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평윤씨(坡平尹氏) 교리공파(校理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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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파평윤씨(坡平尹氏) 교리공파(校理公派)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파평윤씨(坡平尹氏) 시조(始祖) 윤신달(尹莘達)


 일명(一名) 화신(華莘)이다. 신라 진성왕 7년(893년)에 태어났다.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935년 신라 경순왕으로 부터 신라를 선양(禪讓)받고 936년에는 후백제를 멸망시켜 삼한(三韓)을 통일하였을 때 이등공신(二等功臣)으로 고려개국통합삼한벽상익찬공신(高麗開國統合三韓壁上翊贊功臣)에 책록(策錄)되었고 관직은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에 올랐다. 고려사(高麗史)에 윤관(尹瓘)의 고조(高祖)인 “윤신달(尹莘達)은 태조(太祖)를 도와 삼한공신(三韓功臣)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943년 고려 태조가 승하(昇遐)하고 고려 혜종이 즉위한 후 동경대도독(東京大都督)으로 부임하여 30년간 신라유민(新羅遺民)에게 도의정치(道義政治)를 베풀면서 선정(善政)을 하다가 광종 24년(973년) 임지(臨地)에서 서거(逝去)하였다. 시호는 소양(昭襄)이다.


(2) 천년(千年)의 명유거족(名儒巨族)
① 종묘배향(宗廟配享) 3명, 왕비(王妃) 6명, 부마(駙馬) 6명, 상신(相臣) 14명, 청백리(淸白吏) 10명과 조선조에서 문과 340명, 무과 86명의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② 파평윤씨(坡平尹氏)는 고려시대 이래 여러 대에 걸쳐 재상을 배출한 가문이자 왕실(王室)과 혼인(婚姻)할 수 있는 재상지종(宰相之宗)의 명문가(名門家)이자 대유명현(大儒名賢)을 배출한 명문가(名門家)이였다.


(3) 분파(分派)
 함안파(咸安派), 남원파(南原派), 덕산군파(德山君派), 문정공파(文定公派), 신녕공파(新寧公派), 대언공파(代言公派), 봉록군파(奉祿君派), 판서공파(判書公派), 야성파(野城派), 전의공파(典儀公派), 소정공파(昭靖公派), 원평군파(原平君派), 소도공파(昭度公派), 판도공파(版圖公派), 소부공파(小府公派), 태위공파(太尉公派) 등 16개파로 분파(分派)되었다.
② 교리공파(校理公派)는 12세 태위공(太尉公) 안비(安庇)의 현손 16세 교리공(校理公) 돈(惇)이 태위공파(太尉公派)에서 소종파(小宗派)인 교리공파(校理公派)로 분파(分派)하였다.


(5) 파평윤씨(坡平尹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파평윤씨(坡平尹氏)는 159가구 477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교리공파(校理公派) 지선(止善)의 후손은  운수면 봉평2리 연봉에, 판도공파(版圖公派) 규(奎)의 후손은 우곡면 월오리, 포리 등에 세거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① 윤관(尹瓘)
 자는 동현(同玄)이고 호는 묵제(默齊)이다. 검교소부소감(檢校小府少監) 집형(執衡)과 국부인(國夫人) 경주김씨(慶州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문종 28년(1074년) 문과에 급제하고 습유(拾遺)·보궐(補闕)을 거쳐 숙종 즉위년(1095년) 좌사낭중(佐司郞中)으로 요(遼)나라에 파견되어 숙종의 즉위(卽位)를 알렸다.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어사대부(御史大夫)·이부상서(吏部尙書) 등을 거쳐 숙종 9년(1104년) 추밀원사(樞密院事)로서 동북면 행영병마도통사(東北面行營兵馬都統使)가 되어 여진을 정벌하다가 실패하였다. 그 뒤 별무반(別武班)을 창설하여 군대를 양성, 예종 2년(1107년) 여진 정벌군의 원수(元帥)가 되어 부원수(副元帥) 오연총(吳延寵)과 17만 대군을 이끌고 동북계에 출진, 이때 함주(咸州)·영주(英州)·웅주(雄州)·복주(福州)·길주(吉州)·공험진(公嶮鎭)·숭녕(崇寧)·통태(通泰)·진양(眞陽)의 9성을 쌓아 침범하는 여진을 평정하고 공험진(公嶮鎭)에 비를 세워 경계로 삼았다. 예종 3년(1108년) 봄에 개선, 그 공으로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문하시중(門下侍中)·상서이부판사(尙書吏部判事)·군국중지사(軍國重知事)가 되었다. 같은 해 행영병마원수 문하시중(行營兵馬元帥 門下侍中)으로서 7월 여진을 재정벌(再征伐)하여 31명의 적의 머리를 바쳤다. 그 뒤 여진이 9성의 환부(還付)를 요청하며 강화(講和)를 요청해오자, 조정은 9성을 지키기 어렵다 하여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예종 5년(1110년)수태보(守太保)·문하시중(門下侍中)·병부판사(兵部判事)·상주국(上柱國)·감수국사(監修國史)가 되었다. 예종 6년(1111년) 졸(卒)하였고 예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되는 체협공신(禘祫功臣)이 돠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註釋) 체협공신(禘祫功臣)
종묘의 역대 선왕(先王)들을 합사(合祀) 하는 제사에 배향되는 공신을 말한다.

② 윤언이(尹彦)
 자는 원로(元老)이며 호는 금강거사(金剛居士)이다. 문하시중(門下侍中) 관(瓘)과 상장군(上將軍) 성간(成幹)의 따님인 국대부인(國大夫人) 인천이씨(仁川李氏) 사이에서 선종 7년(1090년) 태어났다. 인종 6년(1128년)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국교 수립을 청하고 돌아왔다. 예종 9년(1114년) 문과에 급제, 인종 7년(1129년) 기거랑(起居郎)이 되어 좌사간(左司諫) 정지상(鄭知常)·우정언(右正言) 권적(權適) 등과 상소하여 당시 정치의 득실을 논하자 왕이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1135년 서경에서 묘청(妙淸)의 반란이 일어나자, 원수(元帥) 김부식(金富軾)의 보좌(補佐)로 출정(出征)해 서경을 함락시키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어사대부 동지추밀원사(御史大夫 同知樞密院事)·수사공 좌복야 판예부사(守司空 左僕射 判禮部事)·참지정사 판서경유수사(叅知政事 判西京留守事)·정당문학(政堂文學)·판형부사(判刑部事)를 역임하였다. 예종·인종 두 왕조에 걸쳐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고, 특히 『주역(周易)』에 밝았다. 1149년 졸(卒)하였다. 저서로는 『역해(易解)』가 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③ 윤보(尹珤)
 감찰어사(監察御使) 순(純)과 홍주이씨(洪州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충렬왕 2년 문과에 급제한 후 충렬왕 4년(1278년) 내시(內侍)·첨사부녹사(詹事府錄事)로서 정방비칙치(政房必闍赤)에 임명되어 인사행정(人事行政)을 관장하였다. 1296년 좌승지(左承旨)로 국자감시(國子監試)를 주관하면서 최응(崔凝) 등 70여 명을 뽑았다. 충선왕 즉위년(1298년)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의조상서(儀曹尙書)를 거쳐 밀직부사 성균대사성 수문전학사(密直副使 成均大司成 修文殿學士)·서북면도지휘사(西北面都指揮使) 등을 역임하였다. 충렬왕 33년(1307년)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고 충숙왕 8년(1321년) 수첨의찬성사(守僉議贊成事)로 치사(致仕)하였으며, 다시 정승치사(政丞致仕)로 가직(加職)되고 영평군(鈴平君)에 봉하여졌다. 충숙왕 16년(1329년) 졸(卒)하였다. 시호는 문현(文顯)이다.
④ 윤안비(尹安庇)
 영평군(鈴平君) 보(珤)와 군부인(郡夫人) 울산박씨(蔚山朴氏) 사이에서 7남으로 태어났다. 충렬왕 20년(1294년)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충혜왕 즉위년(1330년) 좌우대언(右左代言)을 거쳐 문하시랑(門下侍郞)·찬성사(贊成事)를 역임하고 고려 시대 임금의 고문 구실을 하던 국가의 최고 명예직의 하나인 태위(太尉) 를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⑤ 윤침(尹忱)
태위공(太尉公) 안비(安庇)와 전의이씨(全義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충목왕 즉위년(1345년) 왕이 서연(書筵 : 고려시대 임금의 앞에서 경서를 강론하던 자리)을 설치하자 공은 좌부대언(左副代言)으로서 경연(經筵)에서 글을 강의하였다. 충정왕 원년(1349년) 순성보리익위공신 영원군(純誠輔理翊衛功臣 鈴原君)으로 봉하였고 공민왕 3년(1354년)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거쳐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를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2) 조선시대
① 윤돈(尹惇)
 가선대부(嘉善大夫) 시(恃)와 대언(代言) 흥(興)의 따님인 남양홍씨(南陽洪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명(異名)은 윤순(尹淳)이다. 태종 14년(1414년) 알성시(謁聖試) 문과에 급제한 후 과천현감(果川縣監)을 거쳐 주부(主簿)로서 평안도(平安道) 경차관(敬差官)으로 파견되어 “본도(本道) 44읍에 굶주리는 백성이 4만 5백 명입니다”라고 보고하였으며 뒤에 외교문서 작성과 검토에 관한 일을 맡아 보았던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를 역임하였고 증손자 인경(仁鏡)이 영의정(領議政)으로 귀(貴)하게 되어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추증(追贈)되었다. 태위공파(太尉公派)에서 교리공파(校理公派)로 분파(分派)된 파조(派祖)이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註釋) 추증(追贈)
죽은 사람의 관작(官爵)을 올려 주는 것을 말하며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실직(實職) 2품 이상의 종친(宗親), 문•무관의 부(父)•조(祖)•증조(曾祖) 3대에 한해 추증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증직(贈職)과 뜻이 같은 말이다.
② 윤계흥(尹繼興)
 증(贈) 이조판서(吏曹判書) 돈(惇)과 감찰(監察) 즙(楫)의 따님인 군부인(郡夫人) 순천박씨(順天朴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조 1년(1455년) 판관(判官)으로서 계유정난(癸酉靖難)에 공이 있어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녹훈(錄勳)되었다. 세조 7년(1462년) 삼척부사진병마사겸수군첨절제사(三陟府使鎭兵馬使兼水軍僉節制使)를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손자 인경(仁鏡)이 영의정(領議政)으로 귀(貴)하게 되어 좌찬성(左贊成)에 증직(贈職)되었다.
③ 윤인경(尹仁鏡)
 자는 경지(鏡之)이며 부사정(副司正) 구(昫)와 종(琮)의 따님인 진주유씨(晉州柳氏) 사이에서 성종 7년(1476년) 태어났다. 연산군 10년(1504년) 식년(式年) 진사시(進士試)와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한 후 중종 1년(1506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성균관학록(成均館學錄)을 시작으로 예조좌랑(禮曹佐郞)·병조좌랑(兵曹佐郞)·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승정원(承政院)의 부승지(副承旨)·도승지(都承旨) 등을 역임하고 중종 19년(1524년)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올랐다. 중종 27년(1532년) 예조참판(禮曹參判)으로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명나라에 건너가 외교 활동을 펴고 돌아왔으며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되어, 당시 흉황(凶荒 : 곡식이 잘못되어 농사가 결딴 남)이 심한 경상도 지방의 진휼(賑恤 : 흉년에 곤궁한 백성을 구원하여 도와줌)을 주관하였다. 중종 31년(1536년)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승진, 호조(戶曹)·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내고, 중종 35년(1540년)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인종 1년(1545년) 좌의정(左議政)이 되고 이어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인종이 죽자 원상(院相)으로서 국사(國事)를 맡아 처결하고, 명종이 즉위하자 위사공신(衛社功臣) 1등에 책록(策錄)되고 파성부원군(坡城府院君)에 진봉(進封 : 봉작을 더함)되었다. 명종 3년(1548년) 졸(卒)하였다. 시호는 효성(孝成)이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22세 사어공(司禦公) 영(泳)이 서울에서 충남 연산(連山)으로 처음 이주(移住)하였고 그 아들 23세 판서공(判書公) 지선(止善)이 인조 22년(1644년) 전의이씨(全義李氏) 예빈시(禮賓寺) 참봉(參奉) 종택(宗澤)의 사위가 되어 처향인 다산면 상곡리에 거주하다가 그 아들 24세 승지공(承旨公) 근(瑾)이 다산면 벌지 창리(倉里)로 이주하였으며 그 아들 25세 참판공(參判公) 겸래(謙來)가 숙종 16년(1690년)경 성주 한개에서 고령군 운수면 연봉리로 이주 정착하였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조선시대
① 윤지선(尹止善)
자는 복초(復初)이며 세자익위사사어(世子翊衛司司禦) 영(泳)과 양(諒)의 따님인 장흥임씨(長興任氏) 사이에서 세째 아들로 선조 30년(1597년) 태어났다. 공은 지극한 성품과 순수한 행실이 있어서 덕을 감추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다섯째 아들인 리(理)가 부승지(副承旨)·경주부윤(慶州府尹)을 지내는 등 귀(貴)하게 되어 호조참판(戶曹參判) 겸(兼) 지의금부(知義禁府) 도사(都事)·오위도총부총관(五衛都摠府摠管)에 증직(贈職)된 후 손자가 양래(陽來)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가 되는 등 귀(貴)하게 되어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② 윤리(尹理)
자는 자일(子一)이고 증(贈) 이조판서(吏曹判書) 지선(止善)과 예빈시(禮賓寺) 참봉(參奉) 종택(宗澤)의 따님인 전의이씨(全義李氏) 사이에서 인조 14년(1636년) 태어났다. 효종 8년(1657년)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하고 헌종 4년(166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였다. 성균관(成均館)에 분속(分屬)되어 가주서(假注書)를 지내고·보안찰방(保安察訪)·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장령(掌令)·온성부사(穩城府使)·병조참의(兵曹參議)·동부승지(同副承旨)·경주부윤(慶州府尹) 등을 역임하였다. 숙종 6년(1680년)에는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보사원종공신(保社原從功臣) 1등에 책록(策錄)되었다. 숙종 20년(1694년) 졸(卒)하였다.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에 증직(贈職)되었다.
③ 윤정래(尹鼎來)
 자는 중경(重卿)이고 증(贈) 좌승지(左承旨) 근(瑾)과 시민(時閔)의 따님인 선산김씨(善山金氏) 사이에서 효종 7년(1656년) 태어났다. 숙종 17년(1691년) 증광진사시(增廣進士試)에 입격(入格)하였다. 숙종 20년(1694년) 졸(卒)하였다.
④ 윤충언(尹忠彦)
 자는 군보(君輔)이며 노강서원(老江書院) 창건(創建)을 주도한 통덕랑(通德郞)겸래(謙來)의 세째 아들로 숙종 17년(1691년) 태어났다. 영조 4년(1728년) 무신(戊申) 별시(別試) 무과에 급제한 후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지냈다. 영조 11년(1735년) 졸(卒)하였다.
⑤ 윤면형(尹勉亨)
 자는 통중(通仲)이며 증(贈) 판서(判書) 조언(朝彦)과 증(贈) 참의(參議) 지연(之演)의 따님인 인천채씨(仁川蔡氏) 사이에서 인조 23년(1645년) 태어났다. 무과에 급제한 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영조 9년(1733년) 졸(卒)하였다.
(2) 근∙현대 인물
① 윤종욱(尹鍾旭) : 대검찰청 사무국장
② 윤동연(尹東姸) : 서울중앙지방법원 판사
③ 윤종화(尹鍾華) : 포항직업훈련원장, 육군행정학교 부교장(준장)
④ 윤종필(尹鍾畢) : 국군간호사관학교 학교장(준장), 비례대표 국회의원
⑤ 윤건영(尹建永) : 연세대 상대 교수, 비례대표 국회의원
⑥ 윤종건(尹鍾健) : 한국교원단체 총연합회 회장, 한국외국어 대학 원장
⑦ 윤종린(尹鍾麟) : 포항여중 교장
⑧ 윤귀옥(尹貴玉) : 동촌중학교 교장
⑨ 윤인영(尹仁永) : 서울대 의과대학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의학박사
⑩ 윤근병(尹根秉) : 경북대 공대 교수, 공학박사
⑪ 윤우영(尹禹永) : 고려대 공대 재료공학과 교수, 금속공학 박사
⑫ 윤구영(尹救永) : 홍익대 기계정보공학과 교수, 기계공학 박사
⑬ 윤성리(尹聖理) :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정치학 박사
⑭ 윤종배(尹鍾培) : 한국방송공사(KBS) 부장
⑮ 윤성종(尹聖宗) : 한국 3M 부사장, 베트남 법인장

 

자료제공 : 파평윤씨 교리공파 후손 윤함균(尹咸均)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편집국장 최종동(崔鍾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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