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춘 극세목공예가 ‘취미로 시작한 함선 재현, 평생의 업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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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춘 극세목공예가 ‘취미로 시작한 함선 재현, 평생의 업이 되다’

<사진설명 : 운수면 화암2리 작업장에서 제작중인 판옥선을 설명하는 정재춘 작가>

 

철 운반선 ‘고령호’ 재현하도록
‘대가야조선소’ 자리에 작업장 마련해 줘야
작업장 비우라 통보 밤잠 설쳐
함선 재현 ‘명장(明匠)’ 선정 시급

 

 

“임진왜란 때 세계 해전사에서 엄청난 전과를 올린 함선, 우리의 함선을 제대로 알려야 되겠다는 사명감이 저를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지요” 정재춘(60) 함선 극세목공예가의 인터뷰 일성이다.


그와 인터뷰를 위해 운수면 화암2리 그의 작업장을 방문했을 때 쌀쌀한 날씨였지만 정 작가는 기자의 인기척을 모를 정도로 판옥선 부품 재작에 몰두해 있었다. 작업장이래야 허름한 시골집 협소한 마당이어서 널찍한 실내 작업장을 연상했다가 기자는 솔직히 다소 실망스럽기도 했다.


공정 90% 이상 재현작업이 진행됐다는 판옥선의 늠름한 위용이 비록 축소된 모형이지만 부품 하나하나에 심혈을 기울인 섬세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돛대며 현자총통, 광목천으로 염색해 제작한 삼도수군 깃발, 황룡기, 보호막 은패에 쓰이는 방패, 집기 등 실물을 연상하는데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특히 판옥선 내부를 들여다보고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기관실을 비롯한 내부가 고증을 거쳐 실제 판옥선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정 작가는 자신 있게 강조한다.


오래전부터 정 작가를 잘 알고 있었다며 배석한 박지택 대가야고등학교 교장은 “정 작가는 예술가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신기의 경지라고 할 만큼 고도의 집중력으로 함선 재현에 혼을 불어넣는 작가”라고 극찬했다.

▣ 해군 복무시절 함선에 매료, ‘과학예술의 총체’ 전율 느껴


정 작가가 함선에 매료된 계기는 해군 복무 때였다고 회상한다. 당시 함선을 처음 접하면서 이만한 예술품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고 털어놨다. 그에게 함선은 당대 과학과 예술의 총체로 다가와 단번에 반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조각을 전문으로 배운 적도 없고, 어린 시절부터 오로지 독학으로 조각을 즐겨했던 ‘끼’가 발동해 제대 후 본격적으로 함선 재현을 하기 시작했다.


“그저 함선에 취해 취미로 시작한 일이 이제는 평생의 업(業)이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며 멋쩍게 웃음 짓는다. 가정도 뒷전이고 오로지 함선 제작에만 몰입하다보니 가족으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어서 힘든 줄도 몰랐고 후회는 없다고 한다.


정 작가는, 돈과는 거리가 멀다. 오로지 함선 재현 경비 마련을 위해 가장 잘하는 목수 일을 틈틈이 해서 번 돈으로 판옥선 재현 작업에 투입할 수 있는 게 돈벌이의 전부다.


지금까지 실물과 근접한 역작 재현을 위해 2차 대전 일본을 항복시킨 미주리호를 비롯해 베트남 전에 파견됐던 뉴저지호, 구 소련이 연구·개발해 탄생한 민스크호 등 항공모함 재현은 그 어떤 작품보다 실물에 가깝다고 자부심이 대단하다.

▣기술력의 집약체 항공모함 민스크호 재현, 고도의 집중력으로 완성, 보람


항공모함에 헬기, 탱크, 함포 등 모형이지만 실물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민스크호 재현 작품은 TV, 신문 등 언론에도 많이 소개됐고, 모 방송 ‘세상에 이런일이’ 극세공예편에 소개되어 반짝 관심을 받기도 했다.


작품이 완성되면 누군가는 알아봐주고 소장자도 나설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도 했지만, 40여 년 동안 만든 작품을 단 한 번도 팔아본 적이 없다는 그의 말에서 연민의 정을 느낀다.


특히 그 어려운 과정을 거치며 12년간 심혈을 기울여 재현한 역작 민스크호를 만들었을 땐 국내에서 ‘최고의 함선 재현가’로 자리매김할 큰 기대를 했지만, 세상은 너무도 조용해서 야속했음을 실토했다.


그나마 해군참모총장배 모형함선 경연대회에 5회 출전해 최고상을 비롯해 5회 모두 수상했던 것에서 다소 위안을 삼는다.

원인을 되짚어봤다. 결론은 민스크호라는 거대 작품이 아닌 대중성이 있는 판옥선 재현을 위해 방향을 돌렸다. 마음을 비우고 나무를 수집해 오로지 판옥선 재현에만 몰입해 현재 두 번째 작품을 재작하고 있다.


조선 고유의 전함이 판옥선이다. 판옥선 위에 거북 등 모양의 지붕과 갑판을 얹어 제작한 돌격 전함이 거북선이다.


임진왜란 발발 200여 년 전 고려말 왜구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화약발명가 최무선(永川人)이 진포대첩에서 왜선 500척을 불바다로 만들 때 화포를 실었던 배가 판옥선 형태로 추정된다.


판옥선은 조선군 본래의 대함으로 지휘선 및 주력 전투함이고, 거북선은 기존의 판옥선을 개조한 적 교란을 주목적으로 한 돌격선이다. 일반적으로 거북선을 임진왜란의 주역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주력선은 판옥선이었다. 당시 이순신 장군도 판옥선 제작에 열성을 다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러한 역사성 때문에 정재춘 작가는 더욱 판옥선 제작을 위해 거의 평생을 투자하는지도 모르겠다.


현재 제작중인 판옥선은 정밀을 요하는 소도구에서부터 화력을 담당하는 함포까지 실물과 같이 축소 재현해 놓아 금방이라도 이순신 장군이 장루에 올라 “나를 따르라!” 명령이 떨어지면 출격할 만반의 준비가 된 것 같은 착각을 할 정도다.


정 작가는 항공모함을 비롯해 “지금까지 제작한 작품들의 전시공간이 없어서 대구 부모님집 창고에 쌓아둔 것이 가장 가슴 아프다.”며, “이 작품들을 한자리에 모아 많은 국민들이 볼 수 있도록 전시회를 갖는 것이 꿈이지만 그럴만한 공간·경비 조달 등 그저 마음뿐”이라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집을 비워달라는 통보 받고, 열두 번째는 또 어디로 가야하나?


인터뷰 말미에 정재춘 작가는 다소 머뭇거리며 고민을 털어놨다. 설상가상이라고 했던가. 현재 작업하고 있는 이 집을 집주인으로부터 5월까지 비워달라는 통보를 받고 일손이 잡히지 않는다고 한다.


대구 신동에서 출발해 합천, 고령 등 열한 번째 이사를 하면서 오로지 민족정신을 담은 작품 재현에만 몰입했는데, 또 어디로 이사를 해야 하나?


“비록 돈이 되는 작업은 아니지만 함선 모형을 재현하면서 자긍심도 있었고, 나름으로 행복했다.”며, “이제는 그 행복을 세상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데 또 어디로 가야하나 고민으로 밤잠을 설친다.”고 실토한다.


고령군 관내에 이처럼 사명감을 가지고 임진왜란 대승을 이끈 민족정신을 담은 판옥선 재현에 몰두하는 예술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령군의 자랑이라 해도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닐 것이다. 이처럼 신기의 명장(明匠)을 타지로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철의 왕국 대가야국 철 운반선 ‘고령호’ 재현이 다음 목표


대가야는 내륙에 위치해 지리적 불리한 여건임에도 발달한 철기문화(鐵器文化)를 바탕으로 조선(造船) 기술이 뛰어나 일본과 중국에 해상교류가 가능했다는 것이 역사적인 사실에서 밝혀졌다.


‘대가야조선소(大伽倻造船所)’가 있었던 역사의 현장 치사리 안골(상무사 앞) 앞에 명장(明匠)은 ‘대가야 모형배’를 제작하고, 관광객은 모형배 만드는 체험을 할 수 있는 공작소(工作所)를 갖춘다면 역사성에서도 안성맞춤일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잊힌 가야사 복원은 물론 오는 4월 개장 예정인 ‘대가야생활촌(大伽倻生活村)’과 연계해 관광자원을 확대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특히 정 작가는 현재 만들고 있는 판옥선 작품을 마무리하는 대로 철의 왕국 대가야국 철 운반선 ‘고령호’ 재현을 위해 이미 계획을 세워뒀다고 귀띔한다.


1991년도에 건조한 해군에 ‘고령함’이 있고, 가야사 복원이 국정과제에 포함된 시점에 대가야국을 상징하는 ‘고령호’가 재현된다면 고령군민으로서의 자부심 또한 배가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http://hamsun21.com 

 


최종동 기자  < jongdong44@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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