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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정(四望亭) 유래와 낙강칠현(洛江七賢)의 선유(下)

기사입력 2018.10.06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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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자(亭子)는 풍류를 즐기고 경치를 완상(玩賞)하는 심리적 공간이며 재실(齋室)은 선조의 유덕(遺德)을 추모하고 종사(宗事)를 논의하는 종회(宗會)의 장소이다. 선인(先人)들의 숨결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고령지역의 정자(亭子)와 재실(齋室)의 유래를 격주 간격으로 연재해 소중한 문화유산인 정자(亭子)와 재실(齋室)을 재조명하는 기회를 가지고자 한다.

    7. 낙강칠현(洛江七賢) 범주(泛舟) 분운시(分韻詩)

    선조 22년(1589년) 5월 옥산(玉山) 이기춘(李起春), 청휘당(晴暉堂) 이승(李 承), 모재(茅齋) 이홍우(李弘宇), 한강(寒崗) 정구(鄭逑), 송암(松菴) 김면(金 沔), 대암(大庵) 박성(朴惺), 육일헌(六一軒) 이홍량(李弘量) 등 낙강칠현(洛江七賢)이 개산포(開山浦)에서 강정(江亭) 멍드미 사망정(四望亭)에 이르는 강 위를 선유(船遊)하면서 ‘만경창파욕모천(萬頃滄波欲暮天 : 넓고 푸른 물결과 저물어 가는 하늘)’이라는 시구칠자(詩句七字)로 분운(分韻)하여 각기 오칠음절구(五七音絶句)로 시(詩) 한 수(首)씩을 읊어 강과 산을 내 것으로 만드는 풍류(風流)를 즐기고 지란지교(芝蘭之交)의 아름다움을 칭송하고 그날의 흥취(興趣)와 정황(情況)을 흡족(洽足)하게 표현하였다. 2003년 5월 29일 낙강칠현 문중의 후손들이 사망정(四望亭) 경내에 ‘낙강칠현 낭만공원’을 조성하고 낙강칠현(洛江七賢)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가로 3m, 높이 2m 크기로 세운 ‘낙강칠현시비(洛江七賢詩碑)’에는 낙강칠현(洛江七賢)들의 시가 한 편씩 실려 있어 시분운(詩分韻) 순서대로 원문과 번역문을 소개하고자 한다. 

    (1) 옥산(玉山) 이기춘(李起春) 선생 시(詩) (萬 : 일만 만) 자운(字韻)
    煙艇泛淸波(연정범청파)
    아득한 작은 배를 청파(淸波)에 띄우니
    良朋來自遠(양붕래자원)
    어질고 친한 벗이 먼 곳에서 찾아왔네.
    誰知今日遊(수지금일유)
    그 누가 알리오 오늘 모여 놀 것을
    曾不意千萬(증불의천만)
    천만 뜻밖이라 나도 미쳐 몰랐었네.

    (2) 청휘당(晴暉堂) 이 승(李 承)선생 시(詩) (頃 : 이랑 경) 자운(字韻)
    荷花朝共看(하화조공간)
    아침에는 맑게 된 연꽃(荷花)을 완상하고
    暮泛金山境(모범금산경)
    해질 무렵 배 띄워 금산(金山) 경내 다달았네.
    高會摠羣賢(고회총군현)
    고상한 모임이라 모두가 유현(儒賢)일세
    片帆凌萬頃(편범능만경)
    조각배 노를 저어서 창파(滄波)를 넘나드네.

    (註釋) 유현(儒賢)
    유교(儒敎)에 정통(精通)하고 행적(行蹟)이 바른 사람
    (註釋) 창파(滄波)
    넓고 큰 바다의 맑고 푸른 물결

    (3) 모재(茅齋) 이홍우(李弘宇)선생 시(詩) (滄 : 큰 바다 창) 자운(字韻)
    勝會欣來赴(승회흔래부)
    성대한 모임에 흔쾌히 다다르서
    扁舟萬頃滄(편주만경창)
    조각배에 몸을 실어 망경창파(萬頃蒼波) 거슬러니
    斜陽無限意(사양무한의)
    석양에 정겨운 흥취 다함이 없구려
    回首更微茫(회수갱미망)
    고개들어 다시보니 망망(茫茫)한 장강(長江)만이 아득하구나.

    (註釋) 망경창파
    한없이 넓고 푸른 바다

    (4) 한강(寒崗) 정 구(鄭 逑)선생 시(詩) (波 : 물결 파) 자운(字韻)
    平生何事最爲多(평생하사최위다)
    평생에 무슨 일을 가장 많이 하였던고
    今日舡遊亦可歌(금일강유역가가)
    오늘의 뱃놀이에 노래 또한 정겹구나
    解后良朋仍共醉(해후양붕잉공취)
    좋은 벗 반겨 만나 모두 함께 취했도다.
    斜陽倒影照平波(사양도영조평파)
    석양(夕陽)에 비낀 그림자 평파(平波)에 드리우네

    (5) 송암(松菴) 김 면(金 沔)선생 시(詩) (欲 : 하고자 할 욕) 자운(字韻)
    江湖何幸奉諸賢(강호하행봉제현)
    강호(江湖)에 어진 벗님 다행이 반겨 맞아
    斫玉傾霞興不俗(작옥경하흥불속)
    옥잔에 술 기울이니 흥취 또한 고상하네
    充然有得又何求(충연유득우하구)
    이처럼 즐겁고 흡족한데 무엇을 또 구하리오
    今日留庵是所欲(금일유암시소욕)
    오늘은 초암(草庵)에 머무름이 오직 나의 소망(所望)일세

    (註釋) 초암(草庵)
    갈대나 짚, 풀 따위로 지붕을 엮은 암자.
     
    (6) 대암(大庵) 박성(朴惺) 선생 시(詩) (暮 : 저물 모) 자운(字韻)
    勝會偶然成(승회우연성)
    좋은 모임이 우연히 이루어져서
    又復之子遇(우부지자우)
    또 다시 여러 군자 반가히 만났네
    淸談徹襟懷(청담철금회)
    청담(淸談)을 나누니 회포(懷抱)가 풀리고
    扁舟任沿泝(편주임연소)
    조각배는 물결 따라 오르내리네
    輕陰動飇(경음동량표)
    가벼운 그늘에 서늘한 바람 불어오니
    莫愁江日暮(막수강일모)
    이 강에 해 저문다 근심치 마오

    (7) 육일헌(六一軒) 이홍량(李弘量)선생 시(詩) (天 : 하늘 천) 자운(字韻)
    隔濶良朋已半年(격활양붕이반년)
    좋은 벗님 소식 없이 반년을 지났더니
    淸江解后思無邊(청강해후사무변)
    청강(淸江)에서 만난 감회(感懷) 반갑기 한이 없네
    中流扣枻陶陶醉(중류구예도도취)
    중류(中流)에 뱃전(舷板)을 치며 취흥(醉興)이 도도(陶陶)한데
    不覺煙波物外天(불각연파물외천)
    자욱한 연파(煙波)속의 선경(仙境)인줄 몰랐도다.

    (註釋) 연파(煙波)
    멀리 연기(煙氣)나 안개가 부옇게 잔뜩 낀 수면(水面) (註釋) 선경(仙境)
    경치(景致)가 신비(神祕)스럽고 그윽한 곳

    8. 낙강칠현(洛江七賢) 소개
    (1) 이기춘(李起春 : 1541년∼1597년)
    본관은 성산(星山)이며 자는 계욱(季郁)이고 호는 옥산(玉山)이다. 밀직사(密直使)를 지낸 이언홍(李彦洪)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성현(聖賢)의 학문을 강구(講究)하였다. 고령군 대가야읍 본관2리 옥산마을에 옥산정사(玉山精舍)를 구축하고 벗들과 함께 성리학(性理學)을 강마(講磨)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송암(松菴) 김면(金沔)이 의병(義兵)을 일으킬 때 아무런 직책이 없이 일개 평민으로 진영(陣營)에 참여하여 부시(賦詩)짓는 것을 부지런히 도왔다. 낙강칠현(洛江七賢)과 교분이 두터웠으며 이들 중 수위(首位)를 차지하였다. 만년에 장재(張載)의 기철학(氣哲學)을 연구하였으며 송암(松菴) 김면(金沔)과 함께 도암서원(道巖書院)에 봉향(奉享)되었다.

    (2) 이  승(李  承 : 1552년∼1598년)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선술(善述)이며 호는 청휘당(晴暉堂)이다. 증(贈) 호조참의(戶曹參議) 이사운(李思雲) 아들로 인동현(仁同縣) 약복리(若木里)에서 태어나 이희운(李希雲)에게 출계(出系)하였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선조 21년(1588년)에 선공감(繕工監) 가감(假監)에 천거(薦擧)되어 제수(除授)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유성룡(柳成龍)에게 나아가 배웠다. 41세 때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송암(松菴) 김면(金沔)의 내왕모획(來往謀劃)을 맡았으며 성주기군장(星州起軍將)을 맡아 제1차 무계전투(茂溪戰鬪)에 참전(參戰)하였으며 그후 금산(金山), 성주(星州), 지례(知禮)에 있는 왜적을 격파하였다.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을 당해 성주목사 이수일(李守一)과 병사(兵使) 정기룡(鄭起龍)과 더불어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함에 있어 이미 용기산성(龍起山城)에 저장했던 양곡과 병기로 많은 전과(戰果)를 거두었다.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이 가탄(嘉歎)하여 “도학(道學)은 천년 동안 있을까 말까하는 유학자요(儒學者) 충효(忠孝)는 백세에 모범(模範)이라” 칭찬하면서 장계(狀啓)하였다.

    (3) 이홍우(李弘宇 : 1535년 ∼ 1594년)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자는 계용(季容)이며 호는 모재(茅齋) 또는 낙빈(洛濱)이다. 훈련원(訓練院) 봉사(奉事)를 지낸 이수(李樹)의 삼남이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송암(松菴) 김면(金沔)과 창의(倡義)하여 성주지역의 모병관(募兵官)으로 널리 충의지사(忠義志士)를 모으는 한편 공의 일군(一軍)은 이부산(伊傅山 : 현재 의봉산)에 본거지(本據地)를 두고 안언(安彦)전투 및 무계전투(茂溪戰鬪) 등 수차례 각종 전투에 참전하여 많은 전공(戰功)을 세웠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 뒤 유일(遺逸)로 진천현감(鎭川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않았다. 효제(孝悌)가 뛰어나 회연서원(檜淵書院)의 향현사(鄕賢祠)에 배향(配享)되었으며 후손들이 공의 유덕(遺德)을 추모하기 위하여 철종 5년(1854년) 고령군 성산면 삼대리에 추원재(追遠齋)를 세웠다.

    (註釋) 유일(遺逸)
    초야에 묻혀있는 선비로서 학식과 인품을 갖추고 있으면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경우 이들을 과거시험 없이 발탁하는 인재등용책을 말한다.

    (4) 정 구(鄭 逑 : 1543년 ∼ 1620년)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자는 도가(道可)이고 호는 한강(寒岡)이다. 충좌위(忠佐衛) 부사맹(副司孟)을 지낸 정사중(鄭思中)의 아들로 태어났다.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인(門人)이다. 1580년 창녕현감(昌寧縣監)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동복현감(同福縣監)을 거쳐, 이듬해 교정청낭청(校正廳郎廳)으로 『소학언해』·『사서언해』 등의 교정에 참여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통천군수(通川郡守)로 재직하면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다. 뒤에 우부승지(右副承旨),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형조참판(刑曹參判) 등을 지냈다. 성리설(性理說)은 이황(李滉)의 영향을 제일 많이 받은 부분으로 경전 가운데 특히『심경(心經)』을 중시하였으며 특히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었으며 근기남인(近畿南人) 실학파(實學派)에 영향을 주었다. 인조반정 직후인 1623년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으며, 1625년 문목(文穆)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성주의 회연서원(檜淵書院)·현풍의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祭享)되었다. ‘영남의 삼용(三容)’이라고 불렸던 홍기(弘器), 홍량(弘量), 홍우(弘宇) 삼형제와 공은 남매지간(娚妹之間)이 된다. 

    (5) 김 면(金 沔 : 1541년 ∼ 1593년)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자는 지해(志海)이고 호는 송암(松菴)이다. 경원도호부사(慶源都護府使)를 지낸 김세문(金世文)의 아들로 태어났다. 남명(南冥) 조식(曺植)과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양문(兩門)에서 수학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592년 5월 10일 정인홍(鄭仁弘)과 함께 정식으로 기병(起兵)할 것을 결의한 후 5월 22일 거창으로 가서 의병조직을 갖추고 개산포(開山浦), 무계(茂溪) 전투 등 10여차례의 큰 전투와 30여 소규모 전투를 통하여 거둔 전공으로 6월 29일 합천군수(陜川郡守)를, 9월 9일 장악원정(掌樂院正)과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11월 26일 경상도의병대장(慶尙道義兵大將)을 거쳐 이듬해 1월 4일 의병도대장(義兵都大將) 교서(敎書)를 받고 1월 29일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 겸 진주목사(晋州牧使)를 제수받았다. 사후 선조 40년(1607년)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정헌대부이조판서겸의금부사(正憲大夫吏曹判書兼義禁府使)로 추서(追敍)되고 도암서원(道巖書院)에 봉향(奉享)되었다.

    (6) 박 성(朴 惺 : 1549년∼1606년)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자는 덕응(德凝)이며 호는 대암(大菴)이다. 생원 박사눌(朴思訥)의 아들로 태어났다. 낙천(洛川) 배신(裵紳)에게 수학하고,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사사(師事)하였다. 김면(金沔)·이기춘(李起春)·최영경(崔永慶)·장현광(張顯光)·권호문(權好文) 등과 교유하였다. 선조 1년(1567년)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한 후 선조 24년(1591년) 사포서(司圃署) 사포(司圃)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출사(出仕)하였으며,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종사관(從事官)으로 군량 공급에 많은 공을 세워 공조좌랑(工曹佐郞)에 제수되었다.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이 발생하자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참모로 활동하였고, 주왕산성 대장(周王山城 大將)이 되었다. 송담서원(松潭書院)에 봉향(奉享)되었다.

    (7) 이홍량(李弘量 : 1531년 ∼ 1582년)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자는 중용(仲容)이며 호는 육일헌(六一軒)이다. 선조 1년(1568년) 증광(增廣)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하여 유일(遺逸)로 공릉참봉(恭陵參奉)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불취(不就)하였다. 덕계(德溪) 오건(吳健),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 존재(存齋) 곽준(郭䞭) 등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나누었다.  선조 20년(1587년) 공이 봉화산(烽火山) 자락에 정자(亭子)를 건축하고 사망정(四望亭)이라 칭(稱)하였다. 회연서원(檜淵書院)의 향현사(鄕賢祠)에 배향(配享)되었다.

    9. 맺는말
    사망정(四望亭)은 육일헌(六一軒) 이홍량(李弘量)이 낙동강변 덕양산(德陽山) 경승지(景勝地)에 정자를 짓어 세칭(世稱) 낙강칠현(洛江七賢) 등과 도의(道義)로 사귀면서 학문을 강마(講磨)하고 풍류(風流)를 즐기던 장수지소(藏修之所)이다. 2003년 11월 이곳 경내에 ‘낙강칠현 낭만공원’을 조성하고 ‘낙강칠현시비(洛江七賢詩碑)’를 세워 개산포(開山浦)에서 강정(江亭) 멍드미 사망정(四望亭)에 이르는 강 위를 선유(船遊)하던 선현들의 풍류운치(風流韻致)를 되돌아보게 하고 이들의 뛰어난 덕행(德行)을 밝혀서 천양(闡揚)하는 공간을 마련하였다. 낙강칠현(洛江七賢) 후손들이 매년 5월 29일 사망정(四望亭)에서 거행되는 낙강칠현(洛江七賢) ‘석채례(釋菜禮)’를 봉행하고 ‘낙강칠현시비보존회(洛江七賢詩碑保存會)’를 결성하여 칠현시비(七賢詩碑)를 영구히 보존·관리한다고 하니  우리 지역사회의 정신문화가 한단계 발전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관계당국과 문중에서 협의하여 낙강칠현(洛江七賢)의 고귀한 선비정신을 기리는 ‘ 전국 한시(漢詩) 백일장(白日場)’을 선유(船遊)의 시발점인 개경포(開經浦) 공원(公園)에서 개최할 것을 검토해 주기를 제안해 본다. 

    ​자료제공  : 이방현(李邦鉉)
                  육일헌(六一軒) 13세손
    집     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     리  : 최종동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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