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계열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계열

1.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계열 

도동서원 사진.jpg

도동서원(대구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서원로1)

 

 

(1)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 문인
→ 서호산인(西湖散人) 송순손(宋順孫 : 남양, 생졸년 미상)


(2)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문인
→ 죽재(竹齋) 이천익(李天益 : 여주, 1491년∼1535년)

 

◉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본관(本貫)은 서흥(瑞興)이며 자는 대유(大猷)이고 호는 한훤당(寒暄堂)·사옹(蓑翁)이다. 충좌위사용(忠佐衛司勇) 유(紐)와 중추부사(中樞副使) 승순(承順)의 따님인 청주한씨(淸州韓氏) 사이에서 단종 2년(1454년) 서울 정릉에서 태어났다. 성장하면서 분발하여 문장에 힘썼으며 중국 한유(韓愈)의 『한창려집(韓昌黎集)』을 애독하였다. 21세 때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하(門下)에서 『소학(小學)』을 읽고 스스로 「소학동자(小學童子)」라고 칭하며 실천궁행(實踐躬行)하였다. 일찍이 ‘독소학(讀小學)’이란 시를 지어 이르기를,

“業文猶未識天機(업문유미식천기)
글을 업으로 하면서 하늘의 이치(天機)를 알지 못했더니
小學書中悟昨非(소학서중오작비)
「소학(小學)」의 책 속에서 지난날의 그릇됨을 깨달았네
從此盡心供子職(종차진심공자직)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하여 자식의 직분을 하려 하노니
區區何用羨輕肥(구구하용선경비)
어찌 구차스레 부귀를 부러워하리오”

라고 하니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이 그것에 견주어 말하기를 “이 말은 바로 성인(聖人)이 될 수 있는 바탕이니 노재(魯齋) 이후에 어찌 그러한 사람이 없으랴”하고 격려하였다. 국가적 시사(時事)에 관하여 물으면 반드시 답하기를 “소학동자(小學童子)가 어찌 대의(大義)를 알겠는가?”하였다. 성종 11년(1480년)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하였고, 척불(斥佛)을 상소하였다. 30세 이후에 다른 학문의 서적을 읽었다. 성종 25년(1494년)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이 이학(理學)에 밝고 지조(志操)가 굳다는 명목의 유일지사(遺逸之士)로 천거해 남부참봉(南部參奉)·전생서참봉(典牲署參奉)·주부(主簿)·감찰(監察) 등을 거쳐 연산군 3년(1497년) 형조좌랑(刑曹佐郞)이 되었다. 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일파로 지목되어 희천(熙川)에 유배되었는데 조광조(趙光祖)에게 학문을 전수해 우리 나라 유학사의 정맥(正脈)을 잇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후에 순천(順天)으로 이배(移配)되었다가 연산군 10년(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사사(賜死)를 받게되자 목욕하고 관대(冠帶)를 갖추고 나아가 얼굴빛을 변치 않고 수염을 입에 물면서 “신체(身體)와 모발(毛髮)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이것까지 상하게 할 수 없다(身體髮膚 受之父母, 不可幷 此受傷乃就)”하고 소학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형을 받으니 향년 51세이었다. 그는 존양(存養 : 본심을 잃지 않도록 착한 성품을 기름 )을 학문의 목표로 삼고 그것에 도달하는 수단으로는 성경(誠敬)을 주로 하였다. 그리고 ‘존양(存養)’과 ‘성찰(省察)’을 체(體)로 삼고 ‘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를 용(用)으로 삼아 위대한 성인의 경지에 이를 것을 기약하였다. 묘는 달성군 구지면 도동서원(道東書院) 뒷편에 있다. 중종(中宗) 2년에 승정원승지(承政院承旨)로 추증(追贈)되고 동 왕 12년에 다시 의정부(議政府) 우의정(右議政)에 증직(贈職)되었다. 그 뒤 광해(光海) 2년(1610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고 또 영의정(領議政)의 증직(贈職)이 내렸다. 그는 특히 실천궁행(實踐躬行)에 힘써 학문은 「소학(小學)」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하고 「소학」에 제시된 생활규범을 실천하기에 진력하였다. 그의 「리일분수(理一分殊)」적인 우주관을 보면, 그의 역저(力著) 『추호가병어태산부(秋毫可並於泰山賦)』에서 ‘만수일본(萬殊一本)’과 ‘일본만수(一本萬殊)’를 고찰하기로 한다.「부천하지물(夫天下之物) 유리유분(有理有分) 이회만물이위일(理會萬物而爲一) 분만수혜(分萬殊兮) 불문(不紊)」이라 하였다. 즉 「천하의 사물에는 이(理)가 있고 분(分)이 있으니 이(理)는 만 가지 것이 모여 하나가 된 것이고 분(分)은 만 가지로 나뉘어져도 흐트러지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하여 보편(普遍)과 특수(特殊)를 혼연일체(渾然一體)의 것으로 보아야 함을 강조하였다. 즉 특수(特殊)가 모이면 보편(普遍)이 되고 보편(普遍)이 나뉘어지면 특수(特殊)가 되는 것이지, 보편(普遍)과 특수(特殊)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는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정암(靜菴) 조광조(趙光組)·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퇴계(退溪) 이황(李滉)과 더불어 5현(五賢)의 한 사람으로 칭송되고 퇴계(退溪)는 그를 「근세도학지종(近世道學之宗)」이라 높혔다. 의리(義理)가 핵심(核心)인 성리학적(性理學的) 실천유학(實踐儒學)인 그의 도학(道學)은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組)에 전수(傳受)되어 도학정신(道學精神)에 입각한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지향하게 되었다. 문인(門人)으로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組)·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금헌(琴軒) 이장곤(李長坤)·신당(新堂) 정붕(鄭鵬)·평와(平窩) 윤탁(尹倬) 등이 있다. 문묘(文廟)에 배향(配享), 현풍(玄風)의 도동서원(道東書院), 순천(順天)의 옥천서원(玉川書院) 등에 제향(祭享)되었다. 시호(諡號)는 문경(文敬)이다. 저서에『한훤당집(寒暄堂集)』·『가범(家範)』·『경현록(景賢錄)』이 있다.

 

(註釋1) 노재(魯齋)
노재는 송(宋)나라 때의 학자인 허형(許衡)의 호이다. 그가《소학(小學)》을 중시하여 “내가 이 책을 믿기를 신명(神明)과 같이 하고 공경하기를 부모와 같이 한다.” 하였다.

 

(註釋2) 유일지사(遺逸之士)
과거를 거치지 않은 학식과 덕망이 높고 지조가 곧은 선비를 말한다.

 

(註釋3) 실천궁행(實踐躬行)
실제(實際)로 몸소 이행(履行)한다.

 

(註釋4) 근세도학지종(近世道學之宗)
이황(李滉)은 정암 조선생 행장(靜庵趙先生行狀)에서 “대개 우리 동국의 선현(先賢) 중에 도학(道學)에는 비록 문왕(文王) 같은 성군(聖君)을 기다리지 않고도 창시한 자가 있었으나, 결국에는 절의(節義)・장구(章句)・문사(文詞)를 닦는 데 그쳤고, 진실로 실천하는 것으로써 학문의 근본을 삼은 이는 오직 한훤(寒暄)이 있을 뿐이었다.” 정몽주(鄭夢周)에 이어 도학(주자학)을 계승한 인물로 이황은 김굉필(金宏弼)을 근세 도학의 으뜸 즉 ‘근세도학지종(近世道學之宗)’이라 불렀다.

 

(註釋5) 지치주의(至治主義)
조선 전기의 학자·정치가인 조광조 등이 인간 세상을 하늘의 뜻이 펼쳐진 이상세계가 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 유교교리. 정치사상을 말하며 지치(至治 : 지극히 훌륭한 정치)란 ≪서경≫ 군진편(君陳篇)의 ‘지치형향 감우신명(至治馨香感于神明)’에서 따온 것이다. 잘 다스려진 인간 세계의 향기는 신명(神明)을 감명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지치(至治)가 우리 나라에서는 하늘의 뜻이 실현된 이상 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정치적 실천 운동으로 구체화되었다.

 

▲ 송순손(宋順孫 : 남양, 생졸년 미상)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자는 경조(敬祖)이고 호는 서호산인(西湖散人)이다. 참봉(參奉)을 지낸 수산(守山)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이 연산군 4년(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 : 훈구파가 김일손이 사초에 수록한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빌미로 일으킨 사화)에 연루되어 김종직의 문도(門徒)로서 붕당(朋黨)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장(杖) 80대와 원방부처(遠方付處 : 먼 지방을 지정하여 머물러 있게 하던 형벌)의 형을 받고 평안도 희천(熙川)에 유배되었다가 연산군 10년(1504년)에 일어난 갑자사화(甲子士禍 : 연산군 어머니 윤씨의 복위문제에 얽혀 일어난 사화)에 연루되어 순천(順天)에 이배(移配)되었을 때 적소(謫所)까지 스승을 따라가 가르침을 요청하였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이 당시의 안목(眼目)들을 피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공은 공자(孔子)의 말씀을 인용하여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夕死可矣〕”라고 하였으며 적소(謫所)에서 힘들게 봉양하였다. 선생의 임종할 때의 유언(遺言)인 말명(末命)을 받들어 김굉필이 사사(賜死)되자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으로 옮겨 와서 장례를 치루었다. 벼슬길에 뜻이 없어 처향(妻鄕)인 전남 고흥(高興)의 서호(西湖)로 이거하였다. 생졸년(生卒年)은 미상이다. 고흥군 고흥읍 호동리 730번지에 있는 운곡사(雲谷祠)에 배향(配享)되었다.

 

◉ 조광조(趙光祖)
본관은 한양(漢陽)이고 자는 효직(孝直)이며 호는 정암(靜菴)이다. 감찰(監察)을 지낸 원강(元綱)과 장령(掌令) 민의(閔誼)의 따님인 여흥민씨(驪興閔氏)사이에서 성종 13년(1482년) 한양에서 출생하였다. 17세 때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가 무오사화(戊午士禍)로 화를 입고 희천(熙川)에 유배 중이던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하였다. 학문은 『소학(小學)』·『근사록(近思錄)』 등을 토대로 하여 이를 경전 연구에 응용했으며, 이 때부터 성리학 연구에 힘써 김종직(金宗直)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士林派)의 영수(領袖)가 되었다. 중종 5년(1510년) 진사(進士)에 장원(壯元)으로 입격(入格)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성균관 유생들의 천거(薦擧)와 이조판서(吏曹判書) 안당(安塘)의 추천으로, 중종 5년(1515년)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에 초임(初任)되었다. 그 해 가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옥당(玉堂 : 홍문관)에 선입(選入)되었고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감찰(監察)·예조좌랑(禮曹正郞)을 역임하게 되었고, 이 때부터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는 유교(儒敎)로써 정치(政治)와 교화(敎化)의 근본(根本)을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한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실현을 역설하였다. 즉 지치(至治)란 근본적으로 민본(民本)·위민(爲民)이라는 유학의 근본정신을 실천하는 것으로 덕치(德治)와 예치(禮治)로 표현되는 왕도정치(王道政治)이다. 그는 이러한 덕치가 이루어지려면 우선 군주가 현명해야 한다고 믿고 군주의 자질을 함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경연(經筵)에서 도학을 숭상하고(崇道學), 인심을 바르게 하며(正人心), 성인(聖人)과 현자(賢者)를 본받아(法聖賢), 지치를 일으키는 것(興至治)을 누차 강조했다. 중종 12년(1517)년에는 교리(校理)로 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임했으며, 향촌의 상호부조(相互扶助)를 위해 『여씨향약(呂氏鄕約)』을 8도에 실시하도록 하였다. 중종 12년(1518년) 부제학(副提學)이 되어서는 미신(迷信) 타파를 내세워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하였다. 그 해 11월에는 대사헌(大司憲)에 승진되어 천거시취제(薦擧試取制)인 ‘현량과(賢良科)’를 처음 실시하게 하여 소장학자(少長學者)들을 뽑아 요직에 안배하고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을 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시키는 실마리로 삼았다. 중종 15년(1519년)에는 중종반정(中宗反正) 때 공을 세운 정국공신(靖國功臣) 중 자격이 없다고 평가된 사람들의 공신호(功臣號)를 박탈하고 토지와 노비를 환수한 사건인 위훈삭제사건(僞勳削除事件)를 강력히 청하는 등 급진적(急進的)인 개혁(改革)은 훈구파(勳舊派)의 강한 반발을 샀고, 결국 신진사류(新進士類)가 참화(慘禍)를 당하는 기묘사화(己卯士禍)의 계기가 되었다. 홍경주(洪景舟)·남곤(南袞)·심정(沈貞) 등 훈구파(勳舊派)는 조광조(趙光祖) 일파가 당파(黨派)를 조직, 조정(朝廷)을 문란하게 하고 모반(謀叛)을 꾀한다고 탄핵하였다. 이에 평소부터 신진사류를 비롯한 조광조(趙光祖)의 도학정치(道學政治)와 과격한 언행에 염증을 느껴오던 왕은 능주(綾州)로 유배되었다가 중종 14년(1519년) 12월 바로 사사(賜死)되니 향년 38세이었다. 김정(金淨)·기준(奇遵)·한충(韓忠)·김식(金湜)·김구(金絿) 등 어진 선비들이 모두 귀양가서 죽고 파직되니 이들을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 한다. 이로부터 현량과(賢良科)가 폐지되고 소학(小學)과 향약(鄕約)의 서책을 보는 것을 금지하여 선비들이 모두 유학(儒學)을 업(業)으로 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이 때가 기묘년(己卯年)이었으므로 이 사건을 ‘기묘사화(己卯士禍)’라고 한다. 그 뒤 선조 초 신원(伸寃)되어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고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었다.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실현이 좌절되자 성리학적(性理學的) 이론(理論) 탐구에 몰두하는 학풍(學風)으로 변모하였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조광조 개혁의 실패 원인을 이렇게 말했다.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가 타고난 기질은 아름다웠으나 학력(學力)이 충실하지 못하여 하는 일이 지나침을 면치 못했기 때문에 마침내 실패했다. 만일 학문에 충실하고 덕기(德器)가 이루어진 세상에 나가 이를 담당했더라면 그 성취한 것을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고 평가했으며 또 이렇게 말했다 “요순(堯舜)시대의 임금과 백성처럼 만들려는 것이 군자의 뜻이라고는 하지만 어찌 때와 역량(力量)을 생각하지 않고서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이언적(李彦迪) 등과 함께 공을 동방사현(東方四賢)이라 불렀다. 공은 성리학적(性理學的) 이론가(理論家)라기보다는 경세적(經世的) 실천가(實踐家)이었다. 저서로 『정암집(靜菴集)』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註釋1) 왕도정치(王道政治)
맹자(孟子)의 정치 사상으로 무력이나 강압과 같은 물리적 강제력으로 다스리는 패도정치(覇道政治)와 대비되는 것으로서, 도덕적(道德的) 교화(敎化)를 통해서 순리(順理)대로 정치를 하는 것을 뜻한다. 특히 조광조(趙光祖)는 중종에게 왕도정치(王道政治)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註釋2) 덕기(德器)
어질고 너그러운 도량과 재능 또는 그것을 지닌 사람.
         
▲ 죽재(竹齋) 이천익(李天益 : 여주, 1491년∼1535년)
본관은 여주(驪州)이며 자는 영지(令之)이고 호는 죽재(竹齋)이다. 선략장군(宣略將軍) 행(行) 용양위(龍驤衛) 부장(部將) 성(成)과 내금위(內禁衛) 보공장군(保功將軍) 행(行) 충무위(忠武衛) 부사용(副司勇)을 지낸 기(璣)의 따님인 고령박씨(高靈朴氏) 사이에서 성종 22년(1491년) 태어났다. ‘고사(高士)’로 칭송을 받았던 죽계(竹溪) 이신문(李信文)의 현손(玄孫)이다. 천성이 고매(高邁)하여 일찍 덕기(德器)를 이루었으며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일찍부터 대현(大賢)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아 학문이 정밀(精密)하고 해박(該博)하여 선비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선생이 돌아가신 뒤에 곡(哭)하며 아래와 같은 만사(輓詞)를 지어 애도(哀悼)하였다.


“事業文章望(사업문장망)
학문과 문장으로 명망이 있어서
程朱後一覽(정주후일람)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이후로는 이 분 뿐이었네
承顔不幾日(승안불기일)
만나뵌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受敎間何年(수교간하년)
가르침 받은지 몇 년 되지 않았네
堯舜君民願(요순군민원)
요순시대(堯舜時代) 즉 태평시대(太平時代) 만들기를 원하였고
寒暄道通傳(한훤도통전)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선생의 도통(道通)을 전하였네
誰知己卯歲(수지기묘세)
누가 알았으리 기묘년에
虹貫大明天(홍관대명천)
무지개가 해를 꿰는 변(虹貫之變 : 홍관지변)이 대명천지에 있을 줄을 “

학문이 높고 효성이 지극해 통훈대부(通訓大夫)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증직(贈職) 받았다. 중종 30년(1535년) 향년 45세에 졸(卒)하였다.

 

(註釋1) 고사(高士)
인격이 고결한 선비

 

(註釋2) 대명천지(大明天地)
매우 밝은 세상(世上)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최종동 편집국장

 

구독 후원 하기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