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평윤씨(坡平尹氏) 교리공파(校理公派) 추원재(追遠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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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파평윤씨(坡平尹氏) 교리공파(校理公派) 추원재(追遠齋)

1. 추원재(追遠齋) 유래

(1) 고령군 운수면 연봉길 120-8(봉평리 251)에 소재한 추원재(追遠齋)는 운수면사무소에서 신간리로 가는 도로변에 있는 연자방아 좌측길을 따라 가면 있는 연봉(延鳳)마을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2) 옛날 봉황새 한 마리가 마을 옆에 있는 의봉산(儀鳳山)에 날아와 앉았는데 꼬리와 몸통만 있고 머리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기이한 봉황이 내려앉은 의봉산 밑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연봉(延鳳)이라 하였다고 한다.

(3) 추원재(追遠齋)는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던 윤지선(尹止善)을 추모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1910년에 건립하였던 재실(齋室)인데 같은 건물에 두 개의 편액(扁額)이 걸려 있다. 즉 재실(齋室)로 사용될 때에는 추원재(追遠齋)라 하고 서당(書堂)으로 사용될 때에는 양정헌(養正軒)이라 한다.

 

2. 건축형태

(1) 추원재(追遠齋) 입구는 솟을대문으로 되어 있으며 외곽은 방형(方形)으로 토석(土石) 담장을 둘렀다.

(2)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ㅡ’자형이며 처마는 홑처마이고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3. 추숭(追崇) 인물 윤지선(尹止善)

자는 복초(復初)이며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과 세자익위사사어(世子翊衛司司禦)을 지낸 영(泳)과 장흥임씨(長興任氏)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선조 30년(1597년) 태어났다. 공은 지극한 성품과 순수한 행실이 있어서 덕을 감추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공은 장사랑(將仕郞) 예빈시(禮賓寺) 참봉(參奉) 종택(宗澤)의 따님인 전의이씨(全義李氏)와 혼인하여 충남 연산(連山)에서 처향인 고령군 다산면 상곡리에 이거한 파평윤씨(坡平尹氏) 교리공파(校理公派) 고령입향조(高靈入鄕祖)이다. 다섯째 아들인 리(理)가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보사공신(保社功臣)에 책록(策錄)되고 부승지(副承旨)·경주부윤(慶州府尹)을 지내는 등 귀(貴)하게 되어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다. 현종 14년(1673년) 졸(卒)하였다.

4. 추원재기(追遠齋記)

나의 십일대조이신 사어부군(司御府君) 휘 영(泳)께서 한양으로부터 충청도 연산(連山)으로 이주하셨고 십대조이신 증판서부군(贈判書府君) 휘 지선(止善)께서는 연산으로부터 성산(星山 : 지금의 고령군 다산면)으로 이주하시어 이 고을에 윤씨가 거주한 것은 판서공이 처음이다. 한양을 떠나 시골로 내려와서 벼슬을 싫어하고 초야(草野)의 선비생활을 즐기시니 보통사람은 편안하게 여기는 바가 아니나 우리 할아버지는 참으로 그런 생활을 즐기려는 뜻이 있었다. 증빙할 수 있는 문헌이 없어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그렇다고 해서 안빈낙도(安貧樂道)하려는 우리 할아버지의 본뜻이 영원히 사라지겠는가? 사라진 것은 자취이지만 사라질 수 없는 것은 마음이다. 그 사라지지 아니한 마음을 알면 아마 사라진 자취도 또한 어떠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께서는 조정에서 가장 높은 벼슬을 하시면서 풍성한 공적, 위대한 의열(義烈), 곧은 충성심과 현절(懸絶 : 아주 두드러지게 다름)한 절의(節義)가 대대로 끊어지지 아니하여 국사(國史)에 밝게 등재되었더니 병자년 청나라와 화친(和親)을 한 뒤로부터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을 지키며 편안히 살고 분수(分數) 밖의 것은 바라지 아니하였다. 당시의 대로(大老)께서 춘추필법(春秋筆法)으로 묘갈문(墓碣文)을 지어 말하기를 누추한 집과 거친 음식을 견디기 어려워해도 할어버지께서는 편안하게 여겼으며 부인이 가져온 재물은 없는 것 같이 하였다 하니 부군(府君)께서 지키신 뜻이 어떠한지 이러한 말에서 알 수 있다. 이로부터 대대로 선조께서 남기신 그 아름다운 자취를 이어서 수신(修身)하고 자기가 타고난 성품을 헤치지 아니하는 것을 우리 종족이 대대로 지켜갈 가문(家門)의 법도(法度)로 삼았다. 나의 종선조(從先祖)께서 부채에 다음과 같은 시를 쓰셨다.

대명천지(大明天地)에 일월(日月)이 어두워
천지에 얼굴들고 설 곳이 없도다.
대부채 빌려 얼굴을 가린 뜻은
차마 중원(中原)의 망함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진실로 가슴에 쌓인 것이 독실하자 않았다면 무심코 읊은데서 어찌 능히 이같은 시가 나올 수 있었겠느냐? 우리 집안은 서울서 벼슬하거나 혹은 시골에 은퇴해 있거나 항상 의리(義理)로서 일을 직시(直視)했으며 무반(武班)으로 진출하든 문반(文班)으로 진출하든 항상 때에 맞게 처신(處身)하였다. 타고난 효성과 몸을 수양하는 아름다움은 스승에게 배운 것이 아니고 가풍(家風)에서 얻어진 것이니 이것이 사라지지 아니한 선조의 마음이 무궁(無窮)하게 드리운 것이요, 경전(經典)의 장구(章句)를 배우고 문장을 익히는 것은 본래 숭상하지 아니하여 선조의 행적(行跡)을 문적(文籍)에 남겨 증빙(證憑)할 수 없으니 이것이 사라져 버린 선조의 자취이다. 슬프도다! 조상의 마음은 자손이 잘 지켜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거늘 오늘날 이 지역의 형세(形勢)를 살펴보면 병자년의 국치(國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과연 선조의 뜻을 살려 춘추대의를 세우기 위하여 노력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매양 깊은 밤이면 나도 모르게 이 때문에 눈물을 흘리곤 했다. 이에 종숙(從叔)과 밤낮으로 수십 년을 굳은 마음으로 경영해 두어간의 재실(齋室)을 거처하는 집의 오른쪽에 세워서 문중의 젊은이들로 하여금 도의(道義)를 강마(講磨)하고 선대의 업적을 떨어뜨리지 않게 하려는 뜻에서 추원재(追遠齋)라 현판을 하니 대개 증자(曾子)의 가르침 중에 조상의 은덕(恩德)에 보답하면 백성의 덕(德)이 그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뜻을 취한 것이다. 이 교훈을 더욱 위로 확대시켜 행하면 공자께서 말씀하신 조상의 뜻을 받들어 제향(祭享)하는 뜻을 잘 아는 자는 천하를 다스리기를 마치 손바닥 보듯 쉽게 할 수 있다는 경지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가르침이 밝지 못하여 그 뜻은 잃어버리고 그 말만 전하며 그 말은 외우되 그 참맛은 잃어버리는 사람이 많도다. 혹 멀리 달려가고자 하면서 가까운데서 출발하는 것은 싫어하며, 혹 밖의 것을 따르고자 하면서 안은 잃어버리니 이것은 성현(聖賢)이 훈계(訓戒)한 뜻이겠는가? 그렇다면 성현이 가르치신 도(道)란 어떠한 것인가? 선조의 마음을 자기 마음처럼 여기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후일 이곳에 거처하는 사람은 한갓 그 이름만 지키지 말고 그 뜻을 깊이 음미(吟味)해야 할 것이니 그런 연후(然後)에야 성현이 훈계하신 뜻을 저버리지 아니한 것이 되며 내가 오늘 추원재(追遠齋)라고 이름을 붙인 뜻이기도 하다.

(註釋1) 대로(大老)
세간(世間)에서 존경(尊敬)을 받는 어진 노인(老人)의 극존칭(極尊稱)이나 여기서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지칭한다.

(註釋2) 춘추필법(春秋筆法)
공자(孔子)가 《춘추(春秋)》를 쓸 때 권선징악(勸善懲惡)과 대의명분(大義名分)에 의하여 역사를 서술하던 논법(論法)을 말한다.

(註釋3) 종선조(從先祖)
집안 선조를 뜻하며 여기서는  문학(文學), 효행(孝行), 존현(尊賢, 상절(尙節)하는 행실로 추천되어 통덕랑(通德郞)으로 표창(表彰)되었던 윤면정(尹勉貞)을 지칭한다. 공은 역천(櫟泉) 송명흠(宋明欽)과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의 문인으로 성주에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의 수명유허비(受命遺墟碑)를 세웠다.

(註釋4) 대명천지(大明天地)에 일월(日月)이 어두워(大明日月晦)
명나라가 망한 것을 뜻한다.

(註釋5) 대부채 빌려 얼굴을 가린 뜻(借來孤竹意)
고죽(孤竹)은 삼년에 한 번 죽순(竹筍)이 나오는 대나무의 한 종류이지만 한편으로는 은(殷)나라를 정벌하러 가는 주(周)나라의 무왕(武王)의 말고삐를 잡고 그 부당함을 간(諫)하다가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수양산(首陽山)에서 고사리(薇蕨)를 캐먹다 굶어 죽은 백이숙제(伯夷叔齊)를 말한다. 백이숙제(伯夷叔齊)는 고죽국(孤竹國)의 왕자들이므로 이들을 고죽군(孤竹君)이라 한다. 이 시(詩)에서 고죽(孤竹)은 부채를 만드는 대나무를 칭(稱)함과 동시에 백이숙제(伯夷叔齊)의 곧은 절개(節槪)를 비유하고 있다.

(註釋6) 이같은 시가 나올 수 있었겠느냐?
이 시(詩)는 윤면정(尹勉貞)이 당시 성주군수이었던 민백남(閔百男)과 대화하던 중 그가 운(韻)을 내자 즉석에서 지은 시이다.

(註釋7) 춘추대의(春秋大義)
유학의 오경(五經) 가운데 하나인 춘추(春秋)에서 말한,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키고 행하여야 할 도리나 본분을 말한다.

(註釋8) 조상의 은덕(恩德)에 보답하면 백성의 덕(德)이 그에게 돌아올 것
《논어(論語)》 〈학이(學而)〉에서 증자께서 말씀하셨다. “부모의 마지막 길인 상(喪)을 신중하게 처리하고 먼 조상을 추모하면 백성의 도덕성이 순후하게 될 것이다(曾子曰: 愼終追遠, 民德歸厚矣).”

(註釋9) 조상의 뜻을 받들어 …… 마치 손바닥 보듯 쉽게 할 수 있다.
《논어(論語) 20편》 〈팔일(八佾) 제11장〉에 어떤 사람이 체제사(禘祭祀)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모르겠소. 그것을 아는 자야말로 천하를 손바닥에 놓고 보는 것과 같을 것이오” 라고 하였다(或問禘之說 知其說者之於天下也, 其如示諸斯乎 指其掌)
▶체제사(禘祭祀)
왕이 시조의 묘당을 세우고, 시조를 위시로 이전의 왕들을 배향하여 왕만이 지낼 수 있는 큰 제사를 말하는 것으로 사시(四時)의 고정된 제사가 아니기 때문에 이를 일러 ‘간사(間祀)’라 하고, 시조를 출생시킨 제왕에게까지 미치기 때문에 이를 일러 ‘추향(追享)’이라 하고, 고정된 제사에 비하여 특별히 크기 때문에 이를 일러 ‘대제(大祭)’라 한다.

5. 양정헌기(養正軒記)

우리 집안이 이곳에 자리한 지 오래됨에 선영(先塋)도 줄지어 형성되고 무덤 가에 심은 나무들도 아름드리가 되어 이미 여러 세대에 걸쳐 토구지향(菟裘之鄕)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몇간의 장수(藏修)할 장소도 마련하지 못한 것은 힘이 미치지 못해서일 뿐만이 아니라 사실은 언젠가는 서울로 가서 살 것을 생각하며 타향에서 오래 머무르지 않으려는 것이 본래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그런 바램은 이미 이룰 수 없게 되어 편안히 머물 곳을 살피다가 우리가 사는 곳의 오른 쪽에 몇 개의 서까래를 엮은 집을 지어 후손들이 학업을 익힐 수 있는 장소로 삼았다. 이곳에 양정헌(養正軒)이라는 편액(扁額)을 붙이고 추원재(追遠齋)라는 글씨도 게재(揭載)하였으니 이는 공자께서 말씀하신 몽양이정(蒙養以正)이라는 뜻과 증자(曾子)의 신종추원(愼終追遠)의 뜻을 사모해서이다. 대개 백성의 덕은 본래 후덕(厚德)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신종추원(愼終追遠)함을 기다린 후에 비로소 후한데로 돌아가고, 사람의 성품은 본래 착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다스리고 가르침을 받은 뒤에야 착한 성품을 회복하게 된다. 그러므로 후덕함과 후덕하지 못함, 착함과 착하지 못함이 오직 능히 본성(本性)을 잘 기르느냐 그렇지 못하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약 그 기름(養)을 얻는다면 만물이 성장치 않음이 없고, 만약 그 기름을 잃는다면 만물이 소멸되지 않음이 없다”라고 하셨으니 기름의 뜻은 참으로 크도다. 그래서 어린아이 적에 바른 것으로 기르는 것이 바로 성인(聖人)이 되는 공효(功效)이다. 몽(蒙)이라는 것은 사물의 어린 것이다. 어릴 적에는 의리(義理)와 이익(利益)을 분별(分別)하지 못하고 선악이 형성되지 않는 때이다. 이 때는 연못의 물을 동으로 터주면 동으로 흐르고 서로 터주면 서로 흘러가는 것과 같이 인격형성의 중요한 시기이다. 조고(趙高)가 백성을 죽이고 코를 베고 종족을 죽이는 형벌을 썼는데 어린아이를 이런 식으로 기르면 끝내는 종족에게 재앙(災殃)을 가져다 줄 것이고 만약 이윤(伊尹) 같은 사람을 스승으로 삼아 선조의 유훈(遺訓)을 가까이 접하게 하면 끝내는 하늘과 그 덕을 짝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기르기를 바른 것으로 하지 않을 수 없고, 성인(聖人)이 되는냐 광인(狂人)이 되느냐의 기미(幾微 : 낌새)도 여기에서 나뉘어 지는 것이다. 증자의 가르침에 대해 주자가 해석하기를 ‘이것(愼終追遠)으로 자신을 다스리면 자기의 덕성(德性)이 두터워지고 , 이것으로 백성을 다스리면 백성의 덕성이 후한데로 돌아간다(民德歸厚)’했으니 이로 보건대  먼조상을 추모하면 덕이 두터워지나 덕의 두터워짐은 반드시 바른 것을 기름(養正)에 근본해야 한다. 따라서 이 두가지(厚德과 養正)는 반드시 서로를 필요로 한다. 이른 바 덕(德)이라는 것과 바른 것이라는 것은 인간의 구체적 행위로 볼 때 효제(孝悌)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정자(程子)께서 본성을 잘 닦아 천명(天命)을 알게 되는 것은 반드시 효제(孝悌)에 근본한다고 했으니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라 하겠다. 이에 공자와 증자의 뜻을 헤아려 상인방(上引榜)에 편액을 붙이고 다시 정자와 주자의 가르침을 취하여 그 뜻을 밝히니 후손으로 이 곳에 올라 학문을 닦는 자는 이 글에 느끼는 바가 있을 것이다. 

(註釋1) 토구지향(菟裘之鄕)
벼슬을 내놓고 은거하는 곳이나 노후에 여생을 보내는 곳을 말한다.

(註釋2) 장수(藏修)
학문을 닦음
《예기(禮記)》 〈학기(學記)〉편, 君子之學也 藏焉 修焉 息焉 遊焉
군자가 학문을 하는 것은 배운 것을 마음에 간직하고 배운 것을 익히고 실천에 옮기며 물러가 쉬면서 학업을 익히고 여행을 다니면서 견문을 넓히는 것이다.

(註釋3) 몽양이정(蒙養以正)
《주역(周易)》 〈몽괘(蒙卦) 단(彖)〉에 “몽매(蒙昧 : 어리석고 사리에 어두움)한 이를 바름으로 기르는 것이 성인을 만드는 공이다.[蒙養以正 聖功也]”라고 한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註釋4) 만약 그 기름(養)을 얻는다면 ……소멸되지 않음이 없다
《맹자(孟子)》 제6 고자편(告子篇) 상(上)에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 그러므로 진실로 그 길러 주는 것을 얻는다면 자라지 않는 물건이 없고(故苟得其養無物不長), 그 길러 주는 것을 잃는다면 소멸되지 않는 물건이 없게 마련이다(苟失其養無物不消)”라고 하셨다.

(註釋5) 공효(功效)
공을 들인 보람을 뜻한다.

(註釋6) 조고(趙高)
중국 진(秦) 나라 때의 환관(宦官)으로 지록위마(指鹿爲馬)의 주인공이다. 시황제(始皇帝)가 죽자 승상(丞相) 이사(李斯)와 공모하여 조서(詔書)를 고쳐서 장자인 부소(扶蘇)를 자살하게 하고, 막내 아들인 우둔한 호해(胡亥)를 2세 황제(二世皇帝)로 삼았고 뒤에 승상(丞相) 이사(李斯)를 죽이고 승상이 되어 온갖 횡포한 짓을 많이 하다가 부소의 아들 자영(子嬰)을 옹립하여 진왕(秦王)이라 부르게 하였으나 곧 자영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의 3족도 함께 처벌되었다.

(註釋7) 이윤(伊尹)
탕(湯) 임금 때의 재상으로 은(殷)나라를 건국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註釋8) 상인방(上引枋)
창이나 문짝의 상부에 가로지르는 인방(引枋)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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