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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씨(仁川李氏) 쌍명재공파(雙明齋公派)

기사입력 2021.02.05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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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명재, 경남 의령군 뷰림면 단원리.jpg

    쌍명재(경남 의령군 부림면 단원리)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인천이씨(仁川李氏) 상계연원(上系淵源)
    ① 김해김씨(金海金氏)와 허씨(許氏)와의관계
    신라 유리왕 19년(42년)에 가락국 김수로대왕(金首露大王)께서 가락국(駕洛國)을 세우고, 인도 아유타국(阿踰他國)의 공주 허왕옥(許皇玉)을 서기 48년에 왕비로 맞이하여 두 분사이에 열 분의 왕자를 두셨는데 김씨(金氏) 성(姓)을 가진 사람이 8명이요 허왕후(許王后)의 성을 따라 허씨(許氏)로 한 사람이 둘이었는데 허씨에서 사성을(賜姓)을 받아 인천이씨가 되었으니 김해김씨(金海金氏)와 허씨(許氏), 인천이씨(仁川李氏)는 동일혈족(同一血族)이다.
    ② 득성조(得姓祖) 이허기(李許奇)
    인천이씨(仁川李氏)의 선계(先系)는 가야계의 허씨(許氏)로 알려져 있다. 신라 경덕왕 15년(756년)에 아찬(阿飡) 벼슬을 하신 허기(許奇)(허황후의 23세손)께서 신라 사신(使臣)으로 당(唐)나라에 갔을 때 그 해 11月에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발생하여 당현종(唐玄宗)이 촉(蜀) 나라로 피난하게 되었을 때 위험을 무릅쓰고 허기(許奇)께서 호종(扈從)하였으며 757년에 난이 평정되자 황제가  이를 가상히 여겨 ‘오언십운시(五言十韻詩)’를 지어주고 황제의 성(姓)인 이씨성(李氏姓)을 사성(賜姓) 받아 758년 신라로 환국(還國)하심에 신라 경덕왕께서 친히 그 공을 높이여 소성백(邵城伯)의 작위(爵位)와 식읍(食邑) 1,500호를 봉(封)하여 세습(世襲)케 되었던 것이다. 이로서 허씨(許氏)에서 이씨(李氏)가 되었으니 ‘이허기(李許奇) 선조를 득성조(得姓祖)’라 한다. 소성(邵城)은 지금의 인천(仁川)이다.
    ③ 관향조(貫鄕祖) 이허겸(李許謙)
    득성조(得姓祖) 이허기(李許奇)부터 선대(先代)의 어른들께서 인천지방에 세거하였으며 10세(世)에 내려와 이허겸(李許謙)이 고려 현종 15년(1024년) 증.상서좌복야.상주국.소성현.개국후(贈.尙書左僕射.上柱國.邵城縣.開國侯)에 추증(追贈)되고 식읍(食邑) 1,500호를 받자 이허겸공(李許謙公)을 1세조(世祖)로 하여 인천이씨(仁川李氏) 세보(世譜)의 관향조(貫鄕祖)로 삼았다.
    (2) 인천이씨(仁川李氏) 분파(分派) 
    시중공파(侍中公派), 공도공파(恭度公派), 쌍명재공파(雙明齋公派), 충강공파(忠剛公派), 제학공파(提學公派), 시랑공파(侍郞公派) 등으로 분파(分派)되었다.
    (3) 인천(仁川)의 연혁(沿革)
    신라 경덕왕 때 소성(邵城)에서 고려 숙종 때 경원군(慶源郡)으로 인종 때 인주(仁州)로 공양왕때 경원부(慶源府)로 하였다가 조선 태조 때 인주(仁州)가 되고 정부수립 후 인천시(仁川市)로 되었다. 따라서 인천이씨(仁川李氏)의 본관 명칭은 고려시대 경원이씨(慶源李氏) → 조선시대 인주이씨(仁州李氏) → 인천이씨(仁川李氏)의 순으로 바뀌었다.
    (4) 고려 전기 최대 문벌귀족(門閥貴族) 경원이씨(慶源李氏)
     인천이씨는 고려 제 11대 문종부터 제17대 인종에 이르기까지 7대에 걸쳐 10명의 왕비와 8명의 외손 왕(덕종, 정종, 문종, 순종, 선종, 헌종, 숙종, 인종)을 배출하였으며 80년간 외척(外戚)으로서 고려 전기 최대 문벌귀족이 되었다.
    (5) 인천이씨(仁川李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인천이씨는 19가구 57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쌍명재공파(雙明齋公派) 후손들이 대가야읍 일원에 세거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① 이한(李翰)
    증(贈)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허겸(許謙)과 공부시랑(工部侍郞) 낙랑군(樂浪君) 김은열(金殷悅)의 따님인 계림국대부인(鷄林國大夫人) 경주김씨(慶州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태자태보(太子太保)를 지내고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증직(贈職)되었고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② 이자연(李子淵)
    자는 약충(若沖)이며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한(翰)과 낙랑군부인(樂浪郡夫人) 경주최씨(慶州崔氏) 사이에서 목종 6년(1003년) 장남으로 태어났다. 현종 15년(1024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후 우보궐(右補闕)·이부낭중(吏部郎中)·어사잡단(御史雜端)·우승선·급사중(給事中)·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등을 역임하였다. 그 후에 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參知政事)·수사도(守司徒)·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郎平章事)가 되었다. 문종 6년(1052년) 3월에는 딸 셋이 문종에게 시집을 가 인예태후(仁睿太后)·인경현비(仁敬賢妃)·인절현비(仁節賢妃)가 되었다. 특히 인예태후(仁睿太后 : 이자연의 딸)는 순종·선종·숙종을 낳아 인종에 이르기까지 왕들 모두가 인예태후의 혈통(血統)이었다 이로 인해 경원이씨(慶源李氏)가 고려의 최고 문벌로 성장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1052년 수태위(守太尉)가 되었고, 1053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 1054년 태보(太保), 1055년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에 이르렀다. 그 뒤 추성좌세보사공신(推誠佐世保社功臣)에 봉해지고, 식읍(食邑) 3,000호가 주어졌다. 문종 15년(1061년) 졸(卒)하고 선종 3년(1086년) 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장화(章和)이다.
    ③ 이자상(李子祥)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한(翰)과 낙랑군부인(樂浪郡夫人) 경주최씨(慶州崔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를 지냈다. 삼대째 임금을 모시면서 충의(忠義)가 당당(堂堂)하였고 당시 재상들이 모두 꺼리고 두려워하였다. 그 아들 예(預)와 오()도 평장사(平章事)가 되니 그때 사람이 시를 지어 축하하기를 “뜰 아래 지란(芝蘭)은 재상이 셋이요 문앞에 도리(桃李)는 공경(公卿)이 열이로다.”라고 하였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여진(女眞)을 정벌하여 구성(九城)을 쌓고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던 파평윤씨(坡平尹氏) 중시조(中始祖) 윤관(尹瓘)을 사위로 두었다.

    (註釋1) 지란(芝蘭 : 영지와 난초)
    (남의 집의)똑똑하고 영리(怜悧ㆍ伶俐)한 아들의 비유(比喩)로 쓰인다.
    (註釋2) 도리(桃李)
    복숭아와 오얏인데 열매가 많이 달린다 하여 선대의 음덕(蔭德)을 받은 자손을 가리키기도 한다.

    ④ 이예(李預)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자상(子祥)과 하원군대부인(河源郡大夫人) 유씨(柳氏)사이에서 태어났다. 문종 때 급제하여 여섯 왕조에 걸쳐 관리를 지냈다. 상서공부원외랑(尙書工部員外郎)·예부시랑(禮部侍郞)·한림학사(翰林學士)를 역임하였다. 선종 9년(1092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1093년 지중추원사 한림학사 승지(知中樞院事翰林學事承旨)를 거쳐 헌종 1년(1095년) 5월 정당문학(政堂文學) 형부상서(刑部尙書)가 되었다. 이자의(李資義)의 역모(逆謀)사건에 연루되어 파면되었으나, 정신현비(貞信賢妃 : 이예(李預)의 딸)의 딸인 연화궁주(延和宮主)가 예종의 비가 되자 다시 부름을 받았다. 예종 1년(1106년) 검교태위·형부상서·정당문학(檢校太尉刑部尙書政堂文學)이 되었으며, 판어서원사(判御書院事)로 치사(致仕)하였으며,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에 이르러 졸(卒)하였다. 시호는 문현(文顯)이다.
    ⑤ 이오(李)
    호는 금강거사(金剛居士)이다.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자상(子祥)과 하원군대부인(河源郡大夫人) 유씨(柳氏)사이에서 정종 8년(1042년) 태어났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된 후 문종·순종·선종·헌종·숙종·예종 등 여섯 왕을 모셨다. 숙종 1년(1096년) 직문하성(直門下省)된 후 예빈경추밀원부사(禮賓卿樞密院副使)·빈객(賓客)·예부상서(禮部尙書)가 되었다. 숙종 8년(1103년) 검교사도 수사공 판형부사(檢校司徒守司空判刑部事), 서경유수사(西京留守使),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거쳐, 다음해 3월 수사공·상서우복야(守司空尙書右僕射), 7월 중서시랑평장사·판삼사사·태자소보(中書侍郎平章事判三司事太子少保)가 되었다. 예종 1년(1105년) 문하시랑동평장사(門下侍郎同平章事)에 제수되었고, 다음해 12월 상주국(上柱國), 1107년 문덕전태학사 판상서예부사국사(文德殿太學士判尙書禮部事修國史)가 되었으며 예종 4년(1110년)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수태보·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판상서예부·한림원사·수국사상주국(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守太保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判尙書禮部翰林院事修國史上柱國)에 이르렀으며, 같은 해 7월 세상을 떠났다. 학문에 뛰어나고 불교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특히『금강경(金剛經)』을 좋아하여 스스로 금강거사(金剛居士)라는 호를 지어 불렀다.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⑥ 이인로(李仁老)
    초명은 득옥(得玉)이고 자는 미수(眉叟)이며 호는 쌍명재(雙明齋), 와도헌(臥陶軒)이다. 좌상시(左常侍) 백선(伯仙)과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석(奭)의 따님인 최씨(崔氏) 사이에서 의종 6년(1152년) 태어났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의지할 데 없는 고아가 되어 백부(伯父)인 화엄승통(華嚴僧統 ; 화엄종의 우두머리)인 요일(寥一)이 그를 거두어 양육(養育)하고 공부를 시켰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리하여 글을 잘 지었는데 초서(草書)와 예서(隷書)에 능하였다. 의종 24년(1170년) 그의 나이 19세 때에 정중부(鄭仲夫)의 난에 머리를 깎고 피하였다가 난이 진정되자 환속(還俗)하였다. 이런 와중에 명종 27년(1197년) 이의민(李義旼)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잡은 최충헌(崔忠獻)이 명종과 연결된 왕자 출신의 승려들인 소군(小君)을 궁중에서 쫒아내자, 이인로(李仁老)의 숙부이자 승통인 흥왕사(興王寺)의 승려 요일(寥一)도 영남 지역으로 쫓아내어 고령의 미숭산(美崇山) 반룡사(盤龍寺)에 내려와 주석(主席)하면서 화엄종단(華嚴宗團)의 부흥을 위하여 화엄결사(華嚴結社)를 결성할 때 조카인 이인로도 고령으로 내려와 반룡사 아래 마을인 월막리에 머물면서 용리 상용에 있는 한림대(翰林臺)를 찾아 노닐기도 하였다. 그가 반룡사에 와서 쓴 시 ‘산거(山居)’를 소개하고자 한다.
     
    春去花猶在 / 봄은 가도 꽃은 아직 있는데
    天晴谷自陰 / 하늘은 갰건만 골짜기는 절로 침침하네 
    杜鵑啼白晝 / 두견이 한낮에 우짖으니
    始覺卜居深 / 비로소 깨닫노라 깊은 골에 사는 줄을

     

    명종 6년(1176년) 25세 때에 국자감(國子監)에 들어가 육경(六經)을 두루 학습하였다. 명종 10년(1180년) 진사과에 장원급제한 후 명종 12년(1182년) 금나라 하정사행(賀正使行)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수행하였으며 귀국하여 계양군(桂陽郡) 서기(書記)로 임명되었다. 그 뒤에 문극겸(文克謙)의 천거로 한림원(翰林院)에 보직되어 사소(詞疏 : 문장과 상소)를 담당하였다. 한림원에서 고원(誥院)에 이르기까지 14년간 그는 조칙(詔勅 :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글)을 짓는 여가에도 시사(詩詞)를 짓되 막힘이 없었다. 그래서 ‘복고(腹藁)’라는 일컬음을 들었다. 이인로는 임춘(林椿)·오세재(吳世才) 등과 어울려 시와 술로 즐기며 세칭 ‘죽림고회(竹林高會)’를 이루어 활동하였다. 신종 7년(1204년) 맹성(孟城)의 수령이 되었으며,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郎)·비서감우간의대부(秘書監右諫議大夫)를 역임하였다. 고종 7년(1220년) 졸(卒)하였다. 저술로는『파한집(破閑集)』만이 전하고 있다. 아들 정(程), 양(穰), 온()과 손자 승경(承慶), 승우(承雨), 등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註釋1) 고원(誥院)
    임금의 명령을 글로 작성하는 관아란 뜻으로, 한림원(翰林院)이나 예문관(藝文館)을 이르는 말.
    (註釋2) 복고(腹藁)
    뱃속에 글을 초잡음. 당(唐) 나라 왕발(王勃)의 글 짓는 버릇이 먼저 먹을 잔뜩 갈아 놓고 술을 마신 뒤, 이불을 둘러쓰고 한 숨 자고 일어나 곧 붓을 잡고 줄줄 써 내려가는데, 한 글자도 고치는 일이 없어서 당시 사람들이 ‘복고’라 했다 함.<당서(唐書) 왕발전(王勃傳)>
    (註釋3) 죽림고회(竹林高會)
    중국 위(魏)나라 정시연간(正始年間)에 완적(阮籍)·혜강(康) 등이 구성한 죽림칠현(竹林七賢)을 본떠서 정중부(鄭仲夫)의 무신집권기에 이인로(李仁老)·임춘(林椿)·오세재(吳世才)·조통(趙通)·황보 항(皇甫沆)·함순(咸淳)·이담지(李湛之) 등 일곱 문인이 구성한 시회(詩會)를 ‘해좌칠현(海左七賢)’이라고도 한다.

     

    ⑦ 이양(李穰)
    비서감우간의대부(秘書監右諫議大夫) 인로(仁老)와 국자감(國子監) 사업(司業) 영유(永濡)의 따님인 경주최씨(慶州崔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고려 희종 때 문과에 급제한 후 돈녕부(敦寧府) 판관(判官)를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⑧ 이극명(李克明)
    판군기감(判軍器監) 승우(承雨)의 아들로 태어났다. 보문각(寶文閣) 대제학(大提學)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냈다. 대구에서 의령으로 장가들어 그로 인하여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2) 조선시대


    ① 이맹(李孟)
    자는 요중(堯仲)이고 진해현감(鎭海縣監) 신지(新之)의 장남으로 성종 6년(1475년) 태어났다. 봉열대부(奉列大夫) 사복시(司僕寺) 소윤(少尹)을 지냈다. 연산군 때 스스로 진중(鎭重)하며 자랑하지 않고 노평(蘆坪)과 의현(衣峴)간에 집을 짓고 호를 노오(蘆塢)라 하며 숨어살면서 세상일에 초연하여 무오사화(戊午士禍)의 화(禍)를 면하였다. 중종 37년(1542년) 졸(卒)하였다. 유고로 시집(詩集) 1권이 전한다.
    ② 이언명(李彦明)
    초휘(初諱)는 언조(彦朝)이고 자는 상정(尙貞)이며 호는 유암(幽岩)이다. 봉사(奉事) 풍수(豐壽)와 정구(鼎九)의 따님인 경주김씨(慶州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모장군(禦侮將軍) 사정(司正)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는 “왜적에게 죽임을 당할 위험에 처해 있는 아버지를 칼날을 무릅쓰고 안아서 막았다”고 그 효행(孝行)을 칭찬하였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및 전거(轉居)

     

    (1) 명종 27년(1197년) 이인로(李仁老)가 무신난(武臣亂)을 피하여 백부(伯父) 화엄승통(華嚴僧統) 요일(寥一)을 따라 고령에 잠시 우거(寓居)하였으나 무신난(武臣亂)이 진정되자 고령을 떠나 서울로 올라가 벼슬을 하였다(上京從仕).
    (2) 이인로(李仁老)의 18세 원항(元恒)이 고종 32년(1895년)경 합천군 가회면 월계리에서 고령으로 전거(轉居)하여 4대에 걸쳐 후손이 세거(世居)하고 있다.

     

    4. 기타


    (1) 공도공파(恭度公派) 23세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자운(李自雲)의 대구 후손들이 선조의 묘를 고령군 쌍림면 합가2리로 이장하여 그곳에 재각(齋閣) 금충재(琴忠齋)가 있다.
    (2) 고령 입향 후 현달(顯達)한 인물이 없어 이하는 생략한다. 

     

    자료제공 : 후손 이덕영(李德榮)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편집국장 최종동(崔鍾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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