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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래정(浮來亭)의 유래와 부래정기(浮來亭記) 고찰

기사입력 2018.09.06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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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자(亭子)는 풍류를 즐기고 경치를 완상(玩賞)하는 심리적 공간이며 재실(齋室)은 선조의 유덕(遺德)을 추모하고 종사(宗事)를 논의하는 종회(宗會)의 장소이다. 선인(先人)들의 숨결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고령지역의 정자(亭子)와 재실(齋室)의 유래를 격주 간격으로 연재해 소중한 문화유산인 정자(亭子)와 재실(齋室)을 재조명하는 기회를 가지고자 한다.

    1. 부래정(浮來亭) 소개


    조선 중기 학자이자 임란창의사(壬亂倡義士)이신 학암(鶴巖) 박정번(朴廷) 선생이 선조 36년(1603년) 학문을 강마 (講磨)하고 당대의 뛰어난 선비들과 교유(交遊)하면서 풍류(風流)를 즐기기 위한 장수지정(藏修之亭)으로 처음에는 예곡리 산 31번지 낙동강가 절경지(絶景地)에 영건(營建)하였으나 유구(悠久)한 세월속에 퇴락(頹落)되어 다시 산속에 중건(重建)하였고 후손들이 철종 8년(1857년) 북편(北便) 산기슭 새터에 학사(學舍) 겸 선영보호(先塋保護)와 종산관리(宗山管理)를 위해 신축(新築)하였으나 2002년 허물어졌다. 곽용환 고령군수의 배려로 낙동강(洛東江) 3대 문화권(文化圈) 사적지(史跡地) 복원사업(復元事業)의 일환(一環)으로 공사비 2억 8천만원 전액을 국고(國庫)에서 지원받아 2014년 우곡면 예곡리 산 30번지에 산지(山地) 사용 승인 382m²(115평) 면적으로 복원하게 되었다. 부래정(浮來亭) 복원기(復元記)는 13대 후손 돈헌(燉憲)이 근지(謹識)하였다. 이곳의 마당에 배치된 돌들은 원래 정자의 기초석(基礎石)이며 현판은 중건시 번각(飜刻)이다. 개진면 개포리 소재 개호정(開湖亭)에서 부래정(浮來亭)을 경유하여 부례관광단지(扶禮觀光團地)까지 약 4㎞ 남짓 구간은 ‘개경포(開經浦) 너울길’로 조성해 놓았으며 인근 부례관광단지에는 국토종주자전거길(MTB도로)의 이용자 숙박을 위한 유스호스텔형 바이크텔과 청소년들의 모험심과 모험심을 키워줄 수 있는 담력(膽力)운동을 할 수 있는 포레스트 어드벤처(Forest Adventure)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어 들리고 싶은 명소(名所)로 알려져 있다. 
    (주석) 번각(飜刻)
    한 번 새긴 책판 따위를 본보기로 삼아 다시 새김

    2. 부례(浮來) 지명(地名)과 부래정(浮來亭) 정자 명칭 유래


    (1) 부례(扶禮) 지명(地名) 유래
    원래 이곳의 지명은 서편 산 넘어 세거하는 고령박씨(高靈朴氏) 소윤공파(少尹公派) 후손들이 낙동강을 이용하는 내빈(內賓)을 맞이하던 나루터라 ‘도울 부(扶) 예도 례’ 즉 부례(扶禮)라고 칭하였다.
    (2) 부래정(浮來亭) 정자 명칭 유래
    임진왜란 때 창의기병(倡義起兵)하였던 학암(鶴巖) 박정번(朴廷) 선생이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침범할지도 모르는 왜병선(倭兵船)을 감시하기 위하여 ‘뜰 부(浮) 올 래(來)’ 즉 부래(浮來)를 붙여 건축하였다.

    3. 부래정(浮來亭)에 관한 문헌 기록


    (1) 내암집(來庵集) 제13권 주부(主簿) 박군(朴君) 비명(碑銘)
    스승인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이 근찬(謹撰)한 주부 박군 묘지명 병서〔主簿 朴君 墓誌銘 幷序)에 부래정(浮來亭)에 관한 내용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대가천과 낙동강 사이에 살면서 경치 좋은 곳을 골라 두 개의 정사를 지었으니 학암정(鶴巖亭)과 부래정(浮來亭)이었는데 그곳에서 늙어가면서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았다. 만년에 문연재(文淵齋)를 짓고 때때로 고을 자제들을 모아 학문을 강론하고 글을 읽었으니 이로운 바가 아주 많았다.”

    居在倻川洛水間 擇勝構兩精舍曰鶴巖曰浮來 老焉不求知 晩建文淵齋 時會鄕子弟講誦 所益甚多

    (註釋) 박군(朴君)
    박정번(朴廷, 1550~1611)으로,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군신(君信), 호는 학암(鶴巖)이다. 정인홍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창의하였다.

    (2) 용담집(龍潭集) 제1권 박군신(朴君信) 정번(廷)에 대한 만시 2수
    용담(龍潭) 박이장(朴而章)이 생전에 부래정(浮來亭)에서 종유(從遊)하였던 학암(鶴巖) 박정번(朴廷)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지었던 만시(輓詩)에 부래정(浮來亭)이 언급되어 있다.
     
    “頃我還鄕日 / 전에 내가 고향으로 돌아오던 날은
    方君臥病秋 / 마침 그대가 몸져누운 때였지
    音容三載隔 / 음성과 모습을 삼 년 동안 못 보았고
    歡樂一場休 / 기쁨과 즐거움은 한바탕 끝이 났네
     石火俄驚裂 / 예기치 못한 죽음에 갑자기 놀라 가슴이 찢어지고
     風花不暫留 / 아름다운 그대 모습 잠시도 머무르지 않네
     浮來 【亭名】 今寂寞 / 부래정 - 정자 이름이다 - 이제 적막하니
     無路更從遊 / 다시 어울려 놀 길이 없네”

    (3) 봉산욕행록(蓬山浴行錄)
    1617년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이 신병 치료를 위해 동래 온천욕을 다녀오는 과정을 제자인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가 기록한 책인 『봉산욕행록(蓬山浴行錄)』에 부래정(浮來亭)에 관한 내용이 있다. 봉산(蓬山)은 동래(東萊)의 다른 이름이고, 욕행록(浴行錄)은 온천을 즐겼다는 기록이다.

    “ 음력 7월 21일 모인 벗이 모두 20여명이 되었다. 분향하고 도동서원(道東書院)의 사당(祠堂)을 참배하고 간단한 가마를 타고 산위에 올라 외증조부인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분묘를 참배한 후 배에서 내렸다. 곽영희 등이 뱃머리에서 하직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어목정(漁牧亭)과 부래정(浮來亭)을 지날 때 역풍(逆風)이 다시 크게 일어나므로 대암(巖 : 대바위) 앞에 이르렀다.”

    二十一日 諸友二十餘人 焚香謁廟 先生以肩輿上山 展謁墳墓後下船 郭永禧等拜辭船頭 過漁牧浮來兩亭 逆風復大起 至巖前

    4. 부래정(浮來亭) 편액시(篇額詩) 문연회일유감(文淵會日有感)
       학암(鶴巖) 박정번(朴廷)

    文淵勝會知何日 / 문연(文淵)의 성대한 모임 아느뇨 어느날고
    屈指如今二十年 / 헤어보니 지금까지 이십년이 되었도다.
    淸江此夕重承誨 / 맑은 강 이날 저녁 거듭 가르침을 받자오니
    經亂餘生幸獨存 / 난리지나 남은 생애 다행히 온전하네
    億昔鶴巖簪日 / 옛날 학암정 회합날을 추억하니
    如今一十九回年 / 지금까지 19년이 돌아갔네
    高儀更奉風塵後 /  높은 거동 난리 뒤에 다시 받자오나
    何幸餘生得苟全 / 남은 생애 구차히 보전함이 다행인가
    文淵洛水渾依舊 / 문연(文淵)과 낙동강은 모두가 옛날 같은데
    人世悲歡二十年 / 세상살이 슬프고 기쁨이 이십년이구나
    此夕從遊悽感處 /  이날 저녁 모임은 구슬픈 곳이로다.
    松庵物色已無全 / 김송암의 모습은 이미 온전히 없구나

    (註釋1) 문연(文淵)
    숙종 21년(1695년)에 죽연(竹淵) 박윤(朴潤), 낙락당(樂樂堂) 박택(朴澤), 월오(月塢) 윤규(尹奎), 학암(鶴巖) 박정번(朴廷), 매헌(梅軒) 최여설(崔汝楔) 등 5현을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우곡면 월오리에 건립하여 향사하였던 문연서원(文淵書院)을 뜻한다.
    (註釋2) 잠합(簪)
    원문의 ‘잠합(簪)’은 《주역》 〈예괘(豫卦) 구사(九四)〉에 “붕(朋)이 합잠(簪)했다.”라고 하였는데, 그 주석에 “합()은 합친다는 뜻이고 잠(簪)은 빠르다는 뜻으로 모든 벗이 동시에 빨리 온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5. 복원된 부래정(浮來亭) 구조
    전면 3간, 측면 2간, 중층(中層), 배흘림 기둥 9척(尺), 우물천정

    6. 부래정(浮來亭)을 영건(營建)한 학암(鶴巖) 박정번(朴廷) 소개
    자는 군신(君信)이고 호는 학암(鶴巖)이다. 낙랑당(樂樂堂) 박택(朴澤)과 도사(都事)를 지낸 최필손(崔弼孫)의 따님인 양천최씨(陽川崔氏) 사이에서 명종 5년(1550년) 태어났다. 백부(伯父)인 박일(朴溢)에게 출계(出系)하였다. 1566년 월오(月塢) 윤규(尹奎) 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으며 1569년 낙천(洛川) 배신(裵神) 선생에게 취학하고 1571년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의 문인이 되었다. 1585년 도진(桃津)에 학암정(鶴巖亭)을 건립하고 문연서당(文淵書堂)을 개설하여 향린(鄕隣)의 아동들을 가르쳤다. 1592년 6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백형(伯兄) 양죽당(養竹堂) 정완(廷琬)과 창의(倡義)하여 송암(松庵) 김면(金沔) 진영에서 참모(參謀) 장서기(掌書記)로 모획(謨劃) 활동을 하였다. 가형(家兄) 정완(廷琓)과 가동(家) 70여명을 이끌고 낙동강 개산포(開山浦)에 포진(布陣)하고 날이 저물 무렵을 기하여 왜병선(倭兵船) 5척을 화공(火攻)하여 임금의 영정(影幀) 1족(簇)과 금으로 장식한 안장인 금안(金鞍) 한 벌 및 내탕(內帑 : 임금의 사사로운 재물)의 진귀한 보물을 노획(擄)하여 송암(松庵) 진중(陣中)에 보냈다. 대암(大庵) 박성(朴惺), 존재(存齋) 곽준(郭),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등과 도의(道義)로 사귀었다. 1597년 공과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는 종매제간(從妹弟間)이므로 정유재란 때에는 경상좌도(慶尙左道) 방어사(防禦使)인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화왕산(火旺山)에 입성하였다. 1599년 일천(逸薦)으로 예빈시(禮賓寺) 주부(主簿)를 제수 받았으나 불취(不就)하고 학암정(鶴巖亭)을 복구하였다. 1603년 부래정(浮來亭)을 영건(營建)하고 매월 초하루 후학(後學)을 가르쳤다. 공은 한강(寒岡) 정구(鄭逑)보다 7년 연하(年下)였지만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스승으로 깍듯하게 섬겼으며 명종 38년(1605년) ‘을사선유(乙巳船遊)’때는 시종일관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수행하였다. 공이 졸(卒)하였을 때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만사(輓詞)와 제문(祭文)을 지어 특별하게 애도(哀悼)한 것에서 긴밀했던 학연(學緣) 을 엿볼 수 있다. 광해군 3년(1611년) 2월 22일 향년 62세로 기세(棄世)하였다. 묘는 고령군 개진면 신촌후(新村後) 독산(獨山) 술좌(戌座)에 있다. 묘갈명은 갈암(葛菴) 이현일(李玄逸)이 지었다. 숙종 22년(1696) 문연서원(文淵書院)에 입향시(入享時) 유림의 상소(上疏)에 의하여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로 증직(贈職)되었다. 고종 8년(1871년) 후손들이 2권 1책 학암문집(鶴巖文集)을 간행하였다. 문연서원(文淵書院)과 임난호국영남충의단(壬亂護國嶺南忠義壇)에 배향(配享)되었다. 2012년 후손들이 학암(鶴巖) 박정번(朴廷) 선생 사적비(史蹟碑)를 세웠다. 배위는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지낸 규(赳)의 따님인 현풍곽씨(玄風郭氏)이다.

    6. 부래정기(浮來亭記)
    고령군의 강가에 한 고을이 있는데 도원(桃源)이다. 산을 기대고 물이 둘러서 옷감과 오곡이 잘되고 그윽하고 넓고 밝아서 은둔군자(隱遁君子)가 살만한 곳이다. 도원 뒤의 고개를 넘으면 낙동강이 지나가는 곳에 정자가 있는데 부래정(浮來亭)이다. 강 위에 임(臨)하면 사방이 넓게 뚫려서 도원 가는 길을 다시 찾을 수 있다. 학암(鶴巖) 박선생은 한강(寒岡) 선생 문하에서 학문을 통달하였으며 임진왜란을 당하여 공(功)이 있으나 안주(安住)하지는 않고 물러나 도원에 살면서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이곳에 정자를 또 세우고 마침내 노후에 사색하며 노닐었도다. 상상하건대 학(鶴) 같이 고상한 풍채로 공허히 자적(自適)하면서 왕래했을 것이다. 쓸쓸하고 외로우면 옛 집에 돌아오고 소회(所懷)를 풀고는 이 정자에 오른다. 이렇게 선생은 안팎으로 법도(法度) 기르기를 벗했다. 남쪽으로 바라보면 화왕산성(火旺山城)이니 곽망우당(郭忘憂堂)의 의열(義烈)을 가히 잡을 듯하고 당일로 왕래하면서 왕실(王室)을 위해 도왔다. 진실로 공(公)과 더불어 창의(倡義)한 제군자(諸君子)도 같은 바다. 그 충분강개((忠憤慷慨)가 오히려 숲속에 숨은 자와 비슷한 바가 있겠는가. 동쪽으로 바라보면 대니산(戴尼山)으로 문경공(文敬公)의 도덕이 빛나니 이 산과 더불어 높고 험준(險峻)함이 같도다. 한휜당(寒暄堂) 도학지(道學地)가 또 그 북쪽에 있은 즉 온화하고 강직한 제공(諸公)들이 같이 뱃놀이로 받음을 입었으니 지금 그 몇 해이리오. 이게 다 공(公)이 처신한 바다. 맑고 시원한  이곳에 노후의 계획을 맡기고 조그만 곳에 멀었던 정을 받아들이니 그것이 근본이 확실한 교훈이 존재하는 바로 독실한 벗 사이의 고상하고 청아(淸雅)한 향기가 풍기니 우리들이 힘써 덕을 닦고 공부할 곳이다. 돛단배가 바람을 만남이요 백사장에 새는 구경하는 이를 위함이다. 특히 말년에는 어찌 옳지 아니하겠는가. 선생이 돌아가신지 300년이 지나고 정자(亭子)는 아직 존재하는데 박씨들은 옛 기문(記文)이 없어 나에게 갑자기 부탁하는데 나는 사양하지 못하고 그 유집(遺集)과 기록을 근거로  되풀이해서 살펴보기 위하여 또 반복하고는 받들었다. 지금 천하는 육침(陸沈)되었으나 정자에 올라 바라보니 더욱 예스럽고 선생의 후사를 위함이다. 그리고 선생의 정자에 오르는 자는 반드시 충효(忠孝)의 전승(傳承)을 가슴에 간직할 바를 생각해야 할 것이며 벗에게 강론(講論)함이 사우(師友)의 도리일 것이다. 알지 못해라. 제(諸) 박씨들이 아마 수긍(首肯)하려는지

    기미년(1895년) 월 일 전의(全義) 이종기(李鍾杞) 지음

    (註釋) 육침(陸沈)
    현인(賢人)이 속세(俗世)에 숨기는 일
     
    靈川之汭 有區焉曰桃源 山帶水 宜桑麻五穀 窈廓爽朗 隱遯君子之所捿息也 源之後踰一嶺而洛江過之 有亭曰浮來 臨于江上 四望遼豁 所謂更覓桃源路者也 鶴巖先生朴公以岡門先達 當龍蛇之亂 有功不居 退而居桃源以自晦 旣又築亭于此 終老焉 想其鳩鶴 往來自適 寥濩而歸舊第 暢而登斯亭 是先生之表裏交養法也 南望火旺山城 郭忘憂之義烈可 而當日往來勤王 寔公與倡義諸君子之所同也 其忠憤慷慨 尙有於林之間者否 東望戴尼 我文敬先師道德光輝 與此山同其 而寒老泗陽 又在其北 則誾侃諸公之同舟奉袂者 今幾星霜矣 此皆公平日所身歷者 而寄晩計於淸凉 納遐情於方寸 其所以存苞桑之戒而篤芝蕙之薰者 無非吾進德修業之地 而彼風帆沙鳥之爲景物役者 特末爾 豈不哉 先生沒且三百年 而亭尙存 諸朴氏以舊無記文 猥以屬不 余辭不獲則敬爲按覆其遺集而記其可據者 且復之曰今天下陸沈矣 亭上之觀  猶夫昔也 爲先生之後而登先生之亭者 必思所以服膺於忠孝之傳 講明乎師友之道者矣 不知諸朴氏首肯否

    7. 맺는말
    부래정(浮來亭)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학암(鶴巖) 박정번(朴廷) 선생께서 낙동강가 경승지(景勝地)에 정자를 짓어 물외한인(物外閒人)으로 음풍농월(吟風弄月)하면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한 삶을 즐기고 당대의 명사(名士)인 한강(寒岡) 정구(鄭逑), 대암(大庵) 박성(朴惺), 존재(存齋) 곽준(郭),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등과 도의(道義)로 사귀면서 학문을 강마(講磨)하였던 곳이었으며 고령박씨 일문이 누정(樓亭) 문화(文化)를 꽃피웠고 그 정수(精髓)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곳이다. 낙동강은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이 부강정(浮江亭)에서 동래(부산) 온정(溫井)까지 온천욕을 겸한 45일간 선유(船遊)를 했던 봉산욕행(蓬山浴行)의 현장이며 낙강칠현(洛江七賢)이 풍류(風流)와 시회(詩會)를 즐겼던 선유(船遊)의 공간으로 잘 알려져 있다. 따라서 우곡면 부래정(浮來亭)으로부터 성산면 사망정(四望亭)에 이르는 낙동강 물길을 따라 선유(船遊)와 시회(詩會)를 겸했던 선현의 문화유산인 ‘낙동강 뱃놀이(船遊)의 재현(再現)’을  관광자원화(觀光資源化)하여 우리 지역에 새로운 선유문화(船遊文化)로 잉태(孕胎)되기를 기대한다.


    - 집필 향토사학자 겸 시민기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최종동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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