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19.07.22 (월)

“내 고향은 내가 지킨다!” 자체 특공대 조직 지역 지켜내

주간고령 편집부 2019-06-21 (금) 18:07 30일전 24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남기신 명언이 모두의 마음에 절실하게 다가오는 때이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매년 이맘때면 동족상잔의 6·25를 떠올리며 오로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숭고한 희생을 치른 호국의 영웅들을 생각하게 된다. 70여 년 전 참전 유공자들이 우리 곁을 대부분 떠나고 있어 그 어르신들의 생생한 소식을 듣기에도 이제 시간이 없다. 이번호에는 당시 “내 고향은 내가 지킨다”며, 자체 특공대를 결성해 지역을 훌륭히 지켜낸 덕곡면 원송리 서상화(90) 어르신으로부터 긴박했던 당시의 활약상을 들어본다.  -편집부-

 

덕곡면 원송리 호국영웅 서상화 어르신 


- 6·25 한국전쟁 얘기를 들려주십시오

△만 스무 살에 터진 전쟁은 전 국토를 초토화 시켰다. 1950년 6월 25일 날이 새기 전 새벽을 틈타 탱크를 앞세우고 밀고 내려 온 공산군은 말 그대로 파죽지세였다.
낙동강을 경계로 대구·부산만이 남았고 전 국토가 공산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인천 상륙작전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 무렵 내 고향 덕곡면도 예외는 아니어서 지리산과 가야산 해인사에 은거하던 빨지산이라는 공비들의 습격이 빈번했다. 경찰의 힘으로는 방어가 힘들어 자체 특공대를 모집할 수밖에 없었다.

- 특공대에 자원하게 된 동기가 있습니까?

△나라가 풍전등화인데 국민이라면 누구라도 안일하게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지요. 나도 스무 살에 특공대에 합류했습니다. 군복도 없고 군번도 없지만 “내 고향은 내가 지킨다”는 자부심과 열정만은 컸습니다.
한 분대 12명으로 3개분대로 조를 짜서 낮에는 훈련을 하고 밤에는 초소에서 근무를 하면서 공비들의 습격에 대비했습니다.
당시는 전후방이 따로 없고 전 국토가 전장(戰場)이어서 수많은 군인들이 적군들과 마주하고 싸웠고, 그에 못지않게 우리들은 후방에서 내 지역을 지키기 위해 많은 애를 쓴 것만은 지금 생각해도 보람 있었던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 국가 위기 때 지역 치안에 도움을 줄 수 있었다는 자부심 크다

△야간에 공비들의 습격이 잦기 때문에 한 시도 긴장을 풀 수가 없이 완전무장하고 초소를 지키며 가야산 방향 감시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산 쪽에서 라이터불이 켜지는 모습을 발견하고 초소에 함께 있던 경찰관이 지체 없이 박격포를 발사했지요. ‘아뿔사!’ 그런데 그 박격포가 어떤 물체에 부딪혀 파편이 우리를 덮치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대원 한 사람이 즉사하고 몇 사람이 다치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 때 함께 있던 나도 부상을 조금 입었는데, 죽고 다치는 난리 통이라 그 라이터 불이 공비 소행인지 끝내 확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 한 번은 아군끼리 총질을 한 기억도 있습니다. 성주 수륜쪽에서 백운동으로 올라온 특공대를 공비로 오인해 사격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겼다. 다행히도 일찍 확인되는 바람에 큰 불상사 없이 끝난 아찔했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야간에 공비들이 배가 고파 민가를 습격하는 일이 잦다보니 경찰이나 특공대원들이 예민할 수밖에 없었고, 한 시도 마음을 놓지를 못했던 기억이 70여년이 흘렀지만 너무도 또렷하게 생각난다.
틈틈이 고령읍내 방향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군청이 불탔네, 우체국과 등기소도 무사하지 못하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우리들은 더욱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낡은 소총이라도 있었으니 우리 특공대원들은 경찰을 도우며 주민들을 보호하는데 큰 힘이 될 수 있었다.

- 휴전과 동시에 특공대 해체되고 군에 입대

△1953년 9월 휴전이 되고 그해 10월에 육군 제2훈련소로 군에 입대해 군 생활이 시작됐다.
헌병학교를 졸업하고 15사단 헌병중대에 배치 받아 초소 근무를 했다. 비록 휴전은 됐지만 어수선했던 나라의 분위기 때문에 항시 긴장 상태로 근무했던 기억이 있다.
1958년 만 5년의 군 생활을 마치고 예비역에 편입됐다.

- 35세에 교회 장로가 되다

△“비교적 이른 나이인 35세에 장로가 돼 지금은 은퇴 장로지만 55년 동안 장로(원송교회)로 있는 사람은 아마도 흔치 않을 거요”라며 웃으신다.
서상화 어르신은 아직도 기억력이 또렷하시다. 특공대 생활을 같이 했던 이름들을 줄줄 외우시고 당시 경찰서장 이름까지도 또렷하게 기억하신다.
다만, “전우들 중 살아있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대목에서는 만감이 교차하시는 듯 말을 잇지 못하신다.

- 4남매가 각자의 몫을 다하고 있어서 행복하다

△서상화 어르신의 가족으로는 부인 양금주(87세) 여사와 슬하에 2남2여 4남매를 뒀다.
장남은 현재 서울에 있는 기업에서 이사로 있고, 차남은 H자동차 차장으로 근무중이고, 장녀는 창원에서 개인 사업, 차녀는 구미에 산다고 하신다.
배석한 최중강 덕곡면 노인회장은 “4남매 모두가 각자의 제몫을 다하고 있고, 하나 같이 효성이 지극해 어르신 내외는 남부러울 게 없이 행복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고 귀띔한다. 

최종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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