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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지역 세거성씨(世居姓氏) 연원(淵源)을 찾아서

기사입력 2018.08.16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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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지는‘고령지역 세거성씨(世居姓氏) 연원(淵源)을 찾아서’를 격주로 기획연재한다. 씨족연원(氏族淵源), 현조(顯祖), 고령 입향(入鄕) 내력 및 시기, 입향조(入鄕祖) 이후 역대 주요인물 등을 문헌적 고증(考證)을 근거로 밝힘으로써 각 문중 고유의 씨족연원(氏族淵源), 열조(烈祖)들의 위업(偉業), 올곧은 정신 및 문화유산(文化遺産)을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코자 하오니 관심 있는 문중들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그 첫번째로 현풍곽씨 예곡공파를 소개한다.

    현풍곽씨(玄風郭氏) 예곡공파(禮谷公派)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현풍곽씨(玄風郭氏) 시조(始祖)


    현풍(포산) 곽씨대동보에 의하면 중국 관서(關西) 홍농인(弘農人)으로 고려에 입국하여 고려 인종 16년(1138년) 등과하여, 평장사(平章事)와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고 포산군(苞山君)의 봉읍을 받은 곽경(郭鏡)을 시조로 기록하고 있으나 연일당(燕日堂), 죽재(竹齋), 예곡(禮谷), 구거당(九居堂) 사파(四派)는 중간대서(中間代序)가 확실하지 않고 소목(昭穆)이 불분명하여 곽유(郭劉)의 만진당초록(萬進堂草錄)에 의거 금오위(金吾衛) 곽자의(郭子儀)를 시조로 한다.


    (2) 문훈(門訓)


    충효세업(忠孝世業) 청백가성(淸白家聲)
    나라에 충성하고, 어버이에게 효도함을 대대로 내려오는 업으로 삼고 청렴,결백한 정신과 행동으로 집안의 명예와 명성으로 삼는다.


    (3) 삼강(三綱)의 문중(門中)


    삼강(三綱)은 유교 도덕의 기본으로 임금은 신하의 근본이고[君爲臣綱(군위신강)], 어버이는 자식의 근본이며[父爲子綱(부위자강)], 남편은 부인의 근본[夫爲婦綱(부위부강)]이고 그 내용은 충(忠), 효(孝), 열(烈)로 요약된다. ‘현풍 곽씨 12정려각(旌閭閣)’은 현풍 곽씨가 ‘도덕문중(道德門中)‘임을 나타내는 자랑스러운 표상(表象)이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구휼기관(救恤機關)인 유비창(有備倉)의 종7품 승(承)을 지낸 곽연옥(郭璉玉)의 아들인 곽윤명(郭允明)은 개성부윤(開城府尹)을, 곽윤광(郭允光)은 병조전서(兵曹典書)를, 곽윤현(郭允賢)은 봉익대부(奉翊大夫)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냈다.


    (2) 조선시대


    ① 곽안방(郭安邦)


    자는 여주(汝柱) 호는 이양(尼陽)이며 의영고사(義盈庫使)를 지낸 곽득종(郭得宗)의 아들로 태어났다. 무과에 급제한 뒤 세조 1년(1455년) 세조의 등극을 도운 공으로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3등에 녹훈(錄勳)이 되었다. 세조 3년(1457년) 진무(鎭撫)를 역임하였고 세조 13년(1467년)에는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적개원종공신(敵愾原從功臣)에 책봉되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해남현(海南縣) 명환(名宦)에는 해남현감(海南懸監), 곽안방에 대해 “은혜로운 정치를 했으므로 백성들이 지금도 그를 사모하고 있다.”라고 기록해 놓았으며 선정을 베풀어 고을 백성들이 칭송하며 '생사당(生祠堂)'을 세웠다. 익산군수(益山郡守)를 마치고 돌아올 때 노비가 열쇠 하나를 차고 돌아오는 것을 보고, 관의 물건에 크고 작은 것을 논할 수 없다며 당장 돌려보냈다는 일화가 전한다. 세조 연간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으며 숙종 33년(1707년) 현풍 이양서원(尼陽書院)에 제향하였다.


    ② 현풍곽8주(玄風郭8走)


    청백리(淸白吏) 곽안방(郭安邦)의 현손(玄孫) 중에 주자(走字) 항열의 곽초(郭超), 곽월(郭越), 곽규(郭赳), 곽익(郭), 곽간(郭), 곽황(郭), 곽율(郭), 곽준(郭) 8촌 이내 8형제가 학문과 도덕이 뛰어났는데 세칭(世稱) 이를 ‘현풍곽8주(玄風郭8走)’라 한다. 예곡공파 파조 곽율(郭)을 소개하고자 한다.


    ▲곽율(郭 : 1531년∼ 1593년)


    자는 태정(泰靜)이며 호는 예곡(禮谷)이고 참봉과 수의부위(修義副尉)을 지낸 곽지인(郭之仁)의 세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명종 13년(1558년) 생원(生員)에 입격(入格)한 후 대과에 뜻을 두지 않고 한강(寒岡) 정구(鄭逑), 동강(東岡) 김우옹(金宇   ), 낙천(洛川) 배신(裴紳) 등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고 학문을 논도(論道)하였다. 공은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숙부(叔父) 정사성(鄭思誠)의 사위로서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종자형(從姉兄)이다. 김굉필(金宏弼), 곽승화(郭承華), 배신(裵紳), 원개(元凱)와 더불어 공은 ‘포산오현지일(苞山五賢之一)’로 일컬어진다. 명종 20년(1565년) 이이(李珥)가「논요승보우소(論妖僧普雨疏)」를 올려 그를 귀양 보낼 것을 주장함에 따라 영남의 여러 선비들이 보우(普雨)를 축출하기 위하여 상소를 올렸을 때 상소문(上疏文)에 소수(疏首)로 추대되었다. 1572년 성균관의 천거로 조지서별제(造紙署別提)로 벼슬을 시작하여 김천도찰방, 송라도찰방을 역임한 후 1585년 사포서(司圃署) 별제(別提)에 특진(特進)되었다. 이어 홍산현감(鴻山縣監)에 제수되어 6년간 민심과 문풍(文風)을 순화(醇化)시킨 공로가 있어 왕명으로 표리(表裏) 한 벌을 하사받았으며 이 해 6월에 임기가 만료되어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으로 승진되어 임지를 떠나는데 홍산(鴻山) 현민(縣民)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이 공을 초계가수((草溪假守)로 임명하여 무계전투 등 각종전투에서 왜군을 물리쳤으며 특히 의병군에게 군수물자를 공급하는 일에 많은 공을 세워 예빈시(禮賓寺) 부정(副正)으로 전직명령이 내려졌으나, 군내 유생 정유명(鄭惟明) 등의 유임상소(留任上疏)에 의하여 초계군수(草溪郡守)로 유임되어 낙동강을 차단하여 초계지방과 경상우도지역을 온전하게 지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숙종 21년(1695년) 도동서원(道東書院) 별사(別祠)에 제향되었으며 1990년 현풍의 화산서원(花山書院)에 경덕사(景德祠)를 창건하여 제향(祭享)하고 있다.


    ③ 곽재우(郭再祐)


    자는 계수(季綏), 호는 망우당(忘憂堂)이고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아버지는 황해도관찰사를 지낸 곽월(郭越)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국에서 처음으로 4월 22일 창의기병(倡義起兵)하였으며 군세(軍勢)가 2천여명이 되었다. 정암진(鼎巖津) 도하작전을 전개한 왜병을 맞아 붉은 옷를 입고 왜적을 무찔렀으므로 천강(天降) 홍의장군(紅衣將軍)으로 불리며 대승을 거두었다. 초유사 김성일이 장계(狀啓)를 올려 유곡찰방에 제수하고 형조좌랑에 승진시켰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정유재란 당시 경상좌도방어사로서 창녕의 화왕산성(火旺山城)을 굳건히 지켰다. 광해군 2년(1610년) 오위도총부의 부총관을 역임하였고, 이후 함경도관찰사를 거쳐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병마절도사·삼도수군통제사·한성부 좌윤 등 관직제수를 거부하였다. 숙종 35년(1709년) 병조판서겸 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으며 그의 사우(祠宇) 충현사(忠賢祠)에는 예연서원(禮淵書院)이라는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임진왜란 중 너무 과로하여 선조 26년(1593년) 4월 13일 초계의 관사(官舍)에서 예곡(禮谷) 곽율(郭)이 세상을 떠나니 향년 63세이었다. 이때 왜적이 수시로 출몰(出沒)하는 난 중에 고향인 현풍으로 반장(返葬)하지 못하고 사가(査家 : 경주김씨 수은공파 元瑞)가 있는 고령현 용담(龍潭) 상부곡(上釜谷)에 가장(假葬)하였다가 2년 후인 1595년 2월에 가장한 아래 부곡임좌(釜谷壬坐) 현재의 묘소로 이장하였다. 선조 26년(1593년) 선향지인 현풍 솔례(率禮)로부터 처가인 쌍림면 송림리에 입향한 고령 입향조는 예곡(禮谷) 곽율(郭)의 아들 만취당(晩翠堂) 곽영희(郭永禧)이었으며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의 풍습에 따라 상당기간 송림리에서 거주하다가 1700년경 쌍림면 월막리로 이거(移居)하여 정주(定住)하게 되었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조선시대


    ① 곽영희(郭永禧 : 1560년 ∼ 1606년)
    자는 덕수(德修)이고 호는 만취당(晩翠堂)이다. 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을 역임(歷任)한 예곡(禮谷) 곽율(郭)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문인(門人)이다. 선조 39년(1606년)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 김천도찰방(金泉道察訪), 유곡도찰방(幽谷道察訪)을 거쳐 흥덕현감(興德縣監)을 지냈다. 혼암(昏暗)한 조정을 만나게 되어 하루 아침에 벼슬을 버리고 귀향(歸鄕)하였다. 오봉(五峯) 이호민(李好敏), 인재(齋) 최현(崔晛),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 외재(畏齋) 이후경(李厚慶), 죽헌(竹軒) 최항경(崔恒慶), 동계(桐溪) 정온(鄭蘊), 완정(浣亭) 이언영(李彦英) 등 제현과 교유(交遊)하였다.


    ② 곽홍점(郭鴻漸 : 1579년∼1648년)
    자는 규로(逵老)이며 흥덕현감(興德縣監)을 지낸 만취당(晩翠堂) 곽영희(郭永禧)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한강(寒岡) 정구(鄭逑) 문인(門人)이다. 유림(儒林)의 공의(公議)에 따라 천거(薦擧)되어 을축년(1625년)에서 경오년(1630년)까지 연임하여 5년간 ‘제5대(第五代) 도동서원(道東書院) 원장(院長)’을 역임하였다. 도동서원(道東書院) 원장(院長) 재임시 마음이 헌면(軒冕)에 얽매이지 않고 청고(淸高)한 지절(志節)을 지켰기 때문에 당대의 홍유석학(鴻儒碩學)들과 교유(交遊)하였다. 음사(蔭仕)로 장사랑(將仕郞)의 품계를 받았다.


    ③ 곽수강(郭壽岡 : 1619년∼1660년)
    자는 진옹(鎭翁)이고 호는 매헌(梅軒)이다. 장사랑(將仕郞)을 지낸 곽홍점(郭鴻漸) 장남으로 태어났다. 16세 때에 성리(性理)와 천리(天理) 및 오행(五行) 등의 이치를 깨닫고 그에 대한 「천인감응(天人感應)」이란 설(說)을 지었다. 효종 5년(1654년) 식년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하였다. 효종 9년(1658)년에 성균관에 들어가 경의(經義)를 연구하였는데 대사성(大司成)의 질문에 잘 응답하여 진유(眞儒)라는 칭송을 받았다. 효종(孝宗) 승하(昇遐)로 5개월간 소식(蔬食)한 결과로 몸이 쇠약하여 기세(棄世)하였다. 숙종 33년(1707년)에 지방유림의 공의(公議)로 곽수강(郭壽岡)과 오선기(吳善基)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매림서원(梅林書院)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시고 매년 3월 중정(中丁)에 두 배향인의 향사를 지낸다.


    ④ 곽수진(郭壽 : 1627년∼1668년)
    자는 진경(鎭卿)이며 호는 송담(松潭)이다. 장사랑(將仕郞)을 지낸 곽홍점(郭鴻漸 차남으로 태어났다. 현종 1년(1660년) 식년(式年)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였다.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선생과 교유(交遊)하였으며 학문과 명망이 높았다. 특히 송담공(松潭公)은 백형(伯兄) 매헌(梅軒) 곽수강(郭壽岡)과 같이 세상에서 옥(玉)과 같은 우애(友愛)와 금(金) 같은 형제라고 칭송받았다.


    ⑤ 곽유(郭: 1655년∼1704년)
    자는 숙도(叔道), 호는 월계(月溪)이다. 성균생원(成均生員)을 지내고 매림서원(梅林書院)에 배향된 매헌(梅軒) 곽수강(郭壽岡)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문인이며 숙종 16년(1690년)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였다. 부모가 병이 들어 위급하자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먹여 소생(甦生)하게 하여 영남여지(嶺南輿地)에 효자로 기록되어 있으며 숙종 28년(1702년) 고령향교(高靈鄕校)를 이건(移建)하여 건립하는 데 많은 공헌(貢獻)을 하였으며, 향교의 뜰에 손수 행자목(杏子木 : 은행나무)을 심었다.


    ⑥ 곽식(郭 : 1655년∼1713년)
    자는 건숙(健叔)이며 호는 졸옹(拙翁) 또는 지분당(知分堂)이다. 진사(進士) 송담(松潭) 곽수진(郭壽)의 아들이다.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선생과 외조부(外祖父) 독오당(獨梧堂) 황협(黃峽) 선생으로부터 수학(修學)하였다. 당대의 홍유석학(鴻儒碩學)으로 퇴계학의 적통을 계승한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셋째 아들 밀암(密菴) 이재(李栽), 곡천(谷川) 김상정(金尙鼎) 등 제현(諸賢)과 교유(交遊)하였으니 공이 심오한 학문과 웅대한 문장을 갖춘 대유(大儒)임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1930년 발간된 의춘지(宜春誌 : 의령 지리지)에 향인(鄕人)이 “충효출천(忠孝出天), 학문저세(學問著世) 즉 충효를 천성으로 타고 났으며 학문이 세상에 드러났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⑦ 곽만한(郭萬翰 : 1682년∼1720년)
    초휘는 만용(萬容)이고 자는 지여(智汝)이며 호는 치엄(恥奄)이다. 생원(生員)을 지낸 효자(孝子) 월계(月溪) 곽유(郭)의 차자로 태어났으나 당숙(堂叔) 지분당(知分堂) 곽식(郭)에게 출계(出系)하였다. 성호(星湖) 이익(李瀷) 문인(門人)이며 청천(靑泉) 신유한(申維翰), 상위(相違) 김세명(金世鳴), 약산(藥山) 오광운(吳光運) 등 당대의 명유(名儒)와 교유(交遊)하였으며 문장이 뛰어나 일세(一世)의 사표(師表)가 될 만하다하여 사림(士林)에서 추중(推重)하였다.


    ⑧ 곽수빈(郭守斌 : 1882년 ∼1951년)
    자는 사언(士彦)이고 호는 몽와(夢窩)이다. 유학(幼學) 곽치숭(郭致崧)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숙부 치안(致安)에게 출계(出系)하였다. 임제(臨齊) 서찬규(徐贊奎) 문인이다. 을사조약(乙巳條約)과 경술국치(庚戌國恥)로 인한 망국(亡國)의 설움에 비분강개(悲憤慷慨)하던 파리장서(巴里長書) 137명의 서명자중 21번째로 서명하여 조국독립(祖國獨立)의 당위성(當爲性)을 세계만방(世界萬邦)에 알리는데 적극 가담하였다. 특히 지역인사 중 최초로 서명하여 지역 유림 6명의 서명에 큰 영향을 끼쳤다. 동년 4월경 일경(日警)에 체포되어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모진 옥고를 겪었으나 1919년 6월 9일 대구지방법원 판결에 의하여 기소유예(起訴猶豫)로 석방되었다. 그 후 1938년부터 1940년까지 고령향교의 직원(直員 : 현재 전교)을 맡아 향풍교화(鄕風敎化)와 민족의식(民族意識)을 고취하는데 진췌(盡悴)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功勳)을 기리어 1996년 8월 15일 건국포장(建國章)을 추서(追敍)하였다. 2005년 9월 24일 고귀한 우국충정(憂國衷情)을 길이 후세에 귀감(龜鑑)으로 삼고자 ‘애국지사(愛國志士) 몽와(夢窩) 곽선생(郭先生) 추모비(追慕碑)’를 건립하였다. 


     (2) 근·현대 인물


    ① 곽경열(郭敬烈 : 1934년) → 의성, 영덕, 칠곡, 영주군수 역임 ② 곽무열(郭武烈 : 1935년) → 대구시 수성구청장, 상수도본부장 역임 ③ 곽춘식(郭春植 : 1936년) → 울진, 울릉, 고령군수 역임 ④ 곽욱열(郭旭烈 : 1943년) → 서울특별시 도시관리국장 역임 ⑤ 곽재경(郭在慶 : 1956년) → 고령군 산림조합장 ⑥ 곽용환(郭龍煥 : 1957년) → 3선 고령군수 ⑦ 곽갑열(郭甲烈 : 1962년) → 대구시 의료허브조성과장 ⑧ 곽동우(郭東佑 : 1963년) → 서울고법판사, 법무법인 화우 변호사 역임 ⑨ 곽재일(郭在一 : 1965년) → 한의학 박사 ⑩ 곽동석(郭東碩 : 1965년) → 삼성디스플레이 구매부장 ⑪ 곽덕주(郭德珠 : 1966년) →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 교수 ⑫ 곽희붕(郭憘鵬 : 1978년) → 의학박사 ⑬ 곽규열(郭圭烈 : 1984년) → 법무법인(유한) 태평양변호사
    ⑭ 곽철정(郭哲政 : 1985년) → 서울대학교 뇌과학 박사, 펜실베니아 주립대 박사과정
                               
    - 자료 제공- 예곡공파 주손 곽재현(郭在現), 집필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최종동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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