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 마지막 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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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 마지막 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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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년수<수필가/일선김씨 문충공파 종친회장>

 

 

 

‘살아 있는 6·25전쟁 영웅’ 백선엽 예비역 육군대장이 10일 오후 11시경 별세했다. 향년 100세. 고인은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백척간두에 선 대한민국을 온 몸을 바쳐 지켜낸 ‘살아 있는 전설’이었다. 6·25 전쟁 발발부터 정전협정 체결 때까지 1128일간 하루도 빠짐없이 전선에서 격전을 치렀다. 숱한 생사의 고비를 불굴의 의지로 극복하며 국가와 민족에 헌신한 영웅으로 평가받는다.
살아생전 그는 항상 자신을 ‘노병’으로 불러 달라며 스스로를 낮추며 “시대가 부여한 역할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교사가 되기 위해 평양사범학교에 진학한 그는 군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갔다. 만주국 장교로 복무하던 중 해방이 되자 그는 미군정이 조직한 국방경비대의 중위로 임관해 한국군 창설에 기여했다. 이후 1사단장 재임 중 6·25전쟁이 발발하자 군단장과 육군참모총장 등을 맡아 최전선에서 군을 지휘하며 여러 차례 기념비적인 전과를 올렸다.
6·25전쟁의 최대 격전인 다부동 전투에서 그가 일궈낸 값진 승리는 전설로 회자 된다. 1950년 8월 북한군의 파죽지세와 같은 공세에 밀려 아군은 낙동강 전선까지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 대한민국의 명운이 경각에 달린 위기상황에서 1사단장이던 그는 불굴의 리더십을 발휘했다. 그는 공포에 질려 퇴각하는 부하들을 향해 “내가 물러서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 너희들이 물러서면 내가 너희들을 쏘겠다.”고 독려하며 선두로 달려 나갔다. 그와 부하들의 결사항전으로 부대는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냈고 그 기세를 몰아 인천상륙작전 이후 평양까지 진격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다부동전투가 벌어진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에는 그의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이 전투는 미국의 주요 군사학교가 그의 회고록을 수업 교재로 활용할 정도로 인정받고 있다.
백 장군은 한국보다 미국에서 더 추앙받는 전쟁영웅이다. 주한미군은 그를 ‘살아 있는 전설 ’로 대우한다. 2013년 8월엔 미8군은 그를 ‘미8군 명예사령관’에 임명하기도 했다. 미 8군은 “6·25전쟁 당시 한반도를 방어하는 데 탁월한 업적을 달성했고 한국의 미래를 결정해 온 역사적 순간의 증인”이라고 존경의 뜻을 전했다.
백 장군은 휴전 이후 한국군의 재건과 숙군작업, 국방력 강화에 주력했다. 한국군 최초로 4성 장군으로 진급했고, 초대 1야전군 사령관으로서 아시아 최초로 야전군을 창설했다.
1960년 예편 이후엔 외교와 경제발전에 기여했다 10년간 중화민국(대만) 프랑스, 유럽 5개국과 아프리카 7개국, 캐나다 주재 대사를 지냈다. 교통부 장관으로 서울 지하철 1호선 건설을 시작했다. 충주비료 호남비료 한국종합화학 사장을 역임하며 중화학공업의 토대를 닦기도 했다. 선인재단 운영을 비롯한 각종 교육 활동에도 나섰다.
백 장군은 1940년대 일본군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했다는 이력 때문에 친일파 논란에 시달리기도 했다. 2013년 10월 민주당 모 의원으로부터 “민족 반역자”라는 공격까지 받기도 했다. 이에 보수단체와 장성 출신 의원들이 나서 “일제 치하에 나라가 없어진 상황에서 군 복무지를 선택할 수 없었던 그를 친일로 매도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반발했다.
존경받는 노장(老將)으로 늙어가던 그를 뒤늦게 ‘친일파’라고 낙인찍고 나온 것은 2005년 노무현 정부 때 만들어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다. 일제강점기 만주 간도특설대에 근무하면서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1930년대 일본군의 대대적 토벌작전으로 백 장군이 부임한 1943년 무렵에는 간도에 있던 독립군은 대부분 다른 지역으로 옮겨간 뒤였다.
당시 간도특설대가 상대한 것은 주로 중국공산당 팔로군이었다고 한다. 백 장군은 일제 치하에서 태어났다. 그 세대 사람들에겐 대한민국이란 나라 자체를 상상할 수도 없었다. 지금의 시각으로 그 시절을 재단하며 백 장군을 '독립군 토벌 친일파'라고 한다. 백 장군은 "당시 중공 팔로군과 싸웠고 독립군은 구경도 못 했다."고 하는데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좌파 단체에선 "백씨가 갈 곳은 현충원 아닌 야스쿠니 신사"라는 말까지 나왔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 바친 영령들의 안식처인 현충원에 백 장군이 못 들어간다면 누가 들어가나. 김원봉 같은 인물을 이장할 것인가?.
정부는 백 장군을 12만 6·25 전우가 잠들어있는 서울현충원에 모시자는 각계의 요구도 외면했다. "자리가 없다"는 기가 막힌 이유로 대전현충원에 안장하겠다고 한다. 그마저도 여당 일각에서 '친일파 파묘법'을 추진하고 있다니 나중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대한민국의 오늘을 있게 한 호국 영웅의 마지막 길이 이런 논쟁으로 얼룩지고 있다니 부끄러울 뿐이다. 모든 국민을 대표하는 공직자이자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백 장군 빈소에 조문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의무이나 마지막까지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조화만 시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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