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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문씨(南平文氏) 강성군파(江城君派), 순평부원군파(順平府院君派)

주간고령 편집부 2019-05-18 (토) 20:51 1개월전 57  


삼모제(신리2길4)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남평문씨(南平文氏) 시조(始祖) 문다성(文多省)
영조 7년(1731년)에 간행된 현존 남평문씨 대동보 최고본(最古本)인 신해보(辛亥譜) 서두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널리 전해오는 옛 말에 호남(湖南)의 남녘에는 남평군(南平郡)이 있고, 남평군의 동녘에는 큰 못이 있으며, 못가에 천 길이나 되는 높은 바위가 있었다. 군주(郡主)가 하루는 못 기슭 그 바위 밑에서 놀고 있는데, 갑자기 바위 위에 오색구름이 감돌더니 문득 어린 아기 울음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군주가 이상하게 여겨 바로 사다리를 만들게 하고 시종자로 하여금 올라가 보게 하니, 석함(石函)이 있는지라 끈으로 매어 당겨 내렸다. 함을 열어보자 그 속에는 어린 아기가 있는데 피부가 백설(白雪) 같고 용모가 기이(奇異)하므로 군주는 데려다 양육하였다. 나이 겨우 5세에 글과 사상이 자연 통달하고, 무예와 지략이 뛰어난 재주가 있는 등 사물의 이치(理治)에 막힘이 없었다. 그럼으로, 문(文)자로 성(姓)을 삼고 다성(多省)이라 이름하고 명원(明遠)으로 자(字)를 삼으니 그 시대 사람들이 칭송하여 말하기를, 문군(文君)은 밝기가 해와 달 같고 맑기가 별 같다 하여 호(號)를 삼광(三光)이라 하였다. 나이 14세에 대사도(大司徒)가 되었고, 18세에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에 이르렀으며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 : 고려초 9품계의 향직중 첫째등급) 삼한벽상공신(三重大匡輔國三韓壁上功臣 : 후삼국 통일에 협력한 당대의 세력가들에게 내린 공신호임)으로서 남평개국백(南平開國伯)에 봉해지고 수(壽)는 98세을 누리시고 시호를 무성(武成)으로 받았다. 부인은 김씨(金氏)로 신라왕손이며 호는 정순신의(貞順神毅)이다” 뒤에 사림(士林)과 후손이 나주시 남평면 풍림리 남평 사자봉 밑 지석강 위에 장연서원(長淵書院)을 세워 시축(尸祝 : 제사에서 축문의 낭독을 담당한 관원)하였고 또 장자지(長者池) 위에 문암각(文巖閣)을 세웠다.


(2) 중시조(中始祖) 문익(文翼)
① 시조(始祖) 문다성(文多省)이하 문익(文翼)까지는 12대 560년간 차이가 있고 세계(世系)가 확인되지 않아 1981년 보계상고완의문(譜系詳攷完議文)에 의거 세계(世系)가 확인된 문익(文翼)을 1세조로 기세(起世)하고 있다.
② 공의 생졸년은 미상(未詳)이다. 인종 때의 재상이었던 문공유(文公裕)·문공인(文公仁)의 아버지이며, 명종 때 명재상으로 이름난 문극겸(文克謙)의 할아버지이다. 고려사의 기록을 참고하면 헌종 1년(1095년) 왕명을 받들어 수레와 일산(日傘)를 갖추어 송나라 자은종(慈恩宗) 승려 혜진(惠珍)을 맞이하고 보제사(普濟寺)에 거처하도록 하였다. 숙종 3년(1098년) 좌찬선대부(右贊善大夫)·급사중(給事中)으로 임명되었으며, 숙종 4년(1099년) 요(遼)나라에 가서 원자(元子)의 책명(冊命)을 받아와 직문하성(直門下省)으로 승진되었다. 숙종 7년(1102년)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를 역임하였고, 숙종 8년(1103년)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를 지냈다. 시호(諡號)는 경절(敬節)이다.


(3) 남평문씨(南平文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남평문씨는 127가구 317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문익점(文益漸)의 후손인 강성군파(江城君派)는 대가야읍 신리, 쌍림면 안림리에 세거하고 있으며 문유필(文惟弼)의 후손인 순평부원군파(順平府院君派)는 쌍림면 안림리, 산주리, 대가야읍 등에 분거(分居)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① 문공인(文公仁)
처음 이름은 공미(公美)이었다.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를 지낸 익(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문과에 급제한 후 직사관(直史館)이 되었고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으로 사명(使命)을 받들어 요(遼)나라에 갔고 추밀원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宣)으로 옮겼다가, 왕자지(王字之)가 송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부사(副使)가 되었다. 인종 6년(1128년) 4월 지공거(知貢擧)가 되고 인종 7년(1129년) 이부상서 지문하성사(吏部尙書 知門下省事)를 거쳐 인종 8년(1130년) 판상서형부사(判尙書刑部事)와 참지정사(叅知政事)로 임명되었다. 인종 9년(1131년) 검교사도(檢校司徒)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서경유수사(西京留守使)로, 인종 11년(1133년) 판상서병부사(判尙書兵部事) 감수국사監脩國史)로 임명되었다. 그후 묘청(妙淸)을 천거로 탄핵받아 수태위(守太尉)·판국자감사(判國子監事)로 좌천되었다. 인종 15년(1137년) 졸(卒)하였다. 시호를 충의(忠懿)라 하였다. 배위는 시중(侍中) 사추(思諏)의 따님인 해주최씨(海州崔氏)이다.


② 문공유(文公裕)
개명(改名)은 고수(顧壽)이며 자는 항적(亢迪)이다.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를 지낸 익(翼)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숙종 7년(1102년)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하고 예종 7년(1112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인종의 즉위 후 이자겸(李資謙)이 집권하자 유배되었다가 이자겸이 몰락한 뒤, 인종 5년(1127년) 합문지후(閤門祗候)에 복직되고, 1129년 금(金)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인종 11년(1133년) 시어사(侍御史)로 있다가 충주목부사(忠州牧府使)로 좌천되었다. 묘청(妙淸)의 난이 진압된 뒤 충의(忠義)로서 탁용(擢用)되어 호부낭중(戶部郎中) 동궁시독사(東宮侍讀事) 지제고(知制誥)가 되었다. 의종 1년(1147년)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서 시사(時事)를 간언(諫言)하였다. 의종 2년(1148년)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 시우산기상시(試右散騎常侍), 의종 3년(1149년)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 시형부상서(試刑部尙書), 1150년 예부상서(禮部尙書), 1152년 형부상서(刑部尙書)·병부상서(兵部尙書)를 역임하였다. 의종 13년(1159년) 졸(卒)하였다. 시호는 경정(敬靖)이다. 배위는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지낸 안인(安仁)의 따님인 단주한씨(湍州韓氏)이다.


③ 문극겸(文克謙)
자는 덕병(德柄)이다. 형부상서(刑部尙書)·병부상서(兵部尙書)를 역임한 공유(文公裕)의 장남으로 예종 17년(1122년) 태어났다. 의종 12년(1158년) 문과에 급제하여 좌정언(左正言)이 되고, 환자(宦者) 백선연(白善淵)을 탄핵하다가 황주판관(黃州判官)으로 좌천되었으나, 다시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로 승진하였다. 의종 24년(1170년) 정중부(鄭仲夫)의 난 때 죽음을 당할 뻔하였으나, 좌정언 (左正言) 때 직언(直言)한 일로 화를 면하였다. 명종 1년(1171년) 우승선어사중승(右承宣御史中丞)이 되자 많은 문신(文臣)들을 화에서 구하였고 용호대장군(龍虎大將軍)·상장군(上將軍)을 겸임하여 문무(文武) 겸직(兼職)의 시초가 되었다. 1180년 태자소사(太子少師)를 지냈고 1185년 판예부사(判禮部事)가 되었으며, 다시 수국사(修國史)·판병부사(判兵部事) 등을 거쳐 1187년 권판상서이부사(權判尙書吏部事)가 되었다. 명종 19년(1189년) 졸(卒)하였다. 명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④ 문익점(文益漸)
자는 일신(日新)이고 호는 삼우당(三憂堂)이다. 문과에 급제한 숙선(叔宣)의 차남으로 충숙왕 16년(1329년) 강성현(江城縣) 즉 산청군(山淸郡) 단성면(丹城面) 사월리(沙月里)에서 태어났다. 가정(稼亭) 이곡(李穀)의 문하생이 되었다. 공민왕 9년(1360년) 문과에 급제한 후 김해부(金海府) 사록(司錄)·성균관(成均館) 순유박사(諄諭博士)를 거쳐 공민왕 12년(1363년) 좌정언(左正言)이 되어 원나라에 서장관(書狀官)으로 가서 예부시랑(禮部侍郞)을 제수(除授)받았다. 최유(崔濡)가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옹립(擁立)하고자 하였으나 공이 절조(節操)를 지켜 굽히지 않아 11월 원나라 교지(交祉) 운남(雲南)땅으로 유배(流配)를 당하였다. 공민왕 15년(1366년) 9월에 유배에서 풀려나자 중국의 강남(江南) 지방(地方)에서 목면(木棉)의 종자(種子)를 구하여 공민왕 16년(1367년) 2월 고려로 귀국시 가져와 장인 정천익(鄭天益)과 함께 시험재배에 성공하여 우리나라 의복의 대혁명을 이룬 업적으로 공민왕(恭愍王)은 중현대부(中顯大夫)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겸 지재교(知製敎)의 벼슬을 내렸고 이해 겨울에 성균관학관(成均館學官)에 뽑혔다. 공민왕 17년(1368년)에는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이 되어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함께 성리학(性理學)을 강론(講論)하였다. 우왕 1년(1375년) 전의주부(典儀注簿)를 거쳐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우문관제학(右文館提學)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가 되었다. 사전불가론(私田不可論)에 서명하지 않아 조준(趙浚)의 탄핵을 받아 파직(罷職)되어 낙향(落鄕)하여 삼우(三憂 : 세가지 근심)로 자호(自號)하고 은거하였다. 태조 7년(1398년) 졸(卒)하여 강성현(江城縣) 갈노개산(葛盧介山)에 예장(禮葬)하였다. 이해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예문관(藝文館) 제학(提學)·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강성군(江城君)으로 증직(贈職)되었고. 세조조(世祖朝)에는 부민후(富民候)로 추봉(追封)되었으며, 충선(忠宣)이라 증시(贈諡)를 받았다. 고종 22년(1885년) 유생들이 3차례에 걸쳐 공의 문묘배향(文廟配享)을 상소(上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배위는 판사(判事) 문충공(文忠公) 천익(天翼)의 군부인(郡夫人) 진양정씨(晋陽鄭氏)이다.


(2) 조선시대


① 문여충(文汝忠)
군기소감(軍器少監)을 지낸 문진(文軫)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공은 성품이 단아(端雅)하였으며 임천(林泉)에 종적을 감추었다. 학식이 넓었고 행실을 돈독히 하였으며 명성이 드날림을 구하지 않았다. 세조 때 음사(蔭仕)로 도첨의사(都僉議司) 행(行) 금산군수(金山郡守)를 지냈다. 생졸년(生卒年)은 미상(未詳)이다. 묘는 합서(陜西) 서룡동(瑞龍洞) 경좌(庚坐)이다. 초취는 생원(生員) 치(齒)의 따님인 삼척정씨(三陟鄭氏)이고 재취는 상원군사(祥原郡事)를 지낸 종(悰)의 따님인 포산곽씨(苞山郭氏)이다.


② 문여령(文汝寧)
군기소감(軍器少監)을 지낸 문진(文軫)의 차남으로 태조 5년(1396년)에 태어났다. 세종 5년(1423년)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한 후 세종 9년(1427년) 정미(丁未) 친시(親試)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 서울로 가서 황제로부터 칭찬을 받고 의대(衣帶)를 하사받았다. 세종 18년(1436년) 사간원(司諫院) 좌·우정언(左右正言)을 제수(除授)받았다. 일찍 한성참군(漢城參軍)이 되었을 때, 부(府)에서 완강(頑强)한 재판이 있었다. 이때 세조가 공에게 이 일을 승소(勝訴)하게 부탁하려 하자, 공이 안 된다고 말하여 세조가 매우 분노하였다. 이때 공이 이 문제로 참형(斬刑)당한다는 소리를 듣고 놀라 슬퍼하고 있는데, 세조가 오히려 포상(褒賞)을 하였다. 세종 31년(1449년) 졸(卒)하자 합천군 용주면 방곡리 서룡산 경좌(庚坐)에 예장(禮葬)하였다. 1455년 세조(世祖)는 의정부에 전지(傳旨)하여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3등에 녹훈(錄勳)되었다. 배위는 판서 정충(鄭衷)의 따님인 청산정씨(靑山鄭氏)이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1) 강성군파(江城君派)는 문익점(文益漸)의 6세손인 문극주(文克周)가 선조 25년(1592년) 고성군 하리에서 임진왜란을 피하여 고령군 대가야읍 내곡리로 입향하여 대가야읍 신리 일대에서 530여 년간 세거하고 있다. 


(2) 순평부원군파(順平府院君派) 중 남계파(藍溪派)는 문극철(文極哲)이 헌종 11년(1845년)경 합천군 봉산면 권빈2리 남계(藍溪)에서 고령군 쌍림면 안림리로 입향하였고 팔심파(八尋派)는 문인현(文仁鉉)이 1930년경 합천군 묘산면 팔심리에서 고령군 쌍림면 산주리로 입향하였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조선시대
① 문극주(文克周)
자는 이달(理達)이며 호는 죽은(竹隱)이다. 처사(處士) 원량(元亮)과 해주오씨(海州吳氏) 사이에서 중종 19년(1524년) 태어났다. 선조 8년(1575년)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영릉참봉(英陵參奉)을 제수(除授)받았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고령군 대가야읍 내곡리에 은거하였다. 자손들에게 과거를 보지 말 것과 벼슬을 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효우(孝友)와 문학(文學)으로서 가정을 다스렸고 녹훈자편(錄訓子篇) 등 서적 등에 뜻을 두었으나 전쟁으로 인한 화재로 불타버렸다. 공은 경남 고성에서 임진왜란을 피하여 고령에 시거(始居)한 남평문씨 성숙공파(成淑公派) 고령 입향조이다. 선조 28년(1595년)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대가야읍 내곡리 효진동 임좌(壬坐)에 있다. 배위는 창동(昌東)의 따님인 의성김씨(義城金氏)이다.


② 문계룡(文繼龍)
자는 운서(雲瑞)이고 호는 월포(月圃)이다. 인조 8년(1630년) 태어났다. 죽은(竹隱) 극주(克周)의 4세손이다. 학문에 통달(通達)하였으며 효우친족(孝友親族)하여 효행(孝行)으로 여묘(廬墓) 3년하니 인근 동네에서 추중(推重)하였다. 숙종 29년(1703년)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대가야읍 신리 구산(鉤山)에 있다.


③ 문계봉(文繼鳳)
자는 운보(雲甫)이고 호는 우곡(友谷)이다. 인조 11년(1633년) 태어났다. 죽은(竹隱) 극주(克周)의 4세손이며 계룡(繼龍)의 동생이다. 일찍부터 학업을 닦았으며 효행이 있어 어버이를 섬김에는 지극히 효도하고 백형(伯兄)과 더불어 여묘(廬墓) 3년하니 사우(士右)들이 추중(推重)하였으며 통정대부(通政大夫)의 교서(敎書)를 하사받았다. 숙종 29년(1703년)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대가야읍 신리 마전곡(麻田谷)에 있다.


(2) 근·현대인물


① 문상직(文相直 : 1893년)
자는 맹회(孟晦)이고 호는 일성(一星)이다. 진호(鎭昊)의 아들로 태어났다. 경신중학교(儆新中學校)에 입학에서 약 1년간 학문에 전념하다가 곧 만주로 건너가서 통화현(通化縣)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 8월, 신흥무관학교 군사과 졸업생의 모임인 학우단(學友團)에 가입하였다. 1920년 1월 26일 경북 일대에서 군자금(軍資金)을 모금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 활동을 전개한 혐의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4년 14일 만에 감형(減刑)되어 출옥하였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 대구지회 간부로 활동하다가 독립운동 혐의로 1929년 옥고를 치렀다. 5월 초순경 이강희(李康熙), 유상묵(柳尙默)이 가세하여 비밀결사 ㄱ당(黨)을 조직하여 연구부(硏究部) 직책(職責)을 맡아 암약하다가 달성군의 부호(富豪) 김교식(金敎式)을 위협한 사실이 일본 경찰에 탐지되어 6월 17일 체포되었고, 공은 7월 24일「치안유지법」 위반 등으로 기소되어 5년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 1951년 2월 16일 졸(卒)하였다.


② 문기석(文基錫 : 1900년) 포항고등학교 교장
③ 문규용(文圭鎔 : 1918년) 제3대 고령군 국회의원 입후보자
④ 문기열(文琪烈 : 1928년) 공신기업대표, 수석(水石)연합회 대구 초대 회장
⑤ 문영열(文榮烈 : 1940년) 경북 서예 심사위원장, 경북대, 영남대 서예 강사
⑥ 문기성(文基成 : 1941년) 21사단 부사단장, 육군 준장
⑦ 문무학(文武學 : 1949년) 영남일보 논설위원, 대구문화재단 대표, 시조시인 제9대 한국예총 대구광역시연합회 회장, 문학박사
⑧ 문용환(文龍煥 : 1949년) 달서구청 주민생활지원국장, 행정지원국장
⑨ 문명희(文明熙 : 1958년) 고령성주축협조합장
⑩ 문기현(文基賢 : 1966년) 육사 졸업, 육군 대령
⑪ 문광주(文光柱 : 1966년) 고령군테니스협회장, 효창석물 대표
⑫ 문기봉(文基奉 : 1966년) 한국도로공사 대구경북본부장, 인력처장
⑬ 문기수(文基洙 : 1967년) 육사 졸업, 육군 대령
⑭ 문준영(文焌瑛 : 1994년) 3사 졸업, 육군 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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