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암서원(道巖書院) 상편(上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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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도암서원(道巖書院) 상편(上篇)

도암서원( 쌍림면 칠등길 138)

 

1. 도암서원(道巖書院) 유래(由來) 및 연혁(沿革)

(1) 현종 7년(1666년) 2월 16일 향중(鄕中) 사림(士林)들이 조봉원(趙逢源) 고령현감(高靈縣監)의 지원을 얻어 임진왜란 때 진충보국(盡忠報國)한 송암(松菴) 김면(金沔) 의병도대장(義兵都大將)의 학덕(學德)과 절의(節義)를 추모하고 옥산(玉山) 이기춘(李基春) 선생의 학행(學行)을 기리기 위하여 고령현(高靈縣)의 북쪽에 사당(祠堂)인 도암사(道巖祠)로 시창(始創)하여 두 분을 병향(並享)하였다.

(註釋1) 병향(並享)
사당(祠堂)에 신주(神主)들을 같은 줄에 나란히 두어 함께 제사함.


(2) 숙종 24년(1698년) 도암사(道巖祠)를 도암서원(道巖書院)으로 승호(昇號 : 이름을 높임)하였으며 정조 13년(1789년) 5월 서원 근처에 시장이 있어서 번잡하고 불리하여 송암(松菴) 김면(金沔)의 선영이 있는 고령군 쌍림면 고곡리 칠동(七洞)로 이건(移建)하였다.


(3) 고종 5년(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에 의거 훼철(毁撤)되었으나 광무 6년(1902년) 도암서원(道巖書院) 유지(遺址 : 옛 자취가 남아 있는 자리)에 도암서당(道巖書堂)을 중건(重建)하였다.


(4) 그러나 훼철(毁撤)된 도암서당(道巖書堂)을 중건(重建)한 후 순조 1년(1907년) 향내(鄕內) 29개 문중이 도암서당(道巖書堂) 유계(儒契)를 창설(創設)하고 전곡(錢穀)을 수합(收合)하여 한식일에 묘사를 행할 때 이후부터 송암(松菴) 김면(金沔)만 독향(獨享)하고 있다.


(5) 도암서원(道巖書院)은 1988년 9월 23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76호로 지정되었으며 2002년 3월 향중(鄕中) 사림(士林)이 고령김씨(高靈金氏) 종중의 지원으로 고령군 쌍림면 고곡동 25번지(칠등길 138)에 도암서원(道巖書院)을 복원(復元)하였다.


(6) 2010년 3월 국비, 도비, 군비를 합하여 25억원의 예산으로 도암서원(道巖書院) 성역화(聖域化) 공사(工事)를 기공(起工)하여 기존 건물을 보수하고 사주문(四柱門), 강당(講堂) 등 건물을 신축(新築)하여 2011년 11월 준공(竣工)하였다.

2. 건물형태


(1) 도암서원 정문에는 지심문(知心門)이라고 편액(扁額)한 정3칸의 솟을대문이 있고 둘레에는 담장을 둘렀으며 상평루(常平樓)라고 편액(扁額)한 누각(樓閣)을 지나면 좌우측에 유생들의 숙소인 동재(東齋)인 수의재(修義齋)와 서재(西齋)인 경묵재(敬齋)가 있고 정면에 도암서원(道巖書院)과 연일당(然一堂)이라고 편액(扁額)한 도암서원(道巖書院)이 위치하고 있다.


(2) 도암서원(道巖書院)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좌우측 1칸은 온돌방을 만들고 그 사이의 3칸은 대청을 놓았다.


(3) 도암서원(道巖書院) 좌측에는 재실(齋室)인 추념재(追念齋)와 관리사(管理舍)가 있고 우측에는 유물전시관(遺物展示館)이 있고 뒤쪽에는 사당(祠堂)이 있다.

3. 추숭인물(追崇人物)


(1) 김면(金沔)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자는 지해(志海)이고 호는 송암(松菴)이다. 경원도호부사(慶源都護府使)를 지낸 세문(世文)과 예빈시(禮賓寺) 판관(判官)을 지낸 김중손(金仲孫)의 따님인 김해김씨(金海金氏) 사이에 장남으로 중종 36년(1541년) 4월 2일에 고령군 개진면 양전리에서 태어났다. 10세 때 낙천(洛川) 배신(裵紳)을 찾아가 공부하였다. 11살에 퇴계(退溪) 선생을 찾아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배웠고 20세 전후로 남명(南冥) 조식(曺植)과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양문(兩門)에서 수학하였다. 명종 18년(1563년) 23세 때 공이 지은「율례지(律禮誌)」를 남명(南冥) 선생이 수정하여 주었으며 명종 22년(1567년) 10월 덕산(德山)으로 남명 선생을 찾아 뵈옵고 재실(齋室) 상량문(上樑文)을 써 달라고 부탁하여 이듬해 9월 남명 선생이 직접래임(直接來臨)하여 재호(齋號)를 송암(松庵)이라고 자필현판(自筆懸板)하였다. 3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까지는 <명륜지(明倫誌)>, <역리지(易理誌)>, <삼강략(三綱略)>, <봉선록(奉先錄)> 등을 저술(著述)하였으며 죽리헌(竹裏軒) 나경(羅璟), 치재(癡齋) 허명신(許命申) 등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선조 22년(1589년) 5월에는 옥산(玉山) 이기춘(李起春), 청휘당(晴暉堂) 이승(李承), 모재(茅齋) 이홍우(李弘宇), 한강(寒岡) 정구(鄭逑), 대암(大庵) 박성(朴惺), 육일헌(六一軒) 이홍량(李弘量) 등 ‘낙강칠현(洛江七賢)’과 함께 낙동강을 선유(船遊)하며 ‘만경창파욕모천(萬頃蒼波欲暮天)’일곱
자로 분운(分韻)하여 시를 지었다. 선조 24년(1591년) 4월 칠동정사(七洞精舍)에서 동강(東岡), 한강(寒岡), 대암(大庵), 모계(茅溪), 존재(存齋), 모헌(慕軒), 영호(瀯湖) 등 제현(諸賢)이 참석한 가운데 향음주례(鄕飮酒禮)를 베풀었다. 51세가 되던 때에 은일(隱逸)로 공조좌랑(工曹佐郞)에 제배(除拜)되자 부득이 사은(謝恩)만 하고 이내 낙향(落鄕)하였다. 52세가 되던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적이 부산에 상륙한 지 28일만에 가동(家僮 : 집의 종) 70여 명을 인솔하여 1592년 5월 11일 정식으로 기병(起兵)하였으나 고령에 적병이 이르니 고령이 잔소(殘少)하다고 하여 거창으로 달려가 그곳의 선비와 백성이 약간의 군사를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조종도(趙宗道)를 조군(調軍)·곽준(郭逡)·문위(文偉)·박정번(朴廷璠)·류중룡(柳仲龍) 등으로 참모장서기(參謀掌書記)로 삼아 거창(居昌)·고령(高靈) 등지에서 의병(義兵)을 규합(糾合)하였고 박성(朴惺)은 전향(典餉)으로써 군량(軍糧)을 조달하게 하였다. 4일∼5일 동안에 군사 2,000명을 모았으며 1593년 1월에는 5,000명으로 대군화(大軍化)하게 되었다. 개산포전투(開山浦戰鬪), 무계전투(茂溪戰鬪), 두곡(豆谷) 역전(驛前) 전투, 지례(知禮) 전투, 성주(星州) 전투, 사랑암(沙郞巖) 전투, 방해현(防害峴) 전투 등지에서 크고 작은 30여의 전투를 치르면서 전공(戰功)을 세워 선조 26년(1593년) 정월 4일에 경상도 의병도대장(慶尙道 義兵都大將)의 특명(特命)을 받아 한 도(道)의 군(軍)을 통솔(統率)하게 되었다. 1593년 1월 5일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가 되어 같은 해 3월 개령(開寧)에 진을 치고 선산(善山)의 적을 격멸하려던 중 우연히 병을 얻어 1593년 3월 11일 금산진중(金山陳中 : 지금 김천)에서 세상을 떠났다. 운명 직전 “只知有國不知有身(단지 나라 있는 줄은 알았으나 내 몸 있는 줄은 몰랐다)”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 묘소는 고령군 쌍림면 고곡리 칠동산(七洞山) 유좌(酉坐)에 초취 및 재취 전주이씨(全州李氏)와 함께 삼위합분(三位合墳)이다. 선조 40년(1607년)에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정헌대부이조판서겸지의금부사(正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使)로 추서(追敍)되었다.

(註釋1) 만경창파욕모천(萬頃蒼波欲暮天)
저녁 때 저무는 하늘에 한없이 넓고 푸른 물결


(2) 이기춘(李起春)
 본관은 성산(星山)이며 자는 계욱(季郁)이고 호는 옥산(玉山)이다. 밀직사(密直使)를 지낸 언홍(彦洪)의 셋째 아들로 중종 36년(1541년) 태어났다. 고령군 대가야읍 본관2리 옥산마을에 옥산정사(玉山精舍)를 구축하고 벗들과 함께 성리학(性理學)을 강마(講磨)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송암(松菴) 김면(金沔)이 의병(義兵)을 일으킬 때 아무런 직책이 없이 일개 평민으로 진영(陣營)에 참여(白衣臨陳)하여 부시(賦詩)짓는 것을 부지런히 도왔다. 당세명현(當世名賢)이었던 낙강칠현(洛江七賢)과 교분이 두터웠으며 이들과 낙동강에서 뱃놀이를 하며 만경창파욕모천(萬頃蒼波欲暮天) 7자(七字)로 분운(分韻)하여 시를 지었다. 특히 송암(松菴) 김면(金沔)과는 동향(同鄕), 동갑(同甲)이므로 친형제같이 친하였다. 만년에 장재(張載)의 기철학(氣哲學)을 연구하였다. 선조 30년(1597년) 향년 57세로 졸(卒)하였다.

4. 도암서원(道巖書院) 상량문(上樑文)


유풍(遺風)으로 선비들을 기쁘게 하고 교화(敎化)를 또한 공평하게 기려서 이 사람의 어진 행적(行蹟)을 국가에서 드러내 밝혀 제사를 올리기 위해 제사 지낼 사당(祠堂)을 짓기 시작해서 들보를 다듬어 올리면서 부르는 노래 소리 들려오니 아! 아름답도다. 두 선생께서 나란히 이 고을에서 탄생해서 한 시대의 벗으로 여러 선비들에게 즐거움을 다주었습니다. 송암(松菴) 김(金)선생은 나라위해 자신을 잊고 곧은 소나무의 굳은 기개(氣槪)같이 늠름(凜凜)하였으며 옥산(玉山) 이(李)선생은 맑고 법도(法度)에 맞게 몸을 닦아 온화(溫和)하고 옥(玉)같이 환하며 뛰어난 품격(品格)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역사에 그 충(忠)이 기록되어 있고 정한강(鄭寒岡) 선생께서도 그 바르고 고상(高尙)함을 허(許)하였습니다. 무술(武術)을 닦아서 임금의 원한을 풀어 드렸고 단표(簞瓢)를 즐거워해서 선비의 일상생활이 편안했습니다. 추악(醜惡)한 오랑캐들은 그 위명(威名)에 기가 꺾이고 두려워하니 이로서 왜구의 포악함을 막아냈으며 향당(鄕黨)에서는 그 덕화(德化)에 훈자(薰炙)되어 간악(奸惡)하고 사특(邪慝)한 풍속이 저절로 끊어졌습니다. 이것이 어찌 다만 한 고을에만 잘 한 일이겠습니까? 마땅히 백세(百世)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사당(祠堂)을 세울 의논이 있었으나 선생이 돌아가신 이후에 물자(物資)와 인력(人力)이 약하고 쇠잔(衰殘)해서 어언간 세월이 흘러가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명성(名聲)이 더욱더 들리고 복덕성(福德星)이 임해서 비춰 주었습니다. 이미 여러 사람들이 그 일에 부지런히 일하고 이어서 힘을 빌리고 도와서 고을의 좋은 곳에 터를 잡고 많은 선비들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일을 했습니다. 백성에게 때맞춰 재목을 운반하는 일을 시키니 손에 잡고 하는 일이 한결 편안하고 수월하며 일을 지휘하는 것이 모두 실정(實情)을 헤아려 자기의 기능(機能)을 발휘(發揮)하게 하니 도끼는 도끼대로 톱은 톱대로 정도에 맞게 사용하여 그 옛날 풀이 무성하게 우거진 땅에 얼마 되지 않아 크고 넓은 집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멱 감고 바람 쐬며 놀 물과 언덕이 있고 이제 후생(後生)들이 바라던  바 선현(先賢)들을 높이 받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창건(創建)한 당년(當年)에 서로 함께 기쁨을 나누고 오늘 똑같이 모여 마루에서 향사(享祀)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우러러 보니 의표(儀表)와 형상(形象)은 예전 그대로이고 해타(咳唾)의 말씀소리와 몸기운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는 듯 합니다. 위대한 공적(功績)과 굳게 지킨 곧은 절개(節槪)는 지나간 역사에 휘영청 밝게 빛나고 후세에 남긴 명성(名聲)과 남은 운치(韻致)가 어찌 후세에 아름다운 혜택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로 인해 노래를 부르면서 격식(格式)에 맞추어 들보를 들어 올리는 것을 찬양(讚揚)하노라. 어기영차 들보를 동쪽으로 올리어 아침에 뜬 해를 앉아서 바라보니 이 땅의 인간 문명(文明)과 함께 밝아온다. 온갖 만물 이로 인해 몽매(蒙昧)에서 깨어나도다. 어기영차 들보를 남쪽으로 올리어 멀리 깊숙이 관부(官府)를 바라보니 사군(使君)은 유학(儒學)을 숭상하라 선포하고 현가(絃歌) 소리 귀에 가득 성인(聖人) 교화(敎化) 미쳤네. 어기영차 들보를 서쪽으로 올리니 공문(孔門)엔 처음부터 근원(根源)이 쇠락(衰落)하지 않았으니 바로 정상(精爽)은 고금(古今)이 따로 없음을 알았네. 응당 여러 선비 모두 같이 오르내리겠노라. 어기영차 들보를 북쪽으로 올리니 빼어난 가야산(伽倻山) 우뚝 솟아 하늘을 찌르는데 고산앙지(高山仰止)를 시경(詩經)에서 읊어보네. 높고 곧은 것 모두 사람 본받으리. 어기영차 들보를 위로 올리니 고인은 떠났어도 편안히 받들어서 이제야 우물에 앉아 하늘 보는 것 면하겠네. 천문(天門)이 활짝 열렸으니 넓고 크게 깨우치리라. 어기영차 들보를 아래로 하니 사당(祠堂)을 지어 기뻐하며 서로서로 축하하고 여러 선비 모여 강습(講習)하며 의지할 곳 생겼네. 이로 인해 명령(螟蛉)이 변화해서 나나니 벌 되겠네. 엎드려 바라건대 상량(上樑)한 뒤에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 가까이 있습니다. 봄가을로 향사(享祀)를 올림이여 예의범절(禮儀凡節)에 어김이 없고 집집마다 정주학(程朱學)을 본받음이여 풍속교화(風俗敎化)가 아름답고 좋아질 것입니다. 새는 구름속에 날고 물고기는 물속에 헤엄치고 노나니 이 은덕(恩德)의 아름다움에 어찌 있고 없는 간격(間隔)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파리가 천리마(千里馬)에 달라붙듯이 후학(後學)이 선현(先賢)을 본받고 개미가 고기냄새를 좋아하듯이 남들이 흠모(欽慕)하는 착한 행실을 하는데 원근(遠近)의 사림(士林)들이 싫어함이 없을 것입니다.

만력(萬曆) 재을사(再乙巳 : 1665년) 11월 상완(上浣 : 상순) 찰방(察訪)
이도(李) 삼가 짓다
(註釋1) 유풍(遺風)
유속(遺俗). 후세(後世)에까지 남겨진 교화(敎化)를 뜻한다.
(註釋2) 단표(簞瓢)
단사표음(簞食瓢飮)의 준말로 「대그릇의 밥과 표주박의 물」이라는 뜻으로, 좋지 못한 적은 음식(飮食)을 말한다.
(註釋3) 위명(威名)
위력 있는 명성
(註釋4) 덕화(德化)
덕행(德行)으로 교화(敎化)시킴
(註釋5) 훈자(薰炙)
어떤 스승이나 지도자(指導者)로부터 교화(敎化)를 받음
(註釋6) 사특(邪慝)
남에게 알려지지 않은 나쁜 일. 또는 숨기고 있는 비행(非行)이나 악행(惡行).
(註釋7) 복덕성(福德星)
길한 별이라는 뜻으로, ‘목성(木星)’을 민속에서 이르는 말.
(註釋8) 의표(儀表)
몸을 가지는 태도(態度), 예의(禮儀)에 맞는 차림새
(註釋9) 해타(咳唾)
윗사람·웃어른·학문이 뛰어난 사람 등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
(註釋10) 운치(韻致)
고아(高雅)한 품격(品格)을 갖춘 멋
(註釋11) 몽매(蒙昧)
어리석고 사리에 어두움
(註釋12) 관부(官府)
조정이나 관아(官衙)를 뜻함
(註釋13) 사군(使君)
임금의 명령(命令)을 받들고 나라 밖으로나 지방에 온 사신(使臣)을 말한다.
(註釋14) 현가(絃歌)
거문고 등을 연주하면서 부르는 노래.
(註釋15) 공문(孔門)
공자(孔子)의 문하(門下)를 일컬으며, 일반적으로 유교(儒敎)를 뜻함.
(註釋16) 정상(精爽)
정령(精靈 : 만물의 근원을 이룬다는 신령스러운 기운). 혼백(魂魄)을 뜻함.
(註釋17) 고산앙지(高山仰止)
《시경》 〈거할(車)〉에 “저 높은 산봉우리 우러러보며, 큰길을 향해 나아가노라.[高山仰止 景行行止]”라고 하였다. 덕이 높은 군자에 대한 존경을 뜻한다.
(註釋18) 우물에 앉아 하늘 보는 것
우물에 앉아 있는 것은 알지 못하고 망녕(妄靈)되게 하늘이 작다고 여기는 유생(儒生)들의 고지식한 태도를 뜻한다.
(註釋19) 명령(螟蛉)이 변화해서 나나니 벌 되겠네. 
명령(螟蛉)은 뽕나무벌레로 양자(養子)를 지칭한다. 《詩經》 〈小雅 小宛〉에 “명령의 새끼를 나나니벌이 업어 간다. 네 자식을 잘 가르쳐 너를 닮게 하라.[螟蛉有子 蠃負之 敎誨爾子 式穀似之]”하였는 바 본문에서는 후생(後生)들이 송암(松菴) 김면(金沔) 선생을 닮을 것을 기원하는 말이다.  

 

자료제공 :  각종 문헌 참고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최종동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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