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0.06.04 (목)

고령박씨(高靈朴氏) 소윤공파(少尹公派) 모현정(慕賢亭)

편집부 2020-05-15 (금) 19:29 19일전 18  


모현정(우곡면 도진1길 5-4)

1. 문연서원(文淵書院) 유래(由來)

(1) 인조 14년(1636년)에 지방유림의 공의(公議)로 죽연(竹淵) 박윤(朴潤), 낙락당(樂樂堂) 박택(朴澤), 월오(月塢) 윤규(尹奎), 학암(鶴巖) 박정번(朴廷璠), 매헌(梅軒) 최여설(崔汝契) 등 5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사우(祠宇)를 건립하여 위패를 모셨고 숙종 22년(1696년) 문연서원(文淵書院)으로 승원(陞院)하였다. 문연(文淵)은 우곡면 도진리 앞을 흐르는 회천강 가를 말한다.

(2) 두와(蠹窩) 최흥벽(崔興璧)의 문연서원(文淵書院) 중수기(重修記), 지애(芝厓) 정위(鄭煒)의 문연서원(文淵書院) 상량문(上樑文) 등을 참고하면 문연서원(文淵書院)은 풍우(風雨)로 퇴락(頹落)하여 몇 차례 중건(重建)되었다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에 의거 고종 5년(1868년) 훼철(毁撤)되었고 1940년 후손들이 우곡면 소재지 도진리 입구 도진교 직전 왼쪽 도로가에 문연서원 유허비(文淵書院 遺墟碑)를 세웠다.

2. 모현정(慕賢亭) 유래(由來)

(1) 순조 3년(1803년) 죽연(竹淵) 박윤(朴潤) 종가(宗家)의 사랑채로 건립되었으나 고종 5년(1868년) 문연서원(文淵書院)이 훼철(毁撤)되자 후손들과 사림에서 임시로 서원에 모신 5현의 위패를 모시고 향사를 지내는 장소로 사용하면서 문연재(文淵齋)로 불렀으나 현재는 모현정(慕賢亭)으로 명명(命名)되고 있다.

(2) 모현정(慕賢亭)은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도진1길 5-4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로 2012년 8월 1일 고령군의 향토문화유산 제9호로 지정되었으며 매년 음력 3월 초정일(初丁日) 후손들이 석채(釋菜)를 올리고 있다.

(註釋) 석채(釋菜)
소나 양 따위의 희생(犧牲)을 생략하고 다만 약식으로 소채(蔬菜) 따위로 간소하게 제사를 지내는 일을 말한다.

3. 모현정(慕賢亭) 건물구조

 건물은 출입문인 평삼문(平三門)과 모현정 2동을 ‘二’자형으로 남서향하고 건물 주위로는 토석담을 쌓아 하나의 담장으로 둘러친 지역을 구성했다. 배치는 경사지를 2단으로 터를 닦고 하단에는 평삼문(平三門), 상단에는 모현정(慕賢亭)을 앉혔다. 모현정(慕賢亭)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고 평면은 우측부터 온돌방 정면1칸 x 측면 1칸 반, 온돌방 1칸, 마루 1칸순으로 ‘一’자로 배열하고 전면 전체에 퇴를 둔 좌실우당(左室右堂)형이다. 지붕은 5량가(五樑架)로 홑처마 팔작(八作)에 기와를 이었다. 평삼문(平三門)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로 평면은 중앙의 대문을 중심으로 도장과 온돌방 1칸씩을 ‘一’자로 배열했으며 지붕가구는 간략한 3량가(三樑架)로 홑처마의 맞배지붕 기와집이다.

4. 추숭인물(追崇人物)

(1) 죽연(竹淵) 박윤(朴潤)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자는 덕부(德夫)이고 호는 죽연(竹淵)이다. 양산군수(梁山郡守)를 지낸 박계조(朴繼祖)의 장남으로 중종 12년(1517년) 태어났다. 아홉 살 때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극진한 슬픔으로 효성을 보였으며, 홀로 된 어머니를 동생 낙낙당(樂樂堂) 박택(朴澤)과 함께 지극한 정성으로 모셨다. 특히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네 형제가 한집에 살았는데, 사사로이 재물을 쌓지 않아 다투는 일이 없었고 부인들 또한 화목하게 지냈다. 어머니 전주류씨(全州柳氏)가 병들자 인분(人糞)을 맛보며 병세(病勢)를 살폈고, 82세에 세상을 뜨자 묘소 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몸소 불을 떼어 조석(朝夕)을 받들어 올리는 등 예제(禮制)를 다하였다. 삼년집상(三年執喪)할 때 질대(絰帶)를 벗지 않았고 3년 동안 여묘(廬墓)살이 하는 동안 한 번도 집에 들이지 않았다. 삼강행실(三綱行實)이란 책에 그가 여묘(廬墓)하는 장면이 수록되어 있다. 몇 칸의 정사(精舍)를 지어 ‘죽연(竹淵)’이라고 편액(扁額)하고 세 형제가 매일 그 위에서 노닐며 시를 읊었으며 황강(黃江) 이희안(李希顔), 낙천(洛川) 배신(裵紳)이 찾아와 도학(道學)을 강론(講論)하였다. 선조 9년(1576년) 정려복호(呈閭復戶) 되었으며, 그의 행적은『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박윤상분(朴潤嘗糞)’이란 제목으로 실렸다. 선조 5년(1572년) 졸(卒)하였다.

(註釋) 질대(絰帶)
상복(喪服)을 입을 때, 머리와 허리에 두르는 삼으로 된 띠이다.

(2) 낙락당(樂樂堂) 박택(朴澤)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자는 공부(恭夫)이고 호는 낙낙당(樂樂堂)이다. 양산군수(梁山郡守)를 지낸 계조(繼祖)와 보공장군(保功將軍)을 지낸 승명(承溟)의 딸인 전주유씨(全州柳氏)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중종 16년(1521년)에 태어났다. 공은 일찍이 예물을 준비하여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을 배알(拜謁)하였다. 다른 사람보다 빼어나게 총명하였으며 행의(行誼)가 순수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역학(易學)에 조예가 깊었다. 선생은 공이 지은 ‘극기잠(克己箴)’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하며 “공부(恭夫)의 성일(誠一)한 공부를 여기에서 볼 수 있다”하였다. 명종 21년(1566년) 향년 46세로 졸(卒)하였다.

(註釋) 성일(誠一)
마음과 뜻이 한결같이 참되고 성실함

(3) 월오(月塢) 윤규(尹奎)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자는 문로(文老)이고 호는 월오(月塢)이다. 교위(校尉)를 지낸 윤세정(尹世禎)과 집(楫)의 딸인 홍주홍씨(洪州洪氏) 사이에 둘째 아들로 연산군 6년(1500년)에 태어났다.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다. 부모를 모실 때는 몸과 마음을 함께 봉양하였으며 형을 섬김에는 사랑함과 공경함을 함께 갖추었다. 뜻은 또 청렴하고 곧았으며 비록 끼니를 걸렀지만 의(義)가 아니면 남에게서 받거나 주지를 않았다. 중종26년(1531년) 식년(式年)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하였으나 대과(大科)는 일찍이 포기하였다. 아름다운 산수를 좋아하였고 글짓기를 좋아하였는데 문장가(文章家)로 알려졌다. 남명(南冥) 조식(曺植), 송계(松溪) 신계성(申季誠), 황강(黃江) 이희안(李希顔), 낙천(洛川) 배신(裵紳), 등 제현(諸賢)과 도의(道義)로 사귀고 학문을 절차탁마(切磋琢磨)하였다. 공은 명종 15년(1560년) 향년 61세로 졸(卒)하였다. 우곡면 예곡리 바람골마을에서 회천을 건너 월오리 달오마을 동남쪽 절벽에 ‘월오윤선생유허비(月塢尹先生遺墟碑)’가 세워져 있다.

(4) 학암(鶴巖) 박정번(朴廷璠)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자는 군신(君信)이고 호는 학암(鶴巖)이다. 낙랑당(樂樂堂) 택(澤)과 도사(都事)를 지낸 필손(弼孫)의 딸인 양천최씨(陽川崔氏) 사이에서 명종 5년(1550년) 태어났다. 백부(伯父)인 일(溢)에게 출계(出系)하였다. 1566년 월오(月塢) 윤규(尹奎) 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으며 1569년 낙천(洛川) 배신(裵神) 선생에게 취학하고 1571년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의 문인이 되었다. 선조 18년(1585년) 도진(桃津)에 학암정(鶴巖亭)을 건립하고 문연서당(文淵書堂)을 개설하여 향린(鄕隣)의 아동들을 가르쳤다. 1592년 6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백형(伯兄) 양죽당(養竹堂) 정완(廷琬)과 창의(倡義)하여 송암(松庵) 김면(金沔) 진영에서 참모(參謀) 장서기(掌書記)로 모획(謨劃) 활동을 하였다. 대암(大庵) 박성(朴惺), 존재(存齋) 곽준(郭),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등과 도의(道義)로 사귀었다. 선조 30년(1597년) 공과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는 종매제간(從妹弟間)이므로 정유재란 때에는 경상좌도(慶尙左道) 방어사(防禦使)인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화왕산(火旺山)에 입성(入城)하였다. 1599년 일천(逸薦)으로 예빈시(禮賓寺) 주부(主簿)를 제수 받았으나 불취(不就)하고 학암정(鶴巖亭)을 복구하였다. 1603년 부래정(浮來亭)을 영건(營建)하고 매월 초하루 후학(後學)을 가르쳤다. 광해군 3년(1611년) 졸(卒)하였다. 고종 8년(1871년) 후손들이 학암문집(鶴巖文集)을 간행하였다. 2012년 후손들이 ‘학암(鶴巖) 박정번(朴廷璠) 선생 사적비(史蹟碑)’를 세웠다.

(5) 매헌(梅軒) 최여설(崔汝楔)
 본관은 양천(陽川)이며 자는 순보(舜輔)이고 호는 매헌(梅軒)이다. 호군(護軍)을 지낸 학곡(鶴谷) 원(源)과 현감(縣監)을 지낸 홍(洪)의 딸인 숙부인(淑夫人) 남평문씨(南平文氏) 사이에서 명종 6년(1551년) 태어났다. 어려서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제자인 낙천(洛川) 배신(裵紳)을 스승으로 삼았으나 공의 부친인 학곡(鶴谷) 최원(崔源)의 명(命)으로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유일(遺逸)로 장사랑(將仕郞) 훈도(訓導)에 제수(除授)되었다. 임진란(壬辰亂)을 당하자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진영(陣營)의 창의(倡義)에 동참하였고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선조 30년(1597년) 7월 21일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 맞서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창녕(昌寧) 화왕산성(火旺山城)에 입성(入城)하여 수성(守城)하는 전공을 세웠다. 광해군 3년(1611년) 졸(卒)하였다. 사후(死後) 양난(兩亂)의 전공(戰功)과 세상에 드러난 학행(學行)으로 인하여 지방 사림(士林)과 후손들의 공의(公議)를 거쳐 문연서원(文淵書院)을 비롯하여 모현정(慕賢亭), 학매정(鶴梅亭), 삼현사(三賢祠), 임난호국영남충의단(壬亂護國嶺南忠義壇) 등에 위패를 봉안하여 배향하고 있다.

(註釋) 유일(遺逸)
초야에 묻혀있는 선비로서 학식과 인품을 갖추고 있으면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경우 이들을 과거시험 없이 발탁하는 인재등용 방법이다.

5. 모현정기(慕賢亭記)

 군(郡)의 남쪽 문연(文淵) 가에 옛날에는 서원이 있었다. 서원이 훼철되어 더 이상 제사를 지낼 수 없게 되자 정자(亭子)가 세워지게 된 연유이다. 옛날 서원이 전성기(全盛期)를 이룰 때 두와(蠹窩) 최흥벽(崔興璧)이 지은 기문(記文)과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가 지은 송(頌) 등이 있었다. 지금은 정자에 대해 기록할 만한 사람도 없고 또한 세상도 침체(沈滯)하였을 뿐이다. 이에 옛날 자취에 근거하여 서원을 꾸미니, 곧 죽연(竹淵) 박윤(朴潤), 낙낙당(樂樂堂) 박택(朴澤), 그리고 월오(月塢) 윤규(尹奎), 학암(鶴巖) 박정번(朴廷璠), 매헌(梅軒) 최여설(崔汝契) 등 다섯 선생의 혈맥(血脈)이 잇다은 곳이다. 아아! 다섯 분의 선생은 한 시대에 함께 사시고 같은 고을에 사셔서 도(道)가 서로 부합(符合)하고 뜻도 서로 믿음이 있어 혹은 연벽(聯璧)을 이루어 밝게 빛나고, 혹은 ‘혹은 붕우간(朋友間)에 서로 도와서 가만히 학문을 기르고, 혹은 부자간(父子間)에 시(詩)와 예(禮)를 공부하였다. 서원이 이 고을의 훌륭한 행실이 되었고 대령(大嶺)의 큰 본보기가 되었다. 그러므로 서원에서 제사를 지낸지가 약 이 백 여 년이 되었지만 불행하게도 중도에 희령(熙寧)의 우환(憂患)을 겪으면서 영광(靈光)을 보존함이 없어 유허(遺墟)가 탕진(蕩盡)하여 후학(後學) 가운데 지나가는 자도 갱장(羹墻)함이 없고 아! 하고서 탄식하며 머뭇거리기만 하고 무성한 잡초의 슬픔을 금하지 않았다. 아! 슬프도다 시서(詩書)의 도(道)를 잃음이여 선비들의 기운이 삭막(索莫)해져 감히 화가 나지만 감히 말하지 못하겠네. 불초(不肖) 후손들은 세월이 오래되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더 두려워하였지만 마침내 인멸(湮滅)하는데 이르게 되었다. 널리 여러 사람들에게 자문을 구하니 혹자는 말하기를 중음(重陰)이 비록 박탈(剝奪)하더라도 양(陽)이 다 없어지는 이치는 없지만 하나의 집을 지어 드러내고 차츰 순환(循環)하는 날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옛날 백록동(白鹿洞)의 한 구역에 둔전(屯田)을 베풀어 처음으로 서당(書堂)을 가지고 주부자(朱夫子)가 서원(書院)을 만들었고 아울러 천하에 네 서원이 나란히 건립되게 되었으니 사물(事物)의 성쇠(盛衰)는 각각 나름대로 때가 있을 따름이다. 어찌 한 때의 재앙(災殃) 때문에 백세(百世)의 공의(公議)를 기다리지 않겠는가? 우리 유가(儒家)의 도(道)가 만고(萬古)에 뻗어가고 기리 보존되는 것이 외물(外物)에 비견(比肩)되는 것이 아니고 한 건물의 유무(有無)에 소장(消長)하는 것이니 어찌 현회(顯晦)에 상관할 바가 있겠는가? 그러나 후손들 가운데 이 정자(亭子)를 찾는 자는 선생의 학문을 배우고 선생의 도(道)를 체도(體道)하여 마음속으로 욕되게 함이 없게 하고 만약 여러 마리의 개미가 양고기에 달라붙는 듯이 한다면 아마도 ‘모현(慕賢)’의 편액(扁額)에 부끄러울 것이다. 이 정자에 또한 도움되는 바가 없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을(乙)로 시작하는 해 음력 1월 상한 후학 박한열(朴漢烈)이 삼가 짓다.

(註釋1) 연벽(聯璧)
서로 친밀(親密)하게 지내고 재주와 학문(學問)이 뛰어나며 하는 행동(行動)이 아름다운 두 사람을 뜻한다.

(註釋2) 대령(大嶺)
일반적으로 대관령(大關嶺)의 별칭으로 쓰이기도 하나, 본문에서는 경상도의 큰 고갯길인 조령(鳥嶺)을 이른다.

(註釋3) 희령(熙寧)의 우환(憂患)을 겪으면서
희령(熙寧)은 송나라 신종(神宗)의 연호(年號)인데 이 무렵 왕안석(王安石)이 재상으로 발탁되어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신법(新法)에 의한 정치개혁(政治改革)을 도모하였으나 집정(執政)한 지 9년만에 보수파(保守派)의 반대로 하야(下野)했다. 본문에서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10년간 섭정(攝政)하면서 고종 1년(1864년) 47개 서원을 남기고 대부분의 서원을 정비한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에 의거 문연서원(文淵書院)이 훼철(毁撤)된 것을 뜻한다.

(註釋4) 영광(靈光)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빛을 뜻한다.

(註釋5) 갱장(羹墻)
국(羹)과 담장(墻)의 의미로, 경모(敬慕)하고 추념(追念)함을 이르는 말. ≪후한서(後漢書)≫ 이고전(李固傳)에 “옛날 요(堯) 임금이 죽은 뒤에 순(舜) 임금이 3년 동안 사모하여, 앉았을 적에는 요 임금이 담장[墻]에서 보이고 밥먹을 적에는 요 임금이 국[羹]에서 보였다.”고 하였다.

(註釋6) 인멸(湮滅)
자취도 없이 모두 없어짐. 또는 그렇게 없앰.

(註釋7) 중음(重陰)
음(陰)이 중첩되어 음기(陰氣)가 최대로 왕성해지는 것이다.

(註釋8) 둔전(屯田)
원래는 변경이나 군사 요지에 설치하여 군량에 충당한 토지를 뜻하나 본문에서는 조선시대 서원의 경영·유지에 필요한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설정된 토지인 서원전(書院田)을 뜻한다.

(註釋9) 주부자(朱夫子)
중국 남송(南宋)의 유학자인 주희(朱熹)를 말한다.

(註釋10) 천하에 네 서원
허난의 숭양(嵩陽)서원과 응천(應天)서원, 후난의 악록(岳麓)서원, 장시의 백록동(白鹿洞)서원은 송대(宋代) 4대서원으로 꼽힌다.

(註釋11) 소장(消長)
쇠하여 사라짐과 성(盛)하여 자라감

(註釋12) 현회(顯晦)
세상에 알려지는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 현달함과 은둔함

(註釋13) 체도(體道)
도의(道義)를 본뜸

(註釋14) 개미가 양고기에 달라붙는 듯이
권세(權勢)를 좇는 사람의 속성(俗性)을 비유하여 말한 것이다. 《장자》 〈서무귀(徐无鬼)〉에 “몸을 움츠려 뻗어 나가는 기상이 없는 사람은 순(舜) 임금과 같은 사람이다. 양고기는 개미를 사모하지 않는데 개미는 양고기를 사모하니, 이는 양고기가 누린내를 풍기기 때문이다.〔卷婁者, 舜也. 羊肉不慕蟻, 蟻慕羊肉, 羊肉羶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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