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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고령지역 세거성씨(世居姓氏) 연원(淵源)을 찾아서

기사입력 2018.08.26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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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돈모재. 우곡면 답곡리 소재

    현풍곽씨(玄風郭氏) 죽재공파(竹齋公派)  

     

    본지는 ‘고령지역 세거성씨(世居姓氏) 연원(淵源)을 찾아서’를 격주로 기획 연재한다. 씨족연원(氏族淵源), 현조(顯祖), 고령입향(高靈入鄕) 내력 및 시기, 입향조(入鄕祖) 이 후 역대 인물 등을 문헌적 고증(考證)을 근거로 밝힘으로써 각 문중 고유의 씨족연원(氏族淵源), 열조(烈祖)들의 위업(偉業), 올곧은 정신 및 문화유산(文化遺産)을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코자 하오니 관심 있는 문중들의 많은 참여를 바라며, 그 두 번째로 현풍곽씨 죽재공파(竹齋公派)를 소개한다.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현풍곽씨(玄風郭氏) 시조(始祖)
    현풍(포산) 곽씨대동보에 의하면 중국 관서(關西) 홍농인(弘農人)으로 고려에 입국하여 고려 인종 16년(1138년) 등과하여, 평장사(平章事)와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고 포산군(苞山君)의 봉읍을 받은 곽경(郭鏡)을 시조로 한다.


    (2) 문훈(門訓)
    충효세업(忠孝世業) 청백가성(淸白家聲)
    나라에 충성하고, 어버이에게 효도함을 대대로 내려오는 업으로 삼고 청렴,결백한 정신과 행동으로 집안의 명예와 명성으로 삼는다. 


    (3) 삼강(三綱)의 문중(門中)
    삼강(三綱)은 충(忠), 효(孝), 열(烈)로 요약된다. ‘현풍 곽씨 12정려각(旌閭閣)’은 현풍 곽씨가 ‘도덕문중(道德門中)‘임을 나타내는 자랑스러운 표상(表象)이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구휼기관(救恤機關)인 유비창(有備倉)의 종7품 승(承)을 지낸 곽연옥(郭璉玉)의 아들인 곽윤명(郭允明)은 개성부윤(開城府尹)을, 곽윤광(郭允光)은 병조전서(兵曹典書)를, 곽윤현(郭允賢)은 봉익대부(奉翊大夫)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냈다.

    2) 조선시대


    ① 곽안방(郭安邦)
    자는 여주(汝柱) 호는 이양(尼陽)이며 의영고사(義盈庫使)를 지낸 곽득종(郭得宗)의 아들로 태어났다. 무과에 급제한 뒤 세조 1년(1455년) 세조의 등극을 도운 공으로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3등에 녹훈(錄勳)이 되었다. 세조 3년(1457년) 진무(鎭撫)를 역임하였고 세조 13년(1467년)에는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적개원종공신(敵愾原從功臣)에 책봉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해남현(海南縣) 명환(名宦)에는 해남현감(海南懸監), 곽안방에 대해 “은혜로운 정치를 했으므로 백성들이 지금도 그를 사모하고 있다.”라고 기록해 놓았으며 선정을 베풀어 고을 백성들이 칭송하며 '생사당(生祠堂)'을 세웠다. 세조 연간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으며 숙종 33년(1707년) 현풍 이양서원(尼陽書院)에 제향하였다.


    ② 곽간(郭 : 1529년∼ 1593년)
    자는 원정(元靜)이며 호는 죽재(竹齋)이다. 사인(士人) 곽지견(郭之堅)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상산김씨(商山金氏)로 초계군수(草溪郡守)와 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을 지낸 김수돈(金守敦)의 딸이다.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 정암(定庵) 곽월(郭越)과 호조참의(戶曹參議) 만축재(晩築齋) 곽규(郭赳)와는 종형제지간이며 홍의장군(紅衣將軍)으로 알려진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의 당숙(堂叔)이다. 일찍이 낙천(洛川) 배신(裵紳) 문하에서 예학(禮學)을 공부하였으며 명종 1년(1546년) 병오(丙午)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명종 5년(1550년) 형조좌랑(刑曹佐郞)에 임명되었다. 명종 11년(1556년) 대동찰방 겸 수은어사(大同察訪兼搜銀御史)로 있을 때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명종(明宗) 왕비(王妃)인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沈氏)의 종조계부(從祖季父) 심통원(沈通源)의 짐이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모두 뒤져서 불살라버렸고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불교의 부흥을 꾀하자 이에 반대하는 상소(上疏)를 하였다가 언관(言官)의 자리에서 밀려났다. 그 뒤 보복이 두려워 10여 년 동안 피신(避身)하여 살았다. 심통원(沈通源)이 파직당하고 문정황후(文定王后)가 죽고나서야 38세에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으로 복직(復職)하였으며 그 후 공조·형조·예조의 좌랑과 정랑·통례원통례(通禮院通禮)·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장악원판사(掌樂院判事)·사제감정(司宰監正)·종부시정(宗簿寺正)·영천군수·공주목사·강릉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64세의 노구(老軀)를 이끌고 서사원(徐思遠)과 함께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막하(幕下)에서 사람들을 불러서 군대를 모집하는 일을 맡아보던 초모관(招募官)이 되어 싸우다가 김성일이 진주에서 전염병으로 별세하자 진영(陣營)이 와해(瓦解)되어 돌아오던 중 여사(旅舍)에서 병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저서로는 『죽재문집(竹齋文集)』2권 1책이 있다. 고령군 쌍림면 월막리에 있었던 월암사(月巖祠)에 봉향되었으나 훼철(毁撤)되자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화산리 898번지 소재 화산서원(花山書院)에 제향(祭享)하고 있다. 후손들은 공의 유업(遺業)과 학문을 기리기 위해 1832년 고령군 우곡면 답곡리에 돈모재(敦慕齋)를 건립하였다.


    ③ 곽재우(郭再祐 : 1552년 ~ 1617년)
    자는 계수(季綏)이며 호는 망우당(忘憂堂)이고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아버지는 황해도관찰사를 지낸 곽월(郭越)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국에서 처음으로 4월 22일 창의기병(倡義起兵)하였으며 천강(天降) 홍의장군(紅衣將軍)으로 불리며 정암진(鼎巖津)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초유사 김성일이 장계(狀啓)를 올려 유곡찰방에 제수하고 형조좌랑에 승진시켰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정유재란 당시 경상좌도방어사로서 창녕 화왕산성(火旺山城)을 굳건히 지켰다. 광해군 2년(1610년)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역임하였고, 이후 함경도관찰사를 거쳐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병마절도사·삼도수군통제사·한성부 좌윤 등 관직제수를 거부하였다. 숙종 35년(1709년) 병조판서겸 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으며 그의 사우(祠宇) 충현사(忠賢祠)에는 예연서원(禮淵書院)이라는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④ 곽종석(郭鍾錫 : 1846년∼1919년)
    아명(兒名)은 곽석산(郭石山)이며 경술국치(庚戌國恥) 후 곽도(郭)라 하였다. 자는 명원(鳴遠)이고 호는 면우(宇)이다.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초포(草浦)에서 곽원조(郭源兆)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25세가 되던 겨울에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문하로 들어가 사단십정경위도(四端十情經緯圖)를 지었다. 사단(四端)은 이(理)를 주로 하고 십정(十情)은 기(氣)를 주로하는 것인데 모두가 이(理)가 기(氣)를 타는 것은 같은 것이라 하여 주리설(主理設)의 입장을 보여줬다. 51세 때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의 공관에 열국(列國)의 각축(角逐)과 일본의 침략을 규탄(糾彈)하는 글을 발송하였다. 1899년 고종 초기 음보(蔭補)로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이 되었으며, 1903년 비서원승(秘書院丞)에 특진하였고, 이어서 참찬(參贊)으로 시독관(侍讀官)을 겸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조약의 폐기와 조약 체결에 참여한 매국노를 처형하라고 상소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 유림(儒林)들의 궐기를 호소하고, 거창(居昌)에서 김창숙(金昌淑)과 협의하여 파리의 만국평화회의에 독립호소문을 보냈으며 소위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의 주동자로 체포되어 2년의 실형을 받았으나 병보석으로 풀려나 그해 8월 세상을 떠났다. 이황(李滉)의 학문을 계승한 스승 이진상(李震相)에게서 성리학을 이어받아 주리(主理)에 입각한 이기설(理氣說)을 주장하였다. 저서에 《면우문집(宇文集)》이 있다. 1963년 건국훈장(建國勳章) 독립장(獨立章)이 추서(追敍)되었다.


    ⓒ 종산재. 쌍림면 월막리 국밭 소재​

    3. 고령(高靈) 입향(入鄕)

    곽재용(郭再容)이 현풍에서 1600년경 낙동강 건너편인 고령군 우곡면 답곡리로 이거(移居)하여 세거지(世居地)를 이루었고 차남인 곽재정(郭再定) 후손인 태허정(太虛亭) 곽홍지(郭弘址)가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칠세손(七世孫)인 현와(弦窩) 이도(李)의 사위가 됨으로써 그 당시 풍습인 서류부가혼(留婦家婚)의 관습에 따라 처향(妻鄕)인 고령군 쌍림면 귀원동 서재골에 이거(移居)한 후 다시 고령군 쌍림면 월막리 국전(菊田)으로 옮겨 살아 세거지(世居地)를 이루었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조선시대


    ① 곽린(郭 : 1577년∼1627년)
    자는 경수(景秀)이고 호는 국헌(菊軒)이다. 종사랑(從仕郞)을 지낸 재용(再容)의 아들로 태어나 장사랑(將仕郞)을 지낸 숙부 재정(再定)에게 출계(出系)하였다. 광해군 10년(1618년) 무오(戊午)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하였다.


    ② 곽홍지(郭弘址 : 1600년∼1656년)
    자는 자구(子久)이고 호는 태허정(太虛亭)이다. 생원(生員)을 지낸 곽린(郭)의 아들로 태어났다. 인조 13년(1635년)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군자감(軍資監) 참봉(參奉)·성균관(成均館) 학유(學諭)·광흥창(廣興倉) 부봉사(副奉事)·황산찰방(黃山察訪)·전라도(全羅道) 도사(都事)·예조정랑(禮曹正郞)·공조좌랑(工曹佐郞)을 거쳐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을 지냈다. 인조 24년(1646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의 연경(燕京)을 다녀오고 창원부사(昌原府使) 등 외직(外職)에도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당대의 명류(名流)인 수봉(秀峯) 이여익(李汝翊), 현와(弦窩) 이도(李) 등과 교우(交友)하였다. 효종 5년(1654년) 서울 삼청동(三淸洞)에서 도회(道會)를 여니 관직(官職)에 있는 사람이 15인이고 유생(儒生) 11명이었는데 고령(高靈)을 대표하여 공조좌랑(工曹佐郞)의 신분으로 참석하였다.


    ③ 곽홍규(郭弘圭 : 1606년 ∼?)
    자는 자장(子章)이며 생원(生員) 곽린(郭)의 아들로 태어났다. 인조 11년(1633년) 계유(癸酉) 생원시(生員試)에 입격하였다. 태허정(太虛亭) 곽홍지(郭弘址)의 둘째 동생이다.


    ④ 곽감(郭鑑 : 1634년 ∼ ?)
    자는 국보(國寶)이다. 유학(幼學) 곽홍채(郭弘埰)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현종 10년(1669년)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하였다.


    ⑤ 곽기(郭基 : 1735년∼ 1775년)
    초휘(初諱)는 후완(厚完)이며 자는 덕부(德夫)이고 호는 정관재(靜觀齋)이다. 기오헌(寄傲軒) 곽태주(郭泰柱)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과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의 문인(門人)이다. 대산속이주해(大山屬以註解)와 도산시집(陶山詩集)에 주해(註解)가 없는 것을 흠결(欠缺)로 여겨 일찍이 뜻을 두고 궁구(窮究)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였다. 월암사(月巖祠)에 제향(祭享)되었으나 1869년 월암사(月巖祠)가 훼철(毁撤)되자 1932년 이후부터 종산재(鍾山齋)에서 제향(祭享)하고 있다.


    ⑥ 곽명한(郭溟翰 : 1770년∼1809년)
    자는 남위(南爲)이고 호는 동호(東湖)이다. 유생(儒生) 연(延)의 아들로 태어났다. 정조 19년(1795년)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하였다. 당대의 명유(名儒) 두와(窩) 최흥벽(崔興璧), 송서(松西) 강운(姜橒)과 친밀하게 교유(交遊)하였다. 시문집(詩文集)인 동호유고(東湖遺稿)가 전한다.


    ⑦ 곽세한(郭世翰 : 1760년∼1789년)
    일휘(一諱) 세헌(世憲)이며 자는 가헌(可憲)이고 호는 낙와(樂窩)이다. 정관재(靜觀齋) 곽기(郭基)의 아들로 태어났다. 문학과 재행(才行)이 뛰어나 사림(士林)들이 흠모(欽慕)하였다. 이회근(李晦根), 최흥벽(崔興壁), 박문국(朴文國)) 등 제현과 같이 지은 남귀창수록(南歸唱酬錄)은 귀중한 시집으로 전하고 유고(遺稿)가 있다.


    ⑧ 곽후근(郭厚根 : 1843년 ∼1911년)
    자는 문극(文極)이고 호는 구담(龜潭)이다. 유학(幼學) 곽성구(郭聖九)의 아들로 태어난 후 백부(伯父) 곽성수(郭聖洙)에게 출계(出系)하였다. 남려(南黎) 허유(許愈), 면우(宇) 곽종석(郭鍾錫), 유천(柳川) 이만규(李晩),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 강재(剛齋) 이승희(李承熙)와 더불어 도의(道義)로 교유(交遊)하였으며 관련 간찰(簡札) 백여 점과 안동에서 시행된 과거응시자들이 제출한 답안지 혹은 채점지인 시권(試券)과 유고(遺稿)가 남아있다.

    (2) 근대


    ① 곽걸(郭杰 ; 1868년∼1926년)
    자는 회주(晦周)이고 호는 국전초부(菊田樵夫)이다. 구담(龜潭) 곽후근(郭厚根)의 아들로 태어나 숙부(叔父) 곽영근(郭塋根)에게 출계(出系)하였다. 공은 어릴 때부터 선고께서 남려(南黎) 허유(許愈), 면우(宇) 곽종석(郭鍾錫), 유천(柳川) 이만규(李晩),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 강재(剛齋) 이승희(李承熙)와 더불어 도의(道義)로 교유(交遊)하여 유가(儒家)의 가르침을 받았다.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巴里講和會議)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곽종석(郭鍾錫), 김복한(金福漢) 등이 유림 대표로 작성한 독립청원서(獨立請願書)에 서명하고 항일운동(抗日運動)을 전개하던 중 피체(被逮)되어 모진 고초(苦楚)를 겪었으며 끝내 병(病)을 얻어 기세(棄世)하였다. 1998년 8월 14일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功勳)을 기리어 건국포장(建國褒章)을 추서(追敍)하였다.

    (3) 현대인물


    ① 곽태진(郭泰珍 : 1917년 ∼2016년)
    호는 해파(海波)이며 곽종의(郭鍾義)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건국대학교 법정대학 정치외교학과 졸업하였다. 1942년 3월 호의단(護義團)의 성일영(成一永), 도종표(都鍾杓) 등 동지 100여 명을 규합하여 현풍신사(玄風神社)를 불살랐고 고령, 청도 등의 경찰서에서 무기를 탈취하여 무장봉기(武裝蜂起)를 계획하던 중 1945년 5월 창녕군 이방면 산중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사형선고(死刑宣告)를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50년 5월 30일 치러진 제2대 국회의원 선거 때 고향인 고령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나와 당선되었으며 국민방위군(國民防衛軍) 사건(事件)의 진상을 폭로하였다. 1960년 7월 29일 치러진 제5대 국회의원 총선거 때 고령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임기 4년의 민의원(民議院)에 당선되었으나, 5·16 군사정변으로 1961년 5월 16일 국회가 해산되면서 국회의원에서 물러나 민정당 달성·고령지구당 위원장, 신민당 달성·고령·경산지구당 위원장 및 지도위원, 민권당(民權黨) 부총재(副總裁) 등을 지내고 건국대학교 기성회 이사와 독립운동가연맹 이사를 역임하였다. 1963년과 1990년에 각각 대통령 표창과 건국훈장(建國勳章) 애족장(愛族章)이 추서(追敍)되었으며 향리인 고령군 우곡면 답곡리와 대가야읍 주산에 현창비(顯彰碑)가 세워졌다.


    ② 곽병철(郭柄哲 : 1920년∼1980년) →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역임 ③ 곽해용(郭海容 : 1930년) → 육군 대령, 화랑무공훈장 수상 ④ 곽상국(郭相國 : 1933년) → 중등학교 교장 역임 ⑤ 곽동헌(郭東憲 : 1935년) → 경북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⑥ 곽구석(郭俱錫 : 1944년) → 서기관 역임 ⑦ 곽병석(郭柄錫 : 1948년) → 경상북도 교육청 서기관 역임 ⑧ 곽경민(郭坰玟 : 1948년) → 한림대학교 성심병원 신장내과 전문의 ⑨ 곽상원(郭相源 : 1952년) → 국토해양부 서기관 역임 ⑩ 곽병록(郭柄祿 : 1955년) → 경상북도 교육청 서기관 ⑪ 곽병용(郭柄龍 : 1958년) → 미래에셋생명 전무이사 ⑫ 곽천섭(郭天燮 : 1968년) → KBS 미래기술연구소 부장 ⑬ 곽욱섭(郭旭燮 : 1974년) → 현) 법무법인 케이씨엘 변호사 ⑭ 곽기원(郭基源 : 1972년) → 한의사

    - 자료 제공 종손 주섭(周燮), 태허정공파 종친회 회장 곽명오(郭明悟), 
      집필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시민기자
      정리 최종동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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