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19.11.13 (수)

학도병 지원…국군과 인민군 넘나든 드라마 같은 인생

주간고령 편집부 2019-06-14 (금) 13:53 4개월전 230  




덕곡면 덕운로 호국영웅 윤경호(85) 어르신 재조명

 


6·25 한국전쟁 때문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윤경호 어르신으로부터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당시의 긴박했던 순간의 기억들을 재조명해 보기로 했다. 나라가 풍전등화인데 미적거릴 여유조차 없어서 16세(고령중 3학년) 소년이 학도병을 자원에서 전장에 투입됐다. 중공군 포로, 인민군 강제 입대, 남파간첩 교육, 미군에 투항, 국군에 복귀 등 전쟁 기간 동안 말 그대로 드라마 같은 파란만장한 경험을 했다. 이렇게라도 증언해 주실 어르신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 안타깝다.   -편집부-

 

 

▣전쟁에 대한 남다른 경험을 말씀해 주세요

한반도를 적화 통일하려던 김일성의 야욕에서 빚어진 전쟁, 남침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50일째는 한반도의 남단인 대구에 포탄이 떨어져 대구와 부산만 남은 풍전등화의 위기였다.


어린 나이에도 공부보다 나라가 먼저라는 오직 구국의 일념으로 중학교 3학년 열여섯 어린 나이에 학도병을 지원해 전장에 투입됐다. 치열했던 포항 전투를 거쳐 북진 중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포로가 됐다.

 
그 후 인민군에 강제로 입대 당해 남쪽 부모 형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눠야만 하는 기막힌 당시의 처절했던 현실을 겪었다. 그러다 하늘의 도움으로 꿈에도 그리던 나의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인민군 포로생활의 비참했던 실상을 후세들에게 알리기 위해 10여 년 전, 기억을 더듬어 ‘16세 소년의 절규’라는 한국전쟁의 생생한 고발 수기를 한 권의 한국전쟁 수기를 펴냈다.

6.25 당시 고령이 안전한 곳이 못된다고 너나할 것 없이 대구 방향으로 피난길에 합류했다. 어느새 낙동강 철교 앞에는 피난 인파로 인산인해가 됐다. 철교를 막고 있던 군인이 어쩔 수 없었던지 통행을 허락했다.


철교를 건넌지 채 30분도 안 돼 지축을 뒤흔드는 폭음이 들렸다. 낙동강 다리가 폭파된 것이다. 논공의 어느 과수원댁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보리밥에 된장국으로 먹은 아침밥이 꿀맛이었다는 것이 세월이 많이 지났지만 또렷하게 기억난다. 그리하여 도착한 곳이 대구에 외할머니뻘 되시는 친척집이었는데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셨다.

▣친구의 권유로 학도병에 지원하다

그 무렵 고령 한동네 사는 중학교 동창 김재한 군이 어떻게 알고 우리가 피난하고 있는 집으로 찾아왔다.


재한이는 “경호야, 우리 학도병에 지원 입대하자. 나라가 위급한데 우리라도 힘을 보태자”라고 했다. 그 순간 친구가 그렇게 커 보일 수가 없었다. 나도 바로 동의했다. 문제는 아버지의 허락이었다. 가족에게 늘 위엄과 엄격하신 아버지를 설득하는 게 걱정이었지만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친구와 대구역에 있는 학도병 모병소로 갔다.


어린 우리를 본 모병관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너무 어리고 왜소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용감하게 싸울 수 있습니다” 라며 큰소리로 말하자 모병관은 “용맹성을 보이니 대열에 들어가 서”라며 받아줬다.


저녁에 집에 와서 아버지에게 고했는데, 예상대로 불호령이 떨어졌다. “야! 이놈아~ 군대가 어떤 곳인지 알고 천지도 모르고 날뛰노” 한참의 설득으로 “너 정말 후회 안하고 아무 탈 없이 갔다 올 자신 있나?” “예, 아무 탈 없이 잘 싸워 이기고 남북통일 시켜 놓고 오겠습니다.” 라며 호기를 부렸다.

▣육본 직할 독립 제1유격대 배속, 장사상륙작전에 투입

야간 화물열차로 이동했고, ‘육본 직할 독립 제1유격대’라는 부대에 배속됐는데, 다행히 친구 김재한과 같은 소대로 편성됐다. 밀양에서 일주일간의 짧은 군사훈련을 끝내고 부산진 육군본부 청사로 이동 본격적인 유격훈련을 받았다.


장비는 소련제 무기로 인민군으로부터 노획한 장총, 따발총, 수냉식 기관총, 82미리 박격포 등이었다.

마침내 그해 9월 13일 동해안 장사상륙작전에 투입됐다. 삼천톤급 배를 타고 상륙을 시도했다. 적군이 쏜 기관총알이 선장실을 뚫고 들어와 부상자가 속출했다. 갑판이 열리자 먼저 뛰어 내린 20여명이 안타깝게도 수장되고 말았다. 사투 끝에 해안 지역을 점령하는 성과를 올렸다.


인민군 적지에 들어가 1주일동안 사선을 넘나드는 혈전을 치르고 부산으로 귀환했다. 장사상륙작전은 1950년 9월 14일 새벽 5시를 기해 인천상륙작전의 양동작전으로 적 후방을 교란하고 보급로를 차단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미처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 잔병들이 경기도 북부와 강원도 일원에 흩어져 부락민을 괴롭혔다.


우리부대는 안동에서 영주, 풍기를 거쳐 죽령재를 넘는데 인민군 전차가 폭격을 맞아 서 있었고, 시체들이 즐비해 참혹한 모습을 보면서 양평 공비토벌 작전에 투입됐다. 양평에 20여 일간 주둔했고, 다시 홍천으로 이동해 패잔병 소탕작전을 전개했다.

▣유격대 창설 3개월 만에 해체, 2사단 32연대에 편입, 중공군과 맞서다

1950년 겨울은 전쟁에다 혹독한 추위와의 싸움이 더해졌다. 눈이 내려 녹을 새도 없이 또 내려 쌓여만 가서 재대로 걸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우리 부대는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가운데도 화악산 노천에서 그해 겨울을 보냈다.


1950년 12월31일 중공군의 인해전술이 시작됐다. 우리는 산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데 중공군이 먼저 정상을 점령하고 있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날씨가 너무 추워서 총이 발사가 안 될 정도였다.

▣중공군에 포위당해, 포로가 되다


우리 부대는 중공군에게 완전 포위가 됐다. 적의 조명탄이 대낮같이 밝아 사방으로 흩어지는 국군에게 총알이 비 오듯 쏟아졌다. 총알이 바로 옆에 꽃이는 소리가 퍽퍽 났지만 요행히 총알이 나를 피해갔다.


전우 몇 명이 모여 무조건 남쪽으로 가자고 했다. 북두칠성 반대방향이 남쪽이라는 전우의 말에 따라 남쪽으로 향하던 중 잠시 쉬는 사이에 잠이 들었는데 깨고 보니 옆에 아무도 없었다. 허겁지겁 발길을 옮기다 전우 몇 명을 만나 민가를 발견하고 도움을 청했다.

잠시 쉬는 사이에 집이 중공군에 완전히 포위당했다. 그길로 포로가 돼 임시 포로수용소 생활이 시작됐다. 2주 후 중공군은 물러가고 인민군에 인계됐다.

▣인민군에 강제 입대당하다


인민군 12사단 예비연대 기간요원으로 보급품 운반하는 포로 감시가 주어진 역할이었다. 그때 덕곡 사람 이주환씨를 만났다. 나는 포로 인솔자로 평양 성호리수용소로 가는 도중 세 사람의 고향분을 만났다. 한 사람은 모산골 사람이었고, 또 한 사람은 초등학교 동기인 전상용군이었다. 전군은 포로로, 나는 포로 인솔자인 인민군으로 북한땅에서 기구한 만남이었다. 반갑기는 하지만 내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 무정한 친구가 되고 말았다. 불행하게도 네 사람 중 나만 고향으로 돌아왔다.


나의 임무인 포로 인계가 끝나자 내가 불순분자로 몰려 ‘인민군파송소’에 입소했다. 인민군파송소는 인민군 근무중 불순분자나 사고자를 심사해 개전의 정이 보이면 원대 복귀시키고, 아니면 인민군형무소로 보내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


강제노역 한 달 만에 사회안전성 군관에게 심사를 받았다.

▣남파간첩 교육을 받고 미군에 투항, 국군에 원대 복귀

나는 두 달 동안의 간첩교육을 받은 후 어느 날 사회안전성 8부 부장(준장)의 심사를 받고 통과했다. 나는 철저하리만큼 가식이지만 조선인민공화국에 동화된 듯 연기의 결과였다.


드디어 사선을 넘어 미군에 투항했다. 영등포 포로수용소를 거쳐 거제도포로수용소로 이송됐다. 심사과정에 일반포로 귀환자는 수용소에서 심사를 하고, 나처럼 지령을 받고 온 귀환자는 대구지구특무대에서 심사를 받았다.


간첩 죄목으로 고등군법에 회부돼 해명이 끝나고 국군에 원대 복귀, 수도사단기갑연대에 배속됐다.

눈을 감고 지난날을 회상했다. 장사리상륙작전이며, 중공군포로, 인민군으로, 다시 남파간첩 교육을 받고 남하해 국군에 원대 복귀해 또 전쟁터로 나가고 있는 기구한 운명이다. 나는 결국 싸움터만 찾아다니는 꼴이었다. 그때마다 총알이 나를 피해 주었기에 죽지 않았고, 지금 군용트럭을 타고 전투를 하려고 전방으로 향하고 있다.


전투 중 부상으로 여수 15육군병원으로 이송돼 치료했고, 한 많고 파란만장한 군생활은 3년 4개월 4일로 막을 내렸다.

▣미귀환 포로들의 통한을 어떻게 할 것인가?

윤경호 어르신은 수기 말미에 “공산주의는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거라” 절규하며, 돌아오지 못한 포로 전우들에게 “정말 미안하구나, 전우야, 용서하거라”라고 사죄했다.


윤 어르신은 정부에 대한 서운함을 숨기지 않는다. 나라가 위급할 때 젊은이들을 잡아다 전쟁터로 몰아넣을 때는 언제고, 포로가 되어 70여년을 북한 땅에 억류돼 있지만 나 몰라라 팽개치는 정부가 지구상에 어디 있단 말이냐, 항변한다. 미국은 자기나라 국민이라면 유골까지 찾아다 본국으로 송환해 가는데 말이다.


미전향장기수는 “안녕히 가십시오”하며 송환해 주면서 정작 나라 지키다 돌아오지 못한 국군포로는 관심 밖이니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고 항변한다.


윤 어르신은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고 했다. 나라가 자꾸만 왼쪽길로 가는 것 같아 안타깝고 밤잠을 설친다고 했다. ‘북한’ 그 곳은 사람 살 곳이 못되며 민주화도 촛불시위도 못하는 곳인데, 제발 젊은이들이 이성을 찾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소망했다. 그들이 적화야욕은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자고 했다.

구순을 바라보는 연세에도 윤경호 어르신은 아직 정정하신편이다. 가족으로는 화가인 부인 정귀순(83, 고령문화원 부원장) 여사와 슬하에 2남1여를 뒀다.
윤경호 어르신은 만학으로 대구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으며, 고령군, 의성군 등지에서 일반행정직 공무원으로 재직했다. 그리고 상이군경 고령군지회장을 역임했다. 

 최종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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