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상세페이지

호국 보훈의달 특집(3)

기사입력 2018.06.28 11:49

SNS 공유하기

fa tw gp
  • ba
  • ka ks url

                 호국 영웅 문영상 대가야읍 노인회 회장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매년 이맘때면 동족상잔의 6.25를 떠올리며 오로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숭고한 희생을 치른 호국의 영웅들을 생각하게 된다. 정부는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국민의 호국, 보훈의식 및 애국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1963년 호국보훈의 달을 지정했다. 매년 돌아오는 호국보훈의 달이지만 올해 6월은 감회가 좀 다른 것 같다. 곧 통일이라도 된 듯 들떠 있는 현 시국의 흐름 때문이 아닐까 싶다. 70여 년 전 한국전쟁을 치르신 어르신들 대부분이 90세 전후여서 이제 시간이 없다. 안타깝게도 생존해 계신 분들이 많지 않다. 그 어르신들의 값진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나라가 경제대국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호국보훈의 달만 반짝 그분들을 기억하는 1회성이 아닌 항시 후세들은 어르신들의 호국정신을 기리고 관심을 기울여야 되겠다. 더 늦기 전에 참전 유공자들을 찾아뵙고 전쟁 당시의 실상과 현 시국관을 듣기 위해 시리즈로 특집면을 마련해 세 번째로 문영상(85) 대가야읍 노인회 회장에게 전쟁 당시의 활약상을 들어본다.<편집부>

     

     

     “우리 지역은 우리가 지킨다! 자체 특공대 결성 지역 지켜내

     

     *경험 하셨던 6.25 동란 얘기를 들려주십시오

    열세 살에 고령초등학교(36회)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정부에서 설립한 국립교통학교를 응시, 합격하여 입학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초등학교 때 은사님(故 서규석 선생님)의 철저한 주입식 교육 덕분에 21:1이라는 관문을 뚫고 국립교통학교를 국비생으로 입학했습니다. 중·고등 6년 과정 제1회 졸업생입니다.
    학창시절을 떠올리면 학교 기숙사 생활 때 북한에 있는 선죽교, 만월대를 가본 기억이 오래도록 남아 있는데, 정몽주가 피를 뿌린 다리로 유명한 선죽교 옆에 대형 비석이 특별히 기억에 남습니다.
    학교 재학 중인 열여섯 살에 6.25전쟁이 터졌습니다. 어쩔 수 없이 고향으로 내려와서 일량에서 피난생활을 시작했습니다.

    * 어떻게 전쟁에 가담하게 되었습니까?

    그 무렵 지리산과 해인사에 은거하던 빨지산이라는 인민군이 있었는데, 우리는 그들을 불꽃사단이라고 하여 악명 높았던 부대로 잘 알려졌습니다.
    그들이 고령을 기습적으로 습격하여 군청을 비롯해 우체국, 읍사무소, 등기소, 전매서 등을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처음 그들은 고령경찰서를 목표로 삼았으나 경찰서 옥상에서 기관총으로 완강하게 응사하는 바람에 경찰서는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경찰에서는 지역치안을 목적으로 자체 특공대를 모집했는데, 나도 열일곱 살에 특공대에 합류하였습니다. 군복도 없고, 군번도 없이 정부의 지원은 일절 없었고 대한청년단 지원 명목이었으나 실제로는 경찰의 지원을 받아 허름한 노란색 작업복과 무기를 지급받았을 뿐입니다.
    40여명으로 구성되어 처음 99식 장총을 지급 받아 훈련에 임했고, 나중에는 M1 총으로 군인보다 훨씬 더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지요.


    * 인민군은 우리 특공대를 ‘노랑개라고 불렀다

    운수면을 비롯해 덕곡, 우곡, 고령읍내 등 관내를 순찰하며 치안활동을 했는데, 때때로 공포를 쏘면서 적군의 침투를 막았습니다.
    우리 지역은 우리가 지키자는 사명감과 열의가 애국심과 애향심으로 승화되어 대원들 모두의 가슴에 뜨겁게 달구어져 있었다는 자부심만은 현역 군인 못지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전 국토가 곧 적군의 수중에 들어가 함락 위기에 처했는데 국민 누구나 몸 사릴 여유가 없었고,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전국의 곳곳에서 자생적으로 방어 목적의 단체가 많이 결성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우리가 노란제복을 입고 활동했기 때문에 인민군들은 우리를 ‘노랑개’라고 불렀다는 비화가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 국가 위기 상황에서 지역 치안활동에 깊이 관여했다는 자부심 있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이 가장 마음에 와 닿습니다. 북괴의 불법 남침으로 수많은 국민의 희생과 유엔 참전국의 값진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전장(戰場)에서 적군들과 마주하고 싸우다 산화하신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잊지 말아야 하고, 또한 후방에서 지역의 치안을 위해 공산군들과 맞섰던 특공대원들도 있었다는 것을 후세들은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문영상 회장의 선친께서는 고령군청 공무원으로 18년 동안 봉직했는데, 세정계장을 맡아 공직을 수행하던 중 6.25가 터졌다.
    어수선했던 그 시절 약삭빠른 사람들은 살기 위해 공산군에 동조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고령지역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선친께서 공무원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적 치하에서는 더 혹독하게 냉대를 받았다고 문 회장은 회상한다.
    문영상 회장은 지역에서 19개월 동안의 치안활동이 인정되어 국가보훈처로부터 2008년 9월 6.25참전유공자로 뒤늦게나마 인정받았다.
    문 회장은 종전 후 20세에 공군에 입대하여 항공관제사로 4년 6개월 복무하고 만기 제대했다.
    현재 (사)대한노인회 고령군지회 대가야읍 분회장을 맡아 어르신들 친목도모를 우선순위에 두고 활동하고 있다.
    현 시국을 바라보는 문 회장의 생각을 물었다. “전쟁을 찬성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라며 “그러나 전쟁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그들을 잘 알기에 너무 서두르지 말고 좀 더 신중했으면 좋겠다”고 충고를 잊지 않는다.
    문 회장 가족으로는 부인 서오순 여사와 슬하에 2남 1여를 두었고, 3남매 모두 대학을 졸업하여 아들은 대기업체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고명딸은 공무원 가족으로 잘 살고 있어서 3남매 모두를 반듯하게 키웠다.


    최종동 기자

     

     


     

    [이 게시물은 주간고령 편집부님에 의해 2018-06-28 11:52:48 특집에서 이동 됨]
    backward top 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