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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노씨(江華魯氏) 추원재(追遠齋), 도은재(道隱齋)

주간고령 편집부 2019-05-10 (금) 21:55 8일전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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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원재(적산길6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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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은재(광도길138-6)

1. 추원재(追遠齋), 도은재(道隱齋) 유래(由來)

(1) 추원재(追遠齋)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문인(門人)으로 문과에 급제한 후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내고 고려말 국운이 기울자 고려 왕조에 절개를 지킨 절의지사(節義之士) 노인복(魯仁復)과 임진왜란 때 왜적의 칼날에 맞서 자기의 몸을 펴서 아버지를 덮고 사지(四肢)가 흉도(凶刀)에 잘렸으나 아버지의 신체를 온전하게 보호하였던 노지도(魯至道)의 효행(孝行)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1960년 고령군 개진면 적산길 67-6에 세운 재실(齋室)이다.

(2) 도은재(道隱齋)
초야에 묻혀 학문과 풍류를 즐겼던 은일지사(隱逸之士)로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도의지교(道義之交)하였고 학행(學行)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던 도은(道隱) 노대용(魯大容)을 위하여 1961년 고령군 개진면 광도길 138-6에 세운 재실(齋室)이다.

2. 건축형태

(1) 추원재(追遠齋)
건물 입구에는 3칸의 삼문(三門)을 두었고 둘레에는 담장을 둘렀다.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좌우측에 각 1칸의 온돌방을 두었고, 가운데 1칸은 대청을 깔았다.

(2) 도은재(道隱齋)
건물 입구에는 1칸의 출입문(出入門)을 두었고 둘레에는 담장을 둘렀다.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좌우측에 각 1칸의 온돌방을 두었고, 가운데 1칸은 대청을 깔았다.

3. 추숭(追崇) 인물(人物)

(1) 추원재(追遠齋)
① 노인복(魯仁復)
초휘(初諱)는 인문(仁文)이고 자(字)는 정지(正之)이며 호는 이무당(二無堂)이다. 진현관(進賢館) 제학(提學)을 지낸 노여(魯輿)의 셋째 아들로 공민왕 22년(1373년) 태어났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이다. 창왕 1년(1389년)에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한 후 공양왕 2년(1390년) 동진사(同進士)로 문과에 급제하고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냈다. 고려의 운수가 다되자 개성의 취령(鷲嶺 : 수리재) 아래 효자리(孝子里)로 물러가 벽위에 이무당(二無堂)이라 써 붙이니 곧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백성에게는 두 임금이 없다는 뜻이다.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이 차운(次韻)하기를 「그대 있는 곳에 와서 그대의 시(詩)를 보니 우쭐대며 벼슬하던 내가 부끄럽네」하였다. 세종 14년(1432년) 졸(卒)하였다.

② 노지도(魯至道)
일휘(一諱) 지희(之熹)요 자는 섭이(燮而)이며 호는 적은(笛隱)이다. 장사랑(將仕郞)을 지낸 극예(魯克禮)와 성율(聲律)의 따님인 석산김씨(螫山金氏) 사이에서 선조 3년(1570년) 태어났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아버지와 함께 왜구에게 붙잡혀 그 칼날에 죽임을 당하려는 순간 아버지를 품에 안듯이 하여 칼날을 막았다. 화가 난 왜구가 마구 칼을 휘둘러 온몸을 난자(亂刺)하였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네 번이나 사지(四肢)로 막아 사지(四肢)가 절단(切斷)될 때까지 아버지를 보호하니 칼을 든 왜장(倭將)이 공의 효성(孝誠)에 크게 감복하여 칼을 접고 “효자(孝子)”라는 혈서(血書)를 남기고 물러갔다. 후손들이 공의 효성(孝誠)을 기리기 위해 개진면 옥산2리 적산(笛山)에 추원재(追遠齋)를 세웠으며 상재헌(相齋軒) 김여진(金旅振)이 행장(行狀)을 지었다. 졸년(卒年)은 미상이다. 묘소는 고령군 개진면 구곡리 대점곡(大店谷)에 있다.

(2) 도은재(道隱齋)
자는 약부(若夫)이고 호는 도은(道隱)이다. 장사랑(將仕郞)을 지낸 노중달(魯仲達)과 금위장(禁衛將)을 지낸 윤덕(潤德)의 따님인 단양우씨(丹陽禹氏) 사이에서 명종 22년(1567년) 태어났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도의지교(道義之交)하였다. 학행(學行)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는 사실이 치재(痴齋) 허명신(許命申)의 유고(遺稿)에 실려 있다. 인조 7년(1629년)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개진면 구곡리 산관(山冠)에 있다.

4. 추원재기(追遠齋記)

영천(靈川 : 현재 고령) 고을 동쪽 30리에 적산리(笛山里)가 있으니 적산리(笛山里)는 강화노씨(江華魯氏)가 대대로 살던 곳이다. 넓은 들에 곡식이 풍성하고 풍속이 오래되고 백성이 순박하니 참으로 하늘이 아끼는 숨은 땅이다. 옛날 세종 때에 훈련원(訓練院) 참군(參軍)을 지내신 집의공(執義公) 승주(承柱)가 이 땅에 처음 들어왔다. 그 선조를 빛나게 하고 후손들을 관대하게 대하였다. 증손은 통정대부(通政大夫) 낙애공(洛厓公) 삼(參)이니 문무(文武)에 뛰어났다. 낙애공(洛厓公)의 증손인 적은공(笛隱公) 지도(至道)께서는 임진왜란(壬辰倭亂)때 부자(父子)가 죽기로 다투어 칼날을 무릅쓰고 사지(四肢)로 아버지를 감싸 그 부친이 온전(穩全)하였으니 이와 같은 사실이 현풍‧고령읍지에 실려 있다. 
이후로 효자(孝子)와 효부(孝婦)가 계속 이어졌다. 세상이 혼란하여 그치지 아니하여자손이 비록 흩어져 살지만 선조의 묘를 살피고 제전(祭田 : 위토답)을 마련하여 온 힘을 다하였으나 재실(齋室)이 없어 한스러웠다. 지금에 있어서 후손 학계(學桂)‧학만(學萬)‧학칠(學漆) 등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마을의 좋은 땅을 골라서 잡초를 뽑아내고 가시나무를 베어낸 뒤 3칸 크기의 재실을 짓고 또 문, 글방과 부엌 3칸을 세우고 이미 이루어졌을 때 ‘추원(追遠)’이라 하였다. 동섭(東燮)에게 기문(記文)을 청하니 내가 말하기를 “진실로 공적인 일을 할 때에는 사사로움을 잊어서는 안되고 용단(勇斷)을 내릴 때에는 옮음을 쫓는다. 아! 오랫동안 끝내지 못한 일을 힘써 노력하는구나. 대개 이 재실을 이름 짓는 것은 증자(曾子)가 말한 “부모의 장례를 엄숙히 하고 조상의 제사를 정성스럽게 추모(追慕)하라는 뜻에서”나온 것이다. 대개 ‘추(追)’는 깊이 생각하고 지극히 공경하며 거스르지 않는 것이다. ‘원(遠)’은 먼 조상은 사람이 잊기 쉬운 바인데 능히 추모하니, 옛날 진씨(甄氏)가 지은 사정(思亭)과 장가(張家)의 영벽(靈璧)이 참으로 이런 마음에서 만들어졌다. 오늘날 여러 사람들은 사람들의 귀와 눈을 현혹시키지 않는 것으로 선(善)을 삼고 효도하고 우애하는 것으로 근본을 삼으며 성실하고 공경하는 것으로 방패를 삼으니 이는 마땅히 해야 할 것이다. 선조들의 묘소에 서리와 이슬이 내릴까 걱정하는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위로는 조상들의 충의(忠義)를 생각하고 아래로는 비바람에 서까래가 무너져 떨어질까 살펴 수선할 곳을 생각하여 먼 후손들로 하여금 영원히 없어지지 않게 하면 이 재실은 썩어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만일 수려한 산천과 좋은 경치를 즐기려면 어리석은 말을 기다리지 않고 올라 바라보는 것이 자세히 볼 수 있을 것이니 이를 기록해 놓는다.

을묘년(1975년) 섣달 보름 의성(義城) 김동섭(金東燮)이 짓다.

(註釋1) 원(遠)은 먼 조상은 사람이 잊기 쉬운 바인데 능히 추모하니, 옛날 진씨(甄氏)가 지은 사정(思亭)과 장가(張家)의 영벽(靈璧)이 참으로 이런 마음에서 만들어졌다.

* 《논어》〈학이(學而)〉에 나오는 증자(曾子)의 말에, “종(終)을 삼가 행하고 원(遠)을 추모하면 백성의 덕이 후한 데로 돌아갈 것이다.〔愼終追遠, 民德歸厚矣.〕”라고 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종(終)’은 어버이의 상(喪)을 말하고 ‘원(遠)’은 선조를 말한다.

(註釋2) 견씨(甄氏)의 사정(思亭)
조상을 추모하는 뜻에서 지은 정자나 재각(齋閣)을 뜻한다. 송(宋)나라 때 서주(徐州)의 부호였던 진씨(甄氏) 집안이 진군(甄君)의 대(代)에 이르러 빈한해졌다. 그래서 부모 형제가 죽어도 장례를 치르지 못하다가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여러 영구(靈柩)를 함께 장사지내고 무덤 가에 조상을 추모한다는 뜻을 담은 사정(思亭)을 지었다. 이에 당시 문장가인 진사도(陳師道)가 그 내력과 조상을 사모해야 한다는 뜻을 가지고 〈사정기(思亭記)〉를 지었다.

(註釋3) 장가(張家)의 영벽(靈璧)
송(宋나라) 소식(蘇軾)이 지은 장씨원정기(張氏園亭記)에 보면, 장씨(張氏)들이 영벽현(靈璧縣)에 자리를 잡고 원정(園亭 : 정원에 만든 정자)을 만들어서 난고정(蘭皐亭)을 짓고서 어버이를 봉양하였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5. 도은재기(道隱齋記)

영천(靈川)의 동쪽 15리 떨어진 마을을 ‘광도(廣道)’라 하는데 삼면(三面)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있다. 제석산(帝釋山)이 그 동쪽에 솟아 있고 한 면(面)은 강이 흐르고 길은 동쪽으로 나 있으니 나무를 하고 물고기를 잡을 수 있으니 가히 천성(天性)을 기를 수 있는 적지(適地)의 땅이로다. 내가 연전(年前)에 박인현(朴寅賢)과 함께 이곳으로 지나 그 산천(山川)을 보고 세속(世俗)에 뛰어난 절경(絶景)이라. 사는 사람들이 순후(淳厚)하니 몰래 이르기를 혹 도(道)를 얻으려는 선비가 숨어 살 곳이 있을 것인데 사람들이 잘 알고 있지 못하니 내가 그 연유(緣由)를 듣지 못하였으니 내 스스로 의아(疑訝)해 하였다. 어느 날 강화노씨(江華魯氏) 일호(一浩), 인호(仁浩), 동원(東元), 동수(東守) 등이 종중의 명(命)을 받아 그 일을 가지고 나에게 와서 재실(齋室)의 기문(記文)을 요청하였다. 재실(齋室)이 있는 곳은 광도(廣道)이며 주인공의 이름은 대용(大容)이요 호(號)는 도은(道隱)이니 그 선조(先祖)이다. 공이 학행(學行)으로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고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과 도의(道義)로 사귀었다고 한 것은 치재(癡齋) 허명신(許命申)이 쓴 것이다. 선생이 이미 도의(道義)로써 서로 허락하니 공의 덕(德)이 스스로 있고 공의 도(道)가 스스로 존귀(尊貴)하였으니 어찌 치재(癡齋)의 글을 기다리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또한 가히 쓰지 않을 수 없다. 옛날에 안연(顔淵)이 누항(陋巷)에 있을 때 공자가 어질게 생각했으나 같은 문인(門人)이 쓴 연후에야 전하니 공이 광도(廣道)에 있을 때 선생이 비록 허락하였으나 만일 치재(癡齋)의 글이 없었으면 어찌 능히 알 수 있었을 것이며 하물며 알고 난 이후에 또한 가히 쓸 수 있는 자는 이에 허명신(許命申)과 같은 학식(學識)으로 일찍이 과장(科場)에 출입하지 않고 문자를 쫒아 왁자지껄 넓은 집을 짓고 그 건물에 도은(道隱)이라는 현판을 건 것은 광도(廣道)의 뜻에 은거(隱居)하여 종적(蹤跡)을 감추려는 것이다. 밝은 곳을 볼 수 없으니 즐길 수 있으면 이와 같을 것이다. 비록 소위 득도(得道)한 선비를 찾자면 공이 곧 그 사람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죽어 잘잘못을 아는 자가 적으니 그 후손된 자는 여러 대에 걸쳐 공이 살아온 땅을 경영하고 선조의 유업(遺業)을 이어 집을 짓고 오늘날까지 그렇게 우뚝 서 있는 것은 뜻이 오직 물력(物力)을 모으는데만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저 공의 숨은 덕(德)이 이에 더욱 드러나니 그 또한 당시 세상에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 호를 따서 건물을 ‘도은(道隱)’이라 한 것은 오직 후세 사람들이 공의 시호(諡號)를 따서 충무(忠武)의 뜻이라 하였으니 모두 그 후손이 칭송하고 그리워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다.

임자년(1972년) 6월 상순 청주(淸州)  양진기(楊鎭驥)

(註釋1) 허명신(許命申 : 1569년∼1635년)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자는 군익(君益)이며 호는 치재(癡齋)이다. 양산훈도(梁山訓導)에 발탁(拔擢)되었으나 사직하고 미수(眉叟) 허목(許穆)과 운계(雲溪) 정홍석(鄭弘錫) 등을 가르치며 후학양성에 매진하였다. 죽포(竹圃) 이현룡(李見龍), 태허정(太虛亭) 곽홍지(郭弘址), 우암(愚庵) 최산립(崔山立) 등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나누었다.

(註釋2) 안연(顔淵 : B.C.521~B.C.490) 
중국 춘추전국시대 노(魯) 나라의 현인(賢人)이다. 자(字)는 연(淵)이고 안회(顔回)라고 흔히 부른다. 공자(孔子)가 가장 신임했던 수제자로,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도를 즐기고 학문과 덕행으로 이름을 높였다. 

(註釋3) 누항(陋巷)
자기가 사는 거리나 동네를 겸손하게 이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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