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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년(石年) 이정우(李正宇)

기사입력 2021.02.19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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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산배씨 찰방공파, 매은정, 쌍림면 하거1길48.JPG

    성산배씨 찰방공파 매은정(쌍림면 하거1길48)

     

    ▲ 석년(石年) 이정우(李正宇 : 여주, 1881년∼1924년)

     

    본관은 여주(驪州)이고 자는 상율(尙栗)이며 호는 석년(石年)이다. 고령군수(高靈郡守)를 지낸 만하(晩霞) 봉조(鳳朝)와 최원(最元)의 따님 숙부인(淑夫人) 거창장씨(居昌章氏) 사이에서 고종 18년(1881년) 1월 27일 태어났다. 만하공(晩霞公) 이봉조(李鳳朝)가 당대의 거유(巨儒)인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양명학파(陽明學派)의 거장(巨匠)인 난곡(蘭谷) 이건방(李建芳)을 비롯하여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던 시례지가(詩禮之家)의 유풍(遺風)을 이어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의 문인(門人)이 되었다. 시예(詩禮)에 능달(能達)하고 경학문장(經學文章)에 전도(傳道)한 절행지사(節行之士)로 그 이름이 세상에 드러났으며 경릉참봉(敬陵參奉)을 제수(除授)받았던 성산인(星山人) 진화(珍和) 이경(李俓)를 친구로 삼아 종유(從遊)하였다. 성리학(性理學)에 전념하여 경전(經傳)에 침잠(沈潛)하고 천인성명(天人性命 : 하늘의 명령과 사람의 성품)의 은미(隱微 : 겉으로 드러나지 않음)한 이치를 꿰뚫고 실천하였다. 특히 시(詩)와 문장(文章)에 능통하여 『시서(詩書)』를 저술하였다. 1924년 1월 2일 향년 44세로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대가야읍 고아리 토령(兎嶺) 동편산(東便山) 남향(南向)에 있다. 배위는 봉상(鳳相)의 딸 기계유씨(杞溪兪氏)이며 묘는 쌍분(雙墳)이다. 슬하에 해방 후 초대 고령군수(高靈郡守)와 교육감(敎育監)를 지낸 석조(石鳥) 홍직(洪直)을 두었다.

     

    ▲ 요암(饒庵) 최인석(崔寅錫 : 양천, 1857년∼1923년)


    본관은 양천(陽川)이며 초휘(初諱)는 창석(昌錫)이고 자는 주백(周伯)이며 호는 요암(饒庵)이다.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학서(鶴棲) 승태(升泰)와 지우(志愚)의 따님인 공인(恭人) 밀양변씨(密陽卞氏) 사이에서 철종 8년(1857년) 2월 1일 고령군 쌍림면 학동(鶴洞) 본제(本第)에서 태어났다. 천품(天稟)이 너그럽고 온화했으며 거동(擧動)과 용모가 단정(端正)하였다. 6세부터 수강(受講)하였으나 증조부 향오공(香塢公) 상원(尙遠)이 교독(敎督)하지 않아도 자력(自力)으로 학문에 힘써 날로 진취(進取)하였고 이따금 의표(意表)를 찌르는 질문을 하여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하니 향오공(香塢公)이 기애(奇愛)하였다. 당대의 명석(名碩) 농산(農山) 장승택(張升澤),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등에게 다소(多少) 유교경전에 관한 경의(經義)를 강질(講質)하기도 하였다. 1905년 겨울 서간(西澗) 박한열(朴漢烈)과 함께 거창(居昌) 아림(娥林) 객관(客館)에 있는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선생을 찾아가 뵙고 고금(古今)의 현인(賢人)과 성인(聖人)들의 출처지의(出處之義) 즉 나아가 벼슬하는 일과 머물러 집에 있는 일에 관한 의리(義理)와 국가치란지도(國家治亂之道) 즉 국가의 혼란을 다스리는 방법에 관하여 논하였는데 공이 해법을 명쾌하게 제시하자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선생이 탄복(歎服)하며 크게 칭찬(稱讚)하였다. 1902년 학곡(鶴谷) 최원(崔遠)과 매헌(梅軒) 최여설(崔汝契) 선조(先祖)를 현창(顯彰)하기 위해서 학매정(鶴梅亭)을 세웠으며 1922년 겨울에 사림(士林)의 공의(公議)로 송애재(松厓齋)에서 강학계(講學契)를 만들여 경전을 강송(講誦)하고 시를 지어 읊기도 하였다. 조부 송애(松厓) 호문(虎文)의 유고(遺稿)를 모아 『송애문집(松厓文集)』을 발간하였다. 1923년 1월 27일 향년 67세로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쌍림면 서학동(西鶴洞) 상촌후(上村後) 숙인곽씨(淑人郭氏) 묘하(墓下) 간좌(艮坐)에 있으며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이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요암유집(饒庵遺集)』이 전하며 서(序)는 일헌(一軒) 이규형(李圭衡)이 썼다. 배위는 통정대부(通政大夫) 극규(極奎)의 따님인 성산전씨(星山全氏)이다.

     

    ▲ 이인표(李寅杓 : 성산, 1869년∼1930년)


    본관은 성산(星山)이고 초휘(初諱)는 천희(天熙)이며 자는 경춘(敬春)이다. 처사(處士) 봉상(鳳相)의 아들로 고종 6년(1869년) 태어나 종발(鍾發)의 장남으로 출계(出系)하였다.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문하에서 수학(受學)하였다.『고대철학고변(古代希臘哲學攷辨)』의 저자이자 유교개혁(儒敎改革)을 주장하였던 성와(省窩) 인재(寅梓)의 형이다. 1930년 졸(卒)하였다. 묘는 합천군 야로면 하림리 신기촌후 성지곡 좌등 중요(中腰) 석뇌하(石腦下) 인좌(寅坐)이다.

    ▲ 고재(古齋) 최곤술(崔坤述 : 경주, 1870년∼1953년)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경순(敬純) 또는 자강(子剛)이고 호는 고재(古齋)이다. 진릉참봉(眞陵參奉)을 지낸 창수(昌粹)의 장남으로 고종 7년(1870년) 5월 17일 태어났다.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의 문인이다. 약관(弱冠)의 나이로 경상관찰부(慶尙觀察府)가 실시한 영재선발시험(英才選拔試驗)에 수석(首席)으로 합격하여 영남(嶺南) 13영재(英才)로 선발된 후 낙육재(樂育齋)에서 3년간 수학(修學)하였으며 고령향교내에 만하(晩霞) 이봉조(李鳳朝)가 설립한 사립(私立) 명륜학원(明倫學院) 교장(校長)과 전교(典校)를 역임하였다. 35세인 1904년 대한제국 때에 둔 비서원(秘書院)의 정3품 관직인 비서승(祕書丞)에 임명되었으나 내부대신(內部大臣) 이재극(李載克)에게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겠다는 뜻을 전달하여 불취(不就)하였으며 경술국치(庚戌國恥) 후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초야에 묻혀 자연과 더불어 일생을 보냈다. 1925년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의 글을 모아 현존 최고(最古) 문집인『고운집(孤雲集)』상·하권 양권을 발간하였으며 이듬해 중간(重刊)하였다. 1936년에서 1937년까지 합천군 가야면 홍유동에 고운 최치원 선생의 학사당(學士堂)을 이전 및 건축시 주재(主宰)하였으며 1949년부터 1951년까지 가야서당(伽倻書堂) 건축을 주재(主宰)하였다. 1953년 10월 14일 향년 84세로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우곡면 속동 안산(案山) 정좌(丁坐)에 있으며 비문은 고령인 박태호(朴泰顥)가 지었다. 문집은『고재집(古齋集)』 2권이 있으며 1990년 손자 재욱(在旭)에 의해 ‘나라여! 내나라여’ 라는 제목으로 국역(國譯)되어 간행되었으며 『한시집(漢詩集)』은 1999년 국역(國譯)되어 간행되었다. 1963년 200명 내외 인사가 공을 추모하는 후학들의 모임인 ‘고재계(古齋稧)’를 만들어 정기모임을 하고 있다. 초취(初娶)는 진양정씨(晋陽鄭氏)이며 재취(再娶)는 성옥(成玉)의 따님인 여주이씨(驪州李氏)이다.

     

    ▲ 손암거사(遜菴居士) 이인광(李寅光 : 성산, 1878년∼1934년)


    본관은 성산(星山)이며 자는 중실(仲實)이고 호는 손암거사(遜菴居士)이다. 아버지 호발(發)과 태운(泰運)의 따님인 어머니 성산전씨(星山全氏) 사이에서 고종 15년(1878년) 7월 6일 고령군 대가야읍 내상리 228번지에서 태어났다. 홍와(弘窩) 이두훈(李斗勳)과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문하(門下)에서 수학(受學)하였다. 공은 천자(天資)가 영오(穎悟)하고 풍의(風儀)가 늠늠(凜凜)하여 어릴 때부터 장래가 성취(成就)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두 분 선생님 문하에서 수업하여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 망극(罔極)하자 솟구치는 열혈(熱血)을 진정(鎭定)할 길이 없어 일신(一身)을 나라를 위해 바칠 각오를 하던 중에 42세의 장년(長年)으로 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운동(己未獨立運動)을 당하여 온 마음과 온 힘을 한곳에 모아 만세를 크게 외쳤다. 공은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巴里講和會議)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곽종석(郭鍾錫), 김복한(金福漢) 등이 유림 대표로 작성한 독립청원서(獨立請願書)에 서명한 연서자(聯署者) 137명중 52번째로 서명하는 등 항일운동(抗日運動)을 전개하였다.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宋晦根)이 피체(被逮)되어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면서 체포되어 구속되었으나 1919년 4월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기소유예(起訴猶豫) 불기소(不起訴) 처분(處分)을 받고 풀려났다. 일제는 이들 유림이 한국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들이었으므로 민족적 감정이 더욱 번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크게 부각시키지 않았다. 이밖에도 공은 소비자의 권익을 보호하고 신장시킬 목적으로 1922년 8월 고령청년회관에서 개최된 고령소비조합(高靈消費組合) 창립총회(創立總會)에서 이사(理事)로 선출되었으며 1928년에는 공이 주도하여 고령 내산서당(乃山書堂)에서 스승인 홍와(弘窩) 이두훈(李斗勳)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13권 7책의『홍와문집(弘窩文集)』을 발행하는 등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 고령지역 사회에 크게 기여하였다. 1934년 8월 18일 향년 57세로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덕곡면 반성리 금암 수락동 선영 청룡등 진좌(辰坐)에 있다. 유고(遺稿) 3권이 전한다. 1995년 8월 15일 정부에서는 고인(故人)의 공훈(功勳)을 기리어 건국포장(建國褒章)을 추서(追敍)하였다. 배위는 춘석(春錫)의 따님인 전주이씨(全州李氏)이다.

     

    ▲ 아계(鵝溪) 오우상(吳瑀相 : 고창, 1880년∼1956년)


    관향은 고창(高敞)이며 자는 자형(子珩)이고 호는 아계(鵝溪)이다. 처사(處士) 화순(和淳)과 유권(有權)의 따님인 밀양손씨(密陽孫氏) 사이에서 고종 17년(1880년) 태어났다.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의 문인이다. 총명하고 재주가 많았고 청렴하고 검소하였으며 말수가 적었다. 이름난 선비들에게 의문 나는 것을 번갈아 물어 도움을 얻었다. 향리에 있는 사우(士友)들이 계(契)를 만들어 묘소에 비석을 세웠다. 종손(從孫) 재홍(在烘)이 가장(家狀)을 짓고 화산(花山) 권용현(權龍鉉)이 묘갈명을 지었다. 1956년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우곡면 야정리 아곡촌 뒤 강남산 경좌(庚坐)에 있다.

     

    ▲ 이상희(李相羲 : 광주, 1880년∼졸년미상)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자는 백양(伯陽)이고 호는 차산(此山)이다. 고종 17년(1880년) 고령군 대가야읍 내상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선생을 찾아 뵙고 처음 만나 가르침을 청할 때 작은 선물을 함으로써 예절을 갖추는 속수지례(束脩之禮)를 행하고 제자가 돼 학문을 전수(傳受)받아 유학자로서 명성이 인근 지역에 널리 알려졌다. 1910년 8월 29일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국권(國權)을 상실한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한 후 오매(寤寐)에도 조국 광복에 마음과 정성(精誠)을 다하던 중 1919년 전국 유림이 비밀리에 파리평화회의에 자주독립을 청원하는 독립청원서(獨立請願書)에 서명했던 유림의거(儒林義擧)에 즈음해 연서자(聯署者) 137명중 78번째, 고령 출신 서명자 중에는 같은 내상동에 살았던 이인광(李寅光)에 이어 3번째로 서명했다. 그 후에 사문(師門)의 지휘하에 서명인(署名人)의 규합(糾合)에 혼신의 노력을 다하다가 왜경에게 체포돼 고령경찰서에서 모진 고문(拷問)과 옥고(獄苦)를 치르다가 석방(釋放)된 후에도 민족정기(民族精氣)의 선양(宣揚)에 앞장섰다. 파리장서(巴里長書) 사건에 서명한 7명 중 6명은 정부에서 고인(故人)의 공훈(功勳)을 기리어 건국포장(建國褒章)을 추서(追敍)받은 반면 공만이 유일하게 미추서(未追敍) 유림(儒林)으로 남아 있을 뿐 아니라 연고지를 통해 수소문(搜所聞)해도 후손들의 행방과 주소도 알 수 없어 애석하기 그지 없다. 졸년(卒年) 및 묘는 미상(未詳)이다.

     

    (註釋) 속수지례(束脩之禮)
    묶은 육포의 예절이라는 말로, 스승을 처음 만나 가르침을 청할 때 작은 선물을 함으로써 예절을 갖춘다는 뜻이으로 《논어(論語)》 술이(述而)편에 나오는 말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속수 이상의 예를 행한 자에게 내 일찍이 가르쳐주지 않은 바가 없었다(子曰 自行束脩之以上 吾未嘗無誨焉)”라고 하였다. 속수(束脩)는 열 조각의 마른 고기로, 예물(禮物) 가운데 가장 약소한 것이다. 공자는 모든 가르침은 예(禮)에서 시작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제자들에게 가장 작은 선물인 속수 이상의 예물을 가지고 오도록 함으로써 제자의 예를 지키도록 하였다. 여기에서 속수지례란 제자가 되기 위하여 스승을 처음 뵈올 때에 드리는 예물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 의암(宜庵) 배병한(裵炳翰 : 성주, 1882년∼1948년)


    본관은 성주(星州)이고 초휘(初諱)는 욱(煜)이며 자는 여란(汝鸞)이고, 호는 의암(宜庵)이다. 충훈부(忠勳府) 도사(都事)를 지낸 영근(榮根)과 학문(翯文)의 따님인 양천최씨(陽川崔氏)와의 사이에서 고종 19년(1882년) 3월 3일 고령군 쌍림면 학동(鶴洞)에서 태어났다.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더 널리 배우고자 하여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와 회당(張晦堂) 장석영(張錫英) 두 선생에게서 사사(師事)를 받았다. 또 동향(同鄕) 출신 홍와(弘窩) 이두훈(李斗勳)‧송강(松岡) 김성하(金聲夏)‧만송(晩松) 한남교(韓南敎) 등과 교유하였다. 사서(四書)를 곁에 두고 밥 먹는 것도 잊고 연구에 전념하면서, 학문은 마음과 성품을 다스리기 위해 하는 것이지 사장(詞章)에 힘쓰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1948년 9월 3일 향년 67세로 졸(卒)하였다. 묘는 익산촌후(翊山村後) 북 임좌(壬坐)에 있다. 그의 문집 『의암문집(宜庵文集)』은 스승인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에게 대학의의(大學疑義)와 맹자의의(孟子疑義)에 대하여 질문한 편지 글들과 부록(附錄)에는 「의암기(宜庵記)」‧가장(家狀)‧묘갈명(墓碣銘) 등이 실려 있다. 배위는 세유(世猷)의 따님인 초계정씨(草溪鄭氏)이다.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최종동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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