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나라> 더 아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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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수필나라> 더 아프고 싶다

정아경(수필가)

요즘 나는 아프다. 남편이 차려주는 아침밥을 심드렁하게 먹고는 침대로 돌아와 눕는다. 잠시 후, 커피와 책이 침대 여분의 공간에 올려진다. 방금 전까지 그가 누웠던 자리다. TV 리모컨까지 챙겨주는 것은, 책을 읽든 잠을 자든 푹 쉬라는 몸짓이다. 말이 생략된 그의 살뜰한 손길에 모처럼 충만한 감정의 늪에 빠져든다. 출근하는 남편에게 ‘수고해’ 라고 무심한 듯 답하지만 달려가 입이라도 맞추고 싶다. 침대 위에서 모닝커피를 마시다니! 이런 호사가 없다. 혼자서 엷은 미소를 지으며 그동안 나의 미련하고 아둔한 행동을 돌아보고 또 돌아본다.
3주전이다. 입시설명회에 가기 위해 이웃에 사는 J선생과 다정하게 이야기하며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던 중, 계단구석에 처박혀 버렸다. 수 십 년 끌어당겼던 중력은 그 순간 왜 나를 놓아버린 것일까. 내동댕이쳐진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다리를 부여안고 살이 울부짖는 소리를 신음으로 토해냈다. 마치 자신의 사고인양 애처로워하는 J선생을 안심시켜야 했고 시간도 빠듯했기에 마냥 널브러져 있을 수는 없었다. 스타킹 망을 비집고 나오는 미지근한 액체를 휴지로 누르며 설명회를 경청했고, 점점 부어오르는 다리를 절룩이며 모처럼 만난 동료들과 점심을 먹었다. 늦은 저녁까지 수업도 했다. 자고 일어나니 상황은 더 심각했다. 피부과에서 연고를 받고, 정형외과에서 사진을 찍었다. 왼손에 실금이 갔으니 2주정도 깁스를 하고 경과를 보자고 했다. 깁스, 내 것이라고 여겨본 적이 없는 생소한 그 단어가 나의 언어가 되어 손목을 휘감았다. 방금 병원에서 나온 여자가 자신의 깁스한 팔을 들여다보고는 싱글벙글 웃으며 청명한 사월 햇살 아래 걷고 있었다. 상처투성이 다리를 드러낸 미니스커트까지 입고서….
가족의 반응은 의외였다. 모두가 지극해졌다. 알람소리에 남편이 벌떡 일어나 밥을 안쳤다. ‘아하, 나 지금 아프지.’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 익숙해지라는 듯 왼손에 허연 붕대가 확대되어 눈에 들어왔다.
밥을 챙기는 남편과 학교 갈 준비를 하는 아이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들으며 다시 살풋 잠이 들었다. 그사이 아이들은 학교를 갔고, 남편은 밥 먹자며 나를 흔들었다. 몇 숟가락 뜨고, 침대로 돌아와 누우면 커피와 책을 챙겨주는 일이 연속되고 있었다.
신혼 초엔 아내인 내가 건강해야 내 가정이 건강하리라는 신념이 있었다. 미숙하던 그 시절의 나는 찬물에 막 씻어 올린 배추처럼 싱싱했고 남편은 내가 하는 모든 일을 대견해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혼자서 일과 육아를 거뜬히 해내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그도 그렇게 생각했고 나도 그랬다. 위로라도 받고 싶어 힘겨움을 호소할라치면 그네들이 더 성화였다. 남편은 ‘운전을 많이 해서 허리 아프다’ 큰 아이는 ‘야간자습으로 머리가 아프다’ 작은 아이는 ‘급식을 잘못 먹었는지 배가 아프다’며 날마다 제각각의 하소연이 줄줄이 이어졌다. 덜 아픈 사람은 없고 더 아픈 사람만 있었다. 약을 지어주고, 쓰다듬어 고통을 잠재우면서 내 것들은 감정 밑바닥에 가라앉혀야 했다. 내가 그중 덜 아픈 척 덤덤하게 웃고 넘겼지만 사실은 힘겨웠다. 그건 분명 상처였다. 피 나지 않았지만 아팠다. 사랑받고 보호받고 싶었던 열망의 자리에는 의무와 책임이 무겁게 들어앉았고, 허허로웠다. 말려지는 무처럼 시들시들 수분이 빠진 마음 고랑에는 서늘한 바람이 고여 있을 뿐이었다. 왜 이 사람은 나를 애처롭게 봐주지 않을까. 몰라준다고 마음으로 돌아앉기를 얼마나 반복했던가.
피는 꽃보다는 씨앗마저 다 떨군 마른 대궁이에,  들녘 가득 풍요롭게 출렁거리는 나락보다는 빈 들녘에 주저앉은 그루터기에 더 마음이 머문다. 제각각 말라가는 저 사물들을 통해 내가 발견하는 것은 틈이다. 여백이다. 그 틈새를 바람이 채우고 그 여백은 겨울 볕이 채운다. 틈과 여백에 의해 존재는 오롯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감상적 고독이 아니라 냉철한 본질이다.
마른 대궁이와 주저앉은 그루터기는 내 안에도 있다. 왼손의 상처는 조금 불편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감쪽같이 사라질 것이어서 아무것도 아니지만, 드러나 보인다는 것만으로 힘을 발휘한다. 이 작은 상처가 가족의 걱정과 관심을 끌기에는 그만이다. 깁스를 하니 타인의 손길이 필요할 경우가 많았다. 부탁하는 목소리는 나긋해지고 고맙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도와주는 이의 눈빛도 순했다. 혼자서 다하면 건강했던 날보다 더 만족한 나날이다.
상처가 체질인 내게 치유의 꽃이 피어나는 아침, 그럴 수만 있다면 더 아프고 싶다.

작가 프로필
대구문인협회, 에세이스트 작가회, 북촌시사 회원
수필집 : ‘나에게 길을 묻다’, ‘중독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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