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와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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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와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 가산(可山) 이호창(李鎬昌 : 여주, 1858년∼1942년)

 본관은 여주(驪州)이며 자는 덕필(德弼)이고 호는 가산(可山)이다. 처사(處士) 배민(培敏)과 국서(局緖)의 따님인 성산배씨(星山裵氏) 사이에서 철종 9년(1858년)에 태어났다.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와 홍와(弘窩) 이두훈(李斗勳)  양문(兩門)을 모두 출입하였다. 학행(學行)과 경술(經術)이 뛰어나 사람들에게 존중받았다. 경서(經書)를 깊이 사색하여 그 뜻을 궁구(窮究)하였고 과거 공부에 뜻을 끊고 성현(聖賢)의 글에 잠심(潛心)하면서 오로지 위기지학(爲己之學)에 힘을 쏟았다. 1942년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대가야읍 중화리 화갑 부흥립(富興昱) 임좌(壬坐)에 있다. 배위는 진아(鎭阿)의 따님인 성주이씨(星州李氏)이다.
▲ 죽와(竹窩) 나찬기(羅燦基 : 수성, 1872년∼1953년)
 본관은 수성(壽城)이고 자는 문극(文極)이며 호는 죽와(竹窩) 또는 묵담(默潭)이다. 처사(處士) 인수(忍叟) 수열(秀烈)과 주대(柱大)의 따님인 김해김씨(金海金氏) 사이에서

양천최씨 송애재, 쌍림면 학동길 56-5.JPG

양천최씨 송애재(쌍림면 학동길 56-5)
 
 
고종 9년(1872년) 태어났다. 천성(天性)이 너그럽고 후하며 재주가 있고 풍채(風采)가 뛰어났다. 열성(熱誠)으로 학문(學問)을 닦고 사물의 이치를 깊이 연구하여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 선생의 문인이 되었으며 경서(經書)를 강론(講論)하고 의리(義理)의 가르침을 듣고 성취한 것이 많았다. 또 임재(臨齋) 서찬규(徐贊奎), 미강(渼江) 박승동(朴昇東), 시암(是菴) 이직현(李直鉉) 등 제현(諸賢)과 학문연구에 힘쓰고 다곡(茶谷) 이기로(李基魯)과 함께 학문(學問)을 갈고 닦았으며 서로 보태고 늘여 도움이 되게 하였다. 고향의 문회(文會)에 참여하니 사람들이 인망(人望)을 추앙(推仰)하였다. 저서로는 『죽와집(竹窩集)』이 전한다. 1953년에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다산면 지동(池洞) 조고묘(祖考墓) 아래 오좌(午坐)이다. 배위는 해준(海埈)의 따님인 경산이씨(京山李氏)이다. 묘갈명(墓碣銘)은 권용현(權龍鉉)이 근찬(謹撰)하였다.
(註釋) 문회(文會) 
시문(詩文) 따위를 지어 서로 비평하는 문학 모임. 문사(文士)의 모임
▲ 다곡(茶谷) 이기로(李基魯 : 전의, 1876년∼1946년)
 본관은 전의(全義)이며 자는 성종(聖宗)이고 호는 다곡(茶谷)이다. 두남(斗南) 종림(種琳)과 상곤(相坤)의 따님인 전주이씨(全州李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고종 13년(1876년) 고령군 다산면 상곡리에서 태어났다.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 의 삼종질(三從姪)이다. 천품(天稟)이 아름답고 덕성(德性)이 일찍 성취되었다. 스스로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 선생 문하에서 직접 가르침을 받았으며 학문이 정심(精深)하고 몸소 실천하는 것이 순고(純固)하며 흡연(翕然)하여 한편으로 유림의 사표(師表)가 되었다. 1912년 기존 서락서당(西洛書堂)을 다시 이건(移建) 중창(重創)하기 위해 서락서당계(西洛書堂契)가 조직되어 1923년부터 고령군 다산면 상곡동 465번지에 본격적으로 서락서당(西洛書堂)을 짓기 시작하여 1926년에 완성된 후 일제강점기간 동안 공의 주도하에 강학(講學)을 시작하여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 선생의 학통을 이어 장차 나라가 바로해졌을 때를 대비하여 글읽는 소리가 그치치 않게 많은 후학을 양성했으나 1946년 공의 사후(死後)에 강학 기능은 사라졌다. 공은 벽제(躄齊) 이규운(李奎運)에 의해 창시(創始)된 ‘다산이학학맥(茶山理學學脈)‘을 더욱 뻗어나게 했으며 일찍이 “소만구(小晩求)”라 칭하게 되었다. 또한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 선생의 유사(遺事)를 지었다. 달성군 화원의 인흥마을에 있는 수봉정사(壽峰精舍)에서 수봉(壽峰) 문영박(文永樸),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 난곡 이건방(蘭谷 李建芳), 백괴(百愧) 우하구(禹夏九) 등 역내(域內)의 기라성 같은 학자들과 이곳에서 교유(交遊)하며 경륜(經綸)을 교류(交流)하였다. 1946년 향년 71세로 졸(卒)하였다. 묘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설화리 산 124-8번지에 있다. 문집 24권 12책이 세상에 전한다. 배위는 정학(廷鶴)의 따님인 달성배씨(達城裵氏)이다.
(註釋1) 유사(遺事)
돌아가신 분의 사적(事蹟)을 기록한 것을 말한다.
(註釋) 흡연(翕然)
대중(大衆)의 의사(意思)가 한 곳으로 쏠리는 정도(程度)가 대단한 모양
참고문헌 : 암서집(巖棲集), 전의이씨 부정공파보(경인보)
▲ 율봉(栗峯) 최순곤(崔淳崑 : 양천, 1879년∼1960년)
 본관은 양천(陽川)이고 초명(初名)은 순벽(淳璧)이며 자는 치옥(致玉)이고 호는 율봉(栗峯)이다. 요암(饒庵) 인석(寅錫)과 통정대부(通政大夫) 극규(極奎)의 따님인 성산전씨(星山全氏) 사이에서 고종 16년(1879년) 3월 28일에 학동(鶴洞) 옛집에서 태어났다. 생김새가 밝고 뛰어났으며 재주가 보통사람과 달랐다. 처음에는 선고(先考) 요암공(饒庵公) 최인석(崔寅錫)에게 배웠는데 글자와 글의 뜻을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즉시 알았다. 요암공(饒庵公)이 매우 사랑하였으나 해이(解弛) 하지 않토록 가르침을 엄격히 하고 문사(文詞)를 가르침에 더욱 독촉을 하여 정문(程文)이 일찍이 이루어졌으며 또한 각체(各體)가 정세(精細)하고 묘하였다. 부모님을 모심에 정성을 다하였으며 4형제가 침식을 같이하면서 우애를 나누었다. 부친의 명(命)으로 폐백(幣帛)을 갖추어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을 찾아 뵙고 문하생(門下生)이 되었으며 농산(農山) 장승택(張升澤) 선생과 경전(經典)과 경서(經書)의 뜻을 토론(討論)하고 질문하였으며 폐백(幣帛)을 갖추어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선생을 찾아 뵙고 유도(儒道)를 강설(講說)하고 밝히어 향중(鄕中) 사림(士林)이 추중(推重)하였다. 그후에 향리 후생들이 책을 끼고 가르침을 청하였을 때 가르침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학칙(學則)을 엄격하게 지켰고 혹은 학칙(學則)을 지키지 않을 경우 책임있는 모든 학생에게 태장(笞杖)을 가하셨다. 하루 종일 아무 말없이 입을 다문 채 무릎을 모으고 똑바로 앉아 있었다. 1960년 9월 19일 향년 82세로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쌍림면 서쪽 합가동 용당곡(龍塘谷) 각씨등(角氏嶝) 갑좌(甲坐)에 있다. 묘갈명(墓碣銘)은 성산인(星山人) 극암(克菴) 이기윤(李基允)이 지었다. 시문집(詩文集)인 율봉유고(栗峯遺稿) 3권 1책이 전한다. 배위는 기용(琪鎔)의 따님인 김해김씨(金海金氏)이다.
(註釋1) 정문(程文)
과거(科擧)의 고시장에서 쓰이는 일정(一定)한 법식(法式)이 있는 글
(註釋2) 각체(各體)
서체, 글자체, 문체 따위의 여러 가지 체
참고문헌 : 율봉유고(栗峯遺稿), 양천최씨 세보(임술보)
▲ 이영로(李泳魯 : 전의, 1885년∼1936년)
 본관은 전의(全義)이며 자는 여양(汝養)이다. 영남학맥의 뛰어난 성리학자(性理學者)이었던 만구(晩求) 종기(種杞)와 기인(基寅)의 따님인 밀양박씨(密陽朴氏) 사이에 외아들로 고종 22년(1885년)에 태어났다. 1926년 1월 국내에서의 군자금 모금차 중국으로부터 밀입국하여 활동을 벌이고 있던 매부(妹夫) 김창숙(金昌淑)을 대구 남선정에서 만나 그의 부탁으로 밀양군 단장면 단장리의 부호(富豪) 허석(許石)에게 출자(出資)를 요구하는 편지를 전달하고 군자금 100원을 받아 김창숙(金昌淑)에게 전해주었다가 피체(被逮)된 소위 ‘제2차 유림단 사건(第二次 儒林團 事件)’에 연루되어 징역 8월에 집행유예(執行猶豫) 2년을 선고받고 옥고(獄苦)를 치룬 공을 인정받아 1995년 정부로부터 건국포장(建國褒章)을 추서(追敍)받았다. 1936년 음력 4월 6일 졸(卒)하였다. 묘는 춘사산(春寺山)에 있다. 초취(初娶)는 호림(頀林)의 따님인 의성김씨(義城金氏)이고 재취(再娶)는 시용(時容)의 따님인 선산김씨(善山金氏)이다.
◉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본관은 현풍(玄風)이고 아명(兒名)은 곽석산(郭石山)이며 경술국치(庚戌國恥) 후에는 곽도(郭)라고도 하였다. 자는 명원(鳴遠)이고 호는 면우(俛宇)이다. 원조(源兆)의 막내 아들로 헌종 12년(1846년)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서 태어났다. 20대 초반에 송학(宋學 : 성리학)에 관심을 가지고 회와(晦窩)라는 당호(堂號)를 짓고 성리학 공부에 전념하여 이미 학자의 명성을 떨쳤다. 25세 때『사단십정경위도(四端十情經緯圖)』를 지어 이진상(李震相)을 찾아가 문하에 들어갔으며, 그뒤 그의 심즉리설(心卽理說)이 심화되었다. 정통 퇴계학파(退溪學派)나 노사학파(蘆沙學派)로부터 이진상(李震相)의 심즉리설(心卽理說)이 비판을 받을 때 이에 맞서 스승의 심즉리설(心卽理說)를 옹호하였다. 고종 32년(1895년) 비안현감(比安縣監)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때마침 을미의병(乙未義兵)이 일어나자 안동과 제천의 의병진영을 살피고, 고종 33년(1896년) 거창의 다전(茶田)으로 옮겨 살았다. 광무 3년(1899년)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이때 『한주집(寒洲集)』을 편찬하였으며, 『남명집(南冥集)』도 교열(校閱)하였다. 1903년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고 비서원승(秘書院丞)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이때 신기선(申箕善)의 간(諫)에 따라 왕이 온갖 예의를 갖춰 부르자 일단 상경하여 10여일간의 어전(御前) 독대(獨對)로 시무(時務)를 논하니 고종이 감복하여 의정부(議政府) 참찬(參贊)에 임명하였다. 그후  물러나 4개종의 차(箚 : 상소문)로써 간(諫)하였다. 그 내용은 첫 번째 숭정학(崇正學) 즉 올바른 학문을 높여서 장려할 것, 두 번째 결민심(結民心) 즉 민심을 수습하여 단결되게 할 것, 세 번째는 정군제(定軍制) 즉 군사의 체제를 제정, 확립할 것, 네 번째는 절재용(節財用) 즉 국가의 재용(財用)을 절약할 것이었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조약에 찬성하여 서명한 다섯 대신 즉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처단할 것을 상소하였다. 1906년 을사의병(乙巳義兵)이 확산될 때, 기병(起兵 : 군대를 일으킴) 여부로 논의가 있었으나 즉각의 죽음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서 자중 고행하며 깨끗한 죽음에 이르는 것이라는 ‘자정론(自靖論)’에 의거 기의(起義 : 의병을 일으킴)에 동참하지 않았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영남은 물론, 호남의 전우(田愚)와 기정진(奇正鎭), 기호의 이항로(李恒老)·김복한(金福漢) 등의 유문(儒門)과 또 양명학계의 황원(黃瑗)과 개성 출신 김택영(金澤榮) 등과도 교유하였으며, 그리스철학과 기독교리까지 탐구하면서 심즉리설(心卽理說)을 발전시켜갔다. 그의 학문은 21세 때의 〈회와삼도 晦窩三圖〉와 25세 때의〈사단십정경위도 四端十情經緯圖〉가 기초적인 것이다. 여기에서 마음이란 성(性)과 기(氣)를 합쳐서 말하는 것인데, 기(氣)라 함은 오행(五行)의 기(氣)이고 성(性)은 인(仁)·의(義)·예(禮)·지(智)의 이(理)로서, 이(理)와 기(氣)가 발함에 있어서는 이(理)는 근본(根本)이고 기(氣)는 수단(手段)으로서 이(理)가 기를 타는〔乘〕 것이라 했다. 그리하여 이(理)가 기(氣)를 바르게 타면 날〔經〕이 되는 것이니 그것이 사단(四端)이고, 그것이 겉으로 나타난 것이 씨〔緯〕로서 십정(十情)이라는 것이다. 이와같이 사단(四端)은 이(理)를 주(主)로 하고 십정(十情)은 기(氣)를 주(主)로 하는 것인데, 그 모두가 이(理)가 기(氣)를 타는 것은 같은 것이니 주리설(主理說)이다. 그뒤 32세 때 『이결(理訣)』을, 54세 때 『이기론(理氣論)』을 지으면서 주리설(主理說)이 강화되었다. 그와 동시에 각종 주기설(主氣說)을 배격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있은 뒤 김창숙(金昌淑)의 부탁으로 공의 나이 74세에 유림을 대표해서 파리강회회의(巴里講和會議)에 보낼 ‘파리장서(巴里長書)’를 썼다. 유림대표 137명이 서명한 2,674자의 장문(長文)으로 김창숙(金昌淑)을 시켜 1차로 중국 상해(上海)에 보내져 영어, 중국어, 우리말로 번역되어 파리에 모인 각국 대표에게 보내지고 우리나라의 각 기관과 향교에도 보내져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했다. 이 일로 2년의 실형을 받고 대구감옥에 투옥되었으나 병보석으로 풀려나 1919년 8월 향리인 거창에서 졸(卒)했다. 묘는 거창군 가조면 다천서당(茶川書堂) 서쪽의 모덕산(慕德山)에 있다. 단성에 이동서당(尼東書堂), 거창에 다천서당(茶川書堂), 곡성(谷城)에 산앙재(山仰齋)가 그를 기념하여 세워졌으며, 1963년에는 건국훈장(建國勳章) 국민장(國民葬)이 추서(追敍)되었다. 문집은 본집이 63책 165권, 속집이 13권, 연보 4권, 승교록(承敎錄) 1권 등 모두 183권의 영인본이 나와 있다. 
(註釋) 심즉리설(心卽理說)
심(心)의 본체(本體)는 리(理)에 있고 기(氣)에 있지 아니하기 때문에 심(心)의 정체(正體)나 실상을 지적하면 심(心)은 곧 리(理)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학설이다.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최종동 편집국장

* 수정합니다.
본지 제161호(2021年 1月 18日字) 기획연재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 中 첫 문항 두 번째 줄 기용(器容)을 기여(器汝)로 수정합니다. 이는 전의(全義)이씨 문중의 요청에 의하여 수정하게 되었으니 애독자 여러분들의 착오 없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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