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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별(時代別) 고령(高靈) 유학(儒學)의 학맥(學脈) 주류(主流)

기사입력 2020.07.03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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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② 16세기 유학자

    ▶ 학암(鶴巖) 박정번(朴廷璠 : 고령, 1550년∼1611년)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내암(萊菴) 정인홍(鄭仁弘)의 양문(兩門)에서 수학하였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義兵將) 김면(金沔) 휘하에서 참모장서기(參謀掌書記)로 모획(謨劃) 활동을 하였으며 학암정(鶴巖亭)을 건립하고 문연서당(文淵書堂)을 개설하여 후학을 양성하였다. 대암(大庵) 박성(朴惺), 존재(存齋) 곽준(郭䞭),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등과 도의(道義)로 사귀었다. 공과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는 종매제간(從妹弟間)이므로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경상좌도(慶尙左道) 방어사(防禦使)인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화왕산(火旺山)에 입성하여 왜군의 진출을 막았다. 선조 32년(1599년) 일천(逸薦)으로 예빈시(禮賓寺) 주부(主簿)를 제수 받았으나 불취(不就)하고 학암정(鶴巖亭)을 복구하였다. 1603년 부래정(浮來亭)을 영건(營建)하고 매월 초하루 후학(後學)을 가르쳤다.

    (주석) 일천(逸薦)
    학행(學行) 등이 출중(出衆)하면 지방장관의 천거, 이른바 ‘유일천(遺逸薦)’을 통해 벼슬길에 나갈 수 있었던 제도를 말한다.

    ▶ 동호(東湖) 이서(李 : 광산, 1566년∼1651년)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선조 30년(1605년)에 진사(進士)에 오르고, 선조 41년(1608년)에 유일(遺逸)로 천거(薦擧)되었으나 불사(不仕)하였다. 고모부(姑母夫)인 한강선생(寒岡先生)이 운명(殞命)하매 심상(心喪) 3년을 복(服)하고 창의(創議 : 의논을 시작함)하여 회연서원(檜淵書院)과 선생의 신도비(神道碑)를 건립(建立)하였으며『한강언행록(寒岡言行錄)』과 『한강유사(寒岡遺事)』를 저술하니 동문(同門)의 여러 현자(賢者)들이 공자(孔子) 문하의 유약(有若)에 견주었다. 또한 선생의 문집(文集) 간행(刊行)에 전심(專心)하였다. 동문(同門)의 여러 현자(賢者)들이 공자(孔子) 문하(門下)의 유약(有若)에 견주었으며 문인(門人)들이 사시(私諡)하여 가로대, ‘덕요선생(德耀先生)’으로 칭하였다.

    (주석1) 심상(心喪)
    상복은 입지 아니하나 상제(喪制)와 같은 마음으로 말과 행동을 삼가고 조심하는 것으로 스승에게 하는 것이 원칙이며 마음속으로 3년의 복을 입는 것이다.
    (주석2) 공자(孔子) 문하의 유약(有若)
    공자의 제자로 언행(言行)이 공자를 가장 많이 닮았다고 한다. 공자 사후(死後)에 제자들이 스승으로 추대한 적이 있다.
    (주석3) 사시(私諡)
    문장(文章)과 도덕(道德)이 뛰어난 선비이긴 하나 지위(地位)가 없어서 나라에서 시호(諡號)를 내리지 않을 때, 일가(一家)나 친척(親戚), 고향(故鄕) 사람 또는 제자(弟子)들이 울리던 시호(諡號)를 말한다. 

    ▶ 죽포(竹圃) 이현룡(李見龍 : 성산 1580년∼1654년)

    일찍부터 용담(龍潭) 박세호(朴世豪)과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다. 인조 5년(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창의(倡義)하여 의려(義旅 : 의병)를 이끌고 충주(忠州)에 이르렀으나 강화(講和)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척화(斥和)하는 소장(疏章)을 지어 상경(上京)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인조 13년(1635년) 증광(增廣)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하였다.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또 격문(檄文)을 도내에 띄우고 창의(倡義)하여 험요(險要 : 지세가 험하여 방어하는 데에 중요함)를 지키고 장령(將領 : 장수)을 차출하여 간략한 시설이 있었더니 도리어 ‘성하(城下)의 맹세(盟誓)’가 있었으므로 통곡하고 돌아왔다. 그후 사정별제(司正別提) 주부(主簿)로 역임하였는데 인조 15년(1637년) 상국(相國) 이경석(李景奭)이 학행(學行)으로 천거하여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사부(師傅)가 되었고 인조 17년(1639년)에는 군위현감(軍威縣監)으로 출재(出宰)하여 대흥(大興)·유화(儒化) 등지의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는데 고을마다 공이 학문을 흥하게 하여 선정비(善政碑)가 있었다.

    (주석) 성하(城下)의 맹세(盟誓)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게 항쟁을 하였던 인조가 항복하고 1637년 1월 30일 남한산성을 나와서 성 밑인 한강의 동쪽에 위치한 삼전도(三田渡)에서 인조(仁祖)가 청나라 태종(太宗)에게 세 번 절하고 한 번 절할 때마다 머리를 땅바닥에 세 번 부딪치는 행위를 세 번 반복하는 방식인 ‘삼배구고두례(三拜九敲頭禮)’의 의식을 행하여 신하(臣下)의 맹세를 하였던 굴욕적인 맹세를 뜻한다.

    ▶ 국포(菊圃) 이문룡(李文龍 : 성산, 1584년∼1655년)

    일찍이 용담(龍潭) 박세호(朴世豪)의 학문을 따르다가 한강(寒岡) 정구(鄭逑) 문하에서 수학(修學)하였다. 정묘호란(丁卯胡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백씨 이현룡(李見龍)과 창의(倡義)하였으나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서 항복(降伏)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미산(薇山) 아래에 조그마한 정자(亭子)를 짓고 세상을 피해 살며 강도(講道)에만 힘쓰니 세칭 ‘미산처사(薇山處士)’라 하였다. 당대의 명류(名流)인 완정(浣亭) 이언영(李彦英), 백천(白川) 이천봉(李天封), 동호(東湖) 이서(李), 등암(藤菴) 배상룡(裵尙龍) 등과 교유(交遊)하였다.

    ▶ 매포(梅圃) 이택룡(李澤龍 : 성산, 1588년∼1620년)

    한강(寒岡) 정구(鄭逑) 문하에서 수학(修學)하였다. 천자(天姿)가 영민(英敏)하고 비범(非凡)하며 총명하고 남보다 훨씬 뛰어났다. 광해군 10년(1618년) 증광(增廣)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하였다. 문장(文章)과 풍모(風貌)가 일시에 빛났고 강론하며 글 뜻 가운데 의심(疑心)이 나는 곳을 묻는 것을 보고 선생의 문하에 있는 청휘당(晴暉堂) 이승(李承)이 일찍이 이 사람은 후일 반드시 대유(大儒) 즉 학식(學識)이 높은 선비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③ 17세기 유학자


    ▶ 매헌(梅軒) 이유석(李惟碩 : 성산, 1604년∼ 1657년)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며 인조 8년(1630년) 진사에 합격하였고, 인조 17년(1639년) 문과 식년시에 병과로 급제한 후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와 전적(典籍)을 거쳐 예조좌랑(禮曹佐郞)을 역임하였다. 그 후 통훈대부(通訓大夫) 행(行)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등을 지냈다. 이어 전라도사(全羅都事)와 충청도사(忠淸都事)로 나가 군비증강(軍備增强)에 힘썼으며,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을 지냈다. 효종 2년(1651년) 함평현감(咸平縣監)을 거쳐 안주판관(安州判官)·영암군수(靈岩郡守) 등을 역임하면서 많은 치적을 쌓았으며 청렴 강직한 성품으로 선정을 베풀고, 문교(文敎 : 문화와 교육)를 크게 진흥시켜 영암에 흥학비(興學碑)가 세워졌다. 청천(聽天) 장응일(張應一), 현와(弦窩) 이도(李), 태허정(太虛亭) 곽홍지(郭弘址), 운계(雲溪) 정홍석(鄭弘錫)과 도의(道義)로 절차탁마(切磋琢磨)하였다.

    ▶ 운계(雲溪) 정홍석(鄭弘錫 : 동래, 1607년∼1671년)

    치재(癡齋) 허명신(許命申)에게 수업(受業)하였다. 인조 20년(1642년) 식년(式年)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하였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문학(文學)과 행의(行誼)로 영남의 명유(名儒)가 되었다. 인조 14년(1636년) 발생한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장인 이천봉(李天封)과 함께 창의(倡義)하였으며 운계정(雲溪亭)을 구축하여 후학 양성에 노력하였다. 제자들이 숙종 30년(1704년) 선생의 학문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고령군 덕곡면 반성1리 만하동에 형산사(刑山祠)를 세워 영상(影像)과 위패를 모시고 제향(祭享)을 모셨다.

    ▶ 매헌(梅軒) 곽수강(郭壽岡 : 현풍, 1619년∼1660년)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을 사숙(私淑)하였다. 15세 때 성리(性理)와 천리(天理) 및 오행(五行) 등의 이치를 깨닫고 그에 대한 「천인감응(天人感應)」이란 설(說)을 지었다. 효종 5년(1654년) 식년(式年)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한 후 백패(白牌)를 가묘(家廟)와 묘전(墓前)에 올리고 통곡하였다. 사위 월촌(月村) 이익량(李翊亮)과 성리학(性理學)을 강론하고 토론하면서 교유하였으며 간송(澗松) 조임도(趙任道), 계헌(戒軒) 배일장(裵一長) 등 당대의 명사(名士)와 사귀면서 자신을 낮추어 같은 무리로 대하며 존경하는 예를 표하고 반평생을 경의(敬義)의 진리를 실천하였다. 효종 9년(1658)년에 성균관에 들어가 경의(經義)의 연구에 몰두(沒頭)하니 동료들이 모두 스승으로 대접하였다. 하루는 대사성(大司成)이 여러 유생(儒生)들을 모으고 성균관에 와서『대학(大學)』을 강론(講論)하게 되자, 그 질문에 잘 응답하여 참된 선비의 유도(儒道)를 참되게 체득한 유학자인 ‘진유(眞儒)’라고 하였으며 여러 유생(儒生)들의 참다운 스승을 얻었다고 하였다. 양천인(陽川人) 월계(月溪) 최형망(崔衡望)을 제자로 두었다. 숙종 33년(1707년) 지방유림의 공의(公議)로 곽수강(郭壽岡)과 오선기(吳善基)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매림서원(梅林書院)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시고 매년 3월 중정(中丁)에 두 배향인(配享人)의 향사(享祀)를 지낸다.

    ▶ 한계(寒溪) 오선기(吳善基 : 고창, 1630년∼1703년)

    단계(丹溪) 장용우(張龍遇)와 임곡(林谷) 임진부(林眞) 선생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다. 젊었을 때 과거 공부를 매우 열심히 하였으며 필법(筆法) 역시 훌륭하였다. 여러 차례 향시(鄕試)에 합격하였으나 어버이를 여읜 후에는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오로지 학문에만 힘썼다. 고령군 쌍림면 귀원리 재동 서재골에 ‘한계정사(寒溪精舍)’를 축조(築造)하고 은거독서(隱居讀書)하면서 규달(閨闥 : 안채의 방)에서 행의(行義)를 닦았다. 후진양성에 매진(邁進)하여 공부를 배우러 오는 선비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으며 모두 나아가 예를 올리며 ‘오공자(吳孔子)’로 지칭하였다. 공의 명성(名聲)을 듣고 고령현감 남궁 억(南宮 億)과 구문유(具文遊)가 찾아와 경의(敬意)를 표하였다. 당대의 석학(碩學)들이었던 한사(寒沙) 강대수(姜大遂), 금강(錦江) 장신(張), 농암(聾巖) 이광언(李光彦) 등과 종유(從遊)하였다. 공의 덕행과 학문을 기리기 위해 고령의 매림서원(梅林書院)과 영주의 남계사(南溪祠) 등에 입향(立享)되었다.

    ▶ 청천(青泉) 신유한(申維翰 : 평산, 1681년∼1752년)

    가정이 빈곤하여 김해김씨(金海金氏) 어머니에게 배웠다. 25세인 숙종 31년(1705년) 을유(乙酉) 증광시(增廣試)에서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한 후 성균관에 들어가 그 문장이 널리 알려졌으며 33세인 숙종 39년(1713년) 계사(癸巳) 증광시(增廣試)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39세인 숙종 45년(1719년) 4월 제술관(製述官)으로 통신사(通信使) 홍치중(洪致中)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으며 『해사동유록(海槎東遊錄)』과 『해유견문록(海遊見聞錄)』 등의 사행록(使行錄)을 저술하였는 바 『해사동유록海槎東遊錄)』 즉 『해유록(海遊錄)』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와 함께 ‘조선 기행문학(紀行文學)의 쌍벽(雙璧)’이라 불린다. 문인(門人)은 이조참판을 지낸 정원시(鄭元始), 정난(鄭瀾), 진사(進士) 수백당(守白堂) 이회근(李晦根), 지촌(芝村) 박이곤(朴履坤) 등 45명으로 파악된다. 70세인 영조 26년(靑泉集)(1750년)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을 경모하여 가야산 기슭 고화동에(高花洞)에 ‘경운재(景雲齋)’를 지어 호를 ‘가야초수(伽倻樵叟)’라 하고 은거(隱居)에 들어가『경학약설(經學略說)』과『역리조해(易理粗解)』를 저술하고『시서정종후제(詩書正宗後題)』와 『문장곤월(文章衮鉞)』을 찬술하였다.

    ④ 18세기 유학자

    ▶ 수백당(守白堂) 이회근(李晦根 : 경주, 1728년∼1809년)

    일찍이 청천(靑泉) 신유한(申維翰)과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선생 문하에서 수업하여 문장을 일찌감치 깨쳤다. 6대손 춘희(春熙)가 쓴 가장(家狀)에 의하면 10세 이전에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독파(讀破)하였는데 특히 주역(駐驛)에 통달했다고 한다. 27세 때인 영조(英祖) 30년(1754) 갑술(甲戌) 증광(增廣)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하였다. 영조 48년(1772년)에 한방윤(韓邦胤)이 고령김씨 문중의 서책이 보관되어 있는 상자에서 김면(金沔)의 시문과 일기를 발견, 이를 최재억(崔載億)과 공이『제선생유집급문견신록(諸先生遺集及聞見新錄)』에 수록하여 후손들이 정조 9년(1785년) 이를 보충하여 송암실기(松庵實紀)를 편집, 간행하였다. 고령 유생(儒生) 대표로 고령향교(高靈鄕校) 이전(移轉) 정문(呈文)을 지었다. 향리(鄕里) 직동(直洞)의 직양재(直養齋)와 고령읍치(高靈邑治)내 미산서당(眉山書堂)에서 많은 후학(後學)을 가르쳤다. 저서로 수백당유고(守白堂遺稿) 2권이 전하는데 609제(題) 640수의 시문(詩文)이 실려 있다.

    ▶ 지촌(芝村) 박이곤(朴履坤 : 고령, 1730년∼1783년)

    어려서는 청천(靑泉) 신유한(申維翰)으로부터 학문의 기초를 닦았으며, 장성하여서는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수차례 과거에 낙방한 후 관직에 나아갈 뜻을 접고 성리학(性理學) 연구에 전념하며 저서에 힘썼다. 향우(鄕友) 정관재(靜觀齋) 곽기(郭基), 두와(蠹窩) 최흥벽(崔興璧) 등 유망(儒望 : 선비로서 명성이 있는 사람)과 교유하였으며 금연(錦淵) 신체인(申體仁), 묵헌(默軒) 이만운(李萬運) 등 제현(諸賢)과 서로 도와 학문을 닦고 힘썼다. 저서로 정서유요(程書類要), 주서유요(朱書類要), 근사석의(近思釋義) 등이 있으며, 문집으로 1933년에 간행된 지촌집(芝村集)이 있다.

    ▶ 정관재(靜觀齋) 곽기(郭基 : 현풍, 1735년∼1775년)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과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 양선생의 문인(門人)이다. 일찍이 명회재(明悔齋) 김경중(金敬中), 두와(蠹窩) 최흥벽(崔興璧)과 교유(交遊)하였다. 도산시집(陶山詩集)에 주해(註解)가 없는 것을 흠결(欠缺)로 여겨 일찍이 뜻을 두고 궁구(窮究)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였다. 죽재공(竹齋公) 곽간(郭趕), 태허정(太墟亭) 곽홍지(郭弘址)와 함께 처음 고령군 쌍림면 월막리 월암동에 있었던 월암사(月巖祠)에 제향(祭享)되었으나 1869년 월암사(月巖祠)가 훼철(毁撤)되자 1932년에 다시 세워 종산재(鍾山齋)로 개칭하여 이곳에서 제향(祭享)하고 있다.

    ▶ 두와(蠹窩) 최흥벽(崔興璧 : 경주, 1739년∼1812년)

    족형(族兄)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과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에게 수학하였다. 1784년 가을 대과(大科) 정시(庭試)에 응했으나 실패하자 모친의 만류로 과거 보기를 포기하였다. 주자(朱子)의 사창법(社倉法)을 의방(依倣)하여 향약(鄕約)을 개설하여 실시했다. 대산(大山) 문하의 가장 탁월한 고족제자(高足弟子)로서 ‘호문삼로(湖門三老)’라 불렸던 후산(后山) 이종수(李宗洙), 천사(川沙) 김종덕(金宗德),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 천옹(喘翁) 최흥립(崔興岦) 등과 교유하였다. 만년(晩年)에 고령에 우거(寓居)하면서 십수년간 문학을 창도(唱導)하였는데 문하에서 대소과 급제자가 7, 8명이나 되었다.

    ▶ 학양(鶴陽) 박경가(朴慶家 : 고령, 1779년∼1841년)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 문하에서 심경(心經)을 배웠으며 학문을 닦아 문장이 뛰어나고 시를 잘 지었으며 순조 10년(1810년) 식년(式年)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한 후 학음서당(鶴陰書堂)을 열어 지북헌(芝北軒) 전광흡(全光潝), 죽은(竹隱) 곽훈(郭壎), 월은(月隱) 곽보(郭堡) 등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이 지은 상사박공경가묘갈명(上舍朴公慶家墓碣銘)에서 ‘한 지방의 사숙(師宿 : 학식이 높은 선비)이자 남방의 성두(星斗 : 별)〔一方師宿 星斗南國〕’라고 평하였으며 문집인 『학양집(學陽集)외에 저서는『사칠정음운고(四七正音韻考)』,『동언고(東言考)』,『동성고(東姓考)』 등이 있다.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최종동 편집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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