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19.11.12 (화)

성주이씨(星州李氏) 승암재(勝巖齋)

주간고령 편집부 2019-07-05 (금) 18:02 4개월전 156  


승암재(덕곡면 덕운로 740)

 

정자(亭子)는 풍류를 즐기고 경치를 완상(玩賞)하는 심리적 공간이며 재실(齋室)은 선조의 유덕(遺德)을 추모하고 종사(宗事)를 논의하는 종회(宗會)의 장소이다. 선인(先人)들의 숨결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고령지역의 정자(亭子)와 재실(齋室)의 유래를 격주 간격으로 연재해 소중한 문화유산인 정자(亭子)와 재실(齋室)을 재조명하는 기회를 가지고자 한다. 

 

 


1. 승암재(勝巖齋) 유래(由來)

이 건물은 고령군 덕곡면 가륜리 667에 위치하고 있으며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고 광평부원군(廣平府院君)에 피봉(被封)된 승암공(勝巖公) 이인임(李仁任)을 추모(追慕)하여 공의 묘지 아래에 후손들이 1920년 건립한 재사(齋舍)이며 1995년 중건(重建)하면서 율리서원(栗里書院)도 세웠다. 조부는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지고 문열공(文烈公)의 시호(諡號)를 받았던 이조년(李兆年)이고 아버지는 검교시중(檢校侍中)에 이르렀고 성산군(星山君)에 봉하여 졌으며 경원공(敬元公)의 시호(諡號)를 받았던 이포(李褒)이다.

2. 건축형태

건물 입구에는 1칸의 출입문(出入門)을 두었고 둘레에는 담장을 둘렀다.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좌우측에 각 1칸의 온돌방을 두었고, 가운데 1칸은 대청을 깔았다.

3. 추숭(追崇) 인물(人物)

승암공(勝巖公) 이인임(李仁任)의 본관은 성주(星州)이고 자는 자중(子重)이며 호는 승암(勝岩)이다. 검교시중(檢校侍中)을 지낸 포(褒)와 대사성(大司成) 문우(文遇)의 따님인 군부인(郡夫人) 경주설씨(慶州薛氏) 사이에서 충선왕 4년(1312년)에 고령군 운수면 연봉리(延鳳里)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처음 문음(門蔭)으로 전객시승(典客寺丞)이 된 후 전법총랑(典法摠郎)을 거쳐 공민왕 7년(1358년)에는 좌부승선(左副承宣)이 되었다. 이듬해 홍건적이 침입해 의주를 함락시키자 서경존무사(西京存撫使)에 임명되어 홍건적에 대비했고, 1361년의 재차 침입했을 때에도 크게 활약하였다. 1363년에는 원나라가 덕흥군(德興君 : 충선왕의 셋째 아들)을 왕으로 삼아 고려에 들이려 하자 서북면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 겸 평양윤(平壤尹)이 되어 덕흥군 일파의 침략을 물리친 출정군의 식량을 조달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이어 삼사우사(三司右使)·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좌시중(左侍中)을 지내고, 순성동덕보리공신(純誠同德輔理功臣)의 칭호를 받았다. 1374년(공민왕 23) 잠시 면직되었다가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임명되었고 광평부원군(廣平府院君)에 책봉되었다. 공민왕(恭愍王)이 피살되자 명덕태후(明德太后)와 시중(侍中) 경복흥(慶復興)이 종친을 새로운 왕으로 세우려 하자 자신의 일파와 모의해 나이 10세의 어린 우왕(禑王)을 즉위시켰다. 한편 당시 고려에 와 있던 명나라 사신 채빈(蔡斌)이 공민왕 피살사건을 본국에 보고해 책임이 재상인 자신에게 돌아올까 염려해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채빈(蔡斌)을 호송관 김의(金義)로 하여금 살해토록 하고, 그 동안 배척당했던 원나라와 가깝게 지내려고 하였다. 이에 삼사좌윤(三司左尹) 김구용(金九容), 전리총랑(典理摠郎) 이숭인(李崇仁), 전의부령(典儀副令) 정도전(鄭道傳), 삼사판관(三司判官) 권근(權近)이 정부의 친원(親元) 외교정책(外交政策)을 비판하고, 우헌납(右獻納) 이첨(李詹)이 이인임(李仁任)과 찬성사(贊成事) 지윤(池奫)의 죄목을 열거하며 이들을 목 벨 것을 상소했다. 그러자 최영(崔瑩)·지윤(池奫) 등과 합심해 이첨(李詹)·전백영(全伯英)을 사기죄로 몰아 유배시키고 김구용(金九容)·이숭인(李崇仁)·정몽주(鄭夢周)·임효선(林孝先)·정사도(鄭思道)·박형(朴形)·이성림(李成林) 역시 자신을 해치려 한다며 모두 유배시켰다. 반대세력을 제거한 후, 지윤·임견미(林堅味)·염흥방(廉興邦)과 함께 권력을 휘두르며 관직(官職)과 옥(獄)을 팔고 전국에 걸쳐 토지와 노비를 축적하는 등 탐학(貪虐)을 일삼았다. 이어 영문하부사(領門下府事)·영삼사사(領三司事)를 거쳐 영중방 사헌 개성부사(領重房司憲開城府事)에 임명되었고, 우왕 12년(1386년)에는 다시 좌시중(左侍中)이 되었다가 1387년 노병(老病)으로 사직하였다. 1388년에 염흥방(廉興邦)의 가노(家奴) 이광(李光)이 주인의 권세를 배경으로 전직 밀직부사(密直副使) 조반(趙胖)의 토지를 빼앗자 이에 격분한 조반이 이광을 죽였다. 이에 염흥방(廉興邦)이 조반(趙胖)을 국가모반죄(國家謀叛罪)로 몰아 순군(巡軍)에 가두고 심하게 고문시킨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그 동안 기회를 엿보던 우왕(禑王)·최영(崔瑩)·이성계(李成桂) 등이 오히려 염흥방(廉興邦)·임견미(林堅味)·왕복해(王福海) 등을 처단하고 그 일파를 유배시켰는데, 이 때 공(公)도 임염(林廉)의 옥사(獄事)에 연좌(連坐)되어 경산부(京山府) 즉 고령군 덕곡면 가륜리 신율리로 귀양왔다가 1388년 6월에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덕곡면 신율리(新栗里) 간좌원(艮坐原)에 있으며 배위는 순천박씨(順天朴氏)이며 진한국부인(辰韓國夫人)으로 봉해졌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성주이씨 대동보(신묘보) 세덕편

4. 승암재기(勝巖齋記)

고령군 율리(栗里) 마을에 재각(齋閣)이 연기구름이아득히 피어나는 경치속에 높다랗게 나타나 있는 것은 우리 숙선조(叔先祖)인 승암공(勝巖公)의 묘재(墓齋)이다. 공(公)은 고려 공민왕 시대에 출생하셔서 안으로는 문열(文烈 : 이조년), 경원(敬元 : 이포), 문충공(文忠公 : 이인복)의 가학(家學)을 이어 받고 밖으로는 불훤재(不諼齋) 신문정공(申文貞公 : 신현)의 학문의 연원정맥(淵源正脈)을 이어받아 밝혀 목은(牧隱 : 이색), 포은(圃隱 : 정몽주)과 더불어 교우(交友)하여 사림(士林)의 여러 장로(長老)들의 충(忠)과 의(義)의 단일한 사전(師傳 : 스승에게서 전수함)을 강명(講明 : 연구하여 밝힘)하여 양대(兩代 : 공민왕, 우왕)의 조정(朝廷)을 두루 섬겨 쌍성(雙城)의 옛 강토(疆土)를 수복(收復)하였으며 홍건적(紅巾賊)의 큰 난리를 토벌(討伐), 평정(平定)하고 왕명(王命)을 받아 요양(遙陽)에서 최유(崔濡)를 토벌(討伐)하여 마침내 왕위(王位)를 회복(回復)하였으며 태후(太后)의 뜻을 받들어 홍륜(洪倫)이 임금을 시해(弑害)한 죄(罪)를 고가(藁街)에서 환열형(轘裂刑)을 하여서 나라님의 원수(怨讐)를 갚았으며 선생의 고명(顧命 : 임금이 임종 때에 세자 및 신임하는 신하에게 뒷일을 부탁하여 남기는 말)을 받아서 종실(宗室) 및 대신(大臣)들과 함께 의논하여 원자(元子 : 임금의 맏아들)를 왕으로 책립(策立 : 황태자나 황후를 황제의 명령으로 봉하여 세우던 일)하여서 종사(宗社 : 나라)를 안정하여 그 충성은 성대(盛大)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국권(國權)을 잡아 중립(中立)하여 정사(政事)를 결정지어서 중인(衆人 : 뭇사람)의 노여움과 많은 사람들에게 시기(猜忌)됨은 사세(事勢)가 필연(必然)하였기에 필경(畢竟)엔 임견미(林堅味), 염흥방(廉興邦)의 옥사(獄事)에 연좌(連坐)되어 고향으로 내쳐져 겨우 갑옷깃을 보존해서 승암리(勝巖里) 저택(邸宅)에서 돌아가셨다. 조정에서 공의 사직(社稷)을 지킨 공훈(功勳)을 특별히 아껴서 여기에 예장(禮葬)하고서 뇌사(詞)를 내려주시고 시호(諡號)를 내려주셨다. 아! 공(公)의 평생(平生)의 공명(功名), 사업(事業), 절의(節義, 위망(位望 : 지위와 명망)은 천지(天地)에 우뚝 드러나며 일월(日月)을 꿰둟었다고 할만하다. 어찌 그 가운데서 사사(私事)로운 논의(論議)가 있으랴! 다만 운명(運命)이 많이 어기어짐이 한탄(恨歎)된다. 돌아가신지 얼마 아니하여 조준(趙浚), 오사충(吳思忠)의 무리가 날조(捏造)한 탄핵(彈劾)을 부당(不當)하게 받고 또 윤이(尹彛), 이초(李初) 등에게 국계(國系)의 거짓말에 크게 무함(誣陷 : 없는 사실을 그럴듯하게 꾸며서 남을 어려운 지경에 빠지게 함)을 당해 공을 난신적자(亂臣賊子 : 나라를 어지럽히는 신하)의 대오(隊伍)에 두었으니 공은 영혼(靈魂)이 있다면 구원(九原 : 황천길)에서 흐느껴 울 것이다. 홍문충(洪文忠), 윤월정(尹月汀), 신상촌(申象村), 최상사(崔上舍), 제현(諸賢)이 잇달아서 힘을 다하여 신변(伸辨)한 바인데 지금 후손인 모(某)가 개연(慨然)히 차탄(嗟歎 : 탄식하고 한탄함)하여 제가(諸家 : 문중의 여러 집안)의 사승(史乘 : 사기)를 널리 상고(詳考 : 꼼꼼하게 따져서 검토함)하여 실기(實記) 한 편을 편성하여 난사(亂史 : 어지러운 역사)의 무함(誣陷)된 기록을 바루었으며 수묘립비(修墓立碑 : 묘를 정비하고 비를 세움) 정사(精舍)를 묘문(墓門)에 영축(營築)하기에 이르렀다. 선세(先世 : 선대)에서 하지 못한 대역사(大役事)를 훌륭히 이룩한 자는 모모(某某)의 군현(君賢)들이다. 나를 공의 사행(事行)을 상세히 안다고 하여 그 사행(事行)을 기술(記述)하기를 부탁하기에 그런대로 그 개략(槪略 : 개요)를 기술(記述)하여 이를 당벽(堂壁 : 집의 벽)에 걸어 동서남북의 사대부(士大夫)가 이 마을을 지나치면서 의(義)로움을 모앙(慕仰)하는 자로 하여금 흥감(興感 : 마음이 움직여 느낌)하는 바를 깨닫게 하노라.
(註釋1) 고가(藁街)
한대(漢代) 장안성(長安城) 남문 안에 만이(蠻夷)가 살던 거리의 이름. 죄인을 참수(斬首)하여 이 거리에 효시(梟示)하였음. 수괴(首魁)의 머리를 베어 만백성들에게 경계를 삼으려 보였다는 것이다.
(註釋2) 환열형(轘裂刑)
팔과 다리를 각각 다른 수레에 매고 수레를 끌어서 죄인을 찢어서 죽이는 형벌로서 거열형(車裂刑)이라고도 하였다.
(註釋3) 뇌사(詞)
죽은 사람의 살았을 때 공덕을 칭송하며 문상(問喪)하는 말이다.
(註釋4) 윤이(尹彛), 이초(李初) 등에게 국계(國系)의 거짓말
일찍이 본국의 반역자 윤이(尹彝)와 이초(李初)가 태조 초기에 중국의 명나라에 들어가서 국계(國系 : 우리나라 왕실의 계통)를 무고하여 조선의 태조 이성계를 비롯한 조선의 국왕은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이라고 거짓말을 하였던 사실을 말하며 ‘종가의 혈통을 사리를 따져서 억울함을 밝힌다’는 뜻의 종계변무(宗系辨誣)는 선조 때 일단락되었다.
(註釋5) 갑옷깃
부귀인(富貴人)의 옷
(註釋6) 신변(伸辨)
신원변명(伸寃辨明)의 준말로서 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어 버리기 위한 변명을 말한다.
후손 도복(道復) 지음

5. 문하시중(門下侍中) 광평부원군(廣平府院君) 관련 시(詩)

(1) 恭愍王(공민왕) [贈 勝巖公(증 승암공)] : 공민왕이 승암공에게 줌
瑞明行白玉(서명행백옥)
단정하고 밝음이 백옥같으며
純粹似精金(순수사정금)
순수함이 마치 잘 다듬어 놓은 금과 같더라
太和陽春樹(태화양춘수)
크게 화한 기운은 봄날의 뻗어가는 나무와 같으나
猗古復見今(아고복견금)
옛날의 아름다움을 이제 보게 되도다.

(2) [老年寓吟(노년우음) : 노년에 우거하면서 읊은 시(승암공 이인임)
宦海浮沈二十年(환해부침이십년)
벼슬길 부침(浮沈) 이십년
長江嗚咽不平嗚(장강오인불평오)
긴 강의 불평을 안고 울먹이네.
殘花杜宇聲中落(잔화두우성중낙)
쇠잔한 꽃은 두견새 울음에 떨어지고
芳草王孫巨後生(방초왕손거후생)
왕손이 간 뒤의 방초는 살아있더라.
金馬玉堂非我願(금마옥당비아원)
금마와 옥당은 나의 원하는 것 아니고
靑山綠水有誰爭(청산녹수유수쟁)
청산과 푸른 물은 누가 다투고 있나
倘罷天荒作國禎(당파천황작국정)
아마 하늘이 받침대를 파하게 했을 것이니라.

(3) [勝巖公侍恭愍王金苑夜韻(승암공시공민왕금원야운)]
 승암공이 공민왕을 모시고 금원에서 밤에 읊음
霜後能黃霜後紅(상후능황상후홍)
서리 내린 뒤에 노랗고 또 붉어지고
楓林菊卉共秋風(풍림국훼공추풍)
단풍 숲과 국화가 함께하는 가을바람이러라
九江煙外無窮樹(구강연외무궁수)
구강의 연기 넘어 끝없이 들어선 나무들
澎澤樽前有幾叢(팽택준전유기총)
팽택 술자리 앞에 얼마나 많은 국화 모듬인가
金苑巖花香馥馥(금원암화향복복)
금원의 바위 꽃은 향기가 성하게 넘치고
玉階斜月影形形(옥계사월영형형)
대궐안의 섬돌에 비친 달그림자 아름다운 광채가 빛나도다
吾王不啻探花惠(오왕불시탐화혜)
우리 임금님 꽃을 즐거워하는 은혜뿐만 아니고
聊識乾坤造化翁(요식건곤조화옹)
애오라지 천지의 조물주임을 알게 되도다.

(4) [鄭圃隱公次勝巖公弄月亭韻(정포은공차승암공농월정운)]
十載經營屋數椽(십재경영옥수연)
십년 동안 경영하여 두어칸 집을 짓고
錦潭之上月峯前(금담지상월봉전)
금담 위 월봉의 앞이더라
桃花浥露紅淨水(도화읍로홍정수)
복숭아꽃은 이슬에 젖어 붉게 강물위에 뜨고
柳絮飄風白滿船(유서표풍백만선)
버들개지 바람에 휘날려 하얗게 배에 넘치더라
石逕歸僧山影外(석경귀승산영외)
돌길 돌아가는 중은 산 그림자 밖이요
烟沙眠鷺雨聲邊(연사면로우성변)
잠긴 모래밭 졸고 있는 해오라기 빗소리이더라
如今摩詰遊於此(여금마힐유어차)
지금에 와 마힐이 이에 놀고 있는 것 같을진대
不必當年畵輞川(불필당년화망천)
반드시 당년에 망천의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 것이로다.
(註釋) 마힐(摩詰)
중국 당나라의 시인ㆍ화가(699?~761?)인 왕유(王維)로서 자는 마힐(摩詰)이고 벼슬은 상서우승(尙書右丞)에 이르렀으며 중국 자연시인의 대표로 꼽히며 남종화의 창시자로 불린다. 작품에 시집 ≪왕우승집(王右丞集)≫이 있다.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이 성주이씨 대동보 세덕(世德)편(2011년) 및 기타 문헌에 근거하여 집필했고 최종동(崔鍾東) 국장이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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