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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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경훤당, 쌍림면 월막길 32.JPG

경훤당(쌍림면 월막길 32)

 

 

본관은 성산(星山)이고 자는 여뢰(汝雷)이며 호는 한주(寒洲)이다. 진사(進士) 원호(源祜)와 종옥(宗沃)의 따님인 의성김씨(義城金氏) 사이에서 순조 18년(1818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한개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원호(源祜)에게 8세 때《통감절요(通鑑節要)》를 배우고 13세에는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다 읽었다. 17세 때 숙부 원조(源祚)의 교훈으로 성리학(性理學)에 전념하였으며 18세에 성명도설(性命圖說)을 지어 주리(主理)의 입장을 명백히 하였다. 일찍이 자신의 재실에 ‘조운헌도(祖雲憲陶)’라 편액하여 ‘운곡(雲谷 : 朱子)를 조술(祖述)하고 퇴도(退陶 : 李滉)를 헌장(憲章)하겠다’는 뜻을 세워 그의 사상과 철학의 뿌리는 주자와 퇴계에 있음을 그냥 알게 해준다.  20세에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참배하고 퇴계(退溪)를 사숙(私淑)할 것을 결심하였다. 헌종 15년(1849년)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하였다. 35세 때 그는 당시 퇴계 학통의 종장(宗匠) 자리에 있던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을 방문하여 성리설(性理說)을 토론하고 가르침을 받으며 또다시 40세 때 유치명과 그의 고제(高第))인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을 방문하면서 퇴계 학맥과 인연을 맺는다. 철종 13년(1862년) 삼남(三南) 전역에 민란(民亂)이 일어나 조정에서 삼정문란(三政紊亂)의 대책을 묻는 윤음(綸音)이 발표되어 ‘응지대삼정책(應旨對三政策)’을 올렸으나 왕의 비답(批答)을 받지는 못하였다. 고종 3년(1866년) 국가제도의 개혁안을 제시한 자신의 경세론(經世論)을『묘충록(畝忠錄)』이란 책으로 저술하여 이를 받아들여 줄 것을 간청하는 상소‘의진시폐잉진묘충록소(擬陳時弊仍進畝忠錄疏)’.를 썼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여 올리지 않았다. 고종 8년(1871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에 대해 경상도 도내의 대표가 되어‘청복설사원소(請復設祠院疏)’를 올릴려고 서울에 왔으나 대원군의 방해로 올리지 못하였다. 고종 13년(1876년) 운양호사건[雲揚號事件] 소식을 듣고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다가 화의가 성립되어 중단하였다. 고종 17년(1880년) 김홍집(金弘集)이 일본에서《조선책략(朝鮮策略)》을 가져오자 척사(斥邪)의 뜻으로 글을 지어 고을에 돌렸다. 그는 주자(朱子)와 이황(李滉)의 주리론을 중심사상으로 하고 리일원론(理一元論)을 주장하였다. 그의 학문에 대한 비판(批判)·분석(分析)·전개(展開)는 심오했으며 마침내 심즉이설(心卽理說)에 이른다. 문인으로는 곽종석(郭鍾錫)·허유(許愈)·이정모(李正模)·윤주하(尹胄夏)·장석영(張錫英)·이두훈(李斗勳)·김진호(金鎭祜) 등이 있으며 이들을 ‘주문팔현(洲門八賢)’이라고 한다. 고종 15년(1878년)『이학종요(理學綜要)』를 짓고 ‘이단설(異端說)’을 지어 주기설(主氣說)의 그릇됨을 심히 변론하여 말하기를 “이단(異端)의 설(說)은 백 갈래 천 갈래이나, 그 시작이 모두 기(氣)를 인정하는 것에 연유하여 그 종착도 모두 기(氣)를 주로 하는 것으로 돌아간다 저들은 한갓 저 기(氣)의 활동과 유전(流轉)만을 보고 리(理)의 근본(根柢)과 지도리(樞杻)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는 ‘심즉리설(心卽理說)’을 지어 심(心)의 본체(本體)는 리(理)에 있고 기(氣)에 있지 아니하기 때문에 심(心)의 정체(正體)나 실상을 지적하면 심(心)은 곧 리(理)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퇴계학파의 이기이원적(理氣二元的) 주리설(主理說)과 율곡학파의 이기일원적(理氣一元的) 주기설(主氣說) 모두를 인정하지 않고 이진상(李震相)은 편향된 두 설을 합하여 일원론적(一元論的) 사상으로 꿰어내었고 그것을 주자(朱子)와 퇴계(退溪)의 정설(定說)로 규정하였다. 고종 23년(1886년) 향년 69세로 졸(卒)하였다. 그러나 그의 학설은 1902년 퇴계학설(退溪學說)과 다른 위학(僞學)이라 하여 박해령(朴海齡) 등이 상주향교 교궁(校宮)에 모여 한주집(寒洲集)을 불태웠다. 문집으로『한주집(寒洲集)』이 있고 그 밖의 저서로『이학종요(理學綜要)』(22편 10책)『사례집요(四禮輯要)』『춘추집전(春秋集傳)』『직자심결(直字心訣)』등이 있다. 공은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퇴계(退溪) 이황(李滉), 율곡(栗谷) 이이(李珥),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과 함께 ‘성리학(性理學) 6대가’ 중의 한 사람이다.

(註釋1) 조술(祖述)
선인(先人) 곧 조상이나 스승의 설(說)을 근본으로 하여 그 뜻을 받아서 서술하여 밝힘
(註釋2) 헌장(憲章)
어떠한 사실(事實)에 대(對)하여 약속(約束)을 이행(履行)하려고 정(定)한 법적(法的) 규범(規範)
(註釋3) 고제(高第)
고족제자(高足弟子)의 준말로 학식(學識)과 품행(品行)이 우수(優秀)한 제자(弟子)를 뜻한다
(註釋4) 윤음(綸音)
임금의 말씀
(註釋5) 비답(批答)
상소(上疏)에 대하여 임금이 내리는 답
(註釋6) 경세론(經世論)
세상을 다스리는 이론
(註釋7) 리일원론(理一元論)
모든 존재와 현상을 오직 하나의 근본원리인 이(理)를 통해 설명하는 성리학의 이론체계를 말한다.
(註釋8) 위학(僞學)
정도(正道)에 어긋난 학문 또는 정통(正統)이 아닌 학문이나 학파(學派).
▲ 신오(薪塢) 김영규(金泳奎 : 광주, 1812년∼1873년)
본관은 광주(廣州)이고 자는 성여(聖汝)이며 호는 신오(薪塢)이다. 순조 12년(1812년)에 태어났다.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문인이다. 학식이 높고 깊었으며 문장이 넉넉하고 창달(暢達)하였다. 한주집(寒洲集)에 “철종 6년(1855년) 김영규(金泳奎)가 내방하여 이기선후설(理氣先後說)과 심리기설(心理氣說)에 대해 논하다.”라는 내용과 “철종 6년(1855년) 김영규(金泳奎)에게 편지하여 이간(李柬)이 지은「위암집(巍巖集)」에 대해 논했다.”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스승이었던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이 공의 문집(文集)인『신오집서(薪塢集序)』에서 말하기를 “쇠퇴한 세상에 문자를 쉽게 얻을 수 없다(衰世不易得之文字)”라고 하였고, 또한 “국가의 성대함을 울리게 할 수 있다(足以鳴國家之盛)”라고 하였다. 고종 10년(1873년) 졸(卒)하였다.
▲ 금사(琴史) 이 주(李 珠 : 성산, 1839년∼1896년)
 본관은 성산(星山)이며 자는 덕오(德五)이고 호는 금사(琴史)이다. 처사(處士) 재찬(在燦)와 만익(萬翊)의 따님인 진양정씨(晋陽鄭氏) 사이에서 헌종 5년 (1839년) 태어났다. 족조(族祖)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문인이다. 타고난 바탕과 성품이 성품이 순수하고 조심성이 많으며 진실된 마음으로 성실히 행동하고 거짓이 없었다. 문학이 높고 뛰어나 사우(士友)들이 숭상(崇尙)하여 우러러보았다. 건양 1년(1896년)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대가야읍 관동 성주곡(聖住谷) 자좌(子坐)에 있다. 초취(初娶)는 형조(亨祚)의 따님인 광주이씨(光州李氏)이고 재취(再娶)는 사일(師一)의 따님인 선산강씨(善山康氏)이다.
▲ 숭양(崇陽) 곽경근(郭暻根 : 현풍, 1847년∼1879년)
본관은 현풍(玄風)이고 자는 세명(世明)이며 호는 숭양(崇陽)이다. 처사 성순(聖淳)과 장찬(章瓚)의 따님인 성주이씨(星州李氏) 사이에서 헌종 13년(1847년) 태어나 백부(伯父) 성렴(聖濂)에게 출계(出系)하였다.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문인이다. 학문이 뛰어났고 효행과 우애가 남달랐다. 고종 16년(1879년) 졸(卒)하였다.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만사(挽詞)와 만구(晩求) 이종기(李種己)의 애사(哀辭)가 한주집(寒洲集)과 만구집(晩求集)에 전한다. 문집(文集)이 있다. 묘는 접곡(蝶谷) 신좌(辛坐)에 있다. 배위는 운망(雲望)의 따님인 철성이씨(鐵城李氏)이다.
▲ 곽수원(郭守元 : 현풍, 1850년∼1894년)
본관은 현풍(玄風)이며 자는 인가(仁可)이다. 처사(處士) 경훤당(景暄堂) 치도(致道)와 재수(載秀)의 따님인 여산송씨(礪山宋氏) 사이에서 철종 1년(1850년)에 태어났다.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과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양문(兩門)을 출입하면서 수학하여 학문이 높았다. 홍와(弘窩) 이두훈(李斗勳)이 선고(先考)인 사한당(四閒堂) 인한(寅漢)을 추모하기 위하여 당시 고령 일대의 유생(儒生)이 창설한 강학계(講學契)인 ‘회보계(會輔契)’의 계원으로 가입하여 한말 강우유맥(江右儒脈)의 큰 선비라고 할 수 있는 후산(后山) 허유(許愈), 홍와(弘窩) 이두훈(李斗勳) 등 당대의 명유(名儒)들과 폭넓게 교유하였다. 스승인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이 돌아가시자 아래와 같은 만시(挽詩)를 남겼는데 한주선생문집부록권지사(寒洲先生文集附錄卷之四)에 수록되어 있다.
“徵士洪恩降自天(징사홍은강자천)
 징사(徵士)의 큰 은혜가 조정에서 내려오고
 粹然宿德享稀年(수연숙덕향희년)
 훌륭한 숙덕(宿德 : 오래된 덕망)으로 70세를 누리셨네
 猶幸斯文終不喪(유행사문종불상)
 다행하게도 사문(斯文)이 마침내 사라지지 않고
 西山家學九峯傳(서산가학구봉전)
 서산(西山)의 가학(家學)이 구봉(九峯)에게 전해졌네”
고종 11년(1894년)에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쌍림면 월막리 뒤쪽 합곡 간좌(艮坐)에 있다.
(註釋1) 징사(徵士)
학식과 덕행(德行) 혹은 절행(節行)이 뛰어난 산림(山林)의 유일(遺逸)이 천거(薦擧)되어 조정에 나아오는 것. 또는 그 선비를 말한다.
(註釋2) 숙덕(宿德)
오래된 덕망(德望)
(註釋3) 서산(西山)의 가학(家學)이 구봉(九峯)에게 전해졌네
서산(西山) 채원정(蔡元定)의 학문이 그 아들 구봉(九峯) 채침(蔡沈)에게 전해졌는데, 여기서는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학문이 그 아들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에게 전해진 것을 가만히 비유한 것이다.
▲ 치암(恥庵) 박승렬(朴升烈 : 고령, 1850년∼1925년)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자는 수옥(守玉)이고 호는 치암(恥庵)이다.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영갑(永甲)과 기영(奇永)의 따님인 경주이씨(慶州李氏) 사이에서 철종 1년(1850년) 태어났다.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문인이다. 경서(經書)에 밝고 행의(行誼)가 고결(高潔)하여 오직 도(道)로써 실천하니 당시의 모범이었고 준행(準行)하는 바였다. 1925년에 졸(卒)하였다. 문집(文集)이 있다. 묘는 우곡면 도진리 율전등(栗田嶝) 선비(先妣) 묘계하(墓階下) 손좌(巽坐)이다. 배위는 호(琥)의 따님인 순흥안씨(順興安氏)이다.
▲ 옥서(玉西) 이영훈(李英勳 : 성산, 1860년∼1887년)
본관은 성산(星山)이고 초휘는 석훈(錫勳)이며 자는 낙칠(洛七)이고 호는 옥서(玉西)이다. 유생 인학(寅鶴)과 현감 사묵(思默)의 딸인 일선김씨(一善金氏) 사이에서 철종 11년(1860년) 1월 26일 태어났다.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고종 16년(1879년) 식년(式年) 생원시(生員試)에 장원(壯元)으로 입격(入格)하였다. 천자(天姿)가 명민(明敏)하고 일찍이 문견(聞見)과 학식(學識)이 있었다. 예를 아끼고 의리를 좋아했으며 마치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였다. 사람을 접대함에 대나무가 칼날을 맞이하듯이 능란하게 처리하였다.
종당(宗黨 : 일족의 무리)은 기둥이 될 만한 인물(人物)로 믿고 사우(士友)들은 공부를 도와주는 것을 기대하였으나 불행하게도 고종 24년(1887년) 6월 6일 향년 28세로 일찍 세상을 떠나시니 사람들이 모두 애달아서 아깝게 여겼다.  묘는 성주군 수륜면 월촌(月村) 안산(案山) 상정(上頂) 간좌(艮坐)에 있다. 유고(遺稿) 1권이 전한다. 배위는 교리(校理) 신영(臣榮)의 딸인 광주이씨(廣州李氏)이다.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최종동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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