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임씨(平澤林氏) 평성군파(平城君派), 대호군파(大護軍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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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임씨(平澤林氏) 평성군파(平城君派), 대호군파(大護軍派)

평택임씨 운수종중, 평림재, 운수면운성로249(팔산리).jpg

평택임씨 운수종중, 평림재, 운수면운성로249(팔산리)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평택임씨(平澤林氏) 도시조(始祖) 임팔급(林八及)
 한국의 10대 성씨(姓氏)인 임(林)씨의 도시조(都始祖)는 임팔급(林八及)이다. 임문(林門)의 세보(世譜)에 따르면 당(唐)나라 용도각(龍圖閣) 한림학사(翰林學士) 행병부상서(行兵部尙書)를 역임하다가 846년 당(唐) 무종(武宗)의 폭정이 심해지자 공을 비롯한 동료 7학사(七學士), 즉 유전(劉筌), 설인경(薛仁敬), 허동(許董), 송규(宋奎), 최호(崔冱), 권지기(權之奇), 공덕수(부)(孔德狩)(符) 등 8명의 학사(學士)들이 870년경 중국의 팽성(彭城)에서 장보고(張保皐) 선단(船團)의 배를 타고 신라로 망명하여 팽성(彭城)의 용주방(龍珠坊 : 지금의 평택 용포리)으로 옮겨와 농성(農城 : 경기도 지정 기념물 제74호)을 쌓고 정착하였다. 그래서 본관(本貫)을 평택(平澤)으로 삼게 되었다. 중국에서 동도(東渡)할 당시 8명의 학사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오며 심경을 읊은 시(詩) ‘팔현동도(八賢東渡)’라는 시(詩)가 전한다. 신라 말에는 지역의 호족(豪族) 세력들과 주민들의 힘을 모아 서해안에 준동(蠢動)하던 해적들을 소탕(掃蕩)한 공으로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제수(除授)되고 팽성군(彭城君)에 봉(封)해졌으며 신덕왕 때 충절공(忠節公)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2) 기세조(起世祖)를 달리하는 두 계통(系統)
학사공(學士公) 임팔급(林八及)이하 충선공(忠宣公) 임몽주(林夢周)까지의 계대(系代)가 여러 차례의 병화(兵禍) 등으로 각 계파간(系派間)에 서로 달라 모호하고 또 충선공(忠宣公) 이하의 세계 역시 곤계차서(昆季次序 : 형제의 순서)가 각 파간에 맞지 않아 통일하기 어려워 충선공(忠宣公) 임몽주(林夢周)를 중조(中祖)로 하고 전객령계(典客令系)와 충정공계(忠貞公系)로 나누어진다.
① 전객령계(典客令系)
고려 말에 국빈(國賓)의 영접과 대신(大臣)들의 공궤(供饋 : 음식물 제공)를 담당하는 관청인 전객시(典客寺)의 정3품 벼슬인 전객령(典客令)겸 연희궁(衍喜宮) 부사(副使)를 지낸 임세춘(林世春)을 1세조(世祖)로 한다. 소종파 맹산공파(孟山公派)가 속(屬)한 계통이다.
② 충정공계(忠貞公系)
자는 국경(國擎) 호는 계헌(桂軒)이며 고려 말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태위(太位). 찬성사(贊成事).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러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에 봉(封)해지고 충정(忠貞)으로 증시(贈諡)된 임언수(林彦修)를 1세조로 한다. 평성군파(平城君派), 대호군파(大護軍派)가 속(屬)한계통이다.
(註釋) 기세조(起世祖)
보통 족보 등 계대(系代)를 보면 시조(始祖)를 1세(1世)로 하는데 윗대 조상의 소목(昭穆)이 불분명하여 나중에 세(世)를 정함에 도시조(都始祖)나 시조(始祖)를 계보(系譜)에 1세로 할 수 없을 때 종중(宗中)의 추존(推尊)을 받아 어느 훌륭한 조상을 1세로 하는 조상을 말한다.
(3) 충민공(忠愍公) 임경업(林慶業)을 배출한 명문(名門)
이괄(李适)의 난을 진압하고 병자호란 때 백마산성과 의주산성을 수축하고 방어를 하여 전공을 세웠던 충민공(忠愍公) 임경업(林慶業)은 명청(明淸) 교체의 거대한 국제적 격변(激變) 속에서 대명의리(對明義理)의 이념을 실천하다가 옥사(獄死)한 비운(悲運)의 명장(名將)이며 만고(萬古) 충신(忠臣)이다.  전객령계(典客令系) 인물이다. 
(4) 분파(分派)
부사공파(府使公派), 사직공파(司直公派), 삼청당공파(三淸堂公派), 승지공파(承旨公派), 영광공파(靈光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금호공파(錦湖公派), 참의공파(參議公派), 평성군파(平城君派), 송현공파(松峴公派), 만죽공파(晩竹公派), 송담공파(松潭公派), 송산공파(松山公派), 송주공파(松州公派), 송당공파(松塘公派), 영해공파(靈海公派), 관해공파(觀海公派), 대호군파(大護軍派), 현감공파(縣監公派), 은거공파(居隱公派), 지평공파(持平公派), 부원군파(府院君派), 판윤공파(判尹公派) 등 23개파로 분파(分派)되었다.
(5) 평택임씨(平澤林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평택임씨(平澤林氏)는 103가구 248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전객령계(典客令系) 맹산공파(孟山公派) 후손은 개진면 부리, 옥산리에 충정공계(忠貞公系) 평성군파(平城君派) 후손은 다산면 평리, 호촌리에 대호군파(大護軍派)는 운수면 유리, 화암2리에 세거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① 임성미(林成味)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 언수(彦修)의 아들로 충렬왕 20년(1294년) 태어났다. 우왕 4년(1378년) 밀직부사(密直副使)로서 서경도순문사(西京都巡問使)가 되었다. 우왕 6년(1380년) 진포(鎭浦)에 침입하여 각지를 횡행하면서 만행을 저지르던 왜구가 선주(善州 : 현재 구미)에 이르렀을 때, 양광(楊廣)·전라(全羅)·경상도(慶尙道) 삼도도순찰사(三道都巡察使) 이성계(李成桂) 등과 함께 원수(元帥)가 되어 이를 무찔러 공을 세웠으며 같은 해 9월 남원, 운봉 일대에 침입한 왜구를 토벌(討伐)하기 위해 이성계(李成桂)를 양광(楊廣)·전라(全羅)·경상(慶尙) 삼도도순찰사(三道都巡察使)에 임명하고, 변안열(邊安烈)을 체찰사(體察使)에, 우인열(禹仁烈)·이원계(李元桂)·박임종(朴林宗)·도길부(都吉敷)·홍인계(洪仁桂)·임성미(林成味) 등을 원수(元帥)로 삼아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왜구대토벌작전(倭寇大討伐作戰)에 나서게 하여 이성계(李成桂)가 적장(賊將) 아지발도(阿只拔都)를 사살하고 대승(大勝)을 거둔 전투가 황산대첩(荒山大捷)인데 이 때 포획한 말이 1,600여 필이고 노획한 병기(兵器)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우왕 8년(1382년) 4월 왜구(倭寇)를 사칭(詐稱)한 화척(禾尺)들이 영해군(寧海郡)에 침입하여 관아(官衙)와 민가(民家)를 불사르는 등 악행(惡行)을 자행(恣行)하므로, 판밀직(判密直)으로 밀직부사(密直副使) 황보 림(皇甫琳) 등과 함께 이를 무찌르고, 잡혀갔던 남녀 50여 인과 말 200여 필을 찾아오는 등 무공(武功)을 세웠고 삼사우사(三司右使)에 올랐다. 우왕 9년(1383년) 졸(卒)하였다. 시호(諡號)는 충간(忠簡)이다.
(註釋) 화척(禾尺)
 화척은 양수척(揚水尺)을 말하며 후삼국·고려 시대에, 떠돌아다니면서 천업(賤業)에 종사하던 무리를 말하며 대개 여진의 포로 혹은 귀화인(歸化人)의 후예로서 관적(貫籍)과 부역(賦役)이 없었고 떠돌아다니면서 사냥을 하거나 고리를 만들어 파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2) 조선시대
① 임상양(林尙陽)
삼사우사(三司右使) 성미(成味)의 장남으로 태어나 임금의 어가(御駕)를 수종(隨從)하면서 일반 잡인(雜人)의 범접(犯接)을 막던 사금(司禁)을 거쳐 지훈련관사(知訓鍊觀事)·대호군(大護軍)·상호군(上護軍) 등을 역임하였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② 임길양(林吉陽)
자는 선일(先日)이고 삼사우사(三司右使) 성미(成味)의 차남으로 공민왕 16년(1367년) 태어났다. 세종 때 외직(外職)으로 지기장현사(知機張縣事)·지수천군사(知隨川郡事)·철원부사(鐵原府使) 겸(兼) 방어사(防禦使)를 지내면서 선정(善政)을 펼쳐 백성들이 공덕(功德)을 기리는 선정비(善政碑)를 세웠고 내직(內職)으로 한림부제학(翰林副提學)·이조참의(吏曹參議)를 거쳐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치사(致仕)한 후 전원(田園)으로 돌아와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조리며 자연에 몰입(沒入)하며 유유자적(悠悠自適)한 삶을 살다가 세종 15년(1433년) 졸(卒)하였다. 
③ 임담(林襜)
상호군(上護軍) 상양(尙陽)과 충청감사(忠淸監司) 인(縯)의 따님 정경부인(貞敬夫人) 울진장씨(蔚珍張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사온서(司醞署) 직장(直長)을 지내고 통훈대부(通訓大夫)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증직(贈職)받았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④ 임효선(林效善)
자는 덕목(德目)이고 호는 승암(承岩)이다. 이조참판(吏曹參判) 길양(吉陽)과 회령(會寧) 판관(判官) 영선(永善)의 따님 정경부인(貞敬夫人) 풍양조씨(豊壤趙氏) 사이에서 고려 우왕 14년(1388년) 태어났다. 봉직랑(奉直郞)의 품계를 받고 해운판관(海運判官)을 지내고 단종 1년(1453년)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策錄)되었다. 세종 25년(1443년) 졸(卒)하였다.
⑤ 임계창(林繼昌)
자는 정상(正相)이고 호는 송암(松岩)이다. 판관(判官) 효선(效善)과 직장(直長) 형식(亨植)의 따님 숙인(淑人) 파평윤씨(坡平尹氏) 사이에서 태종 12년(1412년) 태어났다. 조선시대 국가의 공사를 감독하고 독촉하기 위하여 임명하던 관청인 선공감(繕工監)의 감역관(監役官)을 거쳐 고성현령(高城縣令)·양구현령(楊口縣令)을 역임하였으며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졌다. 성종 21년(1490년) 졸(卒)하였다.
⑥ 임언신(林彦臣)
자는 양필(良弼)이고 양구현령(楊口縣令) 계창(繼昌)과 부정(副正) 경창(慶昌)의 따님 공인(恭人) 남양홍씨(南陽洪氏) 사이에서 세조 12년(1467년) 태어났다. 내금위(內禁衛)·만호(萬戶)를 거쳐 대호군(大護軍)에 이르렀고 성종 20년(1489년) 함경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거쳐 성종 25년(1494년)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역임하였는데 병조판서(兵曹判書)의 재목(材木)이라는 조정의 공론(公論)이 있었다. 중종 13년(1518년) 졸(卒)하였다. 
⑦ 임세경(林世卿)
자는 덕우(德佑)이고 호는 야헌(野軒)이다. 대호군(大護軍) 언신(彦臣)과 충의위(忠義衛) 지(漬)의 따님인 정부인(貞夫人) 전주이씨(全州李氏) 사이에서 성종 19년(1488년) 태어났다. 무과에 등과(登科)한 후 울진현령(蔚珍縣令)·부안군수(扶安郡守)를 역임하였다. 명종 10년(1555년) 졸(卒)하였다.
⑧ 임식(林植)
자는 숙무(叔茂)이고 호는 송파(松坡)이다. 형조좌랑(刑曹佐郞) 정수(貞秀)와는  현령(縣令) 진남(震男)의 따님 숙부인(淑夫人) 전의이씨(全義李氏) 사이에서 중종 34년(1539년) 태어났다. 명종 19년(1564년) 이이(李珥)·유성룡(柳成龍) 등과 함께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고, 선조 5년(1572년)에 춘당시(春塘試) 문과에 급제한 후 내직(內職)으로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이조좌랑(吏曹正郞)·병조정랑(兵曹正郞)·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예조정랑(禮曹正郞) 등을 역임하고, 외직(外職)으로 영변판관(寧邊判官)·구성부사(龜城府使)를 거쳐 강계부사(江界府事)가 되었다. 선조 22년(1589년) 졸(卒)하였다.
⑨ 임득의(林得義)
자는 자방(子方)이고 강계부사(江界府事) 식(植)과 군수(郡守) 제운(霽雲)의 따님인 정경부인(貞敬夫人) 해주최씨(海州崔氏) 사이에서 명종 13년(1558년) 태어났다. 선조 29년(1596년) 이몽학(李夢鶴)이 충청도 홍산에서 승속군(僧俗軍) 600∼700명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키자 박명현(朴名賢)·최호(崔湖)·신경행(辛景行) 등과 함께 홍주목사(洪州牧使) 홍가신(洪可臣)을 도와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우고, 1604년 청난공신(淸難功臣) 3등에 녹훈(錄勳)되고 평성군(平城君)에 봉해졌다. 그 뒤 광해군 1년(1609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가 되었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1) 입향조(入鄕祖) 심재처사(心齋處士) 주극(柱極)이 1650년경 선향지(先鄕地) 홍성(洪城)에서 난(亂)을 피하여 다산면 평리 심막동(心幕洞)에 시거(始居)함에 따라 평성군파(平城君派) 후손들이 다산면 평리, 호촌리에 세거하게 되었다.
(2) 입향조(入鄕祖) 덕전(德田) 수원(壽遠)이 1660년경 선향지(先鄕地) 파주(坡州)에서 운수면 유리(柳里)에 복거(卜居)함에 따라 대호군파(大護軍派) 후손들이 운수면 유리, 화암 2리에 세거하게 되었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조선시대
① 이몽남(李夢楠)
자는 자기(子奇)이고 호는 연와(窩)이다. 통정대부(通政大夫) 현정(顯挺)과 진사(進士) 징(澄)의 따님 숙부인(淑夫人) 창녕하씨(昌寧河氏) 사이에서 광해군 9년(1617년) 태어났다. 천성이 말이 없었으며 어버이를 섬김에 효성이 지극하였고 부모의 상을 당해서 부모의 죽음을 심히 슬퍼한 나머지 몸에 뼈만 남았으며 죽을 먹고 여막(廬幕)에 거처하니 향리에서 칭송하고 복종하였다. 통정대부(通政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숙종 1년(1675년) 졸(卒)하였다.
② 임시량(林時樑)
자는 성중(聖中)이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몽남(夢楠)과 명관(明觀)의 따님 숙부인(淑夫人) 남평문씨(南平文氏) 사이에서 인조 26년(1648년) 태어났다. 사과(司果)를 거쳐 절충장군(折衝將軍)행용양위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에 올랐다. 숙종 42년(1716년) 졸(卒)하였다. 
③ 임연달(林連達)
자는 도경(道卿)이고 처사(處士) 민량(敏樑)과 태일(泰逸)의 따님 고령박씨(高靈朴氏) 사이에서 숙종 13년(1687년) 태어났다. 병절교위(秉節校尉) 용양위사과(龍驤衛司果)를 지냈다. 졸(卒)년은 미상(未詳)이다.
④ 임봉의(林鳳儀)
초휘(初諱)는 취성(就成)이고 자는 군서(君瑞)이다. 처사(處士) 수종(秀琮)과 도망(道望)의 따님인 성산이씨(星山李氏) 사이에서 숙종 27년(1701년) 태어났다. 영조 4년(1728년)에 벌생한 무신난(戊申亂) 즉 ‘이인좌(李麟佐)의 난’, 또는 ‘정희량(鄭希亮)의 난’에 세운 전공(戰功)으로 동생 봉채(鳳彩)와 함께 분무원종공신(奮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고 통덕랑(通德郞)·병절교위(秉節校尉) 용양위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을 지냈다. 영조 36년(1760년) 졸(卒)하였다.
(2) 근∙현대 인물
① 임근배(林根培) : 공학박사. 포항공대 교수
② 임경국(林慶國) : 공학박사, 부산지방국토관리청장,  도화엔지니어링 부회장
③ 임정규(林正奎) : 댸구광역시 달서구 부구청장, 지방행정부이사관
④ 임창수(林昌洙) : 해양경찰청 차장
⑤ 임판길(林判吉) : 육군 대령, 2군수사령부 부사령관
⑥ 임대성(林大成) : 고령군 기획감사실장, 지방행정부이사관, 고령산림조합장
⑦ 임기식(林起植) : (주) 세림건설 대표
⑧ 임승춘(林承春) : 민주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초대 대의원
⑨ 임영식(林永植) : 달성군 옥포면장
⑩ 임장식(林長植) : 대성광금대표
⑪ 임태식(林泰植) : 건진금속 대표
⑫ 임유호(林有鎬) : 고령군 운수면장
⑬ 임선우(林善雨) : 고령군 운수면장
⑮ 임진식(林珍植) : 법무법인 큐브 대구분사무소 변호사
⑯ 임동식(林棟植) : 분당서울대병원 의사
⑰ 임문우(林汶雨) : 변호사
⑱ 임기홍(林起洪) : 고령군 총무과장, 지방행정사무관
⑲ 임승진(林承珍) : 삼성화재 기업영업 총괄부사장
⑳ 임헌길(林憲吉) : 계명문화대학 명예총무처장
㉑ 임영대(林永大) : 부산 신라대 교수
22. 임영규(林榮圭) : 고령군 군민안전과장
 
 
자료제공 :대호군파 후손 임대성(林大成)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편집국장 최종동(崔鍾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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