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약발명가 최무선 장군 과학기술의 선각자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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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화약발명가 최무선 장군 과학기술의 선각자 재조명

인물평전<최무선 장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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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무선 장군 표준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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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무선 과학관(영천시 금호읍 원기리)

 

 

고려말~조선초 화약발명과 병기 등 제작 과학자인 최무선(崔茂宣, 1325~1395) 장군은 본관이 영천(永川)이며 영천최씨 시조 최한(崔漢)의 7세손이다. 경북 성주군 수륜면 남은리(법산)에는 영천최씨 집성촌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은 100여호가 살고 있으며, 종인들은 선조 최무선 장군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고려말 관리들 월급에 쓸 곡물을 개성으로 운반하는 책임을 맡은 아버지(최동순)와 그 곡물을 노리고 약탈과 방화를 일삼는 왜적들을 보면서 자란 최무선은 왜적을 물리치는 데에는 오로지 화약무기 밖에 없음을 깨닫고 화약제조를 하게 된다.
당시 중국만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화약을 갖고 있었고 기술유출이 엄격히 금지되었기에 원나라 상인에게 화약제조법을 배워 염초와 유황을 배합해 화약을 개발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최무선 장군이 과학기술에 공헌했지만 역사에 저평가되고 있어서 객관적 잣대와 공훈을 재조명함으로서 자라나는 후세들에게 교훈을 전하고 애국심 고취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 왜적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국산화약이 필요했다
* 최무선의 생애와 화약발명 동기
최무선 장군은 경북 영천시 금호읍 원기리(마단) 출신으로 광흥창사를 지낸 최동순의 아들이다. 광흥창사란 고려시대 관리들의 봉급을 맡아 관리하는 관청으로 최동순이 그 수장이다.
더구나 관리들의 녹봉을 담당하는 관리였던 그의 아버지는 조운선(漕運船)에 실려 전국에서 운반되는 곡물을 당시의 수도인 개성으로 운반하는 책임을 맡았다. 이처럼 관리들 월급에 쓸 곡물을 왜구들이 노리고 번번이 피해를 보며 늘 고심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무선은 자랐다.
그것이 자극이 되어 무선은 왜적을 물리치는 데는 오로지 화약무기 뿐임을 깨닫고 화약개발에 몰두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그리고 연구를 거듭하면서 조정에 건의해 화통도감(화약을 관리하는 관청)을 신설하고 그 제조관이 되어 화약과 각종 화약무기 발명에 성공을 거두게 된 것이다.
1380년(우왕6년) 왜구가 전함 500여척을 이끌고 금강하구인 진포(지금의 군산)로 쳐들어 왔을 때 최무선은 부원수에 임명되어 원수 나세(羅世)와 함께 각종 화기로 무장한 전함 100척을 이끌고 나아가 싸워 왜구 선박 500여척을 전멸시키는 큰 공을 세웠다. 이 해전이 진포대첩이다.
그로부터 200여년 후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왜선을 크게 물리칠 수 있었던 것도 최무선의 화약과 화약무기 발명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는 의견도 있다.
진포대첩, 이 해전으로 인해 30여 년 간 우리나라를 괴롭히던 왜구의 출몰이 차츰 뜸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 후 화통도감이 군기시로 통합되고 최무선 장군이 공직에서 물러난 후 화약수련법과 화포법을 저술했으며, 대를 이어 아들 최해산에게 화약기술을 전수시켰다.
비록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지난 공을 기려 검교참찬에 제수되었으며, 태종원년(1401년) 의정부우정승에 추증, 영성부원군에 추봉되었다.
* 염초와 유황을 배합해 최초 국산화약 제조 성공, 고려에 화통도감 설치
전술한 바와 같이 왜구의 노략질 때문에 늘 고심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화약무기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그것이 화약발명의 계기가 된다. 당시 중국만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화약을 가지고 있었지만, 기술유출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조방법을 알아내기가 어려웠다.
다만 우리나라는 불꽃놀이 용도로 조금씩 수입해 썼으며 화약을 무기로 활용한다는 것은 그 누구도 관심 갖지 않은 분야였다. 그러던 중 원나라 상인 이원(李元)이라는 사람이 염초장으로 일한 적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벽란도로 찾아갔다. 그곳에서 그를 만나 집으로 모셔다 극진히 대접하면서 화약제조방법을 익혀 나갔다.
몇 달의 각고 끝에 그 제조법을 완전히 터득하였는데, 초석과 유황을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초석은 고려에서 전혀 생산되지 않는 것이었고, 원나라도 초석의 수출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어서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그래서 최무선은 고려에서 생산되는 재료를 이용해 화약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면서 거듭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끊임없는 노력 끝에 염초와 유황을 배합하여 만드는 방법을 개발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다행히 왜구들이 유황의 위력을 알지 못해 유황은 고려와 교역할 수 있는 왜의 중요한 수출품이었던 것이다.
염초는 소금을 채취하는 염장 근처의 함토나 바닷물의 염분을 많이 흡수한 바닷가의 흙 중에서 사람이나 말이 오랫동안 통행하면서 다져놓은 흙을 모아 가마솥에 넣고 구워내는 것으로 얻을 수 있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드디어 최무선은 최초의 국산 화약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하였고, 1375년 조정의 대신들과 고위층이 참관한 가운데 폭약의 성능을 시험해 보이게 된다.
1377년 10월, 마침내 고려 조정은 최무선의 청에 의해 화통도감을 설치하여 최무선을 제조관으로 삼아 화포 등 화약병기를 제작하게 했다.
최무선은 대포 종류로 대장군, 이장군, 육화, 석포, 화포, 신포, 화통 등으로 그 크기와 용도, 위력이 다른 여러 가지를 개발했다.
또 피사체(포탄)의 종류로 화전, 철령전, 피령전, 철탄자, 천산오룡전 등이 개발됐다. 이 외에도 로켓 종류로 유화, 주화 촉천화 등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이런 화기 등을 실을 수 있는 누선이라는 전함의 건조(建造)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이렇게 개발된 성과는 1380년 진포해전에서 마침내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된다.
* 실전에서 국산화약 사용, 진포대첩 승리의 주역
* 병기의 발명과 화약 이용한 무기 개발 아들 최해산에게 전승
최무선의 첫 번째 공로는 그가 남긴 화약이 우리 역사상 처음 발명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세계에서는 중국에 이어 두 번째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공헌은 그는 이를 이용해 실제 화통도감을 설치케 하고 여러 가지 화약을 이용한 무기들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구슬이 서 말이면 무엇 할까? 꿰어야 보배가 되는 법이다. 그는 구슬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꿰어 보물을 만들었던 셈이다.
그는 이런 무기들을 만들고, 그것을 처음으로 실전에 이용해 보기도 했던 것이다. 그는 실제로 진포해전을 주동했다. 그 싸움에서 크게 이김으로써 고려는 그 후 왜구의 걱정을 덜게 될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 화약 기술을 계승시켰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은 새 왕조가 시작된 다음 역시 화약무기를 담당해 아버지의 업적을 계승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이용해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는 왜구가 아니라 북방의 오랑캐를 물리치는데 그의 화약무기를 활용했다. 부전자전(父傳子傳)이란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 세계 두 번째 화약보유국 기록, 화약 발명에 전함 건조까지
최무선이 고려 때 화약을 처음 발명했다는 것쯤은 교과서를 통해서도 많이들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부터 630여 년 전 최무선이 발명한 화약이 어떤 것이고, 또 그것이 역사상 어떤 중요성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또 화약의 아버지 최무선은 고려사나 그 밖의 옛 기록에 이름이 많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발명한 화약은 알프레드 노벨의 다이너마이트와는 크게 다르다. 최무선의 화약이 ‘자연화약’이라면 노벨의 화약은 ‘인공화약’으로 구분할 수 있다. 지금은 화약이 너무 발달해서 당시와는 비교가 되지 않지만 최무선이 화약을 발명할 때만해도 세계에서는 중국에만 화약이 있었을 뿐이었다. 화약 제조에는 초석과 유황, 그리고 목탄을 배합해서 만든다는 것을 알기까지에는 수많은 난관과 끈질긴 연구가 필요했다. 중국이 절대 비밀로 하고 있는 화약 만드는 법을 그가 오랜 연구 끝에 터득해 1370년대의 고려를 세계에서 두 번째의 화약 보유국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최무선은 화약발명에 이어 화포 등 각종 병기를 고안 제작하고 그것을 실전에서 실을 수 있는 함선까지 건조했다.
* 함포 사격 최초 해상전, 중대한 역사적 의의 내포 
최무선은 화약과 무기들을 그저 발명하고 개발한 것만이 아니라 이를 가지고 실제 싸움에 참가하여 위대한 전과를 남겼다. 그는 고려말 화약무기의 발명자이면서 동시에 왜구 소탕의 공을 직접 세운 과학자이면서 무관이었다. 진포해전에서 고려군이 왜적을 소탕하는데 최무선의 공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포해전은 해전사상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국산 화약과 화포로 치룬 세계 최초의 해전으로 서양보다 30년이나 앞선 해전사에 길이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화포를 적재한 전함이 실전에 투입되어 함포 사격을 개시한 최초의 해상작전이라는 점이다. 이때의 함포 사격이 해상작전에서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세계 해전사에서 군함이 대포를 탑재한 사실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 진포해전보다 30년 뒤인 1410년으로 나와 있기 때문이다.
그 시대까지 전 세계적으로 해전에서 사용된 주공격방식은 당파전술이었다. 당파전술이란 적선을 들이받아 격침시키거나 선체를 파손할 목적으로 행하는 충격전술이었다.
이처럼 진포해전에서 화포가 함재포로 등장한 것은 당파전술에서 새로운 전기를 이룩한 것으로 해전사에 중대한 진일보의 장이기도 했다.
*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전술을 가능케 했다
* 화약의 발명이 후세에 미치는 영향
* 2대에 걸친 연구와 노력으로 성공에 이르기까지 결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최무선 장군을 단순히 ‘화약을 발명한 사람’ 또는 ‘중국의 화약비법을 배워 우리나라에 화약을 전한 사람’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무선의 화약 발명은 이처럼 단순한 것이 아니라 수 십 년간의 세월을 투자하며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분야를 개척, 성공시켜 그 아들에게 까지 이어지는 2대에 걸친 연구와 노력을 통해 얻어진 결과였다. 더구나 우리 땅에서 나는 재료를 이용해 독자적인 화약을 제조할 수 있게 한 엄청난 혁명이었다.
그로 인해 진포대첩에서 쾌거를 이뤘고, 200여 년이 흐른 후에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지켜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임진왜란의 흐름을 바꿔놓은 이순신 장군의 전술이 모두 최무선 장군이 발명한 화약과 무기류 등에 기반하고 있었음을 부인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최무선이 발명한 화약으로 돌이나 탄환, 또는 화살을 멀리 쏘아 보내는 무기로 활용하면서 전쟁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바뀌게 된다. 화약을 가진 나라가 전쟁에 절대 유리하고, 그렇지 못한 나라는 싸움에 이길 도리가 없게 된 것이다.
고려 말에 최무선은 화약을 이용해 왜적을 물리쳤고, 또한 왜적이 갖지 못한 화약 덕분에 이성계는 최무선의 도움을 받아 무공을 세운 뒤에 정치적 야심을 달성할 수도 있었던 셈이다. 이를테면 화약은 조선 왕조를 세우게 되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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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제유물화차
 
 
* 서양사회에 화약 보급이 봉건주의 몰락의 계기로
이 화약이 서양에 전해지자 서양에서는 더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기사(騎士)들을 잘 훈련시켜 영토를 지키던 봉건 영주들의 살아가던 방법이 더 이상 쓸모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화약병기를 더 가진 쪽이 싸움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화기 앞에는 잘 훈련된 기사들의 창과 칼도 허무하게 허물어졌고, 그와 함께 봉건사회도 서서히 무너지고 말았다. 화약은 중세 서양 사회를 해체시킨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프란시스 베이컨이 서양 근대사회를 일으킨 3대 발명품의 하나로 화약을 꼽은 것은 당연한 생각이었다. 그가 말한 3대 발명품은 화약, 나침판, 그리고 인쇄술인데 모두가 동양에서 발명되어 들어간 것이다.
화약은 이미 중국에서 10세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최무선의 화약 발명은 세계에서 처음은 아니라는 뜻이다. 또 고려에서도 최무선이 처음 화약을 보거나 다루게 된 것도 아니었다. 이미 그가 화약을 발명하기 훨씬 전에 고려에서는 화약을 가지고 불꽃놀이에서도 썼고, 또 무기로도 사용했다는 것이 기록에 분명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최무선이 화약을 발명했다는 뜻은 화약을 만드는 방법이 비밀이어서 중국밖에는 알 수가 없었던 것을 최무선이 오랜 연구 끝에 순수 우리 땅에서 나는 재료로 화약 만드는 법을 알아내어 국산화 했다는 것이다.
* 진포해전 500여 적선 격침 자세한 기록 없이 폄하돼
왜적이 창궐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 충정왕2년(1350년)경 부터인데, 이때부터 30여 년간을 우리 민족은 왜적에 시달려야 했다. 우왕6년(1380년) 음력 8월 하순경 진포(지금의 군산으로 추정)를 침입한 왜적의 병력 수는 자세한 기록이 없으나 병선은 무려 500여 척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진포해전이라 불리는 이 해전에서 최무선은 함포(화포, 화통 등) 사격의 주동 지휘관으로 대활약을 펼쳐 위대한 승리로 이끌게 된다.
진포해전의 의미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우라 역사상 처음으로 화약을 발명하고, 화포 등 화약무기를 만들고 규모도 큰 개량된 병선에 장치하여 함포사격으로 적선 500여 척을 일거에 격침 시켜 대승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이는 세계 해전사(海戰史)에 마땅히 기록되어야 할 위훈(偉勳)임에도 당시 위정자들이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한 관견(管見)으로 우리의 사서(史書)에서는 폄하하고 자세한 기록을 빼버린 우(愚)를 범하였다.   

주간고령 기획팀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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