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양(鶴陽) 박경가(朴慶家)·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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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학양(鶴陽) 박경가(朴慶家)·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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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음서당(고령박씨, 하거리)

 

◉ 학양(鶴陽) 박경가(朴慶家)·◉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자는 남길(南吉)이고 호는 학양(鶴陽)이다. 송천(松泉) 문국(文國)과 석찬(錫燦)의 따님인 교하노씨(交河盧氏)사이에서 장남으로 정조 3년(1779년)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상서(尙書), 주역(周易), 사서(四書) 등을 부지런히 읽었다.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 문하에서 심경(心經)을 배웠으며 학문을 닦아 문장이 뛰어나고 시를 잘 지었으며 순조 10년(1810년) 식년(式年)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의 병환에 상분(嘗糞 : 부모의 병세를 살피기 위해 자식이 부모의 대변을 맛보는 것)하여 간병하고 단지주혈(斷指注血)하였다.『동언고(東言考)』 및『동성고(東姓考)』,『사칠(四七) 정음운고(正音韻考)』등을 편찬하였다. 헌종 7년(1841년) 향년 63세로 졸(卒)하였다. 묘는 선고(先考) 계하(階下) 임좌(壬坐)에 있다. 공의 후손과 문인들이 그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학음서당(鶴陰書堂)을 열었으며 서당 경내에 ‘학양(鶴陽) 박경가(朴慶家) 유허비(遺墟碑)를 세웠으며 비석에는 ‘학양박선생강도지소(鶴陽朴先生講道之所)’라 큰 글씨로 적어 놓고 그 아래 학음서당(鶴陰書堂) 비명(碑銘)을 적고 있다. 따라서 이 비석을 ‘학양 박경가 강도비(鶴陽朴慶家講道碑)’라 하기도 한다. 이 비문은 하산(夏山) 조긍섭(曺兢燮)이 짓고, 치성(治城) 송홍래(宋鴻来)가 새기고, 현손(玄孫) 박재룡(朴在)이 썼다. 시문집인『학양집(鶴陽集)』2권 1책이 전한다. 초취(初娶)는 계진(啓晋)의 따님인 벽진이씨(碧珍李氏)이고 재취(再娶)는 녹화(祿和)의 따님인 선산김씨(善山金氏)이며 삼취(三娶)는 최강(最剛)의 따님인 경주김씨(慶州金氏)이다.
▲ 지북헌(芝北軒) 전광흡(全光潝 : 성산, 1790년∼1858년)
본관은 성산(星山)이며 자는 군가(君可)이며 호는 지북헌(芝北軒)이다. 창천(蒼泉) 명장(命鋹)과 성연(聖演)의 따님인 의성김씨(義城金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정조 14년(1790년) 태어났다. 송천(松泉) 박문국(朴文國)과 학양(鶴陽) 박경가(朴慶家) 양문하에 출입하면서 수학(受學)하였다.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였으며 신속한 깨달음을 얻고 정밀하게 배워 부친인 창천공(蒼泉公)이 더욱 힘써 장려하여 유업(儒業)을 대성(大成)하니 배우는 사람이 모두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 하였다. 즉 '푸른색은 쪽에서 나왔지만 쪽빛보다 더 푸르다'라는 뜻으로, 제자가 스승을 능가하였다고 칭송하였다. 유고(遺稿) 수권(數卷)이 있다. 철종 9년(1858년)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쌍림면 합가동 산 133번지 상가곡(上伽谷) 고기(高基) 서변(西邊) 자좌(子坐)이다. 초취(初娶)는 덕규(德奎)의 따님인 성산배씨(星山裵氏)이고 재취(再娶)는 진(璡)의 따님인 광주김씨(光州金氏)이다.
▲ 죽은(竹隱) 곽훈(郭壎 : 현풍, 1804년∼1865년)
본관은 현풍(玄風)이고 자는 내원(乃遠)이고 호는 죽은(竹隱)이다. 처사(處士) 진두(鎭斗)와 만운(萬雲)의 따님인 광산이씨(光山李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순조 4년(1804년) 태어났다. 학양(鶴陽) 박경가(朴慶家)의 문인으로 학행(學行)이 뛰어났다. 고종 2년(1865년)에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쌍림면 고곡리 어성촌 갑좌(甲坐)이다.
▲ 월은(月隱) 곽보(郭堡 : 현풍, 1807년∼1854년)
본관은 현풍(玄風)이고 자는 내후(乃厚)이고 호는 월은(月隱)이다. 처사(處士) 진두(鎭斗)와 만운(萬雲)의 따님인 광산이씨(光山李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순조 7년(1807년)에 태어났다. 학양(鶴陽) 박경가(朴慶家)의 문인으로 경서(經書)에 통달하고 문장이 뛰어났다. 철종 5년(1854년)에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쌍림면 월막리 지부곡 오좌(午坐)이다.
▲ 오원순(吳元淳 : 고창, 1807년∼1876년)
본관은 고창(高敞)이고 자는 치선(穉善)이다. 처사(處士) 응한(應漢)과 방렬(邦烈)의 따님인 전의이씨(全義李氏) 사이에서 순조 7년(1807년) 태어났다. 학양(鶴陽) 박경가(朴慶家)의 문인이다. 성품과 도량이 넓고 굳세었고 기개가 활달하여 조그마한 일에는 구애(拘礙)하지 않았으며 문학이 뛰어났고 필화(筆畵)가 단정하고 발라 유림과 후학들에게 사표(師表)가 되었다. 고종 13년(1876년)에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쌍림면 매촌동 이현(梨峴) 을좌(乙坐)에 있다. 배위는 영원(永元)의 따님인 성주도씨(星州都氏)이다.
▲ 송고(松皐) 최우문(崔宇文 : 양천, 1815년∼1903년)
본관은 양천(陽川)이고 자는 사홍(士洪)이고 호는 송고(松皐)이다.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 겸(兼)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증직(贈職) 받은 상붕(相鵬)의 차남으로 순조 15년(1815년) 8월 15일에 태어났다. 학양(鶴陽) 박경가(朴慶家)에게 수업(受業)하였으며 고종 31년(1894년) 식년(式年)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하였다. 광무 6년(1902년) 칙명(勅命)에 의거 통정대부(通政大夫)에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陞品)되었다. 도덕과 문장이 뛰어나 향중(鄕中)에서 추중(推重)하였다. 돈영부(敦寧府) 도정(都正), 동지중추부사( 同知中樞府事) 등을 역임하였다. 8문중이 수계(修稧 : 계(稧)를 닦음)하여 ‘남중유계(南中儒稧)’라 하였으나 해방 후 ‘빈흥재유계(賓興齋儒稧)’로 개칭되었다. 1903년 10월 18일 향년 89세로 졸(卒)하였다. 묘는 송정(松亭) 안산(案山)이다. 배위는 극빈(克彬)의 따님인 정부인 (貞夫人) 벽진이씨(碧珍李氏)이다.
▲ 산천자(山泉子) 박태원(朴太源 : 고령, 1816년∼1831년)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자는 호연(浩然)이고 호는 산천자(山泉子)이다. 진사(進士)를 지낸 학양(鶴陽) 경가(慶家)와 계보(啓普)의 따님인 벽진이씨(碧珍李氏) 사이에서 순조 16년(1816년) 태어났다. 선친적으로 타고 난 맵시가 일찍 성취되었고 9세에 경사(經史)에 통달하였으며 11세에 저서를 지어서 신동(神童)이라고 하였으나 순조 31년(1831년) 16세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났으니 당시 사람들이 애석하게 생각하였다. 묘는 증조고묘 아래 청룡등(靑龍嶝) 해좌(亥坐)이다. 배위는 정(禎)의 따님인 김해김씨(金海金氏)이다.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이 그 뒤를 적었다.
▲ 노양(魯陽) 최영문(崔韺文 : 양천, 1822년∼1896년)
본관은 양천(陽川)이고 초휘(初諱)는 봉문(鳳文)이며 자는 치서(致瑞)이고 호는 노양(魯陽)이다. 절충장군(折衝將軍)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지낸 산은(山隱) 상식(尙湜)과 채(綵)의 따님인 숙부인(淑夫人) 성산배씨(星山裵氏) 사이에서 순조 22년(1822년) 태어났다. 학양(鶴陽) 박경가(朴慶家)에게 수업(受業)하였다. 고종 33년(1896년) 졸(卒)하였다. 묘는 고비(考妣) 묘좌하(墓左下) 임좌(壬坐)에 있다.
◉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
본관은 성산(星山)이고 초명(初名)은 영조(永祚)이며 자는 주현(周賢)이고 호는 응와(凝窩), 취송(鷲松), 나고(懶高), 호우(毫宇), 응와(凝窩), 만귀산인(晩歸山人)이다. 성균진사(成均進士) 형진(亨鎭)과 난경(鸞慶)의 따님인 함양박씨(咸陽朴氏) 사이에서 정조 16년(1792년) 성주군 월항면 대포리(大浦里 : 한개)에서 태어났다. 백부(伯父) 정언(正言) 규진(奎鎭)에게로 출계(出系)하였다. 사도제자에 절의를 다하여 북비공(北扉公)으로 이름난 돈재(遯齋) 석문(碩文)의 증손이다. 순조 9년(1809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응와(凝窩)는 그의 생부와 양부의 스승이기도 한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를 통하여 영남의 주리정맥(主理正脈)과 만날 수 있었으며 그의 문인이 되었다. 순조 18년(1818년)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으로 있을 때, 평소 그를 지극히 아껴주던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이존수(李存秀)로부터 "그대는 나라의 큰 그릇이니 오직 책을 읽어 지혜를 담으라. 이것은 사사로운 정리(情理)를 넘어서 내가 나라에 필요한 인재를 위해 보내는 것이니 달리 생각말라. 대기(大器)를 위해 재물을 조금 쓰기로서니 아까울 게 뭐 있으랴."고 한 내용의 편지와 함께 귀중한 책을 수백권이나 보내왔다. 이로부터 더욱 학문에 정진하여 마침내 도학문장(道學文章)이 유림(儒林)의 종장(宗匠)이 되었다. 유범휴(柳範休)와 유치명(柳致明)을 따라 공부하며 이상정(李象靖)의 학문지결(學問旨訣 : 학문의 중요한 말씀)을 토론하였다. 성현(聖賢)들이 학문의 큰 가르침을 논한 것들을『성경(性經)』2권으로 만들고『복성도설(復性圖說)』을 저술하여 주경(主敬)의 요결(要訣 : 긴요한 뜻)을 드러내었다. 순조 26년(1826년) 결성현감(結城縣監)이 되어 선정(善政)을 펼쳐 결성현민(結城縣民)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헌종 3년(1837년) 정언(正言)으로서 기강이 문란하여져 사족(士族)들의 사치가 극도에 달하였으며, 계속된 흉년으로 민중들의 간고(艱苦)가 형언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음을 들어 영남지방에 흉년 진구책(賑救策)을 실시할 것을 극간(極諫)하였다. 헌종 6년(1840년) 강릉부사(江陵府使) 재임 중 인삼을 공물(貢物)로 비치는 것을 중지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었고 헌종 7년(1841년) 제주목사(濟州牧使)가 되어서는 곡식을 옮겨서 굶주린 이를 구제하고 군사를 조련하였으며 양로연(養老宴)을 베풀고 동계(桐溪) 정온(鄭溫)의 사당과 학교를 세워 유학을 일으켰다. 철종 1년(1850년) 경주부윤(慶州府尹)에 오르고, 철종 5년(1854년) 대사간(大司諫)에 이어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냈다.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있다가 부당한 뇌물을 요구하는 암행어사 김세호(金世鎬)의 청을 거절한 앙갚음의 장계(狀啓)로 파직되자 고향으로 돌아와 가야산 북쪽 기슭인 가천면(伽泉面) 신계리(新界里)의 포천곡류(布川曲流)곁에 만귀정(晩歸亭)을 지어 자연인으로서의 생활을 즐기며 저술(著述)에 전념하는 한편, 학계(學契)를 모아 향리 선비들의 교육에도 진력하니 모인 제자들이 3∼400명에 이르렀다. 고종 2년(1865년) 74세에 한성판윤(漢城判尹)에 이르고 정훈(政勳)의 원로(元老)로 기로소(耆老所)에 들고 선생의 화상(畵像)을 그려 영수각(靈壽閣)에 모시게 되었으며, 영수목(靈壽木 : 지팡이)도 짚고 다니게 되었다. 고종 3년(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75세의 늙은 몸으로 의병을 모집하는 등 나랏일에 전력하였으며, 고종 8년(1871년), 80세가 되던 정월에 숭정대부(崇政大夫) 용양위(龍驤衛) 상호군(上護軍)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의 벼슬을 받았다. 고종 8년(1871년) 졸(卒)하였다. 묘소는 합천군 가야면 매화산에 있으며, 신도비는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에 있다. 고종 12년(1875년) 정헌(定憲),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를 추증(追贈)받았다. 고종 17년(1880년) 5월 정헌(定憲)이라 시호를 받았다. 저서로는 응와문집(凝窩文集) 12책)과 응와잡록(凝窩雜錄)·포천지(布川誌)·무이도지(武夷圖誌)·탐라록(耽羅錄) 등이 있다.
▲ 죽옹(竹翁) 이해린(李海麟 : 성산, 1803년∼1877년)
본관은 성산(星山)이며 자는 경선(敬善)이고 호는 죽옹(竹翁)이다. 처사(處士) 의진(儀鎭)과 광범(光範)의 따님인 밀양박씨(密陽朴氏) 사이에서 순조 3년(1803년) 태어났다.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의 문인이다. 성격(性格)과 도량(度量)이 엄명(嚴明)하고 몸가짐이 침착하고 사람의 됨됨이가 침착 태연하였다. 고종 14년(1877년)에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덕곡면 옥계동 모로현 자좌(子坐)에 있다. 배위는 광우(光佑)의 따님인 경주김씨(慶州金氏)이다.
  
▲ 벽와(僻窩) 배진조(裵震朝 : 성주, 1815년∼1881년)
본관은 성주(星州)이고 자는 상첨(相瞻)이며 호는 벽와(僻窩)이다. 아버지 경덕(敬德)과 주익(周益)의 딸인 진양강씨(晋陽姜氏) 사이에서 순조 20년(1815년) 태어났다. 천자(天資)가 순수(純粹)하고 재주와 식견이 통달(通達)하고 지혜가 밝았다. 일찍이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 문하에서 종유(從遊)하였으며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와 오루(梧樓) 이배운(李培運)와 강마지교(講磨之交)를 맺었다. 고종 18년(1881년)에 졸(卒)했다. 유집(遺集) 1권이 있다. 묘는 안곡(鞍谷) 선영 백호등 계좌(癸坐)에 있다.
▲ 석주(石洲) 이 준(李 俊 : 성산, 1837년∼1905년)
본관은 성산(星山)이며 자는 영오(英五)이고 호는 석주(石洲)이다. 처사(處士) 해린(海鱗)과 광우(光佑)의 따님인 경주김씨(慶州金氏) 사이에서 헌종 3년(1837년) 태어났다.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와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문인이다.
타고난 품성이 깨끗하고 꾸밈이 없으며 학문이 해박하였다. 1905년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대가야읍 외동 중촌 안산 묘좌(卯坐)에 있다. 배위는 화보(華輔)의 따님인 달성서씨(達城徐氏)이다.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최종동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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