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원윤씨(漆原尹氏) 충효공파(忠孝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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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칠원윤씨(漆原尹氏) 충효공파(忠孝公派)

검단재.jpg

검단재(경남 함안군 칠북면 검단리 832)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칠원윤씨(漆原尹氏) 시조(始祖) 윤시영(尹始榮)
① 시조(始祖) 윤시영(尹始榮)은 신라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때 탄생하였으며 태자의 스승인 태자태사(太子太師)를 지냈고 임금이 유언(遺言)으로 후일의 나랏일을 부탁한 고명원로(顧命元老)에 이르렀다. 졸년(卒年)은 미상(未詳)이다.
②《경신보(庚申譜)》 상계편(上系篇)에는 시조(始祖)의 탄생설화(誕生說話)가 나와 있는데, 칠원현(漆原縣)에 사는 윤씨(尹氏) 부인이 꿈에 신인(神人)으로부터 아이를 낳거든 이름을 시영(始榮)이라 하라는 말을 듣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③ 공의 아들 황(璜)은 판태사국사(判太史局事)를 지냈는데, 이후의 수대(數代)는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알 수 없다. 따라서 고려에서 칠원현(漆原縣)의 호장보윤(戶長甫尹)을 지낸 윤거부(尹鉅富)를 1세조 및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칠원(漆原)은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에 속해있는 지명(地名)이다.

 

(註釋) 호장보윤(戶長甫尹)
고려사(高麗史) 향직고(鄕職考)와 선거지(選擧志)에 의하면 보윤(甫尹)은 8품의 품계이며 호장(戶長)은 향리직(鄕吏職 : 지방관리)의 우두머리(首長)이라 하였다.


(2) 본관유래(本貫由來)
칠원(漆原)이란 본관(本貫)을 사용하게 된 유래는 중시조 이후 17세로서 검교상호군(檢校上護軍)을 지내고 2등공신에 봉하여졌던 길보(吉甫)의 후손들이 칠원(漆原)에 정착세거(定着世居)하면서 본관(本貫)을 칠원(漆原)으로 하였다.

 

(3) 분파(分派)
18세를 중심으로 충효공파(忠孝公派), 대언공파(代言公派), 칠성공파(漆城公派), 사윤공파(司尹公派), 부원군파(府院君派), 장군공파(將軍公派), 학생공파(學生公派) 등 7개파로 분파(分派)되었다.

 

(4) 칠원윤씨(漆原尹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칠원윤씨(漆原尹氏)는 16가구 4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충효공(忠孝公고령현(高靈縣)의 성씨(姓氏)의 기록) 환(桓)의 후손은 대가야읍 본관2리 옥산, 개진면 구곡리 등지에 세거하였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① 윤수(尹秀)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양삼(養三)과 동원군(東原君)의 따님인 개성왕씨(開城王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원종 때 친종장군(親從將軍)으로서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使) 조오(趙)로부터 권신(權臣) 임연(林衍)의 제거 계획을 제의 받아 거짓으로 승락한 다음, 임연(林衍)에게 사실을 고(告)해바침으로써 조오(趙)가 죽임을 당했다. 원종 11년(1270년) 무신정권이 무너지면서 조오(趙)의 모해사건에 대한 책임 추궁을 우려하여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치사(致仕)한 장인 송의(宋義)와 함께 가속(家屬)을 이끌고 원나라로 갔다. 이 때 원나라에 볼모로 있던 세자(충렬왕)에게 응견(鷹犬)을 인연으로 총애를 받았다. 1274년 충렬왕이 즉위하자 귀국하여 대장군(大將軍)에 오르고 이정(李貞)·원경(元卿) 등과 함께 응방(鷹坊)을 관장하며 권세를 부렸다. 충렬왕 9년(1279년) 전라도응방사(全羅道鷹坊使)로 파견되었으며 또한, 유망민(流亡民)들을 모아들여 이리간(伊里干)이라는 취락을 형성하여 매의 사육과 사냥을 맡아보던 관아인 응방(鷹坊)의 경제적 기초로 삼았는데, 이들에 의한 민폐 또한 극심하여 안찰사(按察使)나 지방의 수령들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벼슬이 군부판서(軍簿判書)·응양군상호군(鷹揚軍上護軍)에 이르렀다. 충렬왕 9년(1283년) 졸(卒)하였다.

 

(註釋1) 친종장군(親從將軍)
고려시대, 응양군(鷹揚軍)·용호군(龍虎軍)에 딸린 정4품의 장군(將軍)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註釋2) 응견(鷹犬)
사냥하는 데 쓰는 매와 개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註釋3) 이리간(伊里干)
응방(鷹坊) 등에서 촌락이 없는 곳에 유민(流民)을 불러 모아 세운 취락이다.

 

② 윤길보(尹吉甫)
응양군(鷹揚軍) 상호군(上護軍) 수(秀)와 밀직부사(密直副使) 부()의 따님인 무안박씨(務安朴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원종 11년(1270년) 고려 정부가 몽고에 항복하고 개경으로 환도(還都)하고 삼별초(三別抄)의 해산을 명령하자 배중손(裵仲孫)·노영희(盧永禧) 등이 강화도에서 삼별초(三別抄)를 이끌고 반기를 들어 진도로 향할 때 낭장(郎將)으로서 전(前) 중서사인(中書舍人) 이숙진(李淑眞)과 함께 노예를 모아 구포(仇浦)에서 싸워 5명을 베고 부락산(浮落山) 바닷가에서 군사의 위세로 삼별초 무리들을 쫓았다. 본래 격구(擊毬)를 잘 쳐 원나라 태자(太子)의 동궁(東宮)에 출입하였고, 이로 인해 충선왕의 총애를 받아 중랑장(中郎將)이 되었다가 곧바로 대장군(大將軍)에 올랐다. 충선왕 1년(1309년) 충선왕이 부왕(父王) 충렬왕비(忠烈王妃)였던 숙비(淑妃)를 총애(寵愛)하게 되자 순비(順妃)의 딸로 〈원〉 태자를 모시고 있던 백안홀독(伯顔忽篤, 바얀쿠투)이 숙비(淑妃)를 욕보이기 위하여 숙비(淑妃)를 〈원〉 수도로 오게 해 달라고 태자에게 간청하자 태자에게 아뢰어 이를 중지시키니 이에 대호군(大護軍)이 되었으며, 같은 해 원나라에 가서 동녀(童女)와 환자(宦者)를 바쳤다. 충숙왕 7년(1320년) 원나라에 가서 수릿과의 새인 즉 요(鷂)를 바쳤다. 뒤에 환관 백안독고사(伯安禿古思)의 뜻에 거슬려 실직하고 무안감무(務安監務)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기용되어 합포진변사(合浦鎭邊使)가 되었다. 충숙왕 14년(1327년) 왕이 원나라에 억류되어 있는 동안 시종(侍從)했던 신하들에 대한 포상이 있을 때 검교상호군(檢校上護軍)으로서 2등공신에 봉(封)하여졌다.

 

(註釋1) 삼별초(三別抄)
고종 6년(1219년) 최충헌(崔忠獻)의 무신정권을 계승한 최우(崔瑀)가 도둑을 막는 등 치안유지를 위해 설치한 야별초(夜別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별초(別抄)란 ‘용사(勇士)들로 조직된 선발군(選拔軍)’이라는 뜻이다. 그 뒤 야별초에 소속한 군대가 증가하자 이를 좌별초(左別抄)·우별초(右別抄)로 나누고, 몽골 병사와 싸우다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병사들로 신의군(神義軍)을 조직, 이를 좌 ·우별초와 합하여 삼별초의 조직을 만들었다. 삼별초는 무신정권의 전위(前衛)로서 다분히 사병적(私兵的)인 요소도 있었다. 그러나 항몽전(抗蒙戰)에서는 그 선두에서 유격전술로 몽골병을 괴롭혔으며,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몽골과 강화(講和)가 성립되고 고려정부가 개경으로 환도하자 개경정부 및 몽골과 대항하여 항쟁하였다.

③ 윤환(尹桓)
자는 수상(守常)으로 검교상호군(檢校上護軍) 길보(吉甫)의 아들로 충렬왕 30년(1304년) 태어났다. 충숙왕 15년(1328년) 호군(護軍)으로서 원(元)나라에 파견되어 저포(苧布) 및 종이를 바쳤다. 충숙왕 복위 1년(1332년)에 전왕(前王)에 대한 총애(寵愛)로 장형(杖刑)에 처하여 지고 대언(代言)의 직첩(職牒)을 추탈(追奪)당하였다. 충혜왕 복위 3년(1342년) 조적(曹)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1등공신에 올라 수성양절보리공신호(輸誠亮節輔理功臣號)를 받고 찬성사(贊成事)로 승진했으며, 원나라로부터 다시 행성낭중(行省郎中)에 제수(除授)되었다. 충혜왕 4년(1344년) 찬성사(贊成事)를 거쳐 충정왕 1년(1349년) 수성양절선력보리공신(輸誠亮節宣力保理功臣) 칠원부원군(漆原府院君)에 임명되었다. 공민왕 3년(1354년) 찬성사(贊成事)가 되고 판삼사사(判三司事)를 거쳐 공민왕 5년(1356년) 수충협의동덕익찬공신호(輸忠恊義同德翊贊功臣號)를 받고 좌정승(左政丞)으로 승진하였으며 그 해 관제개혁(官制改革)으로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으로 고쳐 임명되었으나 유배되었다. 공민왕 9년(1360년) 칠원후(漆原侯)로 봉(封)해졌다가 칠원백(漆原伯)으로 고쳐 봉해졌고 공민왕 14년(1365년) 동서북면도통사(東西北面都統使)로 임명되었다. 공민왕 20년(1371년) 신돈(辛旽)이 제거된 뒤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고 무인(武人)으로서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를 겸임하고 추성병의동덕섭리익찬공신호(推誠秉義同德燮理翊贊功臣號)를 받았으나 이듬해 파직되었다. 우왕 3년(1377년) 북원(北元)으로부터 평장사(平章事)에 제수되고 우왕 6년(1380년) 다시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다섯 왕을 섬겨 세 차례 수상(首相)을 지냈으며, 공의 집은 큰 부자였는데, 일찍이 휴가를 얻어 칠원(漆原)에 돌아갔을 때에, 큰 흉년이 들어서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자, 집의 재물을 흩어서 구제하고 가난한 백성에게 빌려 준 문서를 모두 불살라 버렸다. 때마침 오래 가물었는데 물이 환의 논에서 솟아나서 다른 사람의 논에까지 적시어 결실이 잘 되니, 경상도의 백성들이 칭송하기를 마지않았다. 우왕 12년(1386년) 졸(卒)하였다. 시호는 충효(忠孝)이다.

 

(2) 조선시대
① 윤조생(尹祖生)
보문각(寶文閣) 대제학(大提學) 천효(天斅)의 아들로 태어나 여말(麗末) 선초 (鮮初) 노비의 부적(簿籍)과 소송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장례원(掌隷院)의 판결사(判決事)를 지냈다. 생몰년(生沒年) 미상(未詳)이다.
② 윤신로(尹莘老)
장례원(掌隷院) 판결사(判決事) 조생(祖生)의 아들로 태어나 태조 2년(1393년) 지조사(知曹事) 좌랑(佐郞)을 거쳐 세종 때 익산군수(益山郡守)를 지냈다. 생몰년(生沒年) 미상(未詳)이다.
③ 윤중임(尹仲任)
자는 자홍(子弘)이다. 병절굥위(秉節校尉) 부사과(副司果) 필(弼)과 이조좌랑(吏曹佐郞) 한()의 따님 의인(宜人) 한산이씨(韓山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통훈대부(通訓大夫) 용천군수(龍川郡守)을 지내고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 겸(兼) 춘추관(春秋館) 수찬관(修撰官)을 증직(贈職)받았다. 생몰년(生沒年) 미상(未詳)이다.
④ 윤붕(尹鵬)
자는 운정(雲程)이고 용천군수(龍川郡守) 중임(仲任)과 증 숙부인(淑夫人) 남양홍씨(南陽홍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중종 29년(1534년) 식년시(式年試) 무과에 급제한 후 명종 1년(1546년) 중시(重試) 병과(丙科) 무과에 급제하였다. 조선시대 오위(五衛)에서 각 부(部)를 통솔하던 종육품(從六品) 서반 무관직인 부장(部將)을 지내고 흥양현감(興陽縣監)을 지냈다.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 겸(兼)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증직(贈職) 받았다. 생몰년(生沒年) 미상(未詳)이다.
⑤ 윤춘전(尹春荃)
흥양현감(興陽縣監) 붕(鵬)과 생원(生員) 린(璘)의 따님인 증(贈) 정부인(貞夫人) 죽산송씨(竹山宋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선시대 저화(楮貨 : 닥나무 원료의 종이로 만든 지폐)의 발행과 노비가 공납(貢納)하는 면포(綿布 : 무명실로 짠 피륙)를 관장한 관청인 사섬시(司贍寺)의 참봉(參奉)을 지냈다. 생몰년(生沒年) 미상(未詳)이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1) 칠원윤씨 대동보(신사보 : 2001년)에 의하면 칠원윤씨(漆原尹氏) 충효공파(忠孝公派) 고령입향조(高靈入鄕祖) 처사(處士) 옥선(沃善)이 1700년 초반 선향지(先鄕地) 충남 청양군 목면에서 고령군 개진면 구곡리에 시거(始居)한 후 6세손 영하(永河)가 역질(疫疾)로 인하여 다시 고령군 대가야읍 본관2리 옥산으로 전거(轉居)하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2) 그러나 조선 전기의 관찬지리서(官撰地理書)인『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 1454년 간행)』고령현조(高靈縣條)와『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1530년 간행)』의 고령현(高靈縣)의 성씨(姓氏)의 기록에 의하면 “토성(土姓)으로 신(申), 박(朴), 이(李), 유(兪), 김(金), 백(白), 정(鄭)씨가 있으며, 속성(續姓))으로 윤(尹), 조(趙)씨가 있다. 속성인 윤씨와 조씨는 조선 초에 새로이 고령으로 이주해 온 성씨로 윤씨는 칠원(漆原)에서 왔다고 하며, 조씨는 연원(淵源)을 모른다고 되어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註釋1) 토성(土姓)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의하면, 토성(土姓)은 ‘고적(古籍)’과 ‘관(關)’에 기재되어 있는 성씨(姓氏)를 지칭하였다. “고적(古籍)”이란 고려 초기부터 전해 오는 성씨관계 자료이며, 공문서의 일종인 “관(關)”은 지리지(地理誌)의 편찬을 위한 작업으로 각 도(道)에서 보고한 성씨관계 기록을 담은 문서였다. 고려 시대 이래로 과거(科擧) 또는 서리직(胥吏職)을 거친 벼슬 품관(品官) 집단(集團)의 성씨(姓氏)로 군현(郡縣)의 구획 초기부터 토착해 군현명(郡縣名)을 본관(本貫)으로 한 군현의 지배성단(支配姓團)으로 지역 토착세력(土着勢力)의 대표적인 성씨를 말한다.

(註釋2) 속성(續姓)
고적(古籍)에 없던 성(姓)으로 15세기 각종 지리지(地理誌) 편찬 당시에 새로 속록(續錄 : 원안에 잇달아 기록하는 것)된 성씨(姓氏)를 말한다.

 

(3) 따라서 칠원윤씨의 고령 입향은『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 1454년 간행)』고령현조(高靈縣條)와『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1530년 간행)』고령현(高靈縣)의 성씨(姓氏)의 기록을 상고(詳考)하면 칠원윤씨(漆原尹氏) 대동보(2001년) 기록과 간극(間隙)이 있지만 칠원윤씨 충효공파(忠孝公派)는 조선 초기에 고령에 입향한 오랜된 씨족임이 문헌상 밝혀져 향후 향토사 연구 및 고령군지 편찬시 필히 참고할만한 문중이다.

 

4. 입향조(入鄕祖) 이후 역대 주요인물

현달(顯達)한 인물이 없어 생략합니다.

 

자료제공 :충효공파 대구종친회 회장 윤희석(尹熙錫)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편집국장 최종동(崔鍾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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