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박씨(高靈朴氏) 사정공파(司正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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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고령박씨(高靈朴氏) 사정공파(司正公派)

벽한정-합천군 용주면 손목3길94.jpg

벽한정(합천군 용주면 손목3길94)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고령박씨(高靈朴氏) 시조(始祖) 박언성(朴彦成)


고령박씨(高靈朴氏) 시조(始祖)는 시조왕(始祖王) 박혁거세(朴赫居世)의 30세손이고 신라 54대 경명왕(景明王)의 둘째 왕자인 고양대군(高陽大君) 박언성(朴彦成)이며 본관(本貫)의 유래(由來)는 고양대군(高陽大君)의 봉토(封土)가 지금의 고령(高靈)인데 연유(緣由)한다.


(2) 고령박씨(高靈朴氏) 분파(分派)


1987년 정묘(丁卯) 대동보(大同譜) 편찬시 부창정공파(副倉正公派)와 주부공파(主簿公派)의 상계(上系) 선조명(先祖名)이 각 4위(四位), 각 2위(二位)가 실전(失傳)되어 상호 보조를 맞추기 위해 고양대군(高陽大君)의 7세를 기준으로 호장공파(戶長公派), 부창정공파(副倉正公派), 주부공파(主簿公派) 등 3계종파(三系宗派)로 분류하였으며 그 후 다시 15개 지파(支派)로 분파(分派)되었다.


(3) 고령박씨(高靈朴氏) 부창정공파(副倉正公派) 분파(分派)
17세기에 발행된 씨족원류(氏族源流)와 무민당(无悶堂) 박인(朴絪)의 문집인 ‘무민당집(无悶堂集)’에 수록된 세계도(世系圖)를 상고(詳考)하여 보니 부창정공파(副倉正公派)의 파조(派祖)로서 고려시대 향직(鄕職)을 지낸 7세 부창정(副倉正) 박환(朴還)의 증손자인 인걸(仁傑) 후손은 사정공파(司正公派), 현감공파(縣監公派), 무숙공파(武肅公派), 감사공파(監司公派), 참의공파(參議公派), 판관공파(判官公派) 등 6개파로, 인비(仁庇) 후손은 소윤공파(少尹公派) 1계파로 분파(分派)되었다.

(註釋) 부창정(副倉正)
고려시대 지방 행정구역 단위인 주현(州縣)의 재무(財務)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던 향직(鄕職)이었다.


(4) 고령박씨(高靈朴氏) 사정공파(司正公派) 파조(派祖)
 조선시대 오위(五衛)에 소속된 정7품의 무관직(武官職)인 사정(司正)을 지낸 박간(朴簡)이 고령박씨(高靈朴氏) 사정공파(司正公派) 파조(派祖)이며 여말선초(麗末鮮初) 고령에서 합천으로 이거(移居)하였다. 사정(司正)은 대기문관(待機文官)·음관(蔭官) 등의 봉록만을 급여하기 위하여 설치한 ‘원록체아직(元祿遞兒職)’으로, 실직(實職)은 맡지 않았으며 정원은 태조 때는 5명, 성종 때는 20명을 두었다.


(5) 고령박씨(高靈朴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고령박씨는 186가구 471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호장공파(戶長公派) 중 교수공파(敎授公派)는 쌍림면 백산, 산당, 개진면 직리, 우곡면 사촌리 등지에, 부창정공파(副倉正公派) 중 사정공파(司正公派) 후손은 쌍림면 안림리, 대가야읍 일원에, 현감공파(縣監公派) 후손들은 쌍림면 하거 1리, 우곡면 대곡1동에, 소윤공파(少尹公派) 후손들은 우곡면 도진리, 쌍림면 하거 1리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① 박동신(朴東臣)
부창정(副倉正) 환(還)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조에 삼한삼중공신(三韓三重功臣)으로서 동북면찰리사(東北面察里使)를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고 묘소는 실전(失傳)이다. 
② 박인걸(朴仁傑)
금오위(金吾衛) 산원동정(散員同正)을 지낸 세영(世英)의 장남이며 정의대부(正議大夫)의 품계를 받고 도성문(都城門)을 경비하는 역할을 맡은 감문위(監門衛) 상장군(上將軍)을 지낸 것으로 고령박씨 대동보(1987년)에 기록되어 있으나 고려사에는 “고종 23년(1236년) 야별초지유(夜別抄指諭) 이임수(李林壽)와 박인걸(朴仁傑)이 각각 100여 인을 이끌고 나뉘어서 몽고군 진영으로 향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야별초(夜別抄)의 지휘관인 지유(指諭)를 역임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고 묘소는 합천군 묘산면 휴암(鵂岩) 해좌(亥坐)이다.
③ 박수견(朴守堅)
감문위(監門衛) 상장군(上將軍) 인걸(仁傑)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려시대 최고 행정관청인 문하부(門下府)의 정2품 관직인 찬성사(贊成事)를 지냈다고 하나 광양공(光陽公) 비명(碑銘)에는 조봉대부(朝奉大夫) 사순위대호군(司巡衛大護軍)응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④ 박광순(朴光純)
찬성사(贊成事) 수견(守堅)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수성규의시중보조공신(輸誠揆義侍中輔祚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를 지내고 고양부원군(高陽府院君)에 봉군(封君)되었다. 배위는 전법정랑(典法正郞)을 지낸 육권(育權)의 따님인 대성군부인(大成郡夫人) 밀양박씨(密陽朴氏)이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고 묘소는 합천군 묘산면 화양리 해좌(亥坐)에 있다.
⑤ 박광우(朴光雨)
찬성사(贊成事) 수견(守堅)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고 고양부원군(高陽府院君)에 봉군(封君)되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⑥ 박우생(朴雨生)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광순(光純)과 전법정랑(典法正郞)을 지낸 육권(育權)의 따님인 밀양박씨(密陽朴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상호군(上護軍)에 올라 순충양절동덕찬화공신(純忠亮節同德贊化功臣)에 책록(策錄)되고 삼중대광(三重大匡) 문하시중(門下侍中)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를 지냈다. 대를 이어 고양부원군(高陽府院君)에 봉군(封君)되었다. 배위는 예빈령(禮賓令) 윤신(允愼)의 따님인 정신택주(貞信宅主) 단산장씨(丹山張氏)이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고 묘소는 경기도 이천시 율면 고당3리에 있다.
⑤ 박임귀(朴林貴)
문하시중(門下侍中)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 우생(雨生)과 예빈령(禮賓令) 윤신(允愼)의 따님인 정신택주(貞信宅主) 단산장씨(丹山張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봉익대부(奉翊大夫) 사재시(司宰寺) 판사(判事)를 지냈다. 배위는 이천서씨(利川徐氏)이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고 묘소는 고령군 쌍림면 합가1리 대사동(大寺洞 : 한절골) 간좌(艮坐)에 있다.


(2) 조선시대
① 박간(朴簡)
사재시(司宰寺) 판사(判事) 임귀(林貴)와 원일(遠一)의 따님인 이천서씨(利川徐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서령(署令)을 지내다가 여말(麗末)에 은퇴(隱退)하여 고령군 우곡면 도진리(桃津里)에 일시 은거하였다. 공은 두문동 72현(杜門洞七十二賢) 중의 한 분으로 전법판서(典法判書)를 지낸 청주인(淸州人) 한철충(韓哲沖), 중랑장(中郞將) 광산인(光山人) 김유(金維), 고령인(高靈人) 박경(朴景), 박용수(朴龍壽) 형제 등과 고려 유신(遺臣)으로서 조선왕조의 신하 노릇을 하지 않고 절개를 지키며 도의(道義)를 강마(講磨)하고 종유(從遊)하였다. 말년에 합천으로 이거하였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② 박문형(朴文亨)
사재시(司宰寺) 판사(判事) 임귀(林貴)와 원일(遠一)의 따님인 이천서씨(利川徐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사정(司正)의 관직을 제수받았다. 사정(司正)이란 관직은 고려시대 2군6위(二軍六衛)의 무관직인 별장(別將)이 조선 건국 초까지 이어오다가, 태조 4년(1395년)에 사정(司正)으로 개칭되었다. 사정공파(司正公派) 파조(派祖)이다. 생몰년(生沒年)은 미상(未詳)이다. 묘소는 합천군 율곡면 율진리산 46번지 오갈점(烏葛店) 뒷편 금오산(金烏山) 장등(長嶝) 자좌(子坐)에 있다.
③ 박춘산(朴春山)
사정(司正) 문형(文亨)과 영중랑(領中郞) 유(維)의 따님인 광산김씨(光山金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세조 1년(1455년) 진용부위(進勇副尉)로서 계유정난(癸酉靖亂)에 세조가 왕위에 오르는데 공이 있어 좌익원종공신(佐翼願從功臣) 3등에 녹훈(錄勳)되었고 세조 13년(1467년) 건주위(建州衛)를 정벌(征伐)한 군공(軍功)으로 1자급(資級)을 올려 받았으며 조선 시대 각도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보좌하는 외관직(外官職) 종3품 병마우후(兵馬虞候)를 제수(除授) 받았다. 생몰년(生沒年)은 미상(未詳)이다.

(註釋) 자급(資級)
관료(官僚)의 직품(職品)과 관계(官階). 조선 시대는 문무(文武) 각 9품(品)을 정(正)·종(從)으로 나누고, 정1품부터 종6품까지는 각 품을 다시 상(上)·하(下)로 나누어 총 30개의 자급이 있었음.

④ 박윤빈(朴允斌)
초휘(初諱)는 하산(夏山)이고 호는 만취헌(晩就軒)이다. 사정(司正) 문형(文亨)과 영중랑(領中郞) 유(維)의 따님인 광산김씨(光山金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백형 박춘산(朴春山)과 함께 좌익원종공신(佐翼願從功臣) 3등에 녹훈(錄勳)되었다. 학문은 정밀하고 깊었으며 뛰어났고 효도와 우애가 지극히 돈독하였으며 말이나 글로 자기의 생각을 발표하는 것이 충실(充實)하고 올발라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이 “동량지재(棟梁之材) 공보지기(公輔之器)”라고 격찬(激讚)하였으며 문음(門蔭)으로 의정부(議政府) 사록(司錄)으로 천거(薦擧)되었으며 그후 통훈대부(通訓大夫) 신령현감(新寧縣監)으로 재임 중 백성을 다스림에 청렴하고 결백하였으니 고을이 태평(太平)하였다. 생몰년(生沒年)은 미상(未詳)이다.

(註釋) 동량지재(棟梁之材) 공보지기(公輔之器)
나라의 중임을 맡을 만한 큰 인재(人材)이며 재상의 직임 맡을 그릇이라뜻이다
(註釋) 문음(門蔭)
조상이 세운 공훈으로 자손이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말함.
⑤ 박수종(朴壽宗)
자(字)는 유후(裕後)이고 호는 조계(釣溪)이다. 증(贈) 공조정랑(工曹正랑) 충노(忠老)와 의인(宜人) 광주김씨(光州金氏) 사이에서 명종 20년(1565년) 태어났다. 선조 36년(1603년)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에 입격(入格)하였다. 임짐왜란 때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창의토적(倡義討賊)하였다. 광해군 11년(1619년) 졸(卒)하였다.
⑥ 박인(朴絪)
자는 백화(伯和)이고 호는 무민당(无悶堂)이다. 성균생원(城均生員) 수종(壽宗)과 증(贈) 좌승지(左承旨) 건(健)의 따님인 서산정씨(瑞山鄭氏) 사이에서 선조 16년(1583년) 장남으로 합천군 야로현(冶爐縣) 우거촌(愚居村) 현재 합천군 야로면 하림리 우거 마을에서 태어났다. 선조 37년(1604년) 향시(鄕試)에서는 합격하였는데, 예조(禮曹)의 회시(會試)에서는 떨어져 과거공부를 단념하고 내종숙(內從叔) 내암 정인홍(鄭仁弘)의 문하에서 수학한 뒤 평생 고거(故居) 조동(釣洞)에 칩거하면서 유가(儒家) 경전(經典)에 잠심(潛心)하여 오로지 위기지학(爲己之學)에 힘쓰고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을 흠모(欽慕)하여 사숙제자(私淑弟子)가 되었다. 광해군 3년(1611년)  마을의 부로(父老)들과 함께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모방하여 마을의 향약법(鄕約法)을 세웠다. 광해군 15년(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동계(桐溪) 정온(鄭蘊) 및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와 함께 남명학파의 리더로서 학파를 내부적으로 결집케 하고 남명학(南冥學)을 최초로 정립하였다. 인조 2년(1624년)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에 의해 유일(遺逸)로 천거되고 인조 8년(1630년) 사옹원(司甕院) 참봉(參奉), 인조 10년(1632년) 창릉(昌陵) 참봉(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인조 14년(1636년) 〈남명선생연보(南冥先生年譜)〉와 〈사우록(師友錄)〉을 편찬하였다. 인조17년(163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으로 군신관계(君臣關係)를 골자로 하는 ‘정축화약(丁丑和約)’이 맺어지자 당호(堂號)를 ‘무민당(无悶堂)’으로, 문을 ‘절호문(節戶門)’으로 고쳐 편액(扁額)하였는데, 이는 ‘문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허물이 없다’라고 하는 뜻을 취한 것이다. 인조 17년(1639년)여러 유학자와 교류하기 위해 벽한정(碧寒亭)을 창건하였고 인조 18년(1640년) 졸(卒)하였다. 지방 유생들이 현종 3년(1662년) 박인(朴絪)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합천군 용주면 손목리에 용연서원(龍淵書院)을 세우고 숙종 18년(1692년) 사액(賜額)되었다.
⑦ 박위(朴緯)
자는 중밀(仲密)이고 호는 우촌(愚村)이다. 성균생원(城均生員) 수종(壽宗)과 증(贈) 좌승지(左承旨) 건(健)의 따님인 서산정씨(瑞山鄭氏) 사이에서  선조 38년(1605년) 차남으로 합천군 야로현(冶爐縣) 우거촌(愚居村)에서 태어났다. 무민당(无悶堂) 박인(朴絪)의 동생이다. 배운 것이 넓고 문장에도 능하였으나 일찍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명예와 이익을 구하지 않았다. 부모의 병조리에 있는 힘을 다하였고 여묘살이에도 예(禮)를 다하였다. 현종 10년(1669년) 졸(卒)하였다.
⑧ 박만(朴曼)
자는 대경(大卿)이고 호는 수졸재(守拙齋)이다. 처사(處士) 인(絪)과  의민공(毅愍公) 이현(而絢)의 따님인 순천박씨(順天朴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광해군 2년(1610년) 태어났다. 동계(桐溪) 정온(鄭蘊)의 문인이다. 고금(古今)에 널리 통하여 알고 예절문(禮節文)을 실제로 이행하였으며 학문(學問)을 성실히 하였으며 정세(精細)하고 깊었다. 간송(澗松) 조임도(趙任道), 임곡(林谷) 임진부(林眞),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 등 당대의 석학(碩學) 등이 성리학(性理學)에 재능이 있다고 칭찬하며 인정하였다. 숙종 8년(1682년) 졸(卒)하였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및 전거(轉居)
(1) 사재시(司宰寺) 판사(判事)를 지낸 박임귀(朴林貴)와 배위 이천서씨(利川徐氏) 부부 묘소가 고령군 쌍림면 합가1리 대사동(大寺洞 : 한절골)에 있는 것으로 보아 사정공파(司正公派)는 1300년 중반에 부창정공파(副倉正公派) 중 가장 먼저 고령지역에 입향하여 고령군 쌍림면 송림리 일대에 시거(始居)한 것으로 추정된다.
(2) 박임귀(朴林貴)의 장남 박간(朴簡)은 처음 고령군 우곡면 도진리에 시거(始居)하다가 여말선초(麗末鮮初) 합천으로 이거하여 아들 박문형(朴文亨)이 부창정공파(副倉正公派) 중 맏집인 사정공파(司正公派)를 이루고 ‘벽한정(碧寒亭) 고령박씨 문중’이란 이름으로 후손들은 합천군 용주면 손목리(일명 이사리)를 중심으로 반계(봉산면), 덕동(봉산면), 거안(봉산면), 조동(용주면), 성산(용주면), 하림(야로면) 등 소종중을 이루며 세거하고 있다.
(3) 사정공파(司正公派) 후손 중 쌍림농협 박상홍(朴相洪) 조합장의 증조부 필주(弼柱), 필모(弼模) 형제가 선향지(先鄕地) 합천에서 1890년경 고령군 쌍림면 안림리로 이거(移居) 정착(定着)하였고 1940년경 성균관 유도회 대가야읍 박동열(朴東烈) 회장의 선고(先考) 점모(點模) 때부터 대가야읍 중화1리에 이거(移居) 정착(定着)하고 그후 1986년 합천댐 수몰(水沒)로 고령으로 이주한 후손들이 고령군 대가야읍 일원에 거주하고 있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근•현대 인물
① 박종식(朴宗埴) : 평화통일자문위원, 쌍림농협 8대 조합장
② 박주홍(朴株洪) : 경영학박사, 계명대 교수
③ 박상홍(朴相洪) : 쌍림농협 14대, 15대 조합장

 

 

 

자료제공 : 후손  박동열(朴東烈)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편집국장 최종동(崔鍾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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