳에 있는 의봉산(儀鳳山) 일대에서 채석해 온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까지 확인된 석기 제작장 규모로는 최대이다.

    2) 대가야(大加耶) 시대
    ① 국내 사료(史料)상 건국신화(建國神話)
    - 『삼국사기』 권 제34 잡지(雜志) 제3 지리1 고령군
    고령군(高靈郡)은 원래 대가야국(大加耶國)으로써 그 나라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내진주지(內珍朱智)라고도 한다.]부터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16대 520년간 유지되었는데, 진흥대왕(眞興大王)이 이를 침공하여 없애고 그 지역을 대가야군(大加耶郡)으로 만들었으며, 경덕왕(景德王)이 개칭하였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야로현(冶爐縣)은 원래 적화현(赤火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신복현(新復縣)은 원래 가시혜현(加尸兮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은 위치가 분명치 않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9 「경상도」 고령현
    (고령은) 본래 대가야국(大伽倻國)이다【자세한 것은 김해부(金海府)의 산천(山川)조 이하를 보라】.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내진주지(內珍朱智)라고도 한다】부터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무릇 16세 520년이다【최치원(崔致遠)의 『석이정전(釋利貞傳)』을 살펴보면, 「가야산신(伽倻山神) 정견모주(正見母主)는 곧 천신(天神)인 이비가지(夷毗訶之)에게 감응되어 대가야(大伽倻)의 왕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金官國)의 왕 뇌질청예(惱窒靑裔) 두 사람을 낳았다」고 되어 있으니, 즉, 뇌질주일惱窒朱日)은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의 별칭이고 뇌질청예(惱窒靑裔)는 수로왕(首露王)의 별칭이 된다.
    - 따라서 대가야(大加耶)는 42년 정견모주(正見母主)라는 가야산신과 이비가지(夷毗訶之)라는 천신 사이에 태어난 뇌질주일(惱窒朱日)이 대가야의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이 되었다는 건국신화가 전해온다.
    ② 3세기까지 고령지역에 자리한 정치체(政治體)는 반로국(半路國)이었으며 반로국은 개진면 반운리 지역 일대를 국읍(國邑 : 나라의 중심 읍락)으로 하여 몇 개의 읍락(邑落)으로 이루어졌으며 변한(弁韓)에 속하였다. 4세기 무렵부터 반로국에서 한 단계 진전하여 지역연맹체인 가라국(加羅國)으로 발전하였으며 수장(首長)의 호칭을 번예(樊濊)나 험측(險側)에서 벗어나 한기(旱岐)로 하였다.
    ③ 400년 가야ㆍ백제ㆍ왜가 서로 힘을 합쳐 신라를 공격하였다.
    ④ 479년 대가야의 하지왕(荷知王)은 남제(南齊)에 사신을 보내 조공(朝貢)을 바치고는 ‘보국장군(輔國將軍), 본국왕(本國王)’의 관작을 하사받고 독자적으로 국제무대에 진출하였다.
    ⑤ 481년 고구려와 말갈군이 신라의 미질부성(彌秩夫城 : 포항시 흥해읍)을 공격하자 대가야와 백제가 신라를 구해주었다.
    ⑥ 513년 대가야가 백제와 가야의 접경지역인 섬진강 유역에 위치했던 기문(己汶)을 빼앗자 백제는 왜(倭)의 힘을 빌려 기문(己汶)을 되차지 하였다.
    ⑦ 514년 3월에 대가야는 자탄(子呑 : 진주)과 대사(帶沙 : 하동)에 성을 쌓아 만해(滿奚 : 광양)에 이어지게 하고, 봉수대와 식량 창고를 만들어 백제와 왜국의 압박에 대비하였고 고령의 대가야는 이열비(爾列比 ; 의령)와 마수비(麻須比 : 합천 삼가)에 성을 쌓아 마차해(麻且奚 : 위치 미상)ㆍ추봉(推封 : 밀양)에까지 뻗치고 사졸과 병기를 모아서 신라를 핍박하였다.
    ⑧ 신라 법흥왕 9년(522년) 3월에 이뇌왕(異腦王) 일명 이부리지가(已富利知加)가 사신을 보내어 혼인을 청하매 왕이 이찬(伊飡) 비지배(比枝輩, 또는 比助夫)의 딸(혹은 누이)를 보내 결혼동맹(結婚同盟)을 체결하였다.
    ⑨ 신라 법흥왕 11년(524년) 9월에 법흥왕이 남쪽 변방 즉 낙동강 하구 방면을 행순(幸巡)하여 지경을 개척(開拓)하였으며, 대가야국왕이 내회(來會)하였다.
    ⑩ 신라 법흥왕 16년(529년) 신라 왕녀를 이뇌왕(異腦王)에게 시집보내면서 딸려 보낸 100명의 시종(侍從)들이 대가야의 지시사항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입은 옷을 마음대로 바꾸어 입었던 ‘대가야 변복(變服) 사건’으로 대가야와 신라의 우호관계가 깨졌고 시종(侍從)들을 모두 신라로 돌려보냈다. 신라는 의관제(衣冠制)를 빌미로 동맹을 파기하고 급기야 대구에서 창녕에 걸친 지역에 위치한 대가야 세 개의 성과 북경(北境) 다섯 개의 성을 복속시켰다.
    ⑪ 신라 법흥왕 19년(532년) 금관가야(金官加耶) 【본가야(本加耶)라고도 한다】 국주(國主) 김구해(金仇亥)가 비(妃) 및 세 아들 즉 장남 노종(奴宗), 중남(仲男) 무덕(武德), 계남(季男) 무력(武力)으로 더불어 국고(國庫) 보물(寶物)을 가지고 신라에 항복함으로써 완전히 멸망하였다.
    ⑫ 541년 남가라국(南加羅國) 즉 금관가야(金官加耶), 탁순국(卓淳國) 등 임나(任那) 재건과 가야연맹의 독립 보장을 요구하기 위하여 백제 성왕이 백제의 수도 사비(泗)에서 개최한 회의에 7개국이 참여하였다. 이를 흔히 임나부흥회의(任那復興會議), 임나복건회의(任那復建會議) 등으로 부르며 때로는 회의가 열린 장소를 강조하여 사비회의(泗會議)라고 부른다. ‘제1차 사비회의’에 대가야는 상수위(上首位) 관직의 고전해(古殿奚) 이칭(異稱) 기전해(旣殿奚)를 파견하였으나 회의는 실패로 돌아갔다.
    ⑬ 544년 남가라국(南加羅國) 즉 금관가야(金官加耶), 탁순국(卓淳國 : 창원) 등 임나(任那) 재건과 가야연맹의 독립 보장을 요구하기 위하여 개최된 ‘제2차 사비회의’에 8개국이 참여하였는데 대가야는 상수위(上首位) 관직의 고전해(古殿奚) 이칭(異稱) 기전해(旣殿奚)를 파견하였으나 회의는 결렬되었다.
    ⑭ 백제 성왕 29년(551년) 고구려로부터 한강 유역을 회복하기 위하여 백제 성왕이 백제병과 함께 신라와 임나(任那)의 연합세력을 이끌고서 고구려 관할 하에 있던 한성(漢城 : 현재 서울 강남 일대)을 공략하고 더 진군해서 평양(平壤 : 현재 양주 일대)까지도 장악하여 백제는 한강 하류지역인 6군(郡)을 회복하였고 신라는 죽령(竹嶺) 이북 고현(高峴) 이남의 10군(郡)을 차지하였다.
    ⑮ 백제 성왕 30년(552년) 신라와 고구려의 밀약(密約)에 적절히 대응하기 위한 방편으로 대가야는 백제와 안라(安羅)와 함께 왜에 사신을 파견해서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⑯ 백제 위덕왕 1년(554년) 7월 백제군은 성왕의 맏아들인 태자 부여창(扶餘昌 : 후일 백제 위덕왕)이 지휘하는 백제·가야·왜(倭) 연합군이 김무력(金武力) 등이 거느린 신라군과 관산성(管山城 : 충북 옥천)에서 싸워 성왕이 전사당하고 좌평 네 사람과 장병 29,600 명이 참살되는 등 백제가 대패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가야 멸망의 계기를 제공하였다.
    ⑰ 신라 진흥왕 22년(561년) 대가야를 공격하기 위하여 신라 진흥왕은 신하들을 창녕에 모아 회맹(會盟)하였다.
    ⑱ 신라 진흥왕 23년(562년) 9월에 대가야가 반(叛)하매 진흥왕이 이사부(異斯夫)를 명하여 칠 때 사다함(斯多含)이 그를 돕게 되었다. 사다함(斯多含)이 5,000명의 기병(騎兵)을 거느리고 먼저 전단문(栴檀門)으로 달려 들어가 백기(白旗)를 세운즉 성중(城中)의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는지라. 이사부(異斯夫)가 군사를 이끌고 이어 임(臨)하니 성중(城中)이 일시 죄다 항복하여 멸망하였다. 대가야는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으로부터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16대 520년간 존속했다.


    집필 향토사학자 이동훈 
    정리 최종동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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