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강서원(老江書院) 하편(下篇)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획/특집

노강서원(老江書院) 하편(下篇)

노강서원(다산면 다산로 92)

 

(2)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치도(致道)이며 호는 수암(遂菴)·한수재(寒水齋) 이다. 집의(執義) 격(格)과 돈영부(敦寧府) 도정(都正) 초로(楚老)의 따님인 함평이씨(咸平李氏) 사이에서 인조 19년(1641년) 태어났다. 사람됨이 중후(重厚)하고 확고하여 일찍이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현종 3년(1662년) 진사(進士)가 되어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현종 9년(1668년) 송시열(宋時烈)이 좌의정(左議政) 허적(許積)과의 불화로 우의정(右議政)을 사직하자 유임(留任)시킬 것을 상소하였다. 송시열(宋時烈)의 제자 가운데 김창협(金昌協)·윤증(尹拯) 등 출중한 인물이 많았으나, 그는 스승의 학문과 학통을 계승하여 훗날 ‘사문지적전(師門之嫡傳)’으로 불릴 정도로 송시열(宋時烈)의 수제자(首弟子)가 되었다. 숙종 15년(1689년) 남인(南人)이 희빈장씨(禧嬪張氏)의 소생인 원자(元子) 정호(定號 : 이름을 정함)를 할 때 세자 책봉(冊封) 문제로 서인(西人)을 몰아내고 재집권한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南人)이 득세(得勢)하자 송시열(宋時烈)은 제주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고 사약(賜藥)을 받게 되자 그는 유배지로 달려가 결별(訣別)을 고하니 송시열(宋時烈) 손을 잡아 말하기를 “학문은 마땅히 주자(朱子)를 주(主)로 하고 사업은 마땅히 효종(孝宗)의 대의(大義)를 주로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 송시열(宋時烈)의 유언에 따라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華陽里)에 만동묘(萬東廟)와 대보단(大報壇)을 세워 명나라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을 제향하여 명(明)나라를 높이는 의리(義理)를 밝힌 것이다. 그는 유일(遺逸)로 추천되어 우의정(右議政)까지 이르렀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의 문인 한원진(韓元震)과 이간(李柬)이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을 같은 것으로 보는가, 다른 것으로 보는가는 즉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을 가지고 서로 의견을 달리하자 사람과 사물의 성(性)이 동일하지 않다고 주장한 한원진(韓元震)의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에 가담하였다. 경종 1년(1721년)에 졸(卒)하였다. 그는 이단하(李端夏)·박세채(朴世采)·김창협(金昌協) 등과 교유했으며, 문하(門下)에서 배출된 제자로는 한원진(韓元震)·이간(李柬)·윤봉구(尹鳳九)·채지홍(蔡之洪)·이이근(李頤根)·현상벽(玄尙璧)·최징후(崔徵厚)·성만징(成晩徵) 등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가 있다. 글씨에 능하여 「기백이태연표(箕伯李泰淵表)」·「형참권극화표(刑參權克和表)」·「부사과이숙표(副司果李塾表)」 등의 작품을 남겼다. 경종 1년(1721년) 졸(卒)하였다. 저서로는 『한수재집(寒水齋集)』·『삼서집의(三書輯疑)』 등이 있다. 청풍(淸風)의 황강서원(黃岡書院) 등 10여 곳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註釋1) 사문지적전(師門之嫡傳)
스승의 문하에서 학문을 정통(正統 : 바른 계통)으로 이어받아 정통(正統)으로 전함
(註釋2) 위리안치(圍籬安置)
죄인을 배소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둠.
(註釋3) 대보단(大報壇)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내 준 명(明)나라 신종(神宗)의 은혜를 기리기 위해서 숙종 30년(1704년)에 세운 제단(祭壇)으로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기 위해서 절치부심(切齒腐心)하던 때에 청(淸)나라에 대한 불복의 뜻으로 창덕궁 금원(禁苑) 옆에 건물이 없는 제단 형태로 만들었다.

(3)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자는 덕소(德昭)이며 호는 남당(南塘)이다. 통덕랑(通德郞) 유기(有箕)와 숭부(崇阜)의 따님 함양박씨(咸陽朴氏) 사이에서 숙종 8년(1682년) 태어났다.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으로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 중 한 사람이다. 숙종 43년(1717년)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영릉참봉(英陵參奉)을 거쳐 부수(副率)에 임명되었으나 신임사화(辛壬士禍)로 노론이 실각하자 사직하였다. 영조 1년(1725년) 경연관(經筵官)으로 뽑혀 학문을 진강(進講)하며 영조의 총애를 받았으나,『맹자』의 ‘신하가 임금 보기를 원수처럼 한다(臣視君如仇讐)’는 구절을 인용하여 소론을 배척하다가 탕평책(蕩平策)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삭직(削職)되었다. 1741년 김재로(金在魯)의 구명운동(救命運動)으로 복직되어 장령(掌令)·집의(執義)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재지(才知)가 뛰어나고 사리에 밝았으며, 성리학설에 정통하였다. 그 밖에 율려(律呂)·천문(天文)·지리(地理)·병가(兵家)·산수(算數) 등의 서적까지도 깊이 연구하였다. 이이(李珥)-송시열(宋時烈)-권상하(權尙夏)로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하여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의 입장을 고수하였다.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는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다르다고 주장한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대표하였다. 영조 27년(1751년) 졸(卒)하였다. 저서로는 『남당집(南塘集)』, 『병계집(屛溪集)』, 『봉암집(鳳巖集)』 등이 있으며 한원진의 많은 저술 가운데 1741년 저술한 『주자언론동이고(朱子言論同異攷)』는 송시열과 권상하를 거쳐 50년 만에 완성된 한국 성리학사상의 거작(巨作)이었다. 정조 때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註釋1)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
이(理)와 기(氣)는 서로 떨어질 수 없어 흡사 일물(一物)과 같기 때문에 그 발용(發用)은 하나뿐이며 호발(互發)은 있을 수 없다고 하는 기본 전제 아래, 이(理)는 최고의 존재 원리이기는 하나 형체(形體)도 없고 스스로 운동·변화하지 못하며(理不能發), 형체도 있고 스스로 작용할 수 있는 기(氣)만 발(發)한다는 학설이다.

(4)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자는 서응(瑞膺)이며 호는 병계(屛溪) 또는 구암(久菴)이다. 명운(明運)과 경창(慶昌)의 따님인 전주이씨(全州李氏) 사이에서 숙종 9년(1683년) 태어났다. 우참찬(右參贊) 윤봉오(尹鳳五)의 형이다.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이다. 숙종 40년(1714년) 증광(增廣)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하였다. 정언(正言) 한덕전(韓德全)이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영조 1년(1725년) 청도군수(淸道郡守)가 되었다. 1733년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이듬해 장령(掌令)이 되었고, 1739년 집의(執義)에 이르렀다. 영조 17년(1741년) 부호군(副護軍)이 되었을 때 주자(朱子)를 보은(報恩) 춘추사(春秋祠)의 송시열(宋時烈) 영당(影堂)에 추봉(追封)할 것을 주장하다가 삭직(削職)되었다. 이듬해 다시 기용되어 군자감정(軍資監正)이 되었다. 1743년부터 사과(司果), 진선(進善), 서연관(書筵官) 등을 역임하였다.  1755년 찬선(贊善)을 거쳐 1760년 대사헌(大司憲)에 특별히 임명되었으며, 1763년 지돈녕(知敦寧)에 이어 공조판서(工曹判書)가 되었다. 한원진(韓元震)·이간(李柬)·현상벽(玄尙璧)·채지홍(蔡之洪) 등과 더불어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에서 수학한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으로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다르다고 주장한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대표하였다. 그는 사회적·현실적 활동보다 심성론(心性論)을 주로 한 성리학자(性理學者)로서의 입론(立論)에 치중했으며, 저술의 내용도 경전의 강의나 註釋 및 성리설이 주를 이룬다. 영조 43년(1767년) 졸(卒)하였다. 저서로는 『화양존주록(華陽尊周錄)』『병계집(屛溪集)』이 있다. 순조 8년(1805년) 좌의정(左議政) 서매수(徐邁修)의 청으로 문헌(文獻)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노강서원(老江書院)에 배향되었다.

(5)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자는 자동(子東)이며 호는 심재(心齋)·성담(性潭)이다. 송시열(宋時烈)의 5대손이며, 인상(寅相)의 아들로 영조 4년(1728년) 태어났다. 남달리 총명하여 어릴 때부터 『태극도설(太極圖說)』·『역학계몽(易嫀啓蒙)』·『가례(家禮)』 등을 배웠다. 영조 42년(1766년) 진사(進士)가 되고 영조 48년(1772년)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하였다. 영조 52년(1776년) 송시열(宋時烈)의 효종묘(孝宗廟) 배향(配享)과 『송자대전(宋子大全)』 간행의 명을 내리자 문정공(文正公) 묘(墓) 고문(告文 : 임금이 신하에게 일러서 깨우쳐 주는 글)을 지었다. 같은 해 선공감(繕工監) 감역(監役)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정조 23년(1797년) 사도시(司寺) 주부(主簿)가 되고,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시헌부(司憲府) 장령(掌令)·군자감정(軍資監正)을 거쳐 진산군수(珍山郡守)가 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순조 7년(1807년) 형조참의(刑曹參議)·예조참판(禮曹參判), 그후 공조판서(工曹判書)·의정부(議政府) 우찬성(右贊成)에 올랐다. 그는 학덕을 겸비하고 송시열(宋時烈)의 유업(遺業)을 이어 인망(人望)이 높았으며 당시 심성(心性)의 변(辨)으로 성리학계에서 논쟁을 벌일 때 한원진(韓元震)의 주장을 지지하여 노론(老論) 호론계(湖論系) 산림(山林)으로 평가받았다. 그는 학덕을 겸비하여 조야(朝野)의 존경을 받았으며, 문하에 화산(華山) 정규한(鄭奎漢), 규남(圭南) 하백원(河百源), 석연(石淵) 이우세(李禹世), 삼주(三洲) 신호인(申顥仁) 등 많은 선비가 모여들었다. 순조 3년(1807년)에 졸(卒)하였다. 저서로는 『성담집(性潭集)』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며 노강서원(老江書院)에 배향되었다.

6. 노강서당(老江書堂) 기문(記文)


화양(華陽) 송선생(宋先生) 즉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은 우리나라의 대로(大老)이다. 이 분의 학문은 주자(朱子)를 종주(宗主)로 삼고 있고 의리(義理)는 춘추(春秋)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주자의 사상(思想)과 배치(背馳)되는 무리들을 배척(排斥)함에 온 힘을 다하여 물리쳤고 춘추대의(春秋大義)를 세우는데 방해가 되는 무리들을 물리치는데 매우 엄정(嚴正)하였다. 성인의 도(道)와 법(法)이 끊어지거나 폐기(廢棄)되지 않고 세상에 밝게 회복되게 하는데 있어 이 분의 공(功)이 큼은 만세(萬世)토록 속일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유도(儒道)를 배반한 무리들이 이 분을 질시(疾視)하고 춘추대의(春秋大義)를 훼방하는 자들이 사건을 날조(捏造)하여 남으로 옮겨졌다 북으로 귀양보내었다. 또한 남북 천리길을 헤멘 지 10년 동안 하루도 그 몸을 편하게 쉬지 못하였고 끝내는 큰 화를 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선생의 직도(直道)와 대절(大節)은 시종일관(始終一貫)하여 그 한결같은 뜻은 변하지 않았으니 북두칠성(北斗七星)과 일월(日月)같이 높고 밝았다. 지금의 선비들이 오히려 주자(朱子)를 존중하여 그의 학문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알아 이르기를 “춘추대의(春秋大義)는 사회정신(社會精神)의 제방(堤防)이니 훼손시켜서는 안된다는 기풍(氣風)은 누가 주었는가?(바로 우암 송시열 선생이다) 그러니 이 분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선생께서 처음 거제로 귀양가셨다가 돌아올 때 성주의 강가에 도달하였는데 이 지역의 노인들로서 선생을 환영하여 경의를 표(表)하러 온 사람이 많았다. 선생께서 이들과 이야기하면서 기뻐 말하시기를 “노인들이 많은 동네(老多村)”라고 하였다. 이에 강을 노강(老江)이라 불렀고 당시의 강가 제방을 노방(老坊)이라 불렀다. 많은 노인들이 선생에게서 칭찬을 받은 것은 사람으로서는 영광이고, 산천으로서도(노강, 노방이라는 이름을 받았으니) 어찌 빛남이 없겠는가? 후에 이 지역의 인사들이 선생을 위하여 제사를 지내는 사당(祠堂)을 세웠으니 노강서원(老江書院)이 이것이다. 이곳에 추가로 배향(配享)된 분들은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이다. 서원을 관리한 분들로서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 단암(丹巖) 민진원(閔鎭遠),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가 가장 이름난 분들이다. 이 서원에서 강습(講習)한 것은 주자(朱子)의 학문과 춘추(春秋)의 의리(義理)이다. 고종황제 때 선생을 좋아 하지 않는 자들이 국명(國命)을 잡고 나라의 여러 서원들을 훼철(毁撤)하기를 상주(上奏 : 임금에게 아룀)하였는데 노강서원(老江書院)도 그 화를 면치 못하였다. 이로부터 50여 년간 성주지역의 선비들로 선생의 기풍(氣風)을 일으키고자 하는 자들은 속으로 신음(呻吟)하고 상심(喪心)하면서 지냈는데 지금에 이르러 선생의 기풍을 차마 잊을 수 없어서 서원의 옛터에 당우(堂宇)를 새로 짓고 노강서당(老江書堂)이라고 이름하였다. 그리하여 봄가을로 예사(禮事)를 행하고, 옛 학문을 강습하며 옛 의리 즉 춘추의리(春秋義理)도 강습하여 오래도록 끊어진 명성(名聲)를 잇게 되었다. 아! 지난날 주자(朱子)를 배반하고 춘추의리(春秋義理)를 훼손한 자 이분들이 오히려 의관을 쓴 도둑이거늘 오늘날 남의 나라말을 하고 남의 나라 옷을 입은 자들이 성현(聖賢)을 원수로 취급하고 예절과 의리를 멸시(蔑視)하여 온 세상을 어지럽히고 천지의 법도(法度)를 뒤집고 있으니 선생의 의리와 학문을 배우는 많은 선비들이 이런 상황을 누란(累卵)의 위기로 여길 뿐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러한 때에 이런 일을 한 것은 그 역시 선생께서 말씀하신 “몸은 미약하나 뜻은 커야 한다”라고 한 것과 부합(符合)될 것이다. 선생께서 일찍이 주자의 말에 감탄하시고 눈물을 흘리며 말씀하시기를 “난세(亂世)에 군자들을 생각하여 그 법도(法度)를 바꾸지 않아야 한다”라고 하였는데 이런 일은 여러분들에게 달려 있도다. 아! 밤중의 등불이 꺼지지 않으면 아침을 맞이할 수 있고, 깊은 땅속의 한줄기 양기(陽氣)도 끝내는 음기(陰氣)를 물리칠 수 있나니 여러분들은 더욱 힘써 선생의 뜻을 강화시켜 저 음란한 무리들을 물리쳐야 할 것이다. 주자의 학문은 태양과 같고 춘추(春秋)의 의리(義理)는 양기(陽氣)와 같거늘 태양이 다시 뜨지 않고 양기(陽氣)는 다시 회복되지 않는다는 저 몽매(蒙昧)한 무리들을 어찌 꾸짖을 것인가? 우리 선비들이 학문을 힘써 하지 않아 이러한 현재의 어지러운 세태(世態)에 책임이 있으니 어찌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대로(大老)의 후학(後學)이며 다로지향(多老之鄕)의 선비가 되어 노강서당(老江書堂)에서 학문을 강습하는 우리들은 이러한 상황을 더욱 엄중히 받아 들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정들을 노강서당(老江書堂)의 기문(記文)으로 지으니 이를 붓으로 기록한 자는 수양(首陽) 오진영(吳震泳)이며 기문을 짓도록 나에게 청한 자는 친구인 이종익(李鍾翼) 선비이다. 비봉산(飛鳳山) 둔실(遯室)에서 갑술년(甲戌年 : 1934년) 중양절(重陽節)에 쓰노라

파평(坡平) 윤병억(尹炳億) 삼가 쓰다

(註釋1) 대로(大老)
세간(世間)에서 존경(尊敬)을 받는 어진 노인(老人)
(註釋2) 종주(宗主)
크고 중요(重要)한 근본(根本)으로 삼는 데서의 우두머리
(註釋3) 춘추(春秋)
춘추대의(春秋大義)의 준말로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키고 행하여야 할 도리나 본분을 말한다.
(註釋4) 직도(直道)
사람이 행할 바 바른 길
(註釋5) 대절(大節)
죽기를 각오(覺悟)하고 지키는 절개(節槪)
(註釋6) 기풍(氣風)
기상(氣像)과 풍채(風采)
(註釋7) 당우(堂宇)
정당(正堂)과 옥우(屋宇)라는 뜻으로, 큰 집과 작은 집을 아울러 일컫는 말
(註釋8) 예사(禮事)
예로써 제사를 지냄
(註釋9) 춘추의리(春秋義理)
하늘을 대신하여 대의(大義)를 거스른 은(殷)을 징벌한 주(周)를 의리있다 한 것(공자의 尊周精神)이며, 이 의리를 춘추의리(春秋義理)라 하였다.
(註釋10) 다로지향(多老之鄕)
노인들이 많은 곳 즉 노강(老江) 인근 지역을 뜻한다.
(註釋11) 둔실(遯室)
은둔(隱遁)하면서 기거(起居)하는 방

 

구독 후원 하기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