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평이씨(廣平李氏) 종사랑공파(從仕郞公派)·정랑공파(正郞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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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광평이씨(廣平李氏) 종사랑공파(從仕郞公派)·정랑공파(正郞公派)

광평이씨 경암재(다산면 노곡1길 50-7)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광평이씨(廣平李氏) 시조(始祖) 이무재(李茂材)
 고려 때 사재동정(司宰同正)의 벼슬을 하였다. 어물(魚物)의 조달(調達)과 하천(河川)의 교통(交通)에 관(關)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官廳)인 사재시(司宰寺)의 명예직(名譽職)인 동정(同正)을 지냈다. 생졸년(生卒年)은 1150년 전후(前後)인 고려 중엽으로 추정(推定)된다.


(2) 본관(本貫) 유래(由來)
 시조(始祖) 이무재(李茂材)의 증손(曾孫) 이능(李能)이 고려의 조정(朝廷)에서 나라에 공을 세워 광평(廣平 : 성주의 고려시대 이름)을 식읍지(食邑地)로 받아 광평군(廣平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본관(本貫)을 광평(廣平)으로 하였다. 후손들이 성산(광평)이씨, 광평이씨 등으로 본관(本貫)을 쓰고 있어 성산이씨(星山李氏)와 혼돈되는 경우가 있다.


(3) 성주(星州)의 건치연혁(建置沿革)
① 6가야연합국의 하나인 성산가야(星山伽倻)의 영토였다. 6세기 무렵 신라의 세력권에 들게 되어 벽진군(碧珍郡) 또는 본피현(本彼縣)이라 하였다
② 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 본피현(本彼縣)을 신안현(新安縣)으로 개칭하여 성산군(星山郡)의 속현(屬縣)으로 삼았으며 뒤에 다시 벽진군(碧珍郡)으로 바꾸었다.
③ 고려 태조 23년(940년) 다시 경산부(京山府)로 승격하였다가 경종 6년(980년)에 강등(降等)되어 광평군(廣平郡)으로 개칭되었다. 따라서 광평(廣平)은 성주(星州)의 옛 이름이다.


(4) 광평이씨(廣平李氏) 분파(分派)
 종사랑공파(從仕郞公派), 충순위공파(忠順衛公派), 직장공파(直長公派), 한은공파(閒隱公派), 첨정공파(僉正公派), 부사직공파(副司直公派), 정랑공파(正郞公派), 선교랑공파(宣敎郞公派), 병사공파(兵使公派), 황곡공파(篁谷公派), 검계공파(儉溪公派), 충순당공파(忠順堂公派), 학성공파(學性公派) 등 13개파로 분파(分派)되었다.


(4) 광평이씨(廣平李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광평이씨(廣平李氏)는 약 70가구가 거주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예조정랑(禮曹正郞)을 지낸 한보(漢輔)의 후손들이 다산면 노곡리에 집성촌(集姓村)을 이루고 세거(世居)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① 이영(李永) : 2세
초휘(初諱)는 훤(萱)이고 시조(始祖) 무재(茂材)의 아들로 태어났다. 봉순대부(奉順大夫)의 품계를 받고 성주(星州) 지역을 다스리는 으뜸 벼슬인 지경산부사(知京山府使)를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② 이두문(李杜文) : 3세
초휘(初諱)는 윤신(允臣)이고 지경산부사(知京山府使) 영(永)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 때 왕명(王命)의 출납과 숙위(宿衛 : 숙직하여 지킴), 군기(軍機) 따위를 맡아보던 관아(官衙)인 추밀원(樞密院)의 으뜸 벼슬인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를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③ 이능(李能) : 4세
초휘(初諱)는 능(陵)이고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를 지낸 두문(杜文)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 때 조정에 나아가 원(元)나라를 상대로 한 외교정책 수립에 큰공을 세워 삼중대광(三重大匡)의 벼슬을 받고 광평군(廣平君)에 봉해지고 능(能)으로 사명(賜名)을 받았다. 문장(文章)과 덕업(德業)이 그 시대에 밝게 빛나 송경(松京 : 개성)의 종각(鐘閣)에 이름과 공훈(功勳)을 새기고 사후(死後)에는 화상(畵像)을 그리도록 명하였으며 향(香)과 축문(祝文)을 내려 해마다 제사를 모시게 하였다. 배위는 개성유수(開城留守)를 지낸 이억년(李億年)의 따님이다. 성주군 월항면 안포리(安浦里) 암포촌(巖浦村 : 듬개)에는 ‘광평유지단정(廣平遺址壇井 : 광평군의 옛 자취가 남아 있는 자리에 제단과 우물)’이 남아 있고 묘향재각(墓享齋閣)인 암포서원(巖浦書院)이 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④ 이규옥(李圭玉) : 5세
삼중대광(三重大匡)의 벼슬을 받고 광평군(廣平君)에 봉해진 능(能)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 때 각문(閣門), 통례문(通禮門)·중문(中門) 등에 두었던 정칠품 벼슬인 지후(祗候)를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⑤ 이영선(李寧善) : 8세
낭장(郎將)을 지낸 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현령(縣令)을 지내고 아들 호성(好誠)이 귀(貴)하게 되어 정헌대부(正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2) 조선시대
① 이호성(李好誠) : 9세
초휘(初諱)는 자성(子誠)이고 호는 동산(東山)이다. 현령(縣令)을 지낸 영선(寧善)과 좌찬성(左贊成) 평절공(平節公) 옹(雍)의 따님인 정부인(貞夫人) 곡산한씨(谷山韓氏) 사이에서 공민왕 1년(1352년) 태어났다. 세종 9년(1427년) 정미(丁未) 친시(親試)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사복시(司僕寺) 직장(直長)에 제배(除拜)되었고, 벼슬을 여러 번 옮겨서 군기시부정(軍器寺副正)에 이르렀다가, 세종 31년(1449년) 거제현령(巨濟縣令)으로 나가서 읍(邑)을 옮기고 성(城)을 쌓아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오랑캐를 방비한 공이 있었으므로,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승진되었고 세종이 ‘무용청개(武勇淸介)’ 네 글자를 어필(御筆)로 써서 액자로 하사(下賜)하였다. 단종 1년(1452년)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지내고 세조 1년(1455년)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 이등(二等)에 녹훈(錄勳)되었으며 경주부윤(慶州府尹)을 거쳐 세조 5년(1459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겸 경상좌도병마절제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가 되었는데, 부모가 늙었음으로 인하여 사직(辭職)하니, 임금이 그 뜻을 아름답게 여겨 세조 7년(1461년) 경상우도처치사(慶尙右道處置使)에 제수하였다. 일찍이 최윤덕(崔潤德)을 따라 북정(北征)에 참여하여 각 군영(軍營)에 둔 부장(副將)이 되었는데, 향(向)하는 곳마다 대적(對敵)이 없어서 ‘비장군(飛將軍)’이라 불리었다. 세조 12년(1466년)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을 지냈다. 성품이 강직(剛直)하고 청렴(淸廉)하며 기사(騎射 : 말을 타고 활을 쏨)에 능하고 또한 이치(吏治 : 관리로서의 행정능력)에 수완이 있었다 한다. 세조 13년(1467년) 졸(卒)하였다. 시호(諡號)를 정무(靖武)라 하였으니 몸을 삼가고 말이 적은 것을 정(靖)이라 하고, 성품이 강직하며 사리가 곧고 바른 것을 무(武)라 하였다. 덕산서원(德山書院) 및 경덕사(敬德祠) 등에서 제향(祭享)을 봉행한다. 
 
(註釋) 무용청개(武勇淸介)
엄의(嚴毅 : 엄숙하고 굳셈) 특달(特達 : 특별히 재주가 뛰어남) 함은 『무(武)』, 강의(剛毅 : 강직하여 굴하지 않음) 과감(果敢 결단성있고 용감하게 행동함)함은  『용(勇)』이요, 지조(志操 : 곧은 뜻과 절조) 염결(廉潔 : 청백하고 결백함)함은 『청(淸)』이요, 분변(分辨 : 분별) 불요(不撓 :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함)함은 『개(介)』이다.
② 이거인(李居仁) : 10세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 호성(好誠)과 이조참의(吏曹參議) 여경(餘慶)의 따님인 정부인(貞夫人) 광주안씨(廣州安氏) 사이에서 세종 13년(1431년)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세조 1년(1456년) 무과에 급제한 후 성종 6년(1475년) 안주목사(安州牧使)에 제수(除授)되고 광주(廣州)·해주(海州)·공주(公州)·홍주(洪州)·제주(濟州) 등 여섯 웅주(雄州 : 큰 고을)를 다스렸다. 성종 3년(1472년) 경상우도수군절도사(慶尙右道水軍節度使)로 재임하면서 화약고(火藥庫)를 지을 것을 청하였으나 정인지(鄭麟趾)·최항(崔恒)의 반대로 무산(霧散)되었다. 성종 22년(1491년) 순천부사(順天府使)가 된 후 삭주(朔州)·청송(靑松)·전주(全州)등 네 고을 다스려 열 번이나 고을을 다스렸다. 성종 24년(1493년) 전라좌도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를 거쳐 연산군 3년(1497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로 승진(陞進)하여 제포(薺浦) 왜인 마을의 화재, 약탈 사건을 처리하여 국방과 위민정치(爲民政治)의 모범을 보였다. 연산군의 실정(失政)이 깊어지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여생을 보내다가 중종 2년(1507년) 청고(淸高)한 생애를 마쳤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1) 대호군(大護軍) 이희광(李希廣)이 고려말 선향지(先鄕地) 성주군 월항면 안포리(安浦里)에서 고령군 다산면 벌지리(伐知里)로 입향하여 대종파(大宗派)인 종사랑공파(從仕郞公派) 후손들이 세거(世居)하고 이곳을 세장지지(世葬之地 : 대대로 묘를 쓰는 선영)로 삼았다.
(2) 그후 이희광(李希廣)의 7세손 예조정랑(禮曹正郞) 이한보(李漢輔)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김산(金山) 하노(賀老) 마을에서 살다가 월암산중(月巖山中)에 피란(避亂)하였다가 난(亂)이 평정(平定)된 후에 노곡(蘆谷)에 정착하게 되어 이곳은 광평이씨(廣平李氏) 예조정랑공파(禮曹正郞公派)의 세거지(世居地)이자 집성촌(集姓村)이 되었다. 
 
4. 입향조(入鄕祖)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고려시대
① 이희광(李希廣) : 6세
지후(祗候)를 지낸 규옥(圭玉)의 아들로 태어나 봉상대부(奉常大夫) 대호군(大護軍)을 지냈다고 하나 세대(世代)가 이미 오래되었고 대호군(大護軍)의 장재(將材 : 장수가 될 만한 훌륭한 인재)로 훌륭한 공훈(功勳)과 학덕(學德)이 있었을 것이나 기송(杞宋)의 문헌(文獻)이 부족하여 상고(詳考)할 수 없다고 신도비명(神道碑銘)에 쓰여져 있다. 생졸년(生卒年)은 고려말로 추측된다. 광평이씨(廣平李氏) 고령 입향조(入鄕祖)이다.


(2) 조선시대
① 이묘(李昴) : 7세
봉상대부(奉常大夫) 대호군(大護軍)을 지낸 희광(希廣)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중훈대부(中訓大夫)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② 이해(李) : 7세
봉상대부(奉常大夫) 대호군(大護軍)을 지낸 희광(希廣)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낭장(郎將)을 지냈으나 손자 호성(好誠)이 정이품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으로 판서(判書)의 반열(班列)에 올라 귀(貴)하게 되자 자헌대부(資憲大夫)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③ 이적상(李迪祥) : 8세
자는 미전(未傳)이고 호는 만은(晩隱)이다. 중훈대부(中訓大夫) 수(守) 밀직부사(密直副使) 묘(昴)와 문열(文烈)의 따님인 숙부인(淑夫人) 재령강씨(載寧康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청도현감(淸道縣監)을 거쳐 거창현감(居昌縣監)을 역임하였으며 백성들이 불망비(不忘碑 : 후세 사람들이 잊지 않도록 어떤 사실을 적어 세우는 비석)를 세워 공의 선정(善政)을 기렸다. 단종 3년(1455년) 윤 6월 11일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손위(遜位 : 임금의 자리를 내어 놓음)하자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다산면 벌지리에 만은정사(晩隱精舍)를 짓고 청절(淸節)을 지키다가 망구(望九 : 81살)에 하세(下世)하니 수직(壽職)으로 종이품 가선대부(嘉善大夫)에 가자(加資 : 통정대부 이상의 품계를 올리던 일)되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④ 이수문(李秀文) : 10세
진의부위(進義副尉)를 지낸 회(薈)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선시대 중앙군으로서 오위(五衛)의 충무위(忠武衛)에 소속되었던 병종(兵種)인 충순위(忠順衛)를 지냈다. 충순위(忠順衛)는 양반 계층이 군역 의무를 수행하였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⑤ 이한보(李漢輔) : 13세
자는 원약(元若)이다. 명종 9년(1554년) 사복시(司僕寺) 직장(直長)을 지낸 정(禎)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모상을 당하여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3년간 여묘(廬墓)살이를 봉행(奉行) 실천한 후 과업(科業)을 그만두고 경적(經籍)으로 스스로 즐거움을 삼았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령군 다산면 노곡리 월암산(月巖山)에 피란(避亂)하여 은거(隱居)하다가 난(亂)이 평정되자 월암산(月巖山) 아래 노곡촌(蘆谷村)에 전거(奠居 : 자리를 잡고 삶)하여 수간(數間)의 정사(精舍)를 짓고 한양재(寒養齋)라 편액(扁額)하였으며 가슴엔 만 권 서책의 진리를 마음속에 깊이 쌓아 두고 강학(講學)을 논하였으며 애장(愛藏)하여 손때가 묻은 책(手澤本)이 굉장히 많았다. 명종 때 벼슬이 통훈대부(通訓大夫) 예조정랑(禮曹正郞)에 이르렀다고 성산지(星山誌)에 기록되어 있다. 선조 38년(1605년) 졸(卒)하였다. 공을 위한 재각(齋閣)인 경암재(景巖齋)가 고령군 다산면 노곡리에 있다.
⑥ 이석창(李碩昌) : 18세
자는 중보(仲甫)이고 호는 활재(活齋)이다. 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 行龍驤衛副護軍)을 지낸 검(儉)과 부사직(副司直) 두연(斗延)의 따님인 숙부인(淑夫人) 김해김씨(金海金氏) 사이에서 숙종 43년(1717년) 태어났다. 숙종 45년(1775년) 무과에 급제하여 나라를 지키는 믿음직한 장군(干城之將)이 되었으나 당쟁(黨爭)으로 세태(世態)가 혼란함을 보고 사직(辭職)하고 고향(故鄕)으로 돌아와 사재(私財)를 털어 빈민(貧民)을 구휼(救恤 : 구제)하고 기아(飢餓 : 굶주림)에 시달리는 방민(坊民 : 지역 주민)을 진휼(賑恤 : 굶주리거나 질병에 걸린 자, 혹은 돌보아 줄 사람이 없는 자 등을 구제함)하여 세인(世人)들이 ‘활불(活佛 : 생불 → 살아 있는 부처)’이라 칭하여 호를 활재(活齋)라 하였다. 졸년(卒年)은 미상(未詳)이다.


(2) 근∙현대 인물
① 이우병(李雨炳) : 대구시 및 경상북도 교육청 관리국장, 상주대 사무국장
② 이학병(李學炳) : 대한항공 본사 이사, 대구항공 지점장
③ 이만환(李萬煥) : 이학박사, 대학 교수
④ 이인정(李仁貞) : 이학박사, 환경부 연구관
⑤ 이종환(李鍾煥) : 신광화학 대표이사
⑥ 이상도(李相道) : (주) 동신에스피특수인쇄공사 대표이사
⑦ 이승열(李昇烈) : 의학박사, 대학 교수
⑧ 이우열(李佑烈) : 통일부 서기관
⑨ 이근택(李根澤) :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⑩ 이경택(李慶澤) : 육군 대령
⑪ 이구조(李九祚) : 오사카 국립민족학박물관 교수, ‘실크로드’ 세계적 권위자
⑫ 이상환(李相煥) : 국세청 사무관
⑬ 이성숙(李成淑) : 바이오라이트(주) 대표이사
⑭ 이근철(李根喆) : 철학박사, 경희대 교수
⑮ 이민규(李敏奎) : 공학박사, 경북대 교수
⑯ 이주형(李周亨) : 이학박사, 경북대 교수
⑰ 이주원(李周沅) : 제60회 행정고시 합격, 경정
⑱ 이태호(李泰鎬) : 영신기계 대표이사 회장, 광평이씨 대종회 회장
⑲ 이두호(李斗鎬) : 세종대 교수, 한국만화가협회 회장
⑳ 이영규(李英奎) : 도드람양돈농협 조합장

자료제공 : 총무 이주호(李柱昊)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최종동 편집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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