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0.06.04 (목)

성산이씨(星山李氏) 인주공파(仁州公派)

편집부 2020-05-08 (금) 17:16 26일전 27  


성산이씨 의재(대가야읍 본관리 산21)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성산이씨(星山李氏) 시조(始祖) 이능일(李能一)


① 신라가 후백제의 위협을 받고 있을 때 고울부(高鬱府 : 현재 영천시 임고면 일대)에 장군으로 파견되었다가 경애왕 2년, 고려 태조 8년(925년) 고려와 후백제가 조물성(曹物城 : 의성으로 추측)에서 크게 접전(接戰)라고 있을 때 군사를 이끌고 고려를 지원하여 신라와 고려의 동맹관계를 공고히 하였으며 고려 태조 18년(935년) 신라가 고려에 합병되는 과정에서 큰 공을 세워 후삼국(後三國 : 신라, 후백제, 태봉) 통일을 이룩한 고려 태조가 공신(功臣)들에게 대상(大賞)을 내릴 때 시조공(始祖公)의 업적을 높여 휘(諱) 능(能)에 일자(一字)를 더하여 능일(能一)로 사명(賜名)하고 정일품 벼슬인 사공(司空)으로 높혔다.


② 고려 태조 23년(940년) 전국의 주(州)·군(郡) 제도를 설치할 때에 가리현(加利縣), 수동현(壽同縣), 계자현(谿子縣), 신안현(新安縣), 도산현(都山縣) 등 오현(五縣)을 통합하여 경산부(京山府)로 승격시키고 공에게 성산군(星山君)의 작호(爵號)를 내리고 그 지역을 다스리게 하였고 삼중대광(三重大匡)의 벼슬을 내렸다.


③ 시조(始祖)는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부마(駙馬)로 고려 최고 작위(爵位)인 벽상삼한삼중대광사공성산군(壁上三韓三重大匡司空星山君)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생몰년(生沒年)은 미상(未詳)이나 각종 문헌 및 활동상(活動相)을 고찰하면 서기 900년 ∼서기 980년으로 추정된다. 시조(始祖)의 배위는 고려 태조의 딸인 정순대장궁주(淨順大長宮主)로 호국개경부인(護國介景夫人)에 봉하여 졌다.


④ 시조(始祖)와 관련된 유적지(遺蹟地)


 2016년 3월 19일 성산재(星山齋)에서 성산서원(星山書院)으로 승호(昇號 : 이름이 올라감)된 성산서원(星山書院)의 원래 이름은 경원사(景源祠)로 조선 숙종 5년(1679년) 성주목사(星州牧使) 신학(申㶅)이 꿈에 현몽(現夢)을 얻어 시조공(始祖公)의 옛 집터에 남아 있던 우물을 준정(浚井 : 우물을 깨끗하게 쳐냄)하고 ‘이공신정(李公神井 : 시조 이능일이 음용하던 하늘이 내려준 정갈한 우물)’이라 이름하고 그 옆에 작은 사당을 지어 향사(享祀)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2) 성산이씨(星山李氏) 분파(分派)


지인주사(知仁州事) 이여충(李汝忠)을 파조(派祖)로 하는 인주공파(仁州公派), 지김산군사(知金山郡事) 이여신(李汝信)을 파조로 하는 김산공파(金山公派), 좌정언(左正言) 이여량(李汝量)을 파조로 하는 정언공파(正言公派), 봉익대부(奉翊大夫)을 역임한 이문성(李文成)을 파조로 하는 봉익공파(奉翊公派), 호가 기국(杞菊)인 이중화(李中華)를 파조로 하는 기국공파(杞菊公派) 등 5개파로 분파(分派)되었다.


(3) 성산이씨(星山李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성산이씨(星山李氏)는 293가구 732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인주공파(仁州公派) 송오공(松塢公) 이사징(李士澄)의 후손은 대가야읍 본관리 관동, 내곡리, 덕곡면 예리, 성산면 어곡리에, 정언공파(正言公派) 이춘형(李春亨)의 후손은 개진면 반운리에, 기국공파(杞菊公派) 후예(後裔)는 다산면 노곡리, 벌지리 등에 세거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① 이견수(李堅守)
태자태보(太子太保)를 지낸 정신(正臣)의 아들로 관작(官爵)이 대경(大卿)에 올랐다. 고려중기 경산부(京山府)가 영남 지방의 교통의 요충지가 되면서 잡인들이 득실거리는 시항(市巷 : 저잣거리. 가게가 죽 늘어서 있는 거리)으로 변하자 세거지(世居地)를 성주(星州) 서쪽 명암(明岩 : 현재 벽진면) 정곡촌(鼎谷村 : 일명 솟질 현재 봉계리)으로 옮겼다. 광(匡), 직(直) 등 아들을 포함하여 부자삼인(父子三人)이 모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마을 뒤편정자가 있었던 터에 다음과 같은 시(詩)가 전하며 후인들은 아직도 그 터를 대경정(大卿亭)이라고 부른다.

晨昏巷口三軺幷(신혼항구삼초병)
새벽 저녁 마을 입구에 세 수레가 같이하고
歌舞筵中四袖聯(가무연중사수련)

춤추고 노래하는 자리에는 네 소매가 이어지네

② 이우당(李宇唐)
양온서(良醞署) 양온령(良醞令)을 지낸 양인(陽仁)의 아들로 봉익대부(奉翊大夫)를 지내고 국가 행정을 총괄하던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찬성사(贊成事)를 지냈다.


③ 이여충(李汝忠)
봉상대부(奉常大夫) 평양소윤(平壤少尹) 문광(文廣)과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낸 천성(天成)의 따님 광산탁씨(光山卓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우왕 3년(1377) 정사(丁巳) 정사방(丁巳榜) 문과에 급제한 후 인천지방을 통할했던 지인주사(知仁州事)가 되었다. 정명당(正明堂) 정복주(鄭復周) 선생이 찬(撰)한 묘지명(墓誌銘)에 “효우(孝友)로 가정을 다스렸고 교화(敎化)로 백성의 표준(標準)이 되었으며 형제 3명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현달(顯達)하였으므로 당시의 사람들이 칭송하기를 대경공(大卿公) 휘 견수(堅守) 부자 3인이 문과에 급제하여 삼대(三代)가 수레를 탓던 경사를 오늘 다시 보노라”라고 하였다. 1991년 경덕사(景德祠)를 창건하여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4월 초정일(初丁日)에 향례(享禮)를 봉행(奉行)하였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1) 조선 세종 22년(1440년)경 사간원(司諫院) 헌납(獻納)과 지제교(知製敎)를 지낸 송오공(松塢公) 이사징(李士澄)이 성주군 벽진면 봉계리에서 대가야읍 관동(館洞) 마을에 복거(卜居)하였다. 
(2) 가야산의 맥(脈)을 이은 용수봉(龍首峰)과 미강(薇岡)이 자리하고 앞으로는 넓은 벌판과 소가천, 대가천이 굽이굽이 흐르는 산자수명(山紫水明)한 길지(吉地)를 찾아 송오공(松塢公) 이사징(李士澄)이 복거(卜居)하였다고 하나 배위 고양이씨(高陽李氏)의 친정이 대가야읍 일대인 점도 감안된 것으로 추정된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조선시대


① 이사징(李士澄)
호는 송오(松塢)이다. 지인주사(知仁州事)를 지낸 여충(汝忠)과 증(贈) 판서(判書)를 지낸 예(銳)의 따님인 의성김씨(義城金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종 18년(1418년) 태어났다. 산화(山花) 이견간(李堅幹)의 문인(門人)이었고 정명당(正明堂) 정복주(鄭復周)와 도의(道義)로 사귀었다. 세종조(世宗朝)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 행(行) 사간원(司諫院) 헌납(獻納) 지제교(知製敎)를 지냈다. 성산이씨 고령 관동(館洞) 입향조(入鄕祖)이다. 배위는 숙인(淑人) 고령이씨(高靈李氏)로 목사(牧使) 인실(仁實)의 따님이다. 단종 2년(1454년) 졸(卒)하였다.


② 이극강(李克剛)
사간원(司諫院) 헌납(獻納) 지제교(知製敎) 송오공(松塢公) 사징(士澄)과 목사(牧使) 인실(仁實)의 따님인 숙인(淑人) 고양이씨(高陽李氏)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음직(蔭職)으로 언양현감(彦陽縣監)에 임명되어 엄명(嚴明)하고 인서(仁恕)하였으며 정사(政事)를 관장함에 실제로 은혜를 받게 하였다. 벼슬이 교체되어 돌아옴에 이르니 주민들이 선정비(善政碑)를 세워 칭송하고 읍지(邑誌)에 청백(淸白)한 이름을 새겼다고 하였다. 생졸년(生卒年)은 미상(未詳)이다.


③ 이기춘(李起春)
자는 계욱(季郁)이고 호는 옥산(玉山)이다. 밀직사(密直使) 언홍(彦洪)의 아들로 중종 36년(1541년)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성현(聖賢)의 학문을 강구(講究)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송암(松菴) 김면(金沔)이 의병(義兵)을 일으킬 때 진영(陣營)에 참여하여 부시(賦詩)를 짓는 것을 도왔다. 청휘당(晴暉堂) 이승(李承), 모재(茅齋) 이홍우(李弘宇), 한강(寒岡) 정구(鄭逑), 송암(松菴) 김면(金沔), 대암(大庵) 박성(朴惺) 육일헌(六一軒) 이홍량(李弘量) 등 당세명현(當世名賢)과 교분이 두터웠으며 선조 22년(1589년) 5월 개진면 개산포(開山浦)에서 성산면 사망정(四望亭)에 이르는 낙동강을 뱃놀이를 하며 만경창파욕모천(萬頃蒼波欲暮天 : 저녁 때 저무는 하늘에 한없이 넓고 푸른 물결) 7자(七字)로 분운(分韻)하여 시를 지었으니 이들을 낙강칠현(洛江七賢)이라 불렀다. 사망정(四望亭) 곁에는 2003년 5월에 제막된 ‘낙강칠현비(洛江七賢碑)’가 있다. 만년에 장재(張載)의 기철학(氣哲學)을 연구하였다. 선조 30년(1597년) 향년 57세로 졸(卒)하였다.


④ 이득춘(李得春)
예빈시(禮賓寺) 참봉(參奉) 언함(彦涵)과 진사(進士) 탕우(湯佑)의 따님인 파평윤씨(坡平尹氏) 사이에 태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송암(松菴) 김면(金沔) 진중(陣中)에 아들 이동길(李東吉)과 함께 나아가 자기의 가산(家産)을 모두 의병(義兵)의 군량미(軍糧米)로 헌납(獻納)하고 방략(方略)과 계획(計劃)을 도운 전공(戰功)을 세워 선무원종2등공신(宣武原從二等功臣)에 녹훈(錄勳)되었으며 관직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임진왜란이 평정된 후 고령향안(高靈鄕案)을 제일 먼저 창설(創設)하여 사풍(士風)을 바로잡았다. 생졸년(生卒年)은 미상(未詳)이다.


⑤ 이동례(李東禮)
자는 사원(士元)이고 호는 근재(謹齋)이다. 학행(學行)으로 드러난 희춘(熙春)과 참봉(參奉)을 지낸 기(夔)의 따님인 청주곽씨(淸州郭氏) 사이에서 명종 6년(1551년)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과거하는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정미(精微)롭게 학문에 전념하였다. 선조 초에 유일(遺逸)로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등 대유학자(大儒學者)와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다. 특히 한강(寒岡)이 일찍이 신의를 돈독히 하고 학문을 즐겼으며 선도(善道)를 지킬 것을 허여(許與)하였다. 선조 26년(1593년) 졸(卒)하였다.


⑥ 이현룡(李見龍)
자는 성백(誠伯)이며 호는 죽포(竹圃)이다. 근재(謹齋) 동례(東禮)와 전첨(典籤) 진(鎭)의 따님인 공인(恭人) 회산황씨(檜山黃氏) 사이에서 선조 13년(1580년)에 태어났다. 일찍부터 용담(龍潭) 박세호(朴世豪)과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다. 인조 5년(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창의(倡義)하여 의려(義旅 : 의병)를 이끌고 충주(忠州)에 이르렀으나 강화(講和)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척화(斥和)하는 소장(疏章)을 지어 상경(上京)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인조 13년(1635년) 증광(增廣)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하였다.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창의(倡義)하였으나 인조가 청나라 태종(太宗)에게 삼전도(三田渡)의 굴욕(屈辱)을 당하자 통곡하고 돌아왔다.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사부(師傅)를 거쳐 군위현감(軍威縣監)·대흥현감(大興縣監)·유화현감(儒化縣監) 등을 역임하였는데 고을마다 공이 학문을 흥하게 하여 선정비(善政碑)가 있다. 효종 5년(1654년) 졸(卒)하였다.


⑦ 이문룡(李文龍)
자는 회숙(晦叔)이고 호는 국포(菊圃)이다. 근재(謹齋) 동례(東禮)와 전첨(典籤) 진(鎭)의 따님인 공인(恭人) 회산황씨(檜山黃氏) 사이에서 선조 17년(1584년)에 태어났다. 정묘호란(丁卯胡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백씨(伯氏) 이현룡(李見龍)과 창의(倡義)하였으나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서 항복(降伏)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와 미산(薇山)아래에 조그마한 정자(亭子)를 짓고 세상을 피해 살며 강도(講道)에만 힘쓰니 세칭 미산처사(薇山處士)라 하였다. 당대의 명류(名流)인 완정(浣亭) 이언영(李彦英), 백천(白川) 이천봉(李天封), 동호(東湖) 이서(李), 등암(藤菴) 배상룡(裵尙龍) 등과 교유(交遊)하였다. 효종 6년(1655년) 졸(卒)하였다.


⑧ 이택룡(李澤龍)
자는 계확(季確)이고 호는 매포(梅圃)이다. 근재(謹齋) 동례(東禮)와 전첨(典籤) 진(鎭)의 따님인 공인(恭人) 회산황씨(檜山黃氏) 사이에서 선조 21년(1588년) 태어났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문하에서 수학(修學)하였다. 광해군 10년(1618년) 증광(增廣)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하였다. 청휘당(晴暉堂) 이승(李承)이 일찍이 “이 사람은 후일 반드시 대유(大儒) 즉 학식(學識)이 높은 선비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광해군 12년(1620년) 졸(卒)하였다.


⑨ 이두훈(李斗勳)
초휘(初諱)는 중훈(中勳)이고 자는 대형(大衡)이며 호는 홍와(弘窩)이다. 사한당(四閒堂) 인한(寅漢)과 서부(西阜) 지운(芝運)의 따님인 광주이씨(廣州李氏) 사이에서 철종 7년(1856년) 태어났다. 고종 12년(1875년)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문하(門下)에 들어가 위기지학(爲己之學)에 힘쓰며 심즉리(心卽理)의 요지(要旨)를 듣고 흔연(欣然) 하게 마음으로 깨달아 ‘주문팔현(洲門八賢 : 한주 이진상 문하의 8명의 현인)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고종 33년(1896년)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 등과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성토(聲討)하고 단발령(斷髮令)의 철회(撤回)를 요구하는 상소(上疏)를 올렸으나 수령이 거부되자 일본의 행동이 국제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함을 호소하는 ‘포고천하문(布告天下文)’의 초고(草稿)를 공이 작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작성된 최종본을 미국, 영국, 러시아 등 주한(駐韓) 각국 공사관(公使館)에 발송하였다. 고종 34년(1897년) 고령군 대가야읍 내상리에 내산서당(乃山書堂)을 짓고 은거하면서 수십 명의 제자를 가르쳤다. 1905년 제2차 한일협약 즉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배일(排日) 언론투쟁(言論鬪爭)을 하였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 일어나자 고령군 단연상채회(斷煙償債會) 회장(會長)으로 활동하였다. 신안세고(新安世稿), 동화세기(東華世紀) 등을 지었다. 1918년 졸(卒)하였다.


(2) 근∙현대 인물
① 이경(李俓) : 경능참봉(敬陵參奉), 지역사회 헌신 및 이웃 구휼(救恤)
② 이인(李仁) : 고령중·농고·여중고 교장 역임
③ 이인광(李寅光) : 애국지사(愛國志士), 파리장서(巴里長書) 서명자(署名者)
④ 이인재(李寅梓) : 유학자, 고대희랍철학고변(古代希臘哲學考辨) 저자
⑤ 이준환(李浚桓) : 고령군 농협조합장
⑥ 이헌승(李憲升) : 서울신탁은행 전무, 조흥은행 은행장
⑦ 이헌식(李憲寔) : 영남대 영문학과 교수
⑧ 이헌재(李憲梓) : 연세대학교 의대 교수, 미시간대학 신경외과 초청교수
⑨ 이헌주(李憲柱) : 유학자 겸 서예가
⑩ 이규식(李奎埴) : 대구시 서구청 국장, 서기관
⑪ 이운식(李雲埴) : 고령군산림조합장
⑫ 이범환(李範桓) : 영천·영덕 부군수, 포항시 부시장
⑬ 이진환(李震桓) : 고령군 초대 민선군수
⑭ 이장환(李壯桓) : 고령군 명예군수, 재경 고령군향우회장, 영진석유(주) 회장
⑮ 이길환(李吉桓) : 공군준장, 대한항공 비행훈련원장
⑯ 이찬수(李璨洙) : 전자공학박사, 영남대 교수
⑰ 이헌근(李憲根) : 정치학박사, 부경대 교수
⑱ 이헌용(李憲溶) : 대가야고등학교 교장
⑲ 이경재(李炅在) : 대구지검 제1차장검사, 법무법인 동북아의 대표변호사
⑳ 이두곤(李枓坤) : 공학박사, 한국교원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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