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상세페이지

호국보훈의 달 특집(2)

기사입력 2018.06.28 11:43

SNS 공유하기

fa tw gp
  • ba
  • ka ks url

    전쟁의 아픔, 눈사태로 중대원 대부분 잃은 2중고 악몽
    쌍림면 합가리 호국 영웅 오원문 어르신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국민의 호국, 보훈의식 및 애국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1963년 호국보훈의 달로 지정했다.
    6월1일~10은 추모기간, 11일~20일은 감사의 기간, 21일~30일까지는 화합과 단결의 기간으로 나눠져 각각 특성에 맞는 호국 보훈 행사를 하고 있다.
    매년 돌아오는 호국보훈의 달이지만 올해 6월은 감회가 좀 다른 것 같다. 아마도 현 시국의 흐름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한국전쟁을 치르신 어르신들 대부분이 90세 전후여서 이제 시간이 없다. 안타깝게도 생존해 계신 어르신들이 많지 않다.
    그 어르신들의 값진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나라가 경제대국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호국보훈의 달만 반짝 기억하는 1회성이 아닌 항시 후세들은 어르신들의 호국정신을 기리고 관심을 가져야겠다.
    더 늦기 전에 참전 유공자들을 찾아뵙고 전쟁 당시의 실상과 현 시국관을 듣기 위해 시리즈로 특집면을 마련해 두 번째로 쌍림면 합가리 호국 영웅 오원문(89) 어르신을 찾아뵙고 긴박했던 전쟁 당시의 생생한 뒷얘기를 들어보기로 한다.                                     -편집부-

     

     

    * 언제 징집되셨습니까?

     

    전쟁이 발발한 다음해인 1951년 23살 때 마을 청년 몇 사람과 함께 입대하여 제주도 훈련소에서 기초적인 훈련을 받은 후 최전선인 강원도 양양에서 2차 훈련을 받은 다음 강원도 간성에서 근 1개월가량을 대기병으로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 후 창설부대인 21사단에 배속되어 금강산지구인 금봉산 전투에 참가해 밀고 밀리는 피말리는 전투로 하루하루를 긴장 속에 보냈다.
    고향에서 함께 입대했던 친구(故 김재열)와 다행히 같은 중대에서 근무하게 되어 서로에게 많은 의지가 되었으며, 밤이면 손을 맞잡고 우리 반드시 살아서 고향으로 같이 돌아가자고 눈물로 다짐할 때가 많았다.
    죽고 죽이는 전쟁의 틈바구니에서도 고향 친구가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고, 서로에게 살아야 되겠다는 버팀목이 되었다.

     

    * 전쟁과 눈사태로 중대원 대부분 잃는 2중고의 아픔

     

    전쟁이 한창이던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고, 또 몹시도 배가 고팠다.
    뿐만 아니라 엄청나게 많은 눈이 내려 적군과의 전쟁에다 눈과의 싸움이라는 이중고를 치러야 했다.
    설상가상이라고 했던가. 내린 눈이 미쳐 녹을 새도 없이 계속 쌓여만 갔다. 한번은 밤새 쏟아진 폭설 때문에 군인 막사가 폭삭 내려앉아 5명을 제외한 중대원 모두가 참변을 당하는 청천벽력 같은 일을 당했다. 전쟁으로 인한 전우를 잃는 충격 못지않게 가슴이 무너졌다.
    얼마나 눈이 많이 쌓였는지 오랜 기간 눈 속에서 터널을 만들어 오가면서 논바닥을 파헤쳐 풀(모메싹)을 뜯어먹으며 연명했던 기억이 있다. 인간은 누구나 극한 상황에서도 삶에 대한 애착이 있음을 그 때 느꼈다.
    그래도 친구와 나는 운 좋게도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전우들의 몫까지 적군들과 교전을 벌여야만 했다. 나라 위한 행위가 곧 살기 위한 나의 몸부림이라고 해야겠다.

     

    * 5년 만에 제대하여 그리던 고향품에 안기다

     

    군 생활 2년여 동안 전투로 하루도 편할 날 없이 긴장 속에서 세월을 보내다 1953년 드디어 휴전이 되었다.
    막상 휴전은 되었지만 총성만 없었지 긴장의 연속이었다. 종전이 아닌 휴전이기 때문에 언제 또 전쟁이 재개될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창설부대인 21사단에 배속되어 전방 여러 지역을 전전하며 전쟁을 했지만, 결국에는 21사단에서 만기 제대를 하고 부모형제가 기다리는 고향집으로 돌아와 결혼하여 가정을 이뤘다.

     

    * 요즘 북한과 부쩍 가까워진 듯한 분위기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북한군과 서로 총부리를 들이대면서 싸웠던 전쟁 경험자로서 요즘의 나라 분위기가 도대체 뭐가 뭔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70여 년 전 전쟁으로 인한 인명피해 뿐만 아니라 전 국토가 폐허가 되었던 것을 우리는 항시 잊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갑작스러운 북한의 태도 변화가 진정성이 있는지 잘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 그들을 조금 더 알고 있는 전쟁 경험자들의 공통된 인식이라는 것을 밝혀둡니다.

     

    * 3남 1녀 반듯하게 잘 키워내 주변에서 복 많은 어르신으로 통해

     

    거창군 가조가 고향인 오원문 어르신은 합천군 가야면 홍류동에서 사시다가 장남(오정래, 前 쌍림면장)이 태어나고 고령으로 이주했다.
    고령은 어르신의 처가 곳이다. 처가는 전주이씨 집안으로 양령대군의 후손이다.
    온순하신 어르신의 성품 때문에 주변에서는 법 없어도 살 수 있는 점잖으신 어르신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자식들에게만은 엄격하신 분으로도 유명하다.
    장남인 오정래 前 쌍림면장은 “어린 시절 반찬투정이라도 할라치면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진다”고 회상한다. 당시에는 때때로 아버지가 야속할 때도 있었지만 철이 들고부터는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털어놓는다.
    오 전 면장은 “아버지께서는 전쟁 통에 군 생활을 하실 때 눈사태로 인해 근 달포를 눈 속에서 터널을 파고 오간 얘기며 논바닥의 풀을 뜯어 연명하셨던 얘기를 간혹 들려주신다”고 했다. “그래서 먹을거리에 대한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아시고 음식 타령은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 아버지의 지론이셨다”며 아버지께서는 먹는 음식의 타박은 절대 용납이 안 되셨다고 회상 한다.

     

    [이 게시물은 주간고령 편집부님에 의해 2018-06-28 11:52:48 특집에서 이동 됨]
    backward top 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