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여씨(星山呂氏) 성주수촌파(星州樹村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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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성산여씨(星山呂氏) 성주수촌파(星州樹村派)

성산여씨 백록재, 덕곡면백리1길26-17.JPG

성산여씨 백록재(덕곡면백리1길26-17)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시조(始祖) 여어매(呂御梅)


① 중국(中國) 내주(萊州) 사람으로 당(唐)나라 희종(僖宗)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역임하였는데, 황소(黃巢)의 난을 피하여 신라 헌강왕 3년(877년)에 신라(新羅)에 귀화하여 경북(慶北) 성주군(星州郡) 벽진면(碧珍面)에 정착하고 신라(新羅) 때 전서(典書)를 지냈다.
② 그 뒤 세거지명(世居地名)을 따라 성산(星山)과 함양(咸陽)으로 분관(分貫)되어 왔는데 병화(兵火) 등으로 중간에 보판(譜版)을 잃어 세차(世次)를 확인 고증(考證)할 수 없어 기해보(己亥譜 : 1659년)에서는 여어매(呂御梅)를 비조(鼻祖)로 하고 고려말에 삼중대광(三重大匡)을 지낸 여양유(呂良裕)를 중시조(中始祖)로 하되 기세조(起世祖)로 하여 세계(世系 : 대대로 내려오는 계통)를 이어온다.

(註釋1) 비조(鼻祖)
시조(始祖) 이전의 선계(先系) 조상 중 가장 높은 사람을 말한다.
(註釋2) 기세조(起世祖)
보통 족보 등 계대(繼代)를 보면 시조(始祖)를 1세(一世)로 하는데 윗대 조상의 소목(昭穆)이 불분명하여 나중에 세(世)를 정함에  시조를 계보에 1세(一世)로 할 수 없을 때 종중(宗中)의 추존(推尊)을 받아 어느 훌륭한 조상을 1세(一世)로 하는 조상을 말한다.

◈ 소목(昭穆)
종묘나 사당에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차례. 왼쪽 줄을 소(昭)라 하고, 오른쪽 줄을 목(穆)이라 하여 1세를 가운데에 모시고 2세, 4세, 6세는 소(昭)에 모시고, 3세, 5세, 7세는 목(穆)에 모신다.

 

(2) 중시조(中始祖) 여양유(呂良裕)
 고려 때 조정에 천거(薦擧)되어 진사(進士)를 지냈으며 삼중대광(三重大匡)의 벼슬을 올랐다. 절행(節行 : 절개있는 행동)이 고매(高邁)하고 문장이 뛰어나 야은(冶隱) 길재(吉再),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도의지교(道義之交)하였다. 우왕 6년(1380년) 9월 왜장(倭將) 아지발도(阿只拔道)가 왜구를 이끌고 운봉현(雲峰縣)에 침입하자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아지발도(阿只拔道)를 정벌(征伐)하러 남하(南下)하여 성주군 성주읍 백전리 야동(冶洞)에 있는 공의 집에 친히 들리자 군사들에게 밥을 먹이고 계책을 의논하였다고 하여 양식을 운반하고 군사를 보호한 운량호군(運糧護軍)이 되었으며 이성계(李成桂)가 전라도 지리산 근방 황산(荒山)에서 왜구(倭寇)를 격퇴시킨 싸움인 황산대첩(荒山大捷)에서 공을 세웠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여러 차례 불렀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자 3결(三結 : 약 9000평)에 대하여 부역(賦役)이나 조세(租稅)를 면제하여 주던 복호삼결(復戶三結)의 은전(恩典 : 특전)을 내렸다.


(3) 분파(分派)
대구행정백파(大邱杏亭伯派), 대구행정중파(大邱杏亭仲派), 대구행정계파(大邱杏亭季派), 성주진사공백파(星州進士公伯派), 성주진사공중파(星州進士公仲派), 성주진사공계파(星州進士公季派), 성주수촌백파(星州樹村伯派), 성주수촌중파(星州樹村仲派), 성주수촌숙파(星州樹村叔派), 성주수촌계파(星州樹村季派), 구정파(鳩亭派), 관북파(關北派), 김산백파(金山伯派), 김산중파(金山仲派), 김산계파(金山季派), 성주계항파(星州鷄項派), 대구부동파(大邱釜洞派), 경산파(慶山派) 등 18개파로 분파(分派)되었다.
(4) 성산여씨(星山呂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성산여씨(星山呂氏)는 37가구 95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성주수촌중파(星州樹村仲派)·성주수촌숙파(星州樹村叔派)는 덕곡면 백리, 쌍림면 고곡리 등에 성주수촌계파(星州樹村季派)는 대가야읍 지산1리 모산골에 산거(散居)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① 여위현(呂渭賢)
 삼중대광(三重大匡) 양유(良裕)와 동정(同正) 창간(昌榦)의 따님인 정경부인(貞敬夫人) 벽진이씨(碧珍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려 후기 호구(戶口)•공부(貢賦)•전량(錢糧) 등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던 판도사(版圖司) 소속의 정3품 관직인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2) 조선시대
① 여극회(呂克誨)
 판도판서(版圖判書) 위현(渭賢)과 문환(文煥)의 따님인 정부인(貞夫人) 진산강씨(晋山姜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벼슬이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이르렀다. 야로(野老) 이순(李淳)이 지은 읍지(邑誌)에 의하면 “영민함이 뛰어나고 호탕하였으며 문장(文章)과 절행(節行)으로 당대에 이름이 드높았다”고 적고 있다. 산리(山理)에 밝아서 명당(明堂)을 찾아 김천 형곡(荊谷) 사창(司倉)에 터를 잡고 2대에 걸쳐 살았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문집(文集)이 있었으나 병화(兵火)의 와중에 탕실(蕩失)되었다.
② 여자방(呂子方)
 공조판서(工曹判書) 극회(克誨)와 동정(同正) 인적(仁迪)의 따님인 정부인(貞夫人) 청주한씨(淸州韓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성현령(固城縣令)을 지냈다. 풍채(風采)가 소탈하고 호쾌(豪快)하였으며 벼슬에 뜻이 없어 관직에 올라 수일만에 관직에서 물러나 집으로 돌아왔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③ 여우창(呂遇昌)
 자는 응시(應時)이며 호군(護軍) 영(詠)과 현감(縣監) 수겸(守謙)의 따님인 숙부인(淑夫人) 야로송씨(冶爐宋氏) 사이에서 단종 3년(1455년) 태어났다. 타고난 자질이 과감하고 꿋꿋하였으며 세상 물정을 잘 알아 판단이 정확하였다. 만년에는 시 읽기를 좋아하였으며, 선(善)을 좋아하고 선비를 사랑하여 어진 손님의 발길이 문밖에 끊이지 않았다. 성종 2년(1471년) 군왕을 잘 보좌하여 선정을 베풀었다는 공으로 좌리원종공신(佐理原從功臣)에 책록(策錄)되고 병절교위(秉節校尉) 행(行) 부사용(副司勇)을 거쳐 일찍이 선공감(繕工監) 감역(監役)에 제수되자, 문음(門蔭)으로 벼슬살이하는 것은 남자가 할 일이 아니라 하고 끝내 부임하지 않았다. 중종 33년(1538년) 졸(卒)하였다.

(註釋) 문음(門蔭)
고려・조선 시대에, 공신이나 전현직 고관의 자제를 과거에 의하지 않고 관리로 채용하던 일을 말한다.

④ 여희림(呂希臨)
 자는 대지(大之)이며 호는 원정(圓亭)이다. 선공감(繕工監) 감역(監役) 우창(遇昌)과 목사(牧使) 현정(顯廷)의 따님인 남양홍씨(南陽洪氏) 사이에서 성종 12년(1481년) 태어났다. 18세에 용봉산(龍鳳山)에 있는 절에 들어가 도형(都衡)·이광(李光) 등과 함께 학문을 닦았는데, 그 해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이 화를 당하자 이에 과거볼 생각을 단념하고 사림(士林)으로서 지냈다. 일찍이 정시(庭試)와 별거(別擧)에서 두 차례 뽑혔는데 두 번 다 방목(榜目)에서 삭제되자 이에 과거 공부에 뜻을 접고 예학(禮學)을 전공하였다. 중종 2년(1507년)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에 입격(入格)하였다.  중종 5년(1510년)에는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을 찾아가 변역(變易)·소장(消長)의 이치에 관해 문답, 서로 계합(契合 : 부합)한 바 있다. 중종 11년(1516년)에는 고향에 내려가 주자(朱子)가 가감(加減), 증보(增補)한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월회당(月會堂)이란 강당을 지어 한 달에 한 번씩 향약강회(鄕約講會)를 열어 조선에서 최초로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시행하였다. 중종 12년(1517년) 정광필(鄭光弼)의 추천에 의해 특별히 벼슬에 등용된 후 왕자 복성군(福城君)의 사부(師傅)가 되어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 충암(冲庵) 김정(金淨) 등과 도의(道義)로 사귀었다. 중종 14년(1519년) 현량과(賢良科)가 설치되자 형 여희단(呂希端)과 함께 천거되었으나 응시를 거절, 기묘사화(己卯士禍)에 화를 면하였다. 중종 17년(1522년) 의흥현감(義興縣監)이 되었는데, 공손하고 신중하게 직임을 수행하였다. 중종 28년(1533년) 김안로(金安老)가 경빈박씨(敬嬪朴氏)를 폐하고 복성군(福城君)을 연일(延日)로 귀양을 보낼 때 전일에 사부(師傅)를 지냈다는 이유로 기장현(機張縣)으로 유배되었고 함평(咸平)에 이배(移配)된 후 풀려났다. 중종 33년(1538년) 지평(持平)을 거쳐 창녕현감(昌寧縣監)·우봉현감(牛峯縣監)에 제수되었다. 야동(冶洞)을 떠나 수촌(樹村)에 시거(始居)하여 수촌파(樹村派)의 파조(派祖)가 되었다. 명종 8년(1553년) 졸(卒)하였다. 성주 천곡사(川谷祠)에 제향(祭享)되었다.
⑤ 여윤서(呂允恕)
 자는 사추(士推)이며 호는 백미(白眉)이다. 현신교위(顯信校尉) 행(行) 충무위부사직(忠武衛副司直) 침(沉)과 서하(棲霞)의 따님인 숙부인(淑夫人) 수성나씨(壽城羅氏) 사이에서 명종 8년(1553년) 태어났다. 선조 15년(1582년)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에 입격(入格)하였다. 성균관에 들어가서는 친구들에게 추앙(推仰)을 받았다.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한강(寒岡) 정구(鄭逑)와 더불어 우의(友誼)를 맺음이 돈독하였다. 선조 37년(1604년) 졸(卒)하였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이 지은 만사(挽詞)의 일부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가정에서 행한 행의(行義) 사람들이 흠잡을 데 없었고(家庭行義人無間)
 성균관서 펼친 언론은 세상에 함께 알려졌네(泮水言論世共聞)”라고 하였다.
⑥ 여욱(呂煜)
 자는 희원(熙遠)이며 호는 현수(玄叟)이다 증(贈) 공조참의(工曹參議) 윤충(允忠)과 증(贈) 숙부인(淑夫人) 전주이씨(全州李氏) 사이에서 선조 19년(1586년) 태어났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과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의 문하에 유학하여 ‘섬기기를 한결같이 하는 도’를 극진히 하였다. 광해군 2년(1610년) 박이립(朴而立)이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을 무고(誣告)하였을 때 성주(星州)의 생원 정준민(鄭俊敏)과 함께 상소변무(上疏辨誣)하고 대궐 앞에 가서 부르짖어 억울함을 씻었고,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께서 인조 5년(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에 의병을 모을 때 군무(軍務)의 결정에 참여하여 보탬되는 것이 많았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께서 돌아가시고 고향으로 옮겨 장사(葬事)를 지낼 때 공이 좌우로 돕고 관장하였다. 만년에는 등당리(登堂里)에 우거하여 책을 읽는 것으로 스스로 즐기며 여생을 마쳤으니 효종 4년(1653년)에 졸(卒)하였다.
⑦ 여작(呂焯)
 자는 회중(晦仲)이고 호는 호계(虎溪)이다. 성균생원(成均生員) 윤서(允恕)와 면(勉)의 따님인 의인(宜人) 남평문씨(南平文氏) 사이에서 선조 19년(1586년) 태어났다. 일찍이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과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인조 1년(1623년)에는 성주(星州)에 속한 선비들이 오랜 기간 동안 금고(禁錮 : 범죄 사실이 있는 사람을 등용하지 못하게 벼슬길을 막는 형벌)를 당한 것을 위로하기 위하여, 성주에서 시험을 보아 인재를 뽑도록 특별 명령이 내려졌다. 그 결과 김주(金輳) 등과 함께 전시(殿試)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았고, 인조 2년(1624년)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김주(金輳)와 함께 동방급제(同榜及第)하였다. 인조 3년(1625년) 봉상시참봉 겸 교서관정자(奉常寺參奉兼校書正字)를 시작으로 성현도찰방겸교서박사(省峴道察訪兼校書博士)・전적(典籍)・형조좌랑(刑曹佐郞)・공청도사(公淸都事)・하동현감(河東縣監) 등을 역임(歷任)하였다. 효종 2년 시폐소(時弊疏 : 그 시대의 잘못된 폐단에 관한 상소)를 올렸는데 비답(批答 : 상소에 대한 임금의 대답)에 이르기를 “조목별로 진술한 말은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가언(嘉言 : 본받을 만한 좋은 말)과 지론(至論 : 지극히 당연한 이론)을 내 마땅히 유념하여 시행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효종 3년(1652년) 졸(卒)하였다. 
⑦ 여명거(呂命擧)
 자는 천경(天卿)이고 호는 역은와(亦恩窩)이다. 처사(處士) 선화(宣和)와 선교랑(宣敎郞) 신형(愼衡) 사이에서 현종 7년(1666년) 태어났다. 숙종 16년(1690년) 식년시(式年試)에 진사(進士)에 입격(入格)한 후 숙종 28년(1702년)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급제하였다. 예조정랑(禮曹正郞)・청암찰방(靑岩察訪)・황산찰방(黃山察訪)・음성현감(陰城縣監)을 역임하였다. 부모님의 병환이 위중하였을 때 제 손가락을 잘라서 그 피를 먹게 하여 건강을 회복하여 수명을 연장시켰고 문중에 상(喪)을 당하였을 때 먼저 힘을 다하여 도우며 곤궁한 사람을 구제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살펴 친소(親疎)에 차이를 두지 않았다. 숙종 15년(1719년) 졸(卒)하였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1) 성주수촌중파(星州樹村仲派) 후손들은 성주수촌숙파(星州樹村叔派)인 생원공(生員公) 윤서(允恕) 6세손 제가(齊家)의 네째 아들 의침(宜沈)이 1780년 경 성주수촌중파(星州樹村仲派) 참의공(參議公) 윤충(允忠)의 6세손 제서(齊瑞) 앞으로 입양(入養)되면서 선향지(先鄕地) 거창 가조면 일대를 떠나 성주 벽진에 정착하였다가 덕곡면 백1리(배울)에 입향하여 세거하게 되었다.


(2) 성주수촌숙파(星州樹村叔派)는 성주수촌중파(星州樹村仲派) 의침(宜沈)의 장남 철행(喆行)을 의정(宜正)에게 입양(入養)하여 세계(世系)를 이었다.


(3) 덕곡면 백리 일대 세거 성산여씨(星山呂氏)는 17세 의침(宜沈) 선조의 한핏줄로서 성주수촌중파(星州樹村仲派), 성주수촌숙파(星州樹村叔派)간 교차(交叉) 입양(入養)을 통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며 종중사(宗中事)에 모든 종중원이 힘을 합하여 정성을 다하고 있다.


(4) 성주수촌계파(星州樹村季派) 후손들은 1820년 초반에 성주에서 희규(羲奎)가 대가야읍 지산1리 모산골에 입향한 것으로 추정된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조선시대

① 여석규(呂碩奎)
 자는 청숙(淸淑)이고 처사(處士) 철행(喆行)과 화진(華鎭)의 따님 수원백씨(水原白氏) 사이에서 헌종 2년(1836년) 태어났다. 타고난 기품이 순후(純厚 : 순박하고 인정이 두터음)하고 수신제가(修身齊家 : 몸과 마음을 닦아 집안을 다스림)의 도(道)가 있어 천수(天壽 : 타고난 수명)를 누리고 통정대부(通政大夫) 행(行)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1913년 졸(卒)하였다.


(2) 근∙현대 인물

① 여상욱(呂相彧) : 초대 덕곡면의원, 빈흥유계 도청
② 여판술(呂判述) : 육군대령, 안전기획부 대구•경북지부장
③ 여상범(呂相範) : 한국문인협회 고령지부 회장 역임, 경북문인협회 이사
④ 여영동(呂泳東) : 대구광역일보 이사, 대구신문 전무이사 및 대표이사
⑤ 여석동(呂石東) : 지방행정 사무관
⑥ 여경환(呂慶煥) : 농촌진흥청 시설원예연구소 농업연구사, 이학박사
⑦ 여가동(呂可東) : LG메가티온 이사
⑧ 여경동(呂慶東) : 고령경찰서장, 성남중원경찰서장
⑨ 여노연(呂魯淵) : 예비군 중대장
⑩ 여상운(呂相雲) : 대구지방고용노동청 근로개선지도과 과장, 공인노무사

 

 

자료제공 : 후손 여상천(呂相千)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편집국장 최종동(崔鍾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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