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의 향토문화유산을 찾아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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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의 향토문화유산을 찾아서(2)

고령군에서는 향토문화유산을 보다 체계적으로 등록·보존·관리해 지역문화발전에 기여하고 후세에 전승하고자 향토문화유산 지정 및 도지정문화재 승격, 정비사업 등을 추진하고 있다. 우리군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다음호에는 문화유산 9,10을 연재합니다

5. 매림서원(梅林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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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고령군 향토문화유산 유형유산 제5호
지 정 일  2012년 08월 01일
소 재 지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송림2길 54-7

 

매림서원은 쌍림면 송림리 서원마을에 있는 한계 오선기, 매헌 곽수강을 배향한 조선 후기 서원이다. 현풍곽씨(玄風郭氏)와 고창오씨(高敞吳氏) 두 문중에서음력 중정(中丁)에 향사하고 있다.
오선기(吳善基)의 자는 경부(慶夫), 호는 한계(寒溪)이고 본관은 고창(高敞)이다. 경상북도 고령에서 출생하였다. 장용우(張龍遇)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산림처사로 후학 양성에 힘썼던 인물이다. 저서로는『한계집(寒溪集)』이 있다. 곽수강(郭壽岡)의 자는 진옹(鎭翁), 호는 매헌(梅軒)이고 본관은 현풍(玄風)이며 고령에서 거주하였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글 솜씨가 뛰어났으며 1619년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저서로는『매헌집(梅軒集)』이 있다.
매림서원은 오선기와 곽수강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유림에서 1707년(숙종33) 쌍림면 매촌리에 건립하였으나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이후 매림재(梅林齋)로 이어오다 1984년 다시 중수하면서 서원으로 복원되었다.
매림서원은 크게 사당, 강당, 동·서재, 내삼문, 외삼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입구에 풍우루를 비롯하여 서원 내에 비각과 육각형의 정자가 배치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입구를 들어서면 서당이 있고 서당의 양쪽에는 동재와 서재가 뒤쪽에 사당이 위치한다.
사당인 숭경사(崇敬祠)는 강당의 후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맞배지붕 건물이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5량 형식의 가구 구조이다. 강당인 중정당(中正堂)은 2칸의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2칸씩 온돌방을 놓았으며 건물의 전면에는 반 칸의 툇간을 구성하고 마루를 배치하였다. 동·서재는 온돌방 강당 전면에 위치하며 각각 4칸 규모로 되어 있다.
서원 내에는 책판과 현판 및 기판, 비석 1기 등이 남아 있다. 책판에는『매헌선생문집(梅軒先生文集)』,『예곡선생문집(禮谷先生文集)』,『한계선생문집(寒溪先生文集)』등이 소장되어 있다. 책판 세부 목록은『경북지역의 목판자료』2에 수록되어 있다.

 

6. 대곡사(용화재) 大谷祠(龍華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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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고령군 향토문화유산 유형유산 제6호
지 정 일  2012년 08월 01일
소 재 지  경북 고령군 대가야읍 큰골길 240-3

 

용화재는 지산리 큰골마을 위쪽에 위치하며 삼국통일의 주역인 신라 김유신(金庾信, 595∼673, 진평왕 17∼문무왕 13)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된 사우이다.
건물은 모두 2동으로 재실인 용화재(龍華齋)와 김유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인 대곡사(大谷祠)로 이루어져 있다. 연혁은 처음 대곡리에 거주하던 후손인 김치수(金致洙)가 1904년 경주에서 영정을 모셔와 자신이 거주하는 집 뒤편에 영정각을 건립하고 영정을 안치하여 치제(致祭)하였는데, 1928년 봄 후손 용주(容輳)에게 부탁하여 영정기를 찬하였다. 이후 1947년 3월 후손 김용욱(金容旭) 등이 사우와 강당 및 홍문 건축과 관련한 통문을 발송하고, 동년 4월 2일 입주(立柱), 3일 상량하였다. 1950년 2월 손후익(孫厚翼)이 흥무왕영정각강당상량문(興武王影幀閣講堂上樑文)을 찬하였고, 1952년 3월 후손 용욱(容旭)이 용화재기(龍華齋記)를 찬하였다.
건물 구성은 솟을삼문, 대곡사, 용화재 3동으로 일곽을 이루고 있다. 배치는 경사지를 2단으로 조성한 대지에 출입문인 솟을삼문과 북동향하는 용화재를‘ㄱ’자형으로 하단에 배치하고, 용화재 우측의 한 단 높게 조성한 상단에 대곡사가 남동향하고 있다.
대곡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이고, 평면은 3칸 내부 전체를 통칸으로 처리하고 바닥은 장마루를 깔아 마감했다. 내부 어칸의 중앙 뒷벽에는 영정함과 제상이 놓여있다. 지붕가구는 간략한 3량가에 겹처마 맞배로 한식기와를 이었다.
용화재는 정면 4칸, 측면 1칸 반 규모에 평면은 중앙의 2칸통 대청을 중심으로그 좌우측에 온돌방 1칸씩을 들이고 전면 전체에 퇴를 둔 중당협실형이다. 지붕가구는 간략한 3량가로 홑처마 팔작에 한식기와를 이었다.

 

7. 지지재(知知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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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고령군 향토문화유산 유형유산 제7호
지 정 일  2012년 08월 01일
소 재 지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벌지2길 44-3

 

지지재는 벌지마을 뒤편의 야산 중턱에 위치한 경주김씨들의 문중 재실로 규모가 방대하다. 조선 말기인 1870년 김씨 8형제가 서로의 뜻을 모아 조상의 덕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한 사당의 형식으로 지은 건물이다.
건물 구성은 지지재, 주사, 평삼문 3동으로 구성된 재실영역과 그 뒤편에 떨어
져 배치된 사당영역이 별곽을 이루고 있다. 재실영역은 출입문인 사주문과 그 뒤편에 지지재가 일직선상으로 배치하고, 지지재 우측으로는 주사가 위치한다.
지지재는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로 평면은 2칸통 대청을 중심으로 그 좌측에 온돌방 1칸, 좌측으로 온돌방 2칸을 배열하고 전면 전체로는 우물마루를 깐 퇴를 둔 중당협실형이다. 지붕가구는 건실한 5량가에 홑처마 팔작에 기와를 이었다.
건물 내부에는‘지지재(知知齋)’, ‘누산서실(樓山書實)’등의 현판 2개와‘지지재 중건기(知知齋重建記)’, ‘지지재기(知知齋記)’등 기판 2매가 남아 있다.
주사는 지지재보다 낮게 기단을 조성해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를 앉혔다. 평
면은 2칸 온돌방에 마루 1칸을‘一’자형으로 배열하고, 전면에 퇴를 둔 좌실우당(左室右堂)형이다. 지붕가구는 홑처마 5량가에 일식기와를 이은 팔작집이다.
사당은 지지재 일곽에서 좌측으로 별도로 돌각담을 쌓아 돌린 일곽에 출입문인 사주문과‘二’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이고, 지붕가구는 3량가에 겹처마 맞배지붕 기와집이다.

 

8. 남와구거(南窩舊居)

 

 

8.남와구거.JPG

 

 

지정번호 고령군 향토문화유산 유형유산 제8호
지 정 일  2012년 08월 01일
소 재 지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도진3길 17

 

남와구거는 학암 박정번(朴廷韜)의 7세손인 박민국(朴敏國)이 서재 겸 사랑채로 1815년 건립하였으며, 도원정사 또는 불휴당으로 불린다.
남와구거에는 안채, 사랑채, 사당, 별채, 안대문, 솟을대문 등이 배치되어 있다.
건물 배치는 솟을삼문을 들어서면 북편에 사랑채와 사당이 나란히 남향하고, 사랑채 서쪽으로는 중채와 안대문이 축선을 약간 달리하며 남서향한다. 안대문을들어서면 안채가 역시 전방의 건물들과 다른 축선으로 남서향한다.
사랑채는 솟을대문보다 한단 높게 조성한 대지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다.
평면구성은 2칸통 온돌방에 마루 1칸을 두고 전면 전체로는 마루를 깐 퇴를 배열한‘一’자형이다. 지붕가구는 건실한 5량가에 홑처마 팔작에 기와를 이었다. 사당은 정면 2칸, 측면 1칸 반 규모로 내부 뒷벽에는 중앙으로 위패함과 교의, 상이 차례로 놓여 있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이며, 평면은 대청을 중심으로 그 우측에 정지
2칸과 안방 1칸, 대청 좌측으로는 건너방 1칸을‘一’자형으로 배열했다. 지붕가
구는 3량가이고, 지붕은 건넌방 좌측 퇴에는 각기 가적지붕을 달아내어 맞배+가적지붕이라는 독특한 지붕형태를 취했다. 중채는 초가 3칸을 근년에 기와집으로 지은 것이고, 입구에는 솟을삼문이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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