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이씨(驪州李氏) 문순공파(文順公派) 고양군후예(高陽君後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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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여주이씨(驪州李氏) 문순공파(文順公派) 고양군후예(高陽君後裔)

기획연재-고령지역 세거성씨(世居姓氏) 연원(淵源)을 찾아서

반곡재, 쌍림면용리 59-1.JPG

반곡재(쌍림면용리 59-1)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시조(始祖)


여주이씨(驪州李氏)는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크게 황중윤(皇中尹)을 지낸 이은백(李殷伯)을 시조로 하는 문순공파(文順公派), 인용교위(仁勇校尉)를 지낸 이인덕(李仁德)을 시조로 하는 인용교위공파(仁勇校尉公派), 향공진사(鄕貢進士) 이세정(李世貞)을 시조로 하는 경주파(慶州派) 등 3개파로 분파되어 각각 시조(始祖)를 달리하나 고려 초기 한 분의 조상으로부터 분파(分派)된 것으로 인식하고 연원(淵源)이 같은 동종(同宗)임을 깨닫고 있다. 숙종 27년(1701년) 신사대동보(辛巳大同譜)를 시작으로 영조 21년(1745년) 을축대동보(乙丑大同譜) 등 2차례에 걸쳐 족보를 함께 하고 ‘여주이씨종친회연합회(驪州李氏宗親會聯合會)’를 결성하여 선세유적(先世遺蹟) 순례행사(巡禮行事)를 실시하는 등 친목과 단합을 도모하고 현조(顯祖)를 경모(敬慕)하며 본래 그 뿌리가 하나에서 시작된 동원지향(同源之鄕)의 불변의식(不變意識)을 가지고 있다.


(2) 여주이씨(驪州李氏)의 특징


① 동방정수지세족(東方精粹之世族)
가문의 뿌리가 명확하고 역사상 일체 간신(奸臣)이나 역신(逆臣)이 없어 지절(志節)을 고수하고 우리나라 성씨집단 중 제일 맑고도 순수한 씨족 즉 동방정수지세족(東方精粹之世族)이라고 영조 21년(1745년)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 이수항(李壽沆)이 을축대동보(乙丑大同譜) 서문을 찬(撰)하면서 인용하였다.
② 민족문화위인(民族文化偉人)을 최다(最多)로 배출한 명벌(名閥)
1984년 10월 18일에 문화공보부에서 선정한 50명의 민족문화위인(民族文化偉人) 현창대상자(顯彰對象者) 중 문학•언어 분야에서 백운거사 이규보(李奎報), 민족사상 분야에서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더불어 성호(星湖) 이익(李瀷)이 선정되어 최치원(崔致遠), 최제우(崔濟愚)가 선정된 경주최씨(慶州崔氏)와 더불어 위인(偉人)을 최다(最多)로 배출한 문중으로 자리 매김하였다.


(3) 여주이씨(驪州李氏)를 찬란하게 빛낸 3대(三代) 거봉(巨峰)


한국 한문학(漢文學)의 최고봉(最高峰)이었으며 ‘고려 최고의 문장가’이었던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李奎報), 이용후생(利用厚生), 실사구시(實事求是),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이념을 취한 실학(實學)의 종장(宗匠) 성호(星湖) 이익(李瀷), 성리학(性理學)의 주리론(主理論) 선구자(先驅者)이며 동방오현(東方五賢)으로 문묘종사(文廟從祀)된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등 세 분은 우리나라 역사에 여주이문(驪州李門)의 명예를 찬란하게 빛낸 3대(三代) 거봉(巨峰)이었다.
(4) 여주이씨(驪州李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여주이씨(驪州李氏)는 108가구 267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안동장군(安東將軍) 이미숭(李美崇)의 증손 송재공(松齋公) 이계문(李啓文)의 후손은 쌍림면 용2리, 대가야읍 중화리, 헌문리 등지에 세거하고 있고 죽계공(竹溪公) 이신문(李信文)의 후손은 경남 고성 마암면 석마리, 신리, 합천군 묘산면 관기리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① 이윤수(李允綏)
황검교대장군(皇檢校大將軍) 화(和)의 장남으로 인종 8년(1130년) 태어났다. 고려 최고 문장가 이규보(李奎報)의 아버지이다. 명종 1년(1171년) 평안도 성주(成州)의 수령(守令)을 지냈고 명종 4년(1174년) 내시부(內侍府) 요직(要職)에 등용되었으며 명종 13년(1183년)에는 수주자사(水州刺史)를 거쳐 명종 16년(1186년) 호부낭중(戶部郎中)을 역임하였다. 명종 21년(1191년) 졸(卒)하였다.
② 이부(李富)
황검교대장군(皇檢校大將軍) 화(和)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명종 9년(1179년) 대장군(大將軍) 겸(兼) 서북면지병마사(西北面知兵馬事)로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의 반군(叛軍)과 우방전(牛方田)의 난을 진압하여 명종 11년(1181년) 직문하성(直門下省)에 올랐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③ 이규보(李奎報)
자(字)는 춘경(春卿)이며 초명은 인저(仁氐)이고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이다. 호부낭중(戶部郎中) 윤수(允綏)와 울진현위(蔚珍縣尉) 시정(施政)의 따님인 금양김씨(金壤金氏)사이에서 의종 22년(1168년) 태어났다. 명종 19년(1189년) 사마시(司馬試)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한 후 명종 20년(1190년) 예부시(禮部試)에 동진사(同進士)로 뽑혔다. 명종 23년(1193년) 민족 최초의 영웅대서사시(英雄大敍事詩)인 ‘동명왕편(東明王篇)’을 지어 고려인에게 민족의식(民族意識)을 고취(鼓吹)시켰다. 신종 2년(1199년) 전주사록겸장서기(全州司錄兼掌書記)로 벼슬길에 나아가 우정언지제고(右正言知制誥)・우사간지제고(右司諫知制誥)・계양부사(桂陽副使)・예부낭중(禮部郞中)・기거주(起居注)・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한림학사(翰林學士)・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판비서성사(判秘書省事)가 되었다. 고종 20년(1233년) 몽고병이 고려를 침입하자 ‘진정표(陳情表)’를 지어 몽고 황제인 태종(太宗)에게 보내어 수십만의 몽고병을 철병(撤兵)케 하였으니 ‘문장(文章)의 화신(化神)’이었다. 그후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호부상서(戶部尙書)・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정당문학(政堂文學)・수태위(守太尉)・참지정사(叅知政사事)를 지냈다. 고종 24년(1237년) 수태보(守太保)・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벼슬에서 물러나 하음백(河陰伯)에 봉군(封君)되었으며 고종의 칙명(勅命)으로 부처님의 힘을 빌려 몽고군을 격퇴하고 국가와 왕실의 안녕(安寧)을 기원하는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版君臣祈告文)’을 지었다. 고령군은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2016년 11월 25일 개경포(開經浦) 기념공원(紀念公園)내에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版君臣祈告文) 기념비(記念碑)’를 세웠다. 평생 네 차례나 지공거(知貢擧 : 과거 시험관)가 되어 167명의 문하생(門下生)을 배출하였다. 고종 28년(1241년) 졸(卒)하였다. 시호(諡號)는 문순(文順)이며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53권 13책이 세상에 전한다. 평생 8천여 편의 한시(漢詩)를 지었으나 현재 2,094편의 한시가 전한다. 학문이 심오(深奧)한 경지에 이르러 “해동공자(海東孔子)”라 불리었으며 글로써 나라를 빛내는 ‘이문화국(以文華國)의 이상(理想)’을 실현한 나라의 꽃 즉 “국지화(國之華)”이었고 한국 한문학(漢文學)의 최고봉(最高峰)이었으며 ‘고려 최고의 문장가’이었다.
④ 이헌(李憲)
자는 여징(汝徵)이며 사간(司諫) 징(澄)과 좌사간(左司諫) 성(誠)의 따님인 월성이씨(月城李氏) 사이에서 고종 44년(1257년) 태어났다. 이규보(李奎報)의 둘째 손자이다. 충렬왕 3년(1277년) 정축년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예부상서(禮部尙書) 겸(兼) 북도선위사(北道宣慰使)로 함주(咸州)의 차유령(車踰嶺)에서 여진(女眞)을 토벌한 공로가 있어 고양군(高陽君)에 봉해지고 현재 고령(高靈)을 식읍(食邑)으로 받았으며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와 동평장사(同平章事)에 올랐다. 여주이씨(驪州李氏)에서 분관(分貫)하여 ‘고령이씨(高靈李氏) 시조(始祖)’가 되었으며 조선 고종 17년(1880년) 예조완문등초(禮曹完文騰抄)에 근거하여 여주이씨(驪州李氏)로 환관(還貫)할 때까지 후손들은 570 년간 고령이씨(高靈李氏)로 세계(世系)로 이어왔다. 충숙왕 6년(1319년) 졸(卒)하였다. 대가야읍 장기리 산 20-2번지 소재 금산에 공(公)의 위적(偉蹟)을 기리는 정자(亭子) 고양정(高陽亭)과 현창비(顯彰碑)가 세워져 있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동평장사(同平章事)를 지낸 이헌(李憲)이 고양군(高陽君)에 봉군(封君)되어 현재 고령을 식읍(食邑)으로 받아 충선왕 2년(1310년) 수조지(收租地 : 조세를 수취할 권리가 있는 땅)를 관리하기 위하여 선향지(先鄕地)인 개성 동부 봉향리(奉香里)에서 고령군 대가야읍에 입향하였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고려시대
① 이언(李彦)
자는 성약(聖若)이며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동평장사(同平章事) 헌(憲)과 이부상서(吏部尙書) 련(鍊)의 따님인 강릉김씨(江陵金氏) 사이에서 충렬왕 30년(1304년) 태어났다. 안동장군(安東將軍) 이미숭(李美崇)의 아버지이다. 압록강에서 홍건적(紅巾賊)을 평정하여 안북장군(安北將軍)을 제수(除授)받았고 후에 공경직(公卿職)인 상서좌복야(尙書左僕寺)의 벼슬에 올랐다. 
② 이미숭(李美崇)
호는 반곡(盤谷)이며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언(彦)과 예부시랑(禮部侍郞) 윤(允)의 따님인 평강채씨(平康蔡氏) 사이에서 충목왕 2년(1346년) 태어났다. 이규보(李奎報)의 현손(玄孫)으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문인(門人)이다. 안동장군(安東將軍)에 올라 삭방도(朔方道)를 지키는 중임(重任)을 맡아 북방 오랑캐와 왜적이 침략하였을 때 많은 전공(戰功)을 세웠다. 1392년 4월 4일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이 선죽교(善竹橋)에서 참살(慘殺)되고 이성계(李成桂) 일파(一派)가 조선을 건국하려 하자 그 불의(不義)함을 꾸짖고 진서장군(鎭西將軍) 최신(崔信)과 함께 2,000여명의 군사를 일으켜 “충의군(忠義軍)”이라 명명(命名)하고 논산의 니산(尼山), 김천의 덕대산(德大山) 산성(山城), 성주의 독용산성(禿用山城), 고령의 운라산성(雲羅山城) 등지에서 이성계 군대에 결사항전(決死抗戰)하였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패퇴(敗退)한 후 고령 상원산(上元山 : 현재 미숭산)에 입성(入城)하여 축성(築城)하고 군사를 조련(調練)하면서 여조회복(麗朝回復)의 계책(計策)을 세웠으나 이성계(李成桂)가 조선(朝鮮)을 건국하자 거사(擧事)를 포기(抛棄)하고 망복(罔僕 : 망국의 신하로서 의리를 지켜 새 왕조의 신하가 되지 않으려는 절조를 말한다)의 고아(高雅)한 절개(節槪)를 지키기 위하여 1392년 10월 10일 순사암(殉死巖)에 몸을 던져 자진(自盡)하였다. 후인(後人)들이 공의 충절(忠節)을 경모(景慕)하여 휘(諱)로 산명(山名)을 삼아 상원산(上元山)을 미숭산(美崇山)으로 고쳐 불렀다. 방랑시인 김삿갓은 ‘영남술회(嶺南述懷)’와 ‘등망향대(登望鄕臺) 유감(有感)’이란 영회시(詠懷詩)를,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은 회고시(懷古詩)인 ‘미숭성(美崇城)’을 지어 공의 영웅적(英雄的)인 삶을 기렸으며 ‘미숭신사(美崇神祠)’, 주마대(走馬臺), 망향대(望鄕臺) 등 각종 유적이 산재한 미숭산성(美崇山城)은 1983년 12월 20일 ‘경남 기념물 제 67호’로 지정되었고 1946년 창건한 ‘반곡재(盤谷齋)’는 2019년 10월 17일 ‘고령군 향토문화유산 제12호’로 지정되었다.


(2) 조선시대


① 이경령(李景齡)
자는 인로(仁老)이며 호는 의암(義巖)이다. 처사(處士) 장(璋)의 차남으로 중종 26년(1541년) 태어났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때 정기룡(鄭起龍) 장군의 군진(軍陣)으로 달려가 초계(草溪), 진주(晋州), 단성(丹城) 등 각종 전투에 참전(參戰)하여 많은 전공(戰功)을 세워 정기룡(鄭起龍) 장군의 아장(亞將)이 되었고 낭관(郎官)을 제수받았다. 선조 30년(1597년) 감물창진(甘沕蒼津)의 기강전투(岐江戰鬪)에서 왜적과 싸우던 중 졸(卒)하였다. 수문장겸사복시정(守門將兼司僕寺正)을 증직(贈職)받고 사패지(賜牌地)와 제수미(祭需米)를 하사(下賜)받았으며 관원(官員)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다.
② 이천령(李千齡)
자는 인수(仁叟)이고 일명 사령(士齡)이라 한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형(衡)과 숙부인(淑夫人) 안동권씨(安東權氏) 사이에서 명종 11년(1556년) 태어났다. 선조 22년(1589년) 무과에 급제한 후 임진왜란 때 고령현 최초 전투인 풍곡리(楓谷里) 전투와 무계(茂溪) 전투 등지에서 혁공(赫功)을 세워 정3품 절충장군(折衝將軍)을 제수받았다. 졸년(卒年)은 미상(未詳)이다
③ 이세백(李世白)
자는 시보(詩甫)이다. 사과(司果) 성령(成齡)의 장남으로 선조 35년(1602년) 태어났다. 인조 15년(1637) 별시(別試) 무과에 급제한 후 정예 기병 중심의 친위병인 겸사복(兼司僕)을 지냈다. 공의 집안은 선고(先考)를 비롯하여 4대에 걸쳐 연속하여 무과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졸년(卒年)은 미상(未詳)이다.
④ 이성립(李誠立)
자는 계실(季實) 또는 명숙(明淑)이다. 가선대부(嘉善大夫) 응천(應千)과 정부인(貞夫人) 한양조씨(漢陽趙氏) 사이에서 선조 6년(1573년) 태어났다. 박사(博士) 한인(韓)에게 수학하였다. 선조 34년(1601년)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한 후 선조 36년(1603년)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형조좌랑(刑曹佐郞) 형 이중립(李中立)과 동방급제(同榜及第)하였다. 성균관(成均館) 학유(學諭)・박사(博士)・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거쳐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지냈다. 광해군 3년(1611년) 졸(卒)하였다.
⑤ 이봉조(李鳳朝)
자는 내문(乃文)이고 호는 만하(晩霞)이다. 증(贈) 통정대부(通政大夫) 인후(寅厚)와 증(贈) 숙부인(淑夫人) 팔계정씨(八溪鄭氏) 사이에서 철종 12년(1861년) 태어났다. 고종 43년(1906년) 고령군수(高靈郡守) 서리(署理)로 승진하였다. 순종 2년(1908년) 고령단연상채회(高靈斷煙償債會) 부회장을 맡아 지역의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을 주도(主導)하였고 고령초등학교 전신(前身)인 사립 우신학교(又新學校)를 설립하여 초대 교장을 맡았다. 1920년 경신년(庚申年) 대홍수로 수백 명의 이재민(罹災民)이 발생하자 자신의 가옥을 개방, 거주케 하고 식량과 집터를 무상으로 공급하였다. 고령향교 전교(典校)를 맡아 문묘(文廟)와 반룡사(盤龍寺)를 중수(重修)하였고 수리사업(水利事業)에도 힘을 쏟아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1937년 졸(卒)하자 ‘고령군 최초 군민장(郡民葬)’으로 장례를 치루었다.


(2) 근∙현대 인물


① 이진주(李珍珠) : 50회 사법시험 합격, 선명법무법인 변호사 ② 이지욱(李知旭) : 법무법인 재유 변호사 ③ 이홍직(李洪直) : 초대 고령군수 및 고령군 교육감, 월성군수 ④ 이하룡(李河龍) : 청와대 공보비서관, 시애틀총영사, 한전산업개발 대표이사 ⑤ 이용구(李龍九) : 고령군 내무과장, 문경군수 ⑥ 이동석(李東奭) : 국가정보원 부이사관(물리부기감)  ⑦ 이규문(李圭文) : 경찰청 수사국장(치안감), 대전광역시 지방경찰청장 ⑧ 이영희(李英姬) : 제7대 후반기 고령군의회 의장 ⑨ 이용수(李龍洙) : 부군단장, 육군 소장,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회원 ⑩ 이규효(李圭孝) : 행시 및 사시 합격, 경남도지사, 내무부차관, 건설부장관 ⑪ 이규완(李圭浣) : 국가정보원 관리관(1급) ⑫ 이상훈(李相勳) : 기획재정부 감사담당관, 조달청중앙보급창장(1급) ⑬ 이용우(李勇雨) : 중앙일보 편집부 부국장, 중우회 부회장, 소설가 ⑭ 이성렬(李成烈) : 성균관대학교 부총장, 한국자동차공학회 회장, 공학박사 ⑮ 이상윤(李相潤) : 중앙대학교 부총장, 행정학 박사 ⑯ 이순탁(李舜鐸) : 영남대 석좌교수, 국제수문수자원계획 정부간위원회 회장 겸 세계물포럼 국제운영위원장 ⑰ 이승욱(李昇旭) : 미시시피주립대학 수학과 석좌교수 ⑱ 이광택(李光澤) : 국민대 법학과 교수, 경실련 경제정의연구소 이사장 ⑲ 이준식(李浚植) : 성균관대 교수, 수능출제위원장, 한국 중어중문학회장 ⑳ 이광직(李光直) : 경북대 교수, 의학박사 ㉑ 이시욱(李時旭) : 서울대 의대 재활의학 교수, 의학박사 ㉒ 이남직(李南直) : 외환은행 캐나다 현지법인 사장, 외환은행 이사 ㉓ 외손 • 허태열(許泰烈) : 박근혜 정부 초대 청와대 비서실장 • 김대환(金大煥) : 노무현 정부 노동부 장관, 노사정위원회 위원장 ㉔ 사위 • 조일환(曺逸煥) : 민주당 4선 국회의원 • 김혁규(金赫珪) : 경남도지사 3선,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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