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중독을 꿈꾼다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피니언

정아경(수필가)

요즘 내가 좀 이상해졌다. 이런저런 친구들 모임에 나가면 이야기에 집중을 못하고 구석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말귀를 못 알아듣는 숙맥같이 건성 따라 웃기만 한다. 몸은 모임의 공간에 두고도 생각은 읽다 만 글에 가 있으니 보나마나 내 눈빛도 허허했을 것이다. 혹시 이런 것이 중독현상인가? 모임이 길어지면 초조해지고 슬며시 짜증이 날 때도 많다. 이건 금단현상이 틀림없는데, 그렇다면 내게도 고지가 멀지 않는 것인가?


늦깎이로 공부를 시작한 나는 요즘 학교와 도서관을 오가며 지낸다. 그러는 내가 심란해 보이는지 친구들은 ‘떠나기 전에 내 청춘 즐기자’며 각종 달콤한 프로그램으로 나를 꾄다. 한 친구는 산이 좋은 건지 사람이 좋은 건지 산악회를 열심히 따라다니는 중이다. 도서관에 파묻혀 있는데 친구로부터 ‘이 나이에 공부해서 뭐하냐’는 문구와 함께 산 정상에서 찍은 사진이 올라왔다. 멀리 준봉들은 자욱한 안개에 묻혀 있고 그들이 서 있는 청량산 정상에는 햇살이 찬란하다. 환하게 웃음 짓는 산악회 회원들은 건강하고 씩씩해 보이고 그 곁에 나란히 선 내 친구의 표정은 상기되어 있다.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잠깐 휘청한다. 그러나 그뿐, 부러운 것은 아니다.


한때는 친구를 못 보면 불안하고 쓸쓸했는데 이즈막엔 책을 안 보면 불안하고 쓸쓸하다. 친구보다 책이다. 활자냄새를 맡아야 안정이 된다. 그런데 읽어도 읽어도 읽을거리는 쌓여만 간다. 한 권의 책을 읽으면 읽어야 할 책들이 열 권 스무 권으로 늘어난다. 차용·인용된 책들을 읽은 적이 없으니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했을 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읽으면서 메모해둔 책들의 목록을 보면 심장이 뜨거워진다. 얼추 미쳐가는 게 틀림없다.


내 지력이나 지성의 한계를 뻔히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이 미련함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내게 어떤 커다란 결핍이 있는 것일까. 공부는 투자하는 시간만큼 진척되지 않는다. 기억력이 가장 문제다. 기억했다 쳐도 그것을 표현하고자 하면 스멀스멀 안에서만 맴돌 뿐 그려지지가 않는다. 난감하다. 그러면서 책에 집착하는 건 또 뭔가.
나는 보편적 삶에 발맞추기를 은밀히 거부하면서도 결코 겉으로 드러낸 적은 없는 소심한 이단아였다. 그런 겁쟁이가 중년을 넘어오면서야 책이라는 절대적 자유의 공간을 발견했다. 책 속에선 일상을 벗어나지도 없는 마을을 찾아가는 무모한 탐험을 얼마든지 즐길 수 있다. 목숨 걸 일도 없고 목숨을 구걸할 일도 없다. 눈이 좀 아프고 골치가 좀 아픈 것은 차라리 쾌락에 가깝다. 중독성은 이 은미(隱微)한 쾌감과 함께 올 것이다.


일반적으로 중독이라면 마약·알코올·니코틴 중독 같은 약물 의존형이나 도박·게임 같은 충동조절장애를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렇게 부정적인 중독보다 긍정적인 중독이 더 많다. 강수진이 춤을 출 땐 중력이 사라진 세계를 나는 듯하지만, 날개처럼 유연하고 가벼워 보이는 그녀의 발은 토슈즈를 벗는 순간 깊은 상흔으로 얼룩져 있는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고목의 옹이처럼 불거진 수많은 상흔이 춤에 미친 여자의 발이다. 무엇엔가 미친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과학이든 학문이든 예술이든 최고를 이룬 것은 모두 중독의 결과다. 중독은 활(活)이며 화(花)다. 하여 나는 꿈꾼다, 중독을.


『호모 부커스』의 저자 이권우는 책읽기를 좋아해서 책만 읽다가 책읽기의 달인이 되었다. 그는 말한다. “한 개인은 난쟁이다.(…) 거인의 무동을 타야한다. 앞 세대가 이룬 빛나는 학문적 성취를 배우고 익혀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보이는 새로운 지평이 있는 법이다.” 나는 아직 ‘거인의 무동’을 탈 줄 모르고, ‘공자 되기’는 더더욱 멀고멀다. 다만 책속에 길이 있다. 책이 미래라고 말하는 그를 따르고 싶을 뿐. ‘비타민적 책읽기’의 효용을 섭취하다보면 스스로 치유하고 성장하여 책읽기는 마침내 혁명이 된다는 그의 설(設)도 의심의 여지없이 받아드린다. “팽창하는 우주의 책장 앞에서 우주적 유희를 즐길”줄 알아야 호모 부커스(Homo Bookers), 즉 책읽기의 달인이 된다는데…. 우주를 이지 않는 인간은 없지만 그렇다고 우주라는 것이 만인공통의 크기를 갖고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자기 경험만큼 만들어서 자기 능력만큼 이고 다니는 게 개개인의 우주일 것이니까. 내 작고 옹색한 우주도 읽고 또 읽다보면 쬐끔씩은 팽창하겠지. 아무려나, 권우씨가 안내하는 대로 한 번 흉내라도 내볼 참이다.


Beyond The Limit. 한계를 넘어서는 일은 중독 없인 불가능하다. 끊임없이 변신을 시도하고 다른 세상을 상상하면서 멈추지만 않는다면, ‘한계’라는 현실의 벽은 절로 사라지리라는 믿음은 어느 정도 확고해졌다. 이 믿음만이 내 유일한 무기이고 자산이다.

 

구독 후원 하기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