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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와 재실의 유래를 찾아서

기사입력 2018.08.19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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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송정(碧松亭)의 유래(由來)와 유계안(儒契案) 고찰

     

    정자(亭子)는 풍류를 즐기고 경치를 완상(玩賞)하는 심리적 공간이며 재실(齋室)은 선조의 유덕(遺德)을 추모하고 종사(宗事)를 논의하는 종회(宗會)의 장소이다. 선인(先人)들의 숨결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고령지역의 정자(亭子)와 재실(齋室)의 유래를 격주 간격으로 연재해 소중한 문화유산인 정자(亭子)와 재실(齋室)을 재조명하는 기회를 가지고자 한다.

    1. 벽송정(碧松亭) 소개


    고령과 합천의 경계에 이르기 전 고령군 쌍림면 신촌리 마을 뒷산인 학산 기슭에 남서향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소재지는 고령군 쌍림면 영서로 3009(신촌리 5번지)이다. 원래 이 정자는 봉진(鳳津) 마을 즉, 새나리 앞 안림천 변에 있었으나 1920년 경신년(庚申年) 대홍수(大洪水) 때 하천 범람(氾濫)으로 유실(流失)된 잔해(殘骸)를 모아 이 곳으로 옮겨지었다.

    통일 신라 말기에 지방 유림들이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는 벽송정(碧松亭)은 각지의 선비들이 모여 시회(詩會)의 장소로 이용하고 활쏘기 수련장 즉, 사장(射場)의 역할을 했다. 소인묵객(騷人墨客)들의 유식(遊息) 공간으로만 이용된 것이 아니라 고령지역에 거주하는 사족(士族)들의 정신적인 매개체로서 유림(儒林)에서 결계(結契)한 공간이었다.

     현판에는 최치원(崔致遠),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등의 시문(詩文)이 남아 있고,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 비지정문화재 문화재자료 제110호로 지정되었으며, 면적은 453㎡(137평), 관리는 벽송정(碧松亭) 유계(儒契)에서 지정한 관리자가 한다.

     

    2. 벽송정(碧松亭)에 관한 문헌 기록


    (1) 경상도읍지(순조 32년, 1832년) 고령현읍지(高靈縣邑誌) 누정(樓亭)
    현 서쪽 25리의 용담(龍潭) 상류에 있다. 수목이 울창하고 시냇물이 휘감아 도는데 그 아래에 읍선대(揖仙臺)와 고운정(孤雲亭)이 있는데, 최고운(崔孤雲)이 노닐던 곳이다. 늙은이들의 말로 예로부터 전(傳)해 오면서 이르기를 “창건은 중국 한(漢)나라 선제(宣帝) 오봉(五鳳) 원년(元年) 즉 BC 57년에 했고 중수(重修)할 때에 고운(孤雲)이 상량문(上樑文)을 지었는데, 지금은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다”고 하였다.

    在縣西二十五里龍潭上 林木陰濃 溪流  其下有揖仙臺孤雲亭崔孤雲所遊處增古老相傳云亭之   建在漢五鳳元年 而重修時 孤雲作上樑文 今無所徵焉註釋1) 읍선대(揖仙臺)
    합천군 야로면 덕암리 석사다리를 건너자 곧 제방(堤防)을 따라 내려가면 고령군 쌍림면 영서로 3128~76번지(산주리 113번지)가 나온다. 이곳에서 강건너 <비계덤> 야산에는 중봉(中峰)과 상봉(上峯)이 있다. 상봉을 <읍선대>라고 한다.

    註釋2) 고운정(孤雲亭)


    고령지(高靈誌)에 의하면 “정자가 있었던 옛터는 벽송정에서 남쪽으로 몇 리 떨어진 곳에 있다. 아마도 문창후 최치원이 자취를 남긴 곳인 것 같다. 그러나 정자가 언제 지었다가 없어졌는지 알 수는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2) 고령지(高靈誌) 정재(亭齋)


    용담천(龍潭川) 상류에 있다. 이 정자를 건축한 시대를 알 수가 없다. 정자를 손질해 고친 시기가 대대로 전해오는데 한나라 선제(宣帝) 오봉(五鳳) 원년(元年) 즉 BC 57년에 칡 줄기로 대들보를 만들고 여러 차례 고쳐지었으나 칡 줄기의 들보는 예전 그대로이다. 문창후(文昌侯)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가야산에 들어가는 날 이 정자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쓴 시가 있다.

    在龍潭川上流 建築世代不可考 世傳其重修在漢宣宰五鳳元年 大樑以葛爲之屢經改築而葛樑仍舊 云崔文昌公致遠入伽倻山之日所題詩曰

    3. 창건시기(創建時期)


    (1) 고령현읍지(高靈縣邑誌)에서는 중국 한(漢)나라 선제(宣帝) 오봉(五鳳) 원년(元年) 즉 BC 57년에 창건했고 중수(重修)할 때에 고운(孤雲)이 상량문(上樑文)을 지었다고 창건과 중수시기를 언급하고 있다.


    (2) 창건 시기는 한나라 선제(宣帝) 오봉(五鳳) 원년(元年)으로 기원전(紀元前) 57년이며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紀)의 첫머리에 신라 시조(始祖)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즉위한 해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벽송정(碧松亭)의 역사가 유구(悠久)하였음을 내세우기 위한 연도일 뿐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3) 중수할 때 고운(孤雲)이 벽송정 상량문(上樑文)을 지었고 관련 시가 현재까지 ‘고운집(孤雲集)’과 현판에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벽송정이 통일 신라시대인 10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창건됐으며 고령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정자인 것으로 판단된다.

    4. 구조(構造)


    2단으로 축조된 기단(基壇)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집이다. 평면은 6칸 규모의 넓은 마루로 구성되어있으며, 온돌방은 설치되어 있지 않다. 마루의 4면은 모두 개방하고, 바닥은 우물마루를 놓았다. 정자의 구조는 5량가의 초익공계(初翼工系)로 막돌초석 위에 모두 두리기둥을 세워 상부구조를 받게 했으며, 창방(昌防)과 도리(徒里) 사이에는 화반(華盤)을 끼워 장식했다. 호남과 가까운 경북 서부지역의 마루 중심의 정자 형식을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5. 벽송정(碧松亭) 관련 제영시(題詠詩)


    (1) 문창후(文昌侯)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暮年歸臥松亭下 / 모년에 돌아와 벽송정 아래 누우니
    一抹伽倻望裏靑 / 한 가닥 푸른 가야가 나의 눈 안에

    출전 : 고운집(孤雲集)


    (2) 문경공(文敬公)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川上亭開愁已洗 / 물가 정자에 올라 근심 털어내어 마음 깨끗해지니
    雨中吟罷興猶存 / 비 내리는 소리에 다한 흥 아직도 남아 있네
    從今來往承提耳 / 이제부터 오가며 가르침 받아
    托庇期將到轉坤 / 그 도움에 의지하여 하늘과 땅 뒤바꾸기를 기약하노라

    斜界山村歲月深 / 외진 산촌에서 오랜 세월 지냈더니
    肅條索莫少知音 / 쓸쓸하고 삭막하여 알아주는 사람 없네
    徒憐欲向高陽地 / 한갓 서글픈 욕심 고양(高陽)으로 향하기에
    詩病時時得細鍼 / 시를 짓고 싶은 병이 때 없이 가는 침이 되어 찌르네

    출전 : 경현록(景賢錄), 고령지(高靈誌)


    (3) 문헌공(文獻公) 일두  정여창(鄭汝昌)

    松亭琴濕野雲宿 / 벽송정에 거문고 눅눅한 건 들판에 구름 머물기 때문이고
    南沼魚驚山雨來 / 연못에  물고기 놀라는 건 산에 비가 오기 때문이라오

    출전 : 일두집


    註釋1) 제영시(題詠詩)
    정해진 제목에 따라 시를 읊거나 또는 읊은 시가(詩歌)를 말한다. 그러나 지리지나 읍지 등에 실려 있는 제영(題詠)은 주로 경승지(景勝地)를 대상으로 읊은  한시(漢詩)이다.

    6. 제영시(題詠詩) 작가(作家) 소개


    (1) 문창후(文昌侯)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字)는 고운(孤雲), 해운(海雲) 또는 해부(海夫)이다. 문묘(文廟)에 배향되었으며 ‘문창후(文昌侯)’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9세기 통일 신라 말기의 학자이다. 당 나라에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으로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으며, 신라로 돌아온 뒤에 진성여왕에게 10여 조의 시무책(時務策)을 제시하였으나 중앙 귀족의 반발로 개혁은 실현되지 못했다. 유(儒)ㆍ불(佛)ㆍ선(仙) 통합 사상을 제시했다. 894년 효공왕(孝恭王)이 즉위한 뒤 관직에서 물러나 각지를 유랑했다. 그리고 만년에는 가야산(伽倻山)의 해인사(海印寺)에 머물렀다. 최근 중국에서 고운(孤雲) 선생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다.


    (2) 문경공(文敬公)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본관은 서흥(瑞興)이며 자는 대유(大猷), 호는 사옹(蓑翁)·한훤당(寒暄堂)이고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면서 특히 소학(小學)에 심취해 스스로 '소학동자(小學童子)'라 칭했다. 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평안도 희천에 유배됐는데, 그곳에서 조광조(趙光祖)를 만나 학문을 전수했다.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극형에 처해졌으나 중종반정 이후에 신원(伸寃)되어 도승지로 추증되고, 1517년에는 정광필(鄭光弼) 등에 의해 우의정에 추증됐고, 광해군 때 문묘에 배향됐다.


    (3) 문헌공(文獻公) 일두 정여창(鄭汝昌)
    본관은 하동(河東)이며 자는 백욱, 호는 일두·수옹(睡翁)이다.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했다. 『논어』에 밝았고 성리학(性理學)의 근원을 탐구해 체용(體用)의 학(學)을 깊이 연구했다. 성종 21년(1490년) 경술(庚戌)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한 후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시강원설서(侍講院說書), 안음현감(安陰縣監) 등을 역임했다. 1498년 무오사화 때 종성(鍾城)으로 유배되었으며, 1504년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剖棺斬屍)됐다. 중종대에 우의정에 증직됐고, 광해군 2년(1610년) 문묘에 배향됐다.

    7. 벽송정(碧松亭) 이건(移建) 및 소유 전답(田畓) 수호(守護)
    쌍림면 신촌리 송정 거주 최병관(崔炳寬)의 증언을 근거로 아래 사항을 작성했다.


    (1) 벽송정(碧松亭) 이건(移建)
    1920년 경신년 대홍수 때 안림천변에 있었던 벽송정(碧松亭)이 범람(氾濫)으로 유실(流失)되자 쌍림면 신촌리 송정(松亭)에 거주했던 양천인(陽川人) 송석(松石) 최홍석(崔洪錫)과 우당(愚堂) 최순철(崔淳喆) 부자가 중심이 돼 잔해(殘骸)를 모아 고령군 쌍림면 신촌리 마을 뒷산인 학산 기슭 남서쪽으로 현재 위치로 이건(移建)했다.


    (2) 벽송정(碧松亭) 관련 전답(田畓) 수호(守護)
    1920년 경신년 대홍수로 인한 큰 수해(水害)로 벽송정(碧松亭) 소유의 전답의 대부분 유실(流失)돼 황폐화(荒廢化)되자 그 후 송정(松亭) 거주 양천인(陽川人) 최상동(崔常東) 일명 최쾌석(崔快石)과 최병수(崔炳秀) 부자가 공사업자(工事業者)와 협의해 벽송정(碧松亭) 유계(儒契) 명의로 전답 1,500평을 확보해 재정기반을 튼튼히 함으로써 1933년 4월 벽송정 유계가 속계(續契)될 수 있었다.

    8. 벽송정(碧松亭) 유계(儒契)
    (1) 의의(意義)
    16세기 전반에 벽송정을 수호(守護)하고 유교적 이념에 입각해 무너진 풍속을 바로 세워 향속(鄕俗)의 기강(紀綱)을 정립하기 위해 향내(鄕內)에 거주하며 향촌 사회의 여론을 주도했던 재지사족(在地士族)을 중심으로 결계(結契)를 한 것이 ‘벽송정(碧松亭) 유계(儒契)’이었다. 유계(儒契)는 전통 유교문화 친목행사로 옛 성현들의 가르침을 받들어 전승하고 건전한 윤리도덕을 함양하며 선비의 유교 오덕(五德)인 온(溫 ; 온화), 량(良 ; 양순), 공(恭 ; 공손), 검(儉 ; 검소), 양(讓 ; 겸양)을 따르는 것이다.
    (2) 창시(創始)
    유계(儒契)와 관련된 최초의 문서는 1546년 3월 3일에 작성한 송정입의(松亭立議)이다. 1560년에 작성된 두 번째 책의 송정입의(松亭立議)에 보면 이미1539년에 벽송정 소유의 전답을 관리하는 농감유사(農監有司)가 2명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546년 이전에 이미 유계(儒契)가 결계(結契)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벽송정 유계는 현재까지 500여 년간 유지돼 온 유계로서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註釋 1) 입의(立議)
    종중(宗中)·가문(家門)·계·동중(洞中) 등에서 제사·묘위(墓位)·계·동중의 일 등에 관해 의논하고 그 합의된 내용을 적어 그것을 서로 지키도록 약속하는 문서로 ‘완의(完議)’라고도 한다.
    (3) 구성원
    창시(創始)할 때 계원의 수는 33인으로 한정했고, 죽거나 결원된 사람이 있을 경우 다시 추천했다. 그러나 덕망과 학행이 충분히 사표(師表)가 될 만한 사람을 가렸다.

    9. 맺는말
    벽송정(碧松亭)은 세월의 흐름 속에 몇 차례 수해(水害)를 입어 강물의 수로(水路)가 바뀌고 강물이 고갈(枯渴)돼 옛날처럼 수려한 경관(景觀)은 지금 찾아 볼 수 없지만,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일두 정여창(鄭汝昌) 등 3현(三賢)의 자취가 남아있는 유서(由緖) 깊은 정자이며, 소인묵객(騷人墨客)이 풍류(風流)를 즐겼던 명소(名所)이자 우리 지역을 대표하는 최고(最古)의 정자(亭子)이므로 선현(先賢) 유적지(遺跡地) 보존과 대가야 관광자원 확대 차원에서 관계당국과 단체 관계자에게 몇 가지 제언(提言)을 하고자 한다.

    (1) 벽송정(碧松亭)의 원형(原形) 복원사업 추진
    촌로(村老)의 증언에 따르면 “벽송정(碧松亭)은 원래 봉진마을 안림천변에 있었는데 1920년 대홍수로 기존의 6칸 건물이 파손되어 1칸만 남게 되자 300m 떨어진 지금의 자리로 이건(移建)해 중수(重修)했다고 한다. 원래 위치에 있을 때는 누각(樓閣) 형태였는데 그 아래로 소달구지가 드나들 정도로 높아서 도리깨질도 하였다”고 전한다. 따라서 왜소한 규모의 현재 벽송정의 원형 복원은 물론 멸실(滅失)된 고운정(孤雲亭)의 복원에 관한 관계 당국의 관심과 지원이 절실하다.


    (2) 3현(三賢)의 유덕(遺德)을 기리는 석채례(釋菜禮) 봉행(奉行)
    현재 쌍림면 5개 문중 후손에 한정된 벽송정 유계 계원을 3현(三賢) 후손을 포함한 향내 타 문중 후손까지 문호를 개방하는 저변(低邊) 확대를 통해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된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 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을 숭모(崇慕)하는 석채례(釋菜禮)를 벽송정(碧松亭)에서 봉행(奉行)함으로써 지역 선비 문화의 품격을 고양(高揚)함은 물론 고령이 뿌리 깊은 선비의 고장임을 홍보하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

                                                                                                                  
    註釋1) 석채례(釋菜禮)
    새로 나는 나물과 생채소로 스승을 기리는 제사를 올리는 의식이다.


    집필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최종동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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