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경(일러스트, 웹툰 작가) “죄송합니다.”무인기의 공손한 사과를 받고 나는 머쓱해져서 되물었다. “언제 추락한 거야?”“2034년 5월 19일입니다.”“…그럼 무려 5년째 이러고 있었단 거네.”“그렇습니다.”“어디 소속이야?”“기밀사항이라 밝힐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그런 것 치곤 불타다 남은 날개에 너무나 여봐란 듯이 미 공군 마크가 선명히 찍혀 있다. “나도 조난당했어. 차가 퍼져버렸거든.”“저도 통신 계통이 손상당해서 조난신호를 보낼 수 없었습니다. 혹시 통신 수단이 있으십니까?“있긴 한데, 여기선 신호가 안...
두고 이병화시인 여로 계절을 닮아가는 고난의 여정그림자 거울삼아 돌고 돌아어느덧 미수가 따라오네요 한 송이 꽃처럼 아름다움 이었는지… 스산한 새벽달 기러기처럼서걱대는 추억 품고 가지요 이성보다 감성을 가지고사슴처럼 기대고 싶은데 세월은 산을 넘고허허실실 여유가 행복인데 세월을 빗질하며 여유있게꽃처럼 웃으며 살고 싶다
이정란시인 27’어머니에게 삶이 꺾이는 숫자다남편을 가을나비처럼 떠나보낸 나이무거운 짐을 지고 다시 일어서야 하는 숫자이기도 하다 다시 92’서서 버티기가 버거운 숫자가 됐다지난날이 몸서리쳐지는 것이었을까이제 하나씩 버리고 계신다어머니의 머릿속은 자꾸자꾸 가벼워져자식조차 지울듯하다짐이자 꿈이었던 남매를 남겨놓고어머니 자꾸 멀어져 가신다 이제 93’더 가벼워진 어머니는쉽게 가실듯하고나는 숫자의 무정함에가슴 아파하고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모래언덕 너머로 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스패너를 도로 내려놓았다. 아무리 매뉴얼이 있다고 해도, 사륜구동의 미션계 따위를 내가 고작 스패너 하나로 수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애초에 시도를 하질 말았어야 했다. 박진경일러스트, 웹툰 작가 몇 개인가 미쳐 마저 조립하지 못한 부품들을 외면하며 나는 트렁크를 열어 생수를 한 병 따서 마셨다. 처음 오는 사막 탐험에 대비한답시고 생수와 식량을 트렁크에 꽉꽉 쟁여 오길 천만 다행이었다. 내일 낮이 밝으면 차에서 분리해낸 룸미러로 다시 조난...
이병연시인 아직 아니야 어느새 입춘이 지났네찬바람이 기웃대던 문풍지에봄 향기 사알짝 묻어나는 듯 오늘은 햇살 가득한언덕에 올라 볼까 뺨을 스치는 바람의 발톱이아직은 날카롭다 입춘은 와서내 마음에만 불을지피고 있었네 * 2020년 경북장애인종합예술제 시 부문 수상
곽도경시인 화가 목련, 날다 관음도에는 바다 위에도 목련이 피네 시린 물결 위에서꽃들은 짝을 짓고어린 꽃들이 태어나고 하나, 둘아니 백, 이백 송이바다 위에는온통목련 또 목련 겨드랑이 어디쯤이 가려웠을 거야날개가 돋기 시작한 꽃 어느새일제히 날아올라허공은온통괭이갈매기 또 괭이갈매기
한현정시인 / 소설가 “이게 다 너 때문이야.”겨울이의 가슴속에 쌓여 있던 울분이 폭발하고 말았어요. “엥, 무슨 소리야.”“너 때문이라구!”“내가 뭘 어쨌다구!”“네가 팽이 자랑만 안 했어도…….”“그러니까 더 좋은 팽이를 구해와. 불면 훅 날아가는 허접한 것 말고 말야!”민준이는 거만한 표정을 지었어요. 겨울이는 화가 나서 민준이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어요. 민준이도 겨울이의 멱살을 잡았어요. 둘은 뒹굴며 싸웠어요. 필사적으로 버티고 때리고 발로 찼어요. 사범들이 달려와 떼어놓지 않았다면 계속 싸웠을 거예요.돌아오는 ...
김청수시인 능소화 붉은 그늘 아래 풍경소리 등에 업고꼬리가 긴새 한 마리 날아든다 담 너머,바람이 다녀간 길 따라무량한 푸른 그리움의 넝쿨 사이로 수도승처럼 앉아 법석을 여는 붉은 얼굴들…… 오늘이 환히 빛난다
이종갑시인, 시조시인 마음의 꽃밭에다 통나무 집 하나 짓고빳빳하게 날이 선 갈대 같은 그리움에허공의 창문을 열고 구름을 쫓다보니 일없이 지나는 날 노을만 밟혀드네 씁쓸하게 켕기는 뜨거운 겨자 눈물누가 또 매운 고추를 베어 문 듯 아리다.
한현정시인 / 소설가 “아줌마, 얼마에요?”“음, 삼천 오백 원이구나.”겨울이는 천 원짜리 네 장을 분식집 아줌마 앞에 놓았어요. 아줌마는 백 원짜리 다섯 개를 남겨 주었어요.왠지 거스름돈이 무겁고 거추장스럽게 느꼈어요. 바지에 돈이 남아 있으면 엄마한테 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어요.태권도 수업도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아 딱히 갈 곳도 없었어요. ‘그동안 돈이 없어서 못 했는데 인형이나 실컷 뽑자.’겨울이의 눈이 빛났어요. 인형 뽑기 방에는 중학생 형이 세 명 있었어요.“아흐! 뽑을 뻔했는데…….”형들이 마음대로 되...
한현정시인 / 소설가 “더는 안 돼!”엄마가 딱 잘라 말했어요.“딱 한 개만! 응, 엄마!”겨울이는 간절한 눈빛으로 말했어요.“그게 얼만데?”잠시 마음이 흔들린 엄마가 값을 물었어요.“만 칠천 원이요!”“뭐? 만 칠천 원? 무슨 팽이가 그렇게 비싸!”엄마의 눈이 동그래졌어요.“날개가 달라요. 엄청 크고 튼튼하거든요.”“오나돼! 그렇게 비씬 물건은 사줄 수 없어. 안 그래도 할머니 때문에 정신없는데 팽이 사달라는 말이 나오나? 그건 그렇고 아까 학습지 하라고 한 건 다 했어?”엄마가 말을 돌렸어요.“아, 아직…….”“숙제...
서상조시인, 소설가 적도가 온다 사과나무는 왜 북극이 그리울까차츰 차츰 북쪽을 향해 가고 있다 한라봉도 따라가고적도가 고향인 바나나도 뒤를 따른다 나도 버티고 버티다가 언젠가는 저 나무들의 뒤를 따라가야 하지 않을까 적도가 밀려오고 있으니 올해 여름은 더 덥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