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별(時代別) 고령(高靈) 유학(儒學)의 학맥(學脈) 주류(主流)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획/특집

시대별(時代別) 고령(高靈) 유학(儒學)의 학맥(學脈) 주류(主流)

본지는 조선시대 이후 고령출신 유학자(儒學者)를 각종 문헌의 근거에 따라 사승(師承) 관계를 고찰하여 학맥(學脈)을 분류하고 학문 및 업적 등을 기술(記述)하여 고령출신 유학자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하오니 애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을 바랍니다.

⑤ 19세기 유학자

 

▶ 송애(松厓) 최호문(崔虎文 : 양천, 1800년 ∼1850년)
일찍이 학양(鶴陽) 박경가(朴慶家)에게 수업(受業)하고 퇴계학맥(退溪學脈)을 꽃피운 ‘영남의 소퇴계(小退溪)’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제자인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 문하에 나아가 학문을 닦았다. 헌종 7년(1841년) 정시(庭試) 문과(文科)에 급제한 뒤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가 되었고, 다음해 저작(著作)·박사(博士) 등을 거쳐 1843년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예조좌랑(禮曹佐郞)·가례도감(嘉禮都監) 낭청(郎廳)을 지냈다. 그 뒤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으로 있을 때에는 과거(科擧)의 부조리(不條理)를 엄단할 것과 시험종목에 현실성이 없는 시(詩)·부(賦) 등을 없애고 경국지문(經國之文)을 위주로 할 것을 건의하였다. 또한, 문교진흥(文敎振興)에 힘쓰자는 「흥학소(興學疏)」와 당시의 정책적인 시폐(時弊)를 개혁하자는 「시폐소(時弊疏)」를 올렸다. 봉화현감(奉化縣監)과 안동진관병마절제도위(安東鎭管兵馬節制都尉)로 재직시에는 선정(善政)을 베풀어 많은 치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심성론(心性論)에 있어서는 심(心)이 이미 생긴 뒤에 성(性)이 마음에 갖추어지게 되므로 심(心)이 성(性)보다 앞선다는 심선성후설(心先性後說)을 주장하였다. 저서로는 송애집(松厓集) 4권 2책이 있다.
▶ 성암(誠庵) 신상선(申相 : 평산, 1835년∼1900년)
어릴 때 병이 많아 13세에 비로소 고헌(顧軒) 정내석(鄭來錫) 선생에게 나아가 학문을 배웠다. 과거 공부를 하여 한번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성시(省試)에 번번이 실패하자 집에 머물면서 마음에 느끼는 성리학에 관한 서적을 가까이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연구하였으며 10경시(十警詩)를 지어 자기 스스로 힘썼다. 문장이 뛰어나 문하에서 겸재(謙齋) 조진환(曺鎭煥), 청계(聽溪) 조병직(曺秉直) 등 많은 선비들을 배출하였으며 이재(齋) 권연하(權璉夏), 유재(由齋) 신재석(申在錫) 등과 도의(道義)로 교유하였다.
▶ 만구(晩求) 이종기(李鍾杞 : 전의, 1837년∼1902년)
 조선유현연원도(朝鮮儒賢淵源圖)에 공은 허전(許傳)의 문인(門人)으로 기록되어 있다. 유일(遺逸)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제수(除授)받았지만 헛된 이름으로 임금을 속일 수 없다고 하여 부임하지 않았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이기설(理氣說)을 수용하였지만 이(理)와 기(氣)에 치우친 이론의 획일화(劃一化)에 반발(反撥)하는 개방적(開放的)인 태도를 보였으며 이(理)와 기(氣)의 조화(調和)와 공존(共存)을 강조하는 균형(均衡)잡힌 태도를 견지하였다. 안동의 도산서원(陶山書院) 원장(院長)에 두차례나 천임(薦任)되는 등 도덕(道德)과 문장(文章)으로 통달하여 일세(一世)의 사표(師表)로서 추앙(推仰)을 받았다. 이종기(李種杞)의 사상적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성리사상(性理思想)의 특징은 가학적(家學的) 전통과 자신의 학문적 취향을 따라 정통적인 퇴계학파의 입장을 견지하고 지나치게 이발(理發)‧기발(氣發)만을 강조하는 성리적 입장에서는 회의적이었으며 이기공존(理氣共存)의 입장을 강조했고 그는 퇴계(退溪)의 ‘심합리기설(心合理氣說 : 마음은 리(理)와 기(氣)가 합한 것)’을 지지하고 한주(寒洲)의 ‘심즉리설(心卽理說 : 수양의 주체인 마음이 곧 바로 리(理)로 보는 것)’은 비판하였다. 둘째 예학사상의 특징은 예(禮)의 실행과 관련하여 무엇보다도 상황논리(狀況論理)를 강조했다. 즉 실질과 현실의 측면을 중시하고 형식논리에 얽매이지 않았다. 셋째 불교(佛敎)와 서학(西學)에 관한 견해에 관해서는 불교에 관해서는 비교적 온건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였으나 서학(西學)에 대해서는 강경한 척사의식(斥邪意識)을 보였다. 고령군(高靈郡) 다산면(茶山面) 상곡(上谷) 마을에 서락서당(書洛書堂)을 만들고 200여명의 제자를 양성하였으며 대표적인 인물은 수파(守坡) 안효제(安孝濟 : 의령), 금주(錦洲) 허채(許埰 : 김해)  성헌(省軒) 이병희(李炳熹 : 밀양),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 : 성주),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 : 창녕), 수봉(壽峯), 문박(文樸 : 대구) 등이 있다.  2015년 10월 9일 한국국학진흥원(韓國國學振興院)에 소장되었던 만구(晩求) 이종기(李鍾杞) 선생의 문집 책판 413장이 ‘유교책판(儒敎冊版)’과 함께 ‘제12차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홍와(弘窩) 이두훈(李斗勳 : 성산, 1856년∼1918년)
계당(溪堂) 류주목(柳疇睦)과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문하(門下)에서 수학하였다. 고종 23년(1886년) 스승인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이 별세하자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등과 고령 반룡사(盤龍寺)에서 강학(講學)하였다. 고종 33년(1896년) 동문(同門)인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 교우(膠宇) 윤주하(尹胄夏) 등과 함께 상경하여 연명(連名)하여 대궐문에 나아가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성토(聲討)하고 단발령(斷髮令)의 철회(撤回)를 요구하는 상소(上疏)를 올렸으나 수령이 거부되자 일본의 행동이 국제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함을 호소하며 국제적으로 협조를 구하는 ‘포고천하문(布告天下文)’의 초고(草稿)를 작성하였으며 최종본을 미국, 영국, 러시아 등 주한(駐韓) 각국 공사관(公使館)에 발송하였다. 고종 34년(1897년) 고령군 대가야읍 내상리에 내산서당(乃山書堂)을 짓고 은거하면서 제헌국회의원(制憲國會議員) 및 반민특위(反民特委) 위원장(委員長)을 지낸 영주(令州) 김상덕(金尙德), 성균관대학교(成均館大學校) 총장(總長)을 지낸 변희용(卞熙瑢), 임시정부의 법무총장(法務總長)을 비롯한 요직을 두루 거친 남형우(南亨祐) 등 제자를 배출하였다. 고종 39년(1902년) 스승 한주(寒洲)의 학설을 이단(異端)으로 규정한 통문(通文)이 전국 유림에게 발송되자 동문(同門)들이 시류(時流)에 편승(便乘)하여 스승의 문하를 떠나갈 때에도 흔들림없는 지조(志操)를 지키는 의리(義理)를 보였다. 1905년 제2차 한일협약 즉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배일(排日) 언론투쟁(言論鬪爭)을 하였다. 1907년 대구를 중심으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 일어나자 고령군 단연상채회(斷煙償債會) 회장(會長)으로 활동하였다. 2015년 3월 1일 독립유공자로서 공훈을 기려 건국포장(建國褒章)을 추서(追敍)받았다.
▶ 성와(省窩) 이인재(李寅梓 : 성산, 1870년∼1919년)
어려서는 재종질(再從姪)되는 홍와(弘窩) 이두훈(李斗勳)에게 배웠고 고종 26년(1889년) 홍와(弘窩) 이두훈(李斗勳)의 주선으로 곽종석(郭鍾錫)의 문인(門人)이 되었다.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의 영향으로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학문을 계승하여 한주(寒洲) 주리론(主理論)를 그의 학문적 주장의 근거로 삼았으며 특히 한주(寒洲)의 심즉리설(心卽理說)을 이론적으로 해명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이이(李珥)의 주기론(主氣論)을 반박하고 이황(李滉)의 주리론(主理論)을 옹호하였다. 변법자강론자(變法自强論者)인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과 교유하면서 신사조(新思潮)에 눈을 뜨게 되어 초기 서양철학 연구서 가운데 가장 체계를 갖춘 업적으로 평가받는 『고대희랍철학고변(古代希臘哲學攷辨)』을 내기도 하였다. 향리에 ‘하산정사(霞山精舍)’를 짓고 후진교육에 힘썼다. 1909년 고령에 지방 자치제를 위해 설립한 단체인 자치민의회(自治民議會)를 조직하여 회장을 맡아 민지(民智)의 개발, 자강(自强)의 추진 등을 통하여 보국(保國)할 것을 지향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영신학교(靈新學校)를 설립하는 등 1929년 사망하기까지 계몽운동(啓蒙運動)에 투신하였다. 유교를 근본으로 하면서 새로운 서양의 학문을 수용해야한다는 유교개혁(儒敎改革)을 주장했다.
▶ 봉강(鳳岡) 조상(曺塽 : 창녕, 1876년∼1945년)
 10세 때 부친의 명(命)에 따라 임재(臨齋) 서찬규(徐贊奎)의 문하(門下)에서 수제자(首弟子)가 되었으며 임재(臨齋) 서찬규(徐贊奎)사후에 간재(艮齋)의 문하생(門下生)이 되었다.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오상(五常)과 부모가 낳으시고 임금이 먹이시고 스승이 가르치시니 한 마음으로 섬겨야 한다는 ‘생삼사일(生三事一)’을 강조하였다. 사교론(四敎論)’에서 악(樂)은 화창한 소리이니 봄에 마땅하고 시(詩)는 발양(發揚)하는 것이니 여름에 마땅하고 예(禮)는 닦아서 이루는 방법이니 가을에 마땅하고 서(書)는 거두어 간직하는 것이니 겨울에 마땅하다는 공부방법을 논하였다. ‘기질변화(氣質變化)’를 통해 소인은 군자로 군자는 성인으로 다가가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변화기질(變化氣質)의 수양론(修養論)을 주장하였다. 또한 ‘경천애인설(敬天愛人說)’을 지어 하늘을 높이고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유학의 이념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서경설(鋤說)’에서 벼를 재배하듯이 천리(天理 : 하늘의 바른 도리)를 보존하고 잡초를 제거하듯이 인욕(人慾)을 막아야 한다고 하였다. ‘혈기잠(血氣箴)’에서 모든 재앙(災殃)의 출발은 혈기(血氣 : 힘을 쓰고 활동하게 하는 원기)를 조절하지 못함에서 기인(基因)하였다고 보고 혈기를 조절하여 중화(中和)의 상태에 이르는 것을 학문과 수양의 목표로 삼았다. 당대의 명유(名儒)이었던 긍재(兢齋) 이병운(李柄運), 덕천(德泉) 성기운(成璣運), 석농(石農) 오진영(吳震泳), 고암(苦庵) 이종익(李鍾翼), 덕암(德庵) 박순호(朴純鎬) 등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인(門人)과 교유하였다.
▶ 고재(古齋) 최곤술(崔坤述 : 경주, 1870년∼1953년)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의 문인이다. 약관(弱冠)의 나이로 경상관찰부(慶尙觀察府)가 실시한 영재선발시험(英才選拔試驗)에 수석(首席)으로 합격하여 영남(嶺南) 13영재(英才)로 선발된 후 낙육재(樂育齋)에서 3년간 수학(修學)하였으며 고령향교내에 만하(晩霞) 이봉조(李鳳朝)가 설립한 사립(私立) 명륜학원(明倫學院) 교장(校長)과 전교(典校)를 역임하였다. 35세인 1904년 대한제국 때에 둔 비서원(秘書院)의 정3품 관직인 비서승(祕書丞)에 임명되었으나 내부대신(內部大臣) 이재극(李載克)에게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겠다는 뜻을 전달하여 불취(不就)하였으며 경술국치(庚戌國恥) 후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초야에 묻혀 자연과 더불어 일생을 보냈다. 1925년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의 글을 모아 현존 최고(最古) 문집인 『고운집(孤雲集)』 상•하권 양권을 발간하였으며 이듬해 중간(重刊)하였다. 1963년 200명 내외 인사가 공을 추모하는 후학들의 모임인 ‘고재계(古齋稧)’를 만들어 정기모임을 하고 있다.
▶ 송강(松岡) 김성하(金聲夏 : 경주, 1863년∼1909년)
창번(蒼樊) 이이건(李以鍵)과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의 문인이다. 사자심근(四子心近)의 모든 서적을 마음을 가라앉히고 깊은 생각에 잠겨서 묵묵히 속속들이 깊이 연구하여 침식(寢食)까지 잊기에 이르렀다. 부모상(父母喪)에 있는 힘을 다하여 예를 다하였다. 상복의 기간이 끝나자 난곡(蘭谷)에 서당을 짓고 날마다 정좌(靜坐)하여 서책(書冊)을 대하니 학도(學徒)가 운집(雲集)하여 많이 성취(成就)시켰다. 공은 침착하고 의지가 강하였으며 깊이 삼가고 성실한 자질로서 각고(刻苦)의 사색(思索)을 하여 탁연(卓然)히 뜻을 세워서 서책(書冊)에서 구하고 사우(士友)에게 묻고 무릇 천인성명이기지설(天人性命理氣之說)과 삼천삼백(三千三百)의 예문(禮文)과 경사시소(經史詩騷)에 조금이라도 이해되지 않으면 앞서 배운 것이 많고 학식이 넓은 사람과 오랜 벗으로 들은 것이 많아 잘 아는 사람에게 물어서 풀고 기어코 그 본원(本原)을 궁구(窮究)하고 그 요령을 얻고 그 지당한 것을 얻은 연후에야 그쳤다. 공은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선생으로부터 호학자(好學者)란 추익(推翊 : 칭찬)의 말을 들은 고제(高弟)로서 실학중심(實學中心)의 독학자(篤學者)였다. 송강(松岡) 선생 사후에 문인(門人)들과 추모인사(追慕人士)가 추모계(追慕契)인 ‘경산계(敬山契)’를 창설(創設)하여 묘갈수비(墓碣豎碑), 송강문집(松岡文集) 간행, 경산정(敬山亭) 건립 등을 하였으며 2003년 문집국역(文集國譯)과 유적비(遺蹟碑)를 건립하였다.
▶ 죽와(竹窩) 나찬기(羅燦基 : 수성, 1872년∼1953년)
열성(熱誠)으로 학문(學問)을 닦고 사물의 이치를 깊이 연구하여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 선생의 문인이 되었으며 경서(經書)를 강론(講論)하고 의리(義理)의 가르침을 듣고 성취한 것이 많았다. 또 임재(臨齋) 서찬규(徐贊奎), 미강(渼江) 박승동(朴昇東), 시암(是菴) 이직현(李直鉉) 등 제현(諸賢)과 학문연구에 힘쓰고 다곡(茶谷) 이기로(李基魯)과 함께 학문(學問)을 갈고 닦았으며 서로 보태고 늘여 도움이 되게 하였다. 고향의 문회(文會)에 참여하니 사람들이 인망(人望)을 추앙(推仰)하였다. 저서로는 죽와집(竹窩集)이 전한다.
▶ 석년(石年) 이정우(李正宇 : 여주, 1881년∼ 1924년)
만하공(晩霞公) 이봉조(李鳳朝)가 당대의 거유(巨儒)인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양명학파(陽明學派)의 거장(巨匠)인 난곡(蘭谷) 이건방(李建芳)을 비롯하여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던 시례지가(詩禮之家)의 유풍(遺風)을 이어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의 문인(門人)이 되었다. 시예(詩禮)에 능달(能達)하고 경학문장(經學文章)에 전도(傳道)한 절행지사(節行之士)로 그 이름이 세상에 드러났으며 경릉참봉(敬陵參奉)을 제수(除授)받았던 성산인(星山人) 진화(珍和) 이경(李俓)과 종유(從遊)하였다. 성리학에 전념하여 경전(經傳) 천인성명(天人性命)의 은미한 이치를 꿰뚫고 실천하였다. 특히 시(詩)와 문장(文章)에 능통하여 ‘시서(詩書)’를 저술하였다.
▶ 몽와(夢窩) 곽수빈(郭守斌 : 현풍, 1882년∼1951년)
임재(臨齊) 서찬규(徐贊奎)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 3월 38세 때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지역인사 중 최연소, 최초로 서명하여 지역 유림 6명의 서명(署名)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38년부터 1940년까지 고령향교의 직원(直員 : 현재 전교)을 맡아 향풍교화(鄕風敎化)와 민족의식(民族意識)을 고취(鼓吹)하는데  마음과 힘을 다하였다. 1942년 서간도(西間島)로 망명(亡命)하여 2년 동안 항일운동(抗日運動)을 하였다. 해방 후 정남택(鄭南澤), 곽태진(郭泰珍) 등 지역 정객(政客)들의 자문(諮問)에 응하고 탁견(卓見)을 제시하였으며 ‘강세계(講世契)’를 만들어 혼란기(混亂期)의 도덕(道德)을 바로 잡고자 노력하였다. 정부는 고인(故人)의 공훈(功勳)을 기리어 1996년 8월 15일 ‘건국포장(建國褒章)’을 추서(追敍)하였다. 2005년 9월 24일 ‘애국지사(愛國志士) 몽와(夢窩) 곽선생(郭先生) 추모비(追慕碑)’를 고령군 쌍림면 월막리 동네 입구에 세웠다. 
송애재, 쌍림면 학동길 56-5.JPG
송애재(쌍림면 학동길 56-5)
 
 
⑥ 20세기 유학자
▶ 진와(進窩) 이헌주(李憲柱 : 성산, 1911년∼2001년)
15세에 척숙(戚叔) 포서(浦西) 배주환(裵疇煥)에게 수학하고 19세 이후로는 희당(希堂) 김수(金銖) 선생에게 수학하여 고문(古文)과 서법(書法)의 정수(精髓)를 얻었다. 1943년 희당(希堂) 김수(金銖) 선생께서 별세한 후에 중재(重齋) 김황(金榥) 선생에게 경학(經學)의 진전(眞詮 : 참뜻)을 들었다. 공은 또 당대의 석학(碩學)인 회봉(晦峯) 하겸진(河謙鎭),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 수산(壽山) 이태식(李泰植), 제서(濟西) 이정기(李貞基) 등 여러 선학(先學)들에게 직접 나아가 배움을 청하고 혹은 편지로 질정(質正)하여 학업의 진전(進展)을 구하였으니 호학자(好學者)라고 말할 수 있으며 마침내 문원(文苑)의 거벽(巨擘)이 되었다. 영남 일대에 1,200여수(餘首)의 서문(序文) 및 갈문찬(碣文撰)이 산재(散在)되어 있으며 서예(書藝)의 필치(筆致)도 주경(遒勁)하여 공이 쓴 비문(碑文)과 편액(扁額)이 전역에 두루 퍼져 있으며 대문자(大文字)의 대가(大家)이었다. 모년(暮年)에 문인(門人)들이 수계(修契)하고 미강정사(薇岡精舍)를 옛 터에 짓고 문집 12권 6책을 간행하였다.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최종동 편집국장

 

구독 후원 하기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