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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고령지역 세거성씨(世居姓氏) 연원(淵源)을 찾아서

기사입력 2018.09.30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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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주기씨 덕양서당

     

    행주기씨(幸州奇氏) 덕산공파(德山公派)

     

    ‘고령지역 세거성씨(世居姓氏) 연원(淵源)을 찾아서’를 격주로 기획 연재한다. 씨족연원(氏族淵源), 현조(顯祖), 고령입향(高靈入鄕) 내력 및 시기, 입향조(入鄕祖) 이 후 역대 인물 등을 문헌적 고증(考證)을 근거로 밝힘으로써 각 문중 고유의 씨족연원(氏族淵源), 열조(烈祖)들의 위업(偉業), 올곧은 정신 및 문화유산(文化遺産)을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코자 하오니 관심 있는 문중들의 많은 참여를 바라며, 그 네 번째로 행주기씨(幸州奇氏) 덕산공파(德山公派)를 소개한다.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시조(始祖)
    행주기씨(幸州奇氏)의 득성시조(得姓始祖)가 된 “기우성(奇友誠)”은 백제 온조왕(溫祚王) 시절 나라의 기밀(機密)과 서민생활을 보살피는 최고의 지위인 시중(侍中)의 벼슬을 지냈고 그의 후손들은 백제는 물론 고구려, 신라까지 진출하여 크게 번성하였다. 그러나 기우성(奇友誠) 이후 계대(系代)를 알 수 없어 현종 5년(1664년) 갑진보(甲辰譜)를 편수(編修)할 당시 고려 인종 때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에 추증(追贈)된 기순우(奇純祐)를 1세조(一世祖)로 하였다.
    (2) 연원(淵源)
    ① 행주기씨(幸州奇氏)의 연원(淵源)은 고대 기자조선(箕子朝鮮: BC 1122년∼BC 194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문성대왕(文聖大王) 기자(箕子)는 원래 중국 은(殷)나라의 종친(宗親)으로서 태사(太師)의 자리에 있었으며 도덕정치(道德政治)와 성인(聖人)의 길을 강연하다가 기(箕)라는 땅의 문성왕(文聖王)으로 봉(封)해지자 기자(箕子)라 일컫게 되었다.
    ② BC 1122년 은(殷)나라가 주(周)나라 무왕(武王)에게 멸망하자 기자(箕子)는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간곡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충신(忠臣)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이라고 말하며 주(周)나라를 떠나 해동성지(海東聖地) 조선(朝鮮) 땅으로 들어왔다. 이에 조선의 백성들이 기자(箕子)의 충절(忠節)·성덕(聖德)에 감은(感恩)하여 왕(王)으로 추대하였다. 이로써 기자(箕子)는 단군조선(檀君朝鮮)에 이어 기자조선(箕子朝鮮)을 열었다.
    ③ 기원전 194년 기자(箕子)의 41세손 무강왕(武康王) 기준(箕準)은 위만(衛滿)의 침탈(侵奪)로 금마군(金馬郡: 현재 전북 익산군)으로 내려가 왕궁면(王宮面)에 도읍(都邑)을 정하고 국호(國號)를 마한(馬韓)이라 칭하면서 50여 소읍(小邑)을 통합해 다스렸다.
    ④ 그러나 기준(箕準)의 8세손이자 마한(馬韓)의 8대 임금인 원왕(元王) 기훈(箕勳)에 이르러 국운(國運)이 다시 기울게 되었다. 이에 원왕(元王)은 우성(友誠), 우량(友諒), 우평(友平) 등 아들 3형제에게 기(奇), 선우(鮮于), 한(韓)이라는 성(姓)을 하사(下賜)함으로써 우성(友誠)은 백제(百濟)에 입사(入仕)하여 덕양기씨(德陽奇氏) 즉 행주기씨(幸州奇氏)가 되었고, 우평(友平)은 고구려에 입사(入仕)하여 북원 선우씨(北原 鮮于氏)가 되고 우량(友諒)은 신라(新羅)에 입사(入仕)하여 상당한씨(上黨韓氏) 즉 청주한씨(淸州韓氏)가 되었다.(註釋) 입사(入仕)
    벼슬한 뒤에 처음으로 그 벼슬자리에 나감
    (3)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성씨(姓氏)
    기씨(奇氏), 한씨(韓氏), 선우씨(鮮于氏)는 후기 고조선 시조의 후손들의 성(姓)인 고조선 왕손(王孫)들의 성으로써 우리나라의 최고(最古) 성씨이다. 이들은 모두 기자(箕子)의 휴예(後裔)이며 이성동본(異姓同本)으로 서로 한 핏줄, 종씨(宗氏)라 여겨 지금까지도 통혼(通婚)하지 않는다.
    (4) 호남의 3대 명가(名家)
    호남의 명가(名家)는 “기(奇), 고(高), 박(朴)”이라는 말이 생겨나기까지 하였다.  행주기씨(幸州奇氏)는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 장흥고씨(長興高氏)는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충주박씨(忠州朴氏)는 눌재(訥齋) 박상(朴祥) 등 큰 인물의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2. 현조(顯祖)
    (1) 고려(高麗)
    ① 기윤숙(奇允肅)
    문하시랑(門下侍郞)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를 지낸 기수전(奇守全)의 둘째 아들이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공에 관하여 “고종 19년(1232년) 1월 임진일에 화의(和議)가 타결되어 몽고 군사가 철수하였는데, 이날 왕족인 회안공(淮安公) 왕정(王), 수재(首宰) 김취려(金就礪), 대장군 기윤숙(奇允肅) 등이 고종을 대신하여 몽고 사신을 위로하였으며 고종 42년(1255년) 12월에 문하시랑(門下侍郞)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로 삼았고 고종 44년(1257년) 4월에 졸(卒)하였으며 호방(豪放)하고 의협심(義俠心)이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공은 최충헌(崔忠獻) 집권기에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벼슬을 두루 지내면서, 행주기씨(幸州奇氏) 가문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공의 현손(玄孫)으로는 기철(奇轍)과 원나라 순제(順帝)의 황후인 기황후(奇皇后)가 유명하다. 시호는 강정(康靖)이다. 고려시대에 뛰어난 문장가로 이름을 떨친 이규보(李奎報)는 공에 대하여 의종, 명종, 신종 3대에 걸쳐 으뜸 벼슬을 지내며 40년간 부귀영화를 향락하고 의종 말기에 권신(權臣) 정중부(鄭仲夫)가 왕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중신(重臣)들을 함부로 주륙(誅戮)하는 전횡(專橫)을 일삼자 이를 설득하여 왕정(王政)으로 복귀시킨 공이 크다고 기록하였다.
    ② 기황후(奇皇后)
    아버지는 영안왕(榮安王)으로 추존(追尊)된 기자오(奇子敖)이고, 고려 말의 권신 기철(奇轍)의 누이동생이며 북원(北元) 소종(昭宗)의 어머니이다. 충숙왕 복위 2년(1333년)에 원나라의 휘정원(徽政院)에 있던 고려 출신 환관 고용보(高龍普)의 추천으로 궁녀가 되어 원나라 황제인 순제(順帝)의 총애를 받았다. 1339년 황자 아이유시리다라(愛猶識理達臘)를 낳아 제2황후로 책봉되었다. 황후가 된 뒤 곧 반대세력을 몰아내고 휘정원을 자정원(資政院)으로 이름을 바꾸어 이를 배경으로 막대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이와 같이, 원나라에서의 세력이 비대해짐에 따라 고려에서도 일족인 기씨(奇氏)의 세력이 기반을 다졌다. 기황후의 오빠인 기철(奇轍) 등은 권세를 휘두르다가 공민왕 5년(1356년) 공민왕의 반원개혁(反元改革) 때 주살(誅殺)되기도 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기황후는 공민왕을 폐위시키고 충숙왕의 동생 덕흥군(德興君)을 고려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공민왕 13년(1364년) 최유(崔濡)로 하여금 군사 1만으로 고려를 침공케 하였지만 고려의 최영(崔瑩) 장군에게 크게 패주함으로써 덕흥군 고려왕 옹립(擁立) 계획은 무산되었다. 1365년에는 전례를 깨뜨리고 정후(正后)가 되었으나, 1368년 원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행적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원나라에 의한 고려의 공녀(貢女) 징발을 금지하고 환관(宦官)의 징발을 축소하였으며 고려양(高麗樣) 즉 고려의 풍속과 제도를 전파하는데 공로가 있었다.
    (2) 조선 시대
    ① 기건(奇虔: 1390년∼1460년)
    자는 향원(向遠)이고 호는 현암(眩庵) 세칭 청파(靑坡)이다. 아버지는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낸 기면(奇勉)이다. 품행이 효성스럽고 청렴하여 주군(州郡)에서 추천해 올린 관리인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에 제수되었다. 그 뒤 외직으로 연안군수(延安郡守)와 제주목사(濟州牧使) 재임시 주민의 고충을 생각하고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이어서 내직으로 옮겨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형조참의(刑曹參議)·이조참의(吏曹參議)·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호조참판(戶曹參判)·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를 역임하였다. 단종이 즉위하자 대사헌(大司憲)이 되어, 당시 국왕의 유약함을 기화로 해 권력을 농단하던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의 횡포를 탄핵하였다. 그 뒤 평안도관찰사를 역임하고 벼슬이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이르렀다. 당시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권력을 전횡하면서 마침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관직을 버리고 두문분출(杜門不出)하였다. 세조가 다섯 번이나 찾았지만, 청맹(靑盲: 당달 봉사, 눈뜬 장님)을 빙자하고 끝내 절개(節槪)를 버리지 않았다. 나올(羅兀)을 창안해 부녀자들의 외출시 머리 덮개로 이용하게 해서, 우리나라 풍속에서 너울을 처음으로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뒤에 청백리(淸白吏)에 뽑혔으며, 전라남도 장성의 추산서원(秋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무(貞武)이다. 공의 사환(仕宦)과 청절(淸節)로 행주기씨(幸州奇氏)는 중흥(中興)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② 기대승(奇大升: 1527년 ∼1572년)
    자는 명언(明彦)이고 호는 고봉(高峰)·존재(存齋)이다. 중종 17년(1522년) 식년(式年)에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한 기진(奇進)의 차남이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기준(奇遵)이 그의 계부(季父)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명종 4년(1549년) 생원(生員)·진사(進士) 시험에 입격(入格)한 후 명종 13년(1558년)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그 뒤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와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겸(兼)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거쳐 1563년 3월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에 임명되었다. 1565년 병조좌랑(兵曹佐郞)·이조정랑(吏曹正郞)을 거쳐, 이듬해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사헌부헌납(司憲府獻納)·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사인(舍人)을 역임하였다. 1567년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을 거쳐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가 되었으며, 이어서 전한(典翰)이 되어서는 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에 대한 추증(追贈)을 건의하였다. 1572년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임명되었으며, 대사간(大司諫)·공조참의(工曹參議)를 지내다가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던 도중에 고부(古阜)에서 졸(卒)하였다. 시호(諡號)는 문헌(文憲)이며 광주 월봉서원(月峰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12년에 걸쳐 서신을 교환하였고, 그 가운데 1559년에서 1566년까지 8년 동안에 이루어진 사칠논변(四七論辨)은 유학사상 지대한 영향을 끼친 논쟁으로 평가되고 있다. 문헌공(文憲公) 고봉(高峰)으로 인하여 행주기씨(幸州奇氏)는 국반(國班)의 반열(班列)에 올랐으며, "高三峰不如奇一峰(고삼봉불여기일봉)" 즉 높은 세 개의 봉우리는 기씨(奇氏) 문중의 한 봉우리(고봉 기대승)보다 못하다는 뜻으로 고봉의 높은 학문을 칭송하는 글이다. 고봉(高峰)의 사상은 퇴계(退溪)와 벌인 ‘사단칠정(四端七情)’의 논쟁으로 유명하다. 사단(四端)은 ‘선한 마음의 이성(理性)’을 가르키고 칠정(七情)은 ‘인간의 본능적인 감정’을 말한다. 퇴계(退溪)는 사단(四端)이 리(理)에서 발생하고, 칠정(七情)은 기(氣)에서 발생한다고 보는 ‘이기이원론(二氣二元論)’을 주장하고 고봉(高峯)은 이(理)와 기(氣)를 합해서 보는 ‘이기일원론(二氣一元論)’의 입장을 취하였다. 고봉(高峯)의 주장은 9년 후배인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그 뒤를 잇고,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에게 영향을 미쳤다. (註釋) 국반(國班)
    나라에서 인정하는 양반(兩班) 즉 양반 중의 양반을 일컫는 말이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임진왜란 중 화의교섭(和議交涉)의 결렬로 선조 30년(1597년) 발생한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의 둘째 손자인 초명(初名) 기중선(奇仲宣) 개명(改名) 기영헌(奇齡獻)이 난을 피하여 누대(累代)에 걸쳐 세거(世居)하였던 선향지(先鄕地) 광주목 소고룡리(현재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룡동)를 떠나 17세의 청소년 몸으로 혈혈단신(孑孑單身) 방장산(方丈山) 즉 지리산으로 들어가 은거(隱居)하다가 부득이 당시 성주목 벌지면 소속 나정(羅亭) 마을로 피난(避難)하여 행주기씨 고령 나정 입향조(入鄕祖)가 됨으로써 후손들이 400여 년간 세거하게 되었다. 2004년 발행된 행주기씨 대동보 갑신보(甲申譜) 원편(元編)에 “丁酉再亂 逃命奔竄 轉居 星州羅亭(정유재란 도명분찬 전거 성주나정) 즉 정유재란을 당하여 목숨을 보전하기 위하여 바쁘게 도망하여 숨었다가 성주 나정으로 옮겨 살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조선시대
    ① 기영헌(奇齡獻: 1581년∼1655년)
    초명(初名)은 중선(仲宣)이며 호는 덕산(德山)이다. 전력부위(展力副尉) 충좌위(忠佐衛) 부사용(副司勇)을 지내고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된 기효민(奇孝閔)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유교 경전에 대한 지식과 예의범절(禮儀凡節)을 대대로 전승(傳承)해 오는 집안에서 생장(生長)하여 일찍부터 충효(忠孝)에 관하여 순수하고 깊은 가르침을 받았다. 여름엔 서늘하게 해 드리는 동온하청(冬溫夏淸)과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살펴 드리고 새벽에는 문안(問安)을 드리는 혼정신성(昏定晨省)을 하는 등 생효(生孝)을 다하였고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피난 가다가 길에서 왜적을 만나 죽었던 아버지 효민공(孝閔公)과 어머니 남원양씨(南原梁氏)가 겁박(劫迫)을 당하자 정절(貞節)을 지키고자 황룡강(黃龍江)에 몸을 던져 자살하자 슬픔을 이기지 못하면서 치상(治喪)을 극진히 행하고 단(壇)을 세워 제향(祭享) 하는 등 사효(死孝)를 다하여 향린(鄕隣)에서 추중(推重)하였다.
    (註釋)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
    선조가 1591년 조선 건국 초기부터 선조 때까지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세계(世系)가 고려의 권신(權臣)인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으로 200여년간 명나라에 잘못 기록되어 이를 시정해 달라고 주청했던 사건인 종계변무(宗系辨誣)에 공을 세운 신하들을 공신에 책록(策錄)한 것을 말한다.
    ② 기상규(奇相圭: 1841년∼1883년)
    자는 낙서(洛瑞)이고 호는 송오(松塢)이다.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지낸 유학(幼學) 기응욱(奇應郁)의 장남으로 태어나 백부(伯父)인 기응동(奇應東)에게 출계(出系)하였다. 고종 20년(1883년) 충훈부(忠勳府) 종5품(從五品) 벼슬인 도사(都事)에 제수(除授)되었으며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註釋) 수직(壽職)
    해마다 정월(正月)에 80세 이상(以上)의 관원(官員) 및 90세 이상(以上)의 백성(百姓)에게 은전(恩典)으로 주던 벼슬을 말한다.
    (2) 근·현대 인물
    ① 법조계(法曹界)
    △기진석(奇珍錫: 1982년)-부산지방법원판사 △기윤석(奇玧錫: 1984년)-국선전담 변호사
    ② 관계(官界)
    △기숙란(奇淑蘭: 1951년)-경산시의회 6대 부의장 역임 △기  원(奇  垣: 1953년)-안동시 도시건설국장 역임 △기세록(奇世祿: 1955년)-고령군의회 3기 의장 역임 △기언석(奇彦錫: 1955년)-제3사관학교졸, 육군 소령 예편 △기준현(奇峻玄: 1956년)-행정고시 합격, 호주 시드니 총영사관 영사,                            경상북도 부이사관 △기세왕(奇世王: 1965년)-동북지방 통계청 사무관 △기경호(奇景鎬: 1984년)-경찰대 졸업, 경찰청 경감 △기우전(奇宇田: 1961년)-대구지방법원 상주지원 집달관
    ③ 언론계(言論界)
    △기훈석(奇薰錫: 1978년)-KBS 프로듀서
    ④ 교육계(敎育界)
    △기우항(奇宇恒: 1936년)-경북대 명예교수,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기승권(奇承權: 1949년)-오상고등학교 교장, 금오공대 입학사정관 역임 △기영석(奇英錫: 1955년)-행정학박사, 목원대학교 19대 대학원장 역임 △기세희(奇世熙: 1956년)-구암중학교 교장 역임, 팔달중학교 교장 △기영욱(奇永旭: 1983년)-카이스트박사, 미국 스텐퍼드대학교 연구 교수
    ⑤ 의학계(醫學界)
    △기병수(奇秉秀: 1958년)-기병수 신경외과 원장 △기세길(奇世吉: 1959년)-기세길 내과원장 △기세호(奇世鎬: 1962년)-기세호 치과원장 △기세국(奇世國: 1969년)-차병원 외과 전문의, 차의과학대학교 외과 교수 △기세영(奇世暎: 1971년)-이노안과 원장 △기혜민(奇惠敏: 1982년)-김천제일병원 가정의학과장 ⑥ 금융계(金融界) △기정섭(奇正燮: 1946년)-국민은행 지점장 역임, 재경 행주기씨 덕산공파 회장 △기세열(奇世烈: 1947년)-제일은행 지점장 역임 △기광석(奇廣錫: 1947년)-IBK 기업은행 지점장 역임, 행주기씨 덕산공파 12대 주손
    ⑦ 실업계(實業界)
    △기우봉(奇宇奉: 1935년)-현대엔지니어링 대표이사 사장 역임 △기외호(奇外浩: 1949년)-삼성코닝 전무이사, 코리아헤럴드 헤럴드 경제 대표이사 역임 △기창희(奇昌熙: 1949년)-대한항공 부장 △기해석(奇海錫: 1950년)-대경골프연습장 대표 △기세진(奇世進: 1953년)-(주) 세원파서너 대표이사 △기보연(奇寶衍: 1954년)-삼보식품 대표 △기일형(奇逸亨: 1956년)-대성에너지㈜ 경영지원본부장(상무이사)

     

     

    자료 제공  : 주손(胄孫) 기광석(奇廣錫)
    집      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      리  : 최종동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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